# 515
귀환 마교관
515화
“정말이지 마계에는 다양한 기물들이 많기도 하군요.”
추희룡이 짐짓 놀란 척 말하자, 사비강이 피식 웃었다.
“그 기물들을 한때 가장 많이 모으시던 분 아닙니까?”
“허허, 한때의 호기심으로 모으긴 했지만, 그리 많은 수준도 아니었습니다. 사 궁주께서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뭐 저야 잘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요.”
사비강이 희미하게 웃으며 답했다.
‘능구렁이처럼 잘도 피하는군.’
‘흥! 아무리 날 떠보려고 해봐야 네놈이 얻을 수 있는 건 없을 거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생각을 하며 미소를 지었다.
잠시간의 어색한 침묵을 먼저 깬 사람은 이번에도 사비강이었다.
“우염득.”
“……!”
밑도 끝도 없이 꺼낸 말에 추희룡이 내심 긴장하며 슬쩍 고개를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우염득은 구강룡의 뒤를 쫓다가 강변에서 시신으로 발견된 무인이었다.
하필이면 그 멍청한 놈이 구강룡을 죽이지 못한 것도 모자라 오히려 정체까지 발각되고 만 것이다.
사비강이 다시 창밖의 먼발치를 응시하며 다시 불쑥 그 이름을 꺼냈다.
“우염득. 우염득.”
결국 추희룡이 먼저 모른 체하며 물었다.
“갑자기 그자의 이름을 왜….”
사비강이 추희룡을 돌아보며 히죽 웃었다.
“역시 아는 사람입니까?”
“흐음.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기도 하고….”
“우염득. 모르시겠습니까?”
“그리 물어보는 걸 보니 내가 아는 인물인 모양인데… 아! 기억났소. 예전에 묵귀대를 이끌었던 자였지, 아마?”
사비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묵귀대주 우염득은 오래 전 맹가숙과 마찰을 빚어 문제를 일으켰던 바로 그 자였다.
“맞습니다.”
“한데 그를 왜…?”
“구강룡을 죽이려고 한 자가 바로 그자입니다.”
“그런! 하면 그자가 옹기승을 납치했단 말입니까?”
“그건 모를 일이지요. 그자가 납치한 것인지, 아니면 그저 시킨 대로 지키기만 한 것인지.”
“배후가 있다면 도대체 누가… 아, 혹시 오해하실까 해서 말씀드립니다만, 우염득은 이미 오래 전에 묵귀대를 그만두고 본련을 떠났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사비강이 웃으며 말했다.
이미 귀영단으로부터 그 정도는 조사를 해둔 터였다.
추희룡이 말한 대로 우염득은 이제 묵귀대주가 아니었다.
귀영단이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맹가숙과 앙숙처럼 지내던 그가 기어코 혈사련에서 제명을 당한 것으로 파악됐다.
하지만 사비강은 그 정보를 온전히 믿지 않았다.
뭔가 이상했다.
그 이유는…
“공교롭게도 우염득이 제명당한 시기가… 멸마관 사건이 일어난 직후더군요.”
“그렇습니까? 오래된 일이라 거기까지 생각은 못해 봤습니다. 한데 그렇다면 아마 마족 때문이겠지요.”
“마족?”
“그 당시 강림지 전투가 있지 않았습니까? 아시다시피 마족이 강림한 후로 강호가 술렁였습니다. 아마 우염득도 그때 심경의 동요가 있었나보지요. 어차피 마족이 강림한 이상 본련에 남아 봐야 죽음을 앞당길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게 아닐런지. 어쩌면 우염득이 마족을 추종하는 세력에 가담했을 수도 있겠군요. 그래서 옹기승을….”
추희룡이 주절거리자, 사비강이 입매를 비틀어 올렸다.
“오늘따라 말씀을 많이 하시는군요.”
“허허, 괜히 제가 다 신경이 쓰여서 말입니다. 아무래도 그자가 한때 본련에 몸을 담고 있었으니….”
‘정말이지 잘도 둘러대는군.’
사비강이 속생각을 삼키고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차 잘 마셨습니다. 련주님도 성질을 좀 죽이시는 게 어떻습니까?”
‘이번엔 또 뭔 소리를 하려고…!’
