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1
귀환 마교관
511화
세 사람이 달려드는 걸 본 자카르트 백작이 피식 웃고는 수신호를 보냈다.
순간, 제일 앞에서 포위하던 마족기사들이 일제히 창을 조준하더니 세 사람을 향해 한꺼번에 날려 보냈다.
쒸쒸쒸쒸쒸에에엑!
따다다당! 타다다당!
세 사람이 동시에 호신강기를 펼치면서 날아드는 창들을 쳐냈다.
과연 그들은 한 시대를 대표할 만한 무인다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딱!
자카르트 백작이 손가락을 튕기자,
짜자자자자작…!
땅바닥이 새하얗게 얼어 가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얼음 가시가 삐죽삐죽 자라나면서 세 사람에게 뻗어 가는 것이 아닌가?
투카카카카카캉!
창을 쳐낸 세 사람이 쉴 틈도 없이 도검을 휘두르며 쇄도하는 얼음 가시들을 쳐냈다.
하지만 자카르트 백작은 손을 뻗은 채로 계속해서 얼음 가시가 자라나도록 마법을 유지했다.
차카카카카카캉!
얼음 가시가 가루처럼 부서지면서 주변으로 자욱한 연무를 형성했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새하얀 안개 속에서 세 사람은 오로지 도검의 감각에만 의존해서 방어를 이어 갔다.
하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은 차츰 몸이 싸늘하게 식으며 굳어 가는 것을 느꼈다.
마침 화양진인이 쳐낸 얼음 가시 하나가 공교롭게도 주장헌의 옆구리에 날아가 박혔다.
아주 작은 가시였지만, 그 순간 주장헌은 온몸을 음습하는 한기에 일순 몸이 굳어 버리고 말았다.
곧이어 엄청난 공복감이 밀려들었다.
찰나지간,
푸푸푸푸푹!
사방에서 빽빽하게 자라난 얼음 가시가 그의 전신을 찔러 왔다.
“커헉…!”
쩌저저저적…!
그의 몸이 빠른 속도로 얼어붙었다.
“크읏!”
“엇!”
다음 순간, 지강명과 화양진인이 동시에 외마디 비명을 터뜨렸다.
끝없이 자라나던 얼음 가시 중 하나가 그들의 종아리와 허벅지를 각각 찌른 것이다.
그들 역시 한기를 느끼는 것과 동시에 극심한 공복감을 느끼며 힘이 쭉 빠져나갔다.
기아와 추위의 악신.
바로 자카르트 백작을 가호하는 악신이었다.
쩌저저저적…!
마침내 세 사람은 전신이 꽁꽁 얼어붙으면서 꿈쩍도 하지 못했다.
“헉, 헉, 헉…!”
그들이 거칠게 숨을 내쉴 때마다 하얀 김이 훅훅 뿜어져 나왔다.
정신을 잃어버릴 만큼 아니, 잃고 싶을 만큼 지독한 굶주림과 추위였다.
자카르트 백작이 두 팔을 척 늘어뜨린 채 천천히 다가왔다.
세 사람은 그가 지척에 다다를 때까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화양진인은 무감한 표정의 자카르트를 보면서 난생 처음으로 공포감을 느꼈다.
순수한 악을 마주했을 때의 공포감이 이렇게도 클 줄은 미처 몰랐다.
자카르트가 천천히 손가락을 들어 올리더니 화양진인의 미간을 톡 건드렸다.
다음 순간,
쩌저저저저저적…!
순식간에 세 사람의 전신이 완전히 얼음 속에 갇혔다.
쿵, 쿠쿵…!
얼음에 갇힌 시신이 바닥에 쓰러지자, 자카르트 백작이 돌아서서는 탁한 음성을 흘렸다.
“좋은 실험체다. 흑성으로 보내라.”
“예, 백작님.”
마족기사들이 깍듯하게 대답하고는 걸어와 얼음에 갇힌 세 사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때 장원 더 깊은 곳에서 울부짖는 소리와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시선을 돌린 자카르트가 얼어붙은 바닥을 미끄러지듯 이동했다.
전각을 돌아서니 마침 마족기사와 고블린 몇 마리가 여인들과 아이들을 사로잡아 끌고 오고 있었다.
섬서회에 몸을 담은 무인들의 가족이거나 어린 자녀들이었다.
“어떻게 처분할까요?”
마족기사가 다가와 묻자, 자카르트가 눈살을 슬쩍 구기더니 손을 내저었다.
“쓸모없다. 죽여라.”
“알겠습니다.”
다음 순간 돌아서는 자카르트의 등 뒤로 섬뜩한 파육음에 이어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연이어 차올랐다.
