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 마교관-510화 (510/670)

# 510

귀환 마교관

510화

맹주 집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능운파가 눈살을 찌푸리고는 예고 없이 찾아든 구윤을 빤히 보았다.

“군사, 그대도 이젠 예의를 접어 두기로 한 건가?”

“죄송합니다, 맹주님. 하지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아서 결례를 무릅쓰고 이렇게 찾아뵈었습니다!”

“무슨 일인가?”

다급해 보이는 구윤과 달리 능운파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보고서를 훑어보고 있었다.

이자준이 올린 보고서였다.

구윤이 집무 책상으로 성큼성큼 다가서며 따지듯 물었다.

“섬서회의 지원 요청을 거절하셨다는 게 사실입니까?”

“그렇네.”

놀랍게도 맹주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꾸했다.

마치 오늘 아침식사를 하지 않았다는 걸 말하는 사람처럼 태연했다.

탕!

구윤이 집무 책상을 짚고는 소리쳤다.

“맹주님! 섬서회가 뚫리면 본단이 위험합니다!”

“그럴 지도 모르지.”

“한데 어째서…!”

“그들은 처음부터 본맹의 독재를 견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직일세.”

“설마 그런 이유로….”

“가벼운 이유는 아니지.”

“맹주님!”

능운파가 보고서를 책상에 내려 두고는 구윤을 빤히 바라보았다.

구윤이 흠칫거리고는 자세를 바로잡았다.

맹주의 표정에서 분노를 읽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맹주는 지독하리만치 무감한 표정이었다.

때문에 더욱 소름이 끼쳤다.

‘어째서 이렇게 냉정해지신 겁니까? 어째서…!’

능운파의 입에서 역시나 냉랭한 말이 튀어나왔다.

“지원을 해준다면? 마족을 몰아낼 확신이 있는가?”

“당장은 힘들더라도 시간을 벌 수는….”

“자네는 시간을 벌기 위해 아군의 목숨을 갖다 바치자는 건가?”

“그런 말씀이 아니라…!”

“이미 내 의지는 확고하네. 그리고 그들이 당하더라도 마족은 본단을 쉽게 치진 못할 걸세. 그들도 눈귀가 있을 터. 본맹이 그리 쉽게 허물어지진 않으리란 걸 잘 알 걸세.”

“그런…!”

“게다가 마족을 상대하는 건 본맹이 아니지 않은가? 본맹은 어디까지나 강호의 변절자를 상대할 뿐. 애초에 그들은 멸마궁으로 지원 요청을 했어야지.”

“사비강 궁주는 아직 멸마궁에 도착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러니 우선 본맹에서 지원을….”

“그렇다면 그들이 운이 없는 거지.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닌가?”

“…….”

구윤은 입을 딱 벌리고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도대체 어쩌다가 맹주가 이렇게도 변했단 말인가?

한때 자신이 목숨을 바쳐 모시던 그 사람이 맞긴 한가?

“이만 할 말 없으면 나가 보게.”

능운파가 다시 보고서를 들었다.

**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와 비명 소리, 기합성과 고함소리가 마구 어우러져 들려 왔다.

집무 책상에 앉은 섬서회주이자 화산파(華山派)의 장문인 화양진인(華陽眞人)은 깍지 낀 손을 턱 아래 바치고는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이따금씩 흔들리는 호롱불만큼이나 실내 분위기는 위태롭고 불안했다.

마주 앉은 부회주, 지강명(地强冥)이 이를 뿌득 갈고는 일어났다.

“처음부터 맹에는 기대도 하지 않았습니다! 애초에 우리 섬서회는 섬서에 터를 잡은 정도맹을 견제하기 위해 만든 조직이 아닙니까? 그러니 맹이 섬서회의 파멸을 은근히 환영하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지요!”

그는 매우 화가 나 있었다.

사천을 장악한 자카르트 백작은 곧장 마족기사들과 마물들을 이끌고 섬서로 치고 들어왔다.

그들의 발목을 잡아 주길 기대했던 곤륜파는 봉문해 버렸고, 감숙성의 공동파는 맹의 본단으로 들어가 몸을 사리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거리낄 것이 없는 마족들이 곧바로 섬서로 치고 들어온 것이다.

섬서회가 터를 잡은 석천(石泉)은 감숙, 사천, 중경, 호북과 바로 이어지는 요충지라고 할 수 있었다.