추희룡이 내심 발끈했지만, 겉으로 웃으며 답했다.
“허허, 갑자기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그때마다 탁자를 부수면 방안에 남아나는 물건이 없겠습니다.”
사비강이 마치 자신의 행동을 본 것처럼 말하자, 추희룡이 흠칫거리고는 물었다.
“어떻게 그걸…?”
“하하! 뭘 그리 놀라십니까? 탁자가 새것이어서 말해 본 겁니다.”
사실 이는 추량이 전음으로 알려 준 것이었다.
추량은 탁자가 새것이라는 점과 벽과 바닥에 파편이 튀어 새겨진 상흔들을 보고 앞서 탁자를 부순 상황을 짐작한 것이다.
추희룡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안목이 대단합니다. 제가 수양이 부족해서 순간 화를 참지 못한 일이 있었습니다. 허허.”
“무슨 일이 있으셨나보군요. 가령… 수하 중 누군가가 반드시 죽여야 할 자를 놓쳤다거나….”
사비강의 눈빛이 착 가라앉은 것을 본 추희룡이 싸늘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런 일이야 강호에 비일비재하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비일비재하지요. 그래서 배후가 들키는 경우도 많고. 그러니 그런 경우라면 련주님도 조심하십시오.”
“충고 새겨듣겠습니다.”
“그럼 이만.”
사비강이 활짝 웃으며 몸을 돌리자, 추희룡의 표정이 얼음장처럼 차갑게 굳었다.
‘놈… 확실히 날 의심하는군!’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다.
구강룡이 살아서 멸마궁으로 들어갔다고 할 때부터 오늘 같은 날이 올 것을 짐작했다.
하지만 사비강이 순간이동이 가능한 두루마리까지 짐작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나마 다행인 건 사비강도 현재 확증이 없다는 점이다.
심증만 있을 뿐.
‘우선은 잘 넘겼어.’
추희룡이 속내를 갈무리하며 웃었다.
“그럼 사 궁주께서는 얼마나 머무시겠습니까?”
“왜요? 제가 오래 머물면 불편하십니까?”
“허허, 무슨 농을 그리 짓궂게 하십니까? 그저 계시는 동안 편히 모시려고 여쭙는 겁니다.”
“오래 있진 않을 겁니다. 마족이 설쳐대고 있으니 이틀 정도만 묵을 겁니다.”
“그렇군요. 최대한 불편함 없이 모시겠습니다.”
추희룡이 활짝 웃었다.
**
그날 저녁.
“감시를 붙이겠습니다.”
어두컴컴한 실내 한쪽에 사내가 귀신처럼 스르르 나타났다.
그는 추희룡의 호신위인 자귀(磁鬼)였다.
추희룡은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하지 마라.”
“하지만 저대로 가만히 눌러 앉을 자들이 아닙니다. 분명 련 내를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닐 겁니다. 그러다 보면 크고 작은 소란이 일어날 수도 있고….”
“그러니 내버려두란 말이다.”
추희룡이 천천히 눈을 떴다.
그의 눈빛은 어딘지 자신감에 차 있었다.
알고 있다.
자귀의 말대로 사비강은 저렇게 의심을 거둘 자가 아니다.
아니, 분명 낮에 나눈 대화 때문에 더욱 강한 의심을 가졌을 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심증일 뿐.
옹기승을 자신과 연결시킬 수 있는 확실한 고리는 아직까지 어디에도 없다.
결국은 어떠한 증거도 찾지 못하면 제아무리 사비강이라도 돌아갈 수밖에 없으리라.
마족이 설쳐대는 판국에 언제까지나 이곳에서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을 테니까.
그리고…
“어차피 감시를 붙일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오히려 의심만 더 사게 되겠지. 무엇보다… 절대 못 찾아.”
“…알겠습니다.”
자귀가 대답과 동시에 스르르 모습을 감췄다.
추희룡이 다시 눈을 감았다.
‘그저 어르고 달래다가 보내면 될 터.’
**
사비강이 문을 열고 실내로 들어왔다.
방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매설란이 얼른 다가가며 물었다.
“어떻게 됐어?”
“이상하군.”
사비강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창가로 다가가 앉았다.