**
막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멸마궁을 건설하는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공사 속도도 굉장히 빨랐기에 사비강이 형주에 도착했을 때쯤엔 이미 멸마궁의 팔 할 이상이 완공된 상태였다.
아직 완공되지 않은 이 할은 중요도가 떨어지는 편의시설들이었기에 실질적인 업무를 보는 데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사비강은 제일 먼저 조직을 체계적으로 개편하고, 각 조직마다 맡을 주요 임무를 조율했다.
또한 귀영단은 계속해서 소환지를 관리하면서 강호의 소식통 역할을 하도록 유지했다.
만약상과 사천회가 멸마궁으로 편입되고 나니 강호 곳곳에서 멸마궁에 입궁하겠다는 신청이 줄을 이었다.
과연 이대로라면 정도맹의 규모를 넘어설지도 모른다는 우려 아닌 우려가 생길 정도였다.
그렇게 정신없는 날을 보내다가 첫 회의가 진행되던 날.
“섬서회가 멸회당했습니다.”
홍염의 보고에 대회의장이 술렁거렸다.
매설란이 나서며 물었다.
“섬서회가요? 마족들이 섬서 쪽으로 치고 올라간다는 건 진작 알고 있었잖아요. 그들이 맹에 도움을 요청할 시간은 충분했을 텐데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맹에서 지원군을 거절했습니다.”
“그런…!”
다시 한 번 대회의장이 술렁였다.
도저히 능운파답지 않은 대처였다.
그는 조금 손해를 보는 한이 있어도 의를 저버리는 성격이 아니었다.
물론, 섬서회가 정도맹을 견제하기 위해 세워진 조직인 만큼 정도맹과 묘한 관계 속에 놓여 있긴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족에게 당하도록 내버려 두다니!
“마족의 움직임은?”
사비강이 착 가라앉은 어조로 묻자, 홍염이 고개를 숙이고는 답했다.
“섬서회를 장악하고 나서 멈췄습니다.”
그러자 사천회주인 유자양이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아마 마족들도 정도맹 본단을 치는 건 조심스러울 겁니다. 맹의 본단은 강호의 중심이지요.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그들에게도 부담이 될 겁니다. 게다가 섬서회처럼 만만치 않을 테고요.”
일견 일리가 있는 말이었기에 상당수 수뇌 인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비강이 장내를 둘러보며 말했다.
“앞으로 맡은 임무에 따라 힐링 포션과 마나 포션을 나눠 줄 거요. 또한 멸마궁에 속한 모든 무인들에게는 마나를 내공으로 치환하는 심법을 알려 줄 거요. 마법은 사용할 수 없더라도 마나 포션을 복용하고 나서 소모한 내공을 단시간에 회복할 수 있을 테니 큰 도움이 될 거요.”
“감사합니다, 궁주님!”
수뇌 인사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우선 마족들이 섬서회를 장악하고 나서 숨고르기를 하는 것 같으니 맹의 반응은 좀 더 지켜보도록 합시다.”
그때였다.
대회의장 문이 열리면서 귀영단의 이영이 달려왔다.
그가 한쪽 무릎을 꿇으며 급보를 전했다.
“궁주님! 마족들이 남쪽으로도 치고 내려가 운남성(雲南省)을 장악했습니다!”
“그런…!”
“허어! 이렇게나 빨리…!”
다시 한 번 장내가 술렁거렸다.
생각보다 마족들의 기세가 사나웠다.
그들이 나타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운남성까지 차지했다니!
게다가 운남성에는 점창파(點蒼派)와 곤명제일문(昆明第一門)이 있지 않은가?
점창파는 구파일방에 속하는 대문파이고, 곤명제일문은 수십 년 전, 마교를 섬멸할 때 혁혁한 공을 세웠던 명망 높은 무가다.
한데 이들이 이렇게 빨리 무너지다니!
이번엔 사비강도 놀랐는지 미간을 잔뜩 구기고는 물었다.
“적의 수장이 누군지 아느냐?”
“곤명제일문에서 간신히 살아서 도망친 자의 신병을 확보했는데, 그의 말에 의하면 ‘할무트’라고 불렀다 합니다.”
“헬무트!”
사비강이 그 이름을 이야기하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유자양이 사비강을 보며 물었다.
“궁주께서 아시는 자입니까?”
“아… 대충은.”
사비강이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대꾸했다.
생존자는 ‘할무트’라고 했다지만, 아마 마족의 발음에 익숙하지 않아서일 것이다.
헬무트.
그라면 단기간에 운남성을 차지한 것이 이상할 것도 없다.