마족들이 정도맹 본단을 노린 것인지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당장 섬서회가 파멸의 길목에 서 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마침 옆에 앉아 있던 종남파(終南派)의 문주이자, 섬서회의 장로인 주장헌(主長憲)이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중얼거렸다.

“이해할 수가 없군요. 아무리 그래도 맹에서 지원군을 거절할 줄이야.”

“뻔한 일 아니겠습니까? 그들은 이 기회에 섬서회를 없애고 자신들의 입지를 확고히 하려는 것이지요!”

“아무리 그래도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린 법입니다. 섬서회가 멸망하면 당연 정도맹 본단이 위태로워질 터인데….”

“최근 나도는 소문이 있습니다.”

“소문이라면…?”

“능 맹주가 권력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는 소문입니다.”

“허어… 늘 평온하기만 하던 고인이 갑자기 왜…?”

“사비강 궁주 때문이겠지요. 그가 멸마궁으로 분리되지 않았습니까? 사비강 궁주가 날이 갈수록 인지도를 얻는 상황에서 강호가 양분되는 걸 경계할 만도 하겠지요.”

그러자 지금껏 잠자코 듣기만 하던 섬서회주 화양진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맹의 이번 결정은 이해가 되지 않소. 그렇다고 지금 그걸 따질 때는 아니오. 분명한 사실은 이제 우리의 힘만으로 싸워야 한다는 거요. 그리고 적들이 지금 장원까지 침입했소. 자, 일어섭시다. 목숨을 걸고 이곳을 지켜냅시다!”

화양진인이 의자에서 일어나자, 지강명과 주장헌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 사람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도 단호했다.

“좋습니다! 이왕 이리된 것, 맹의 도움 없이도 섬서회가 건재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줍시다!”

**

“크아아악!”

“이 마물들 죽어… 아아악!”

곳곳에서 비명이 솟구쳐 올랐다.

자카르트 백작은 섬서회 장원의 정문 위에 우뚝 선 채로 눈앞에 벌어지는 참상을 즐기듯 바라보았다.

무인들이 비명과 욕설을 뱉어내며 죽어 가고 있었다.

인간들의 손에 쓰러지는 마물들도 있었지만, 신경 쓸 정도로 많지 않았다.

마침 저만치 누군가가 우렁찬 사자후를 터뜨리면서 사이클롭스의 머리 위로 날아들었다.

“이놈들! 썩 사라져라!”

쩌렁쩌렁한 고함소리에 사이클롭스가 흠칫거리는 찰나, 사내는 그대로 검을 내질러 눈알을 찔렀다.

푹!

사이클롭스의 뒤통수를 뚫고 튀어나온 검신에서 진득한 피가 미끄러지다가 뚝 떨어졌다.

츄아아악!

검을 뽑아낸 사내는 그대로 훌쩍 물러나서는 옆에 쓰러진 부상자를 부축했다.

“괜찮으냐?”

“대, 대주님…!”

“조금만 참… 커억!”

대주라 불린 사내는 말을 마저 잇지도 못하고는 그 자리에서 한쪽 다리가 끊어지고 말았다.

어느새 그의 등 뒤에 나타난 오우거가 그대로 도끼를 내려찍은 것이다.

어깨를 가슴께까지 베인 대주는 울컥 피를 토하고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제, 젠자앙…!”

“대, 대주님! 이 썩을 것들! 전부 죽…!”

퍼억!

사납게 돌아서던 부상자는 그 자리에서 오우거의 주먹에 머리통이 박살나면서 즉사하고 말았다.

“노오오옴!”

눈이 뒤집힌 대주가 벌떡 일어나며 마지막 일격을 뿌렸다.

하지만 그의 검은 오우거의 몸에 닿지 못했다.

그보다 먼저 그의 정수리가 오우거의 도끼에 정확히 반으로 갈라졌다.

퍽!

츄아아아아!

수박이 터지듯 머리가 으깨진 대주는 그 자리에서 털썩 무릎을 꿇더니 큰 대자로 넘어가 버렸다.

즉사였다.

오우거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돌아서서는 다른 사냥감을 찾아 쿵쿵 걸어갔다.

그 모습을 보던 자카르트 백작이 풋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하하하하!”

정말이지 인간은 어쩌면 저리도 약하고 멍청하단 말인가?