싸늘한 밤바람이 열린 창을 통해 들어왔다.
그래도 남쪽으로 내려와서 그런지, 이제 겨울이 조금씩 물러가고 있어서인지 시릴 만큼 차갑진 않았다.
매설란이 걱정서린 얼굴로 물었다.
“못 찾은 거야?”
“정말 이상하단 말이지.”
“그러니까 뭐가 이상한 건데?”
“분명히 추 련주가 수상한데… 어디에 숨겼는지 알 수가 없어.”
“혈사련에도 비밀 창고가 있을 것 아냐?”
“어지간한 곳은 다 가봤어.”
사비강이 턱을 괴며 대꾸했다.
지금쯤이면 뭐라도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추희룡과 담소를 나눈 그는 오랜만에 구경을 한다는 핑계로 혈사련 곳곳을 들쑤시고 다녔다.
특유의 무례함을 앞세워 아무 곳이나 마구 드나들었다.
실랑이가 한 번쯤 벌어질 만도 했다.
한데…
“놀라울 정도로 협조적이었어.”
그랬다.
혈사련의 모든 무인들이 사비강을 반갑게 맞이했다.
뿐만 아니라 사비강이 유심히 보고 싶은 장소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당당하게 공개해 주었다.
특히 과거 추희룡이 머물던 백호당의 지하 밀실까지 공개하는 것은 물론, 명리각의 지하 보관소도 공개했다.
감시가 붙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마저도 없었다.
‘정말… 추 련주는 관계가 없는 건가?’
만약 그가 텔레포트 스크롤을 가지고 있다면, 아무도 모르게 옹기승을 납치했다는 것이 충분히 납득이 된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대체 누가 옹기승을 데리고 간 거지?’
때마침 추량이 돌아왔다.
사비강과 매설란이 동시에 그를 돌아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은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었지만, 추량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정말 깨끗합니다.”
“그럼 적어도 옹기승에 대해 아는 사람은 련 내에서도 극소수란 뜻이군.”
추량이 뒤통수를 긁으며 말했다.
“혹시 련 내에 없는 게 아닐까요?”
“만약 추 련주가 납치했다면, 련 내에 있을 가능성이 크다. 이미 밖에 두었다가 발각이 된 만큼 자신의 힘이 미치는 곳에 두었을 테지.”
절대 빼앗기면 안 될 보물일수록 몸에서 멀리 떨어뜨리기 어려운 법.
하지만 추적의 달인인 추량조차도 그 흔적을 찾지 못했다니, 어쩌면 추희룡이 범인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왜 그래?”
멈칫거리는 사비강을 보며 매설란이 물었다.
하지만 그 순간 사비강의 신형은 이미 열린 창문 밖으로 빠져나간 후였다.
그는 천해심보와 블링크를 병행하며 엄청난 속도로 내달렸다.
그야말로 화살이 날아가는 듯했다.
순식간에 혈사련에서 십 리 정도 떨어진 숲에 다다른 사비강은 눈을 가늘게 뜨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촤아아아아아!
시원한 폭포 소리만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훌쩍!
폭포가 떨어지는 절벽 바위에 올라선 사비강은 다시 한 번 주변을 세세히 살폈다.
습하고 찬 공기가 그를 감쌌다.
‘기분 탓인가…? 분명 기척을 느꼈는데….’
하긴 요즘 잠을 제대로 못 자긴 했다.
사비강이 미간을 슬쩍 좁히고는 다시 달려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물론 돌아가는 순간에도 그는 빛살만큼이나 빨랐다.
그리고 그가 떠난 자리.
스팟!
바위 위에 한 소녀가 거짓말처럼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바로 존야였다.
사비강이 사라진 방향을 물끄러미 보던 그녀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사비강이 왜 이곳에 온 거지? 조금은 기다려야겠군. 아직은 서두를 필요 없지.”
물론 그녀의 목소리는 거침없이 쏟아져 내리는 폭포수 소리에 완전히 묻혀 버렸다.
문득 바리탄의 얼굴과 목소리가 떠올랐다.
‘주군… 반드시 성공해서 돌아가겠습니다. 그땐 부디….’
그녀의 얼굴이 부끄럼을 타는 소녀처럼 붉게 달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