‘드디어 헬무트가 움직이기 시작한 건가?’
유자양이 이마에 주름을 깊이 새기고는 중얼거렸다.
“이제 완전히 동인서마(東人西魔)의 형세가 되었군요. 대책 논의가 시급해 보입니다.”
혜현사태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의견을 냈다.
“상황이 급박한 만큼 귀주(貴州)와 광서(廣西)는 포기해야겠어요. 이제 와서 그곳으로 본궁의 전력을 급파해도 대처하기 힘들 겁니다.”
“사태님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차라리 귀주와 광서를 내주고 호남(湖南)과 광동(廣東)을 지키는 게 낫습니다. 그래야만 대비할 시간도 벌 수 있습니다.”
당무열이 동의했다.
“하지만 그랬다간 귀주와 광서에 터를 잡은 문파들은 전부 잿더미가 되고 말 겁니다.”
반대 의견을 피력한 사람은 뜻밖에도 천세명이었다.
그는 이번에 사비강이 멸마궁을 만들자, 용천관에서 자원한 경우였다.
단리정이 그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렇습니다. 귀주와 광서에도 문파가 없지 않습니다. 비록 대문파가 아닐지라도 그들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단리정이 여기에 동의한 데에는 더욱 큰 이유가 있었다.
바로 그의 고향이 귀주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아직도 귀주의 성도인 귀양(貴陽)에서 일성검문을 이끌고 있었다.
만약 마족들이 치고 들어오면 아버지와 일성검문이 위험해질 터였다.
이쯤 되자 찬반 의견으로 장내가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한참 동안 침묵하던 사비강이 손을 들어올렸다.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그에게 향했다.
“우선 귀주와 광서는 버리고 호남과 광동을 지키는 걸로 하겠소.”
“궁주님! 그러면 귀주와 광서는…!”
단리정이 얼른 소리쳤지만, 사비강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귀영단을 급파해서 그곳의 중소 문파들에게 후퇴하길 권고하겠다.”
“하지만 맞서 싸우려는 자들도 있을 겁니다! 그들을 도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단리정이 또 소리쳤다.
아버지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다.
자신의 아버지 단리추는 평생 ‘후퇴’라는 단어를 모르고 사신 분이다.
무모할 정도로 자존심이 강한 분.
그래서 늘 손해를 봐도 쉽게 뜻을 굽히지 않는 분.
‘절대로 물러나려고 하지 않으실 거야….’
하지만 사비강은 냉정했다.
“충분히 권고를 해도 뜻을 굽히지 않는 자들이 있다면, 무운을 빌 수밖에.”
“…….”
단리정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이성적으로는 사비강의 지시가 옳다고 판단했지만, 감정은 마구 흔들렸다.
‘아버지에게는 내가 직접 서신을 보내야겠구나.’
**
“다른 방법은 없을까?”
매설란이 사비강을 따라 궁주실로 들어서며 넌지시 물었다.
사비강이 고개를 저었다.
“없어.”
“정아는 아버지 때문이었을 거야.”
“나도 알아.”
하지만 정말 방법이 없다.
단리추가 아들의 말을 듣고 당분간 물러나는 수밖에.
매설란 역시 그 사실을 알기에 더는 말하지 않았다.
대신 나직이 한숨 쉬며 의미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앞으로 마족들이 움직일 때마다 본궁에서 빠르게 대책을 세워야 할 텐데. 그러기엔 중원이 너무 넓어. 정말이지 이럴 땐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동에 번쩍, 서에 번쩍이라….”
“그런 마법은 없나 봐?”
“있긴 있지.”
“그래? 블링크 말고 정말로 아주 먼 거리를 이동할 수 있는 마법이 있어?”
“텔레포트.”
“텔레포트? 그럼 그걸 쓰면 되잖아! 어디든 가서 도와줄 수 있잖아.”
사비강이 피식 웃었다.
“일단 텔레포트 마법을 사용하려면 정확한 좌표를 알아야 해. 즉, 내가 한 번은 가본 곳이어야 한다는 거지. 좌표가 흔들리면 온몸이 공중분해 되어서 죽어.”
“무서운 마법이네….”
“원래 모든 마법이 무서운 법이야. 그리고 또….”
“또?”
“그건 9서클의 마법이야. 한 마디로 신의 경지. 정확히 말하자면 드래곤의 경지라는 거지.”
“쉽게 말해서 인간이 사용할 수 없다는 거구나.”
“그래. 다만… 아주 방법이 없는 건 아냐.”
사비강이 눈을 가늘게 뜨고 중얼거리자 매설란이 고개를 휙 돌렸다.
“그 방법이 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