지금처럼 멀쩡한 인간이 부상자를 구하려다가 개죽음을 당하는 걸 보면 터져 나오는 웃음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이 얼마나 비효율적이란 말인가?

제대로 싸울 생각이 있다면 적어도….

팟!

순간 자카르트 백작의 신형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다음 순간, 그는 다리 하나를 잃고 신음하는 오우거 곁에 모습을 드러냈다.

오우거가 그를 확인하자마자 악착같이 일어서려고 발버둥 쳤다.

하지만…

촤아아악!

섬광 한 줄기가 허공을 긋자, 오우거의 머리가 바닥에 툭 떨어지고 말았다.

자카르트 백작의 눈빛은 더 없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

“전력에 도움이 안 되고 걸리적거린다면 이렇게 제거를 해야지.”

나직이 중얼거린 그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가 내딛는 곳마다 새하얀 서리가 맺혔다.

마침 장원의 내문을 지나자 조금 더 치열한 전투 현장이 나타났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인간들은 마족기사들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저 갑옷 입은 녀석들을 조심해라! 무력이 보통이 아니… 커억!”

화산파의 이제자이자, 섬서회에서 검신대(劍神隊)를 맡고 있는 진룡(珍龍)은 지시를 내리던 중 허파가 뚫려 입을 쩍 벌렸다.

그의 가슴을 기다란 창으로 내지른 자는 바로 마족기사였다.

시커먼 갑주를 입은 마족기사가 형형한 안광을 휘날리며 주변을 쓸어보았다.

“으아아아! 이 나쁜 노옴!”

때마침 부대주가 울부짖으며 날아들었다.

쉬컥!

다시 한 번 한 줄기 섬광이 호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울분을 터뜨리며 날아들던 부대주는 몸과 머리가 분리되면서 그대로 바닥에 처박혔다.

그때였다.

“이놈들!”

퍼퍼펑!

“크아악!”

저만치 마족기사들이 비명을 터뜨리며 몸이 날아갔다.

그곳에는 세 명의 고수가 서 있었는데, 바로 섬서회주 화양진인과 부회주 지강명 그리고 장로 주장헌이었다.

세 사람은 곧장 마족기사들에게 마주쳐 갔다.

“이곳은 네놈들이 설 자리가 아니다!”

“썩 물러가라!”

‘화산제일검’으로 알려진 화양진인은 마족기사 둘을 동시에 상대하면서도 호각을 이루었고, 부회주이자 패도문(覇刀門)의 장문인 지강명은 ‘파풍도왕(破風刀王)’이라는 별호답게 무척이나 파격적인 도법을 구사하며 적을 당황케 만들었다.

섬서회의 장로이자 종남파의 장문인인 주장헌 역시 마물들을 거침없이 휩쓸며 막강한 무위를 자랑했다.

하지만 그 세 사람을 제외한다면 이미 장원의 다수 무인들이 생포되거나 싸늘한 주검으로 변해 버린 상황.

그들의 무위를 가만히 지켜보던 자카르트 백작이 손가락을 한 번 딱 튕겼다.

그러자 마물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면서 시커먼 갑주의 마족기사들만 빽빽하게 내원으로 들어섰다.

처처처처처처척…!

마족기사들 중 창을 다루는 자들이 전면으로 나서며 세 고수를 에워싸고는 자세를 잡았다.

그들을 훑어보던 화양진인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두 분, 그간 고마웠소.”

지강명과 주장헌이 눅눅하게 젖어든 눈동자로 적들을 보며 대꾸했다.

“함께 해서 즐거웠습니다.”

“모든 시간이 영광이었습니다.”

역시 헛된 희망이었다.

어쩌면 맹의 도움 없이도 막을 수 있지 않을까, 일말의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여기까지가 한계다.

특히 마족기사들 사이에 서서 무표정한 시선으로 이곳을 바라보는 자.

그의 존재감은 그 누구보다도 위압적이었다.

바로 자카르트 백작이었다.

세 사람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다르다…! 저자의 존재감은 다른 이들과 비교가 되지 않는구나!’

화양진인이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마지막 혼을 던집시다.”

“좋지요!”

“갑니다!”

타다닷!

세 사람이 동시에 신형을 날렸다.

“이여어업!”

“이땅에서 사라져라!”

“하아앗!”

그들의 기합성이 장원을 쩌렁쩌렁 울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