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 마교관-499화 (499/670)

# 499

귀환 마교관

499화

달빛이 스며드는 침상 위에 나신이 된 남녀가 나란히 누워 있었다.

바로 사비강과 매설란이었다.

두 사람은 정말이지 오랜만에 사랑을 나누었다.

서로에게 심취해서 다른 어떤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렇게 서로에게만 충실한 시간을 가진 게 언제였던가?

매설란이 돌아누워 사비강을 안으며 피식 웃었다.

“당신… 처음엔 정말 재수 없었는데.”

“그래? 난 첫눈에 반했는데.”

“알아. 날 보고 첫눈에 반하지 않는 남자는 없으니까.”

“대단한 자신감인 걸?”

“하지만 당신은 내 유혹에 넘어오지 않았지.”

“이미 넘어갔던 건지도 모르지.”

“거짓말. 내가 온갖 방법을 다 써도 당신은 유혹에 넘어오지 않았어. 오히려….”

매설란은 잠깐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

“내가 먼저 넘어갔지.”

그녀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예전 같았으면 절대 먼저 말하지 않았을 내용이다.

설령 누군가를 마음에 품었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속내를 드러내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이제 사비강 앞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런 건 의미가 없다.

지금 이 순간 옆에 사비강이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 벅차게 행복했다.

이것이 진정한 사랑이라는 걸 다시 한 번 느꼈다.

휘리릭!

순간 매설란이 사비강의 가슴에 올라타고 앉았다.

사비강이 미간을 좁히고는 말했다.

“그대로 숨겨 둔 비수를 꺼내 찌르면 딱 죽기 좋겠어.”

“그렇게 죽을 뻔한 적 있나 봐?”

“많지.”

거짓말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는 마계에서 이런 식으로 수차례 목숨의 위협을 받아 왔다.

하지만 그때마다 충직했던 부하인 헬무트가 나서서 암살자를 처리했다.

물론 직접 처리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헬무트가 처리하도록 내버려 둔 것은 그의 충성심을 몇 번이고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래도 조금은 믿어 줄 것을….’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자, 매설란의 표정이 부루퉁해졌다.

“과거의 여자를 그렇게 함부로 떠올려도 되겠어? 이런 상황에서?”

“이런 상황이 어떤 상황인데?”

“비수로 찌르면 딱 죽기 좋은 상황.”

“하하하!”

사비강이 모처럼 육성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부루퉁한 매설란의 얼굴이 귀여웠다.

사비강이 그녀의 허리를 부드럽게 안았다.

“그땐 당신을 몰랐으니까. 그 벌로 죽을 고비까지 넘긴 걸 테지.”

“피이.”

“그리고 이렇게 아름다운 여자가 나체로 올라타면… 비수 따윈 안 꺼내도 심장이 멈춰 죽을 지도 몰라.”

“하여튼 말은.”

매설란이 눈을 흘기면서도 싫지만은 않은 표정이었다.

그녀가 머리카락을 한쪽 귀 뒤로 쓸어 넘기며 물었다.

“말해 봐. 첫눈에 반했으면서 왜 내게 빠지지 않았는지.”

“그야 당연히… 당신이 날 보고 있지 않았으니까.”

“뭐?”

“당신은 날 유혹했지만, 당신의 마음은 날 보지 않았잖아.”

“그건….”

“이래봬도 예민한 남자야.”

사비강이 씨익 웃었다.

이것 역시 농담만은 아니었다.

음모와 배신이 가득한 마계에서 악착같이 살아 남기 위해서는 초인적인 감각이 필요했다.

남을 이용할 줄도 알아야 했고, 남의 속내를 눈치 챌 줄도 알아야 했다.

그런 삶을 수십 년이나 살았다.

그러니 속내를 따로 두고 접근하는 여자에게 넘어갈까?

매설란이 피식 웃더니 대뜸 자랑스럽게 말했다.

“나, 블링크를 사용했어.”

“정말? 대단한데?”

사비강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블링크는 상당히 하이 레벨 마법에 속한다.

자신도 처음 회귀했을 때는 블링크를 사용할 수 없어서 이동 거리가 짧은 트라이스만 사용하지 않았던가?

매설란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나… 이번에 맹주님과 함께 토벌대에 참여하려고.”

“갑자기 왜?”

“마물들과 직접 싸워 보고 싶어. 내 검이 마물들에게 얼마나 통하는지 알고 싶어. 그리고 내가 얼마나 강해졌는지도 확인하고 싶어. 그냥 이렇게 머물러만 있다간….”

“……?”

“당신이 손에 닿지 않을 곳으로 멀리 가버릴 것만 같거든.”

매설란이 희미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사비강의 탄탄한 가슴 위에 가만히 엎드렸다.

사비강의 심장 소리가 들렸다.

이토록 강한 남자도 심장 소리만큼은 범인과 다를 바가 없었다.

너무나 약한 울림.

그녀가 가만히 중얼거렸다.

“말리진 않을 거지?”

“말리면?”

“그래도 갈 거야.”

“그럼 안 말려야지.”

“어째서?”

“당신이 비수를 꺼내서 날 찌르고 가 버릴까 봐.”

“뭐야? 풋!”

결국 두 사람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매설란은 이 순간이 행복했다.

이마에 느껴지는 사비강의 숨결, 부드러운 가슴 아래로 느껴지는 사비강의 심장 박동, 자신의 허리를 안은 사비강의 손길.

그녀가 사비강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중얼거렸다.

“정말 우습지.”

“뭐가?”

“마족이 강림해서 세상이 온통 난리인데. 그 와중에 내가 잠깐의 행복을 느끼고 있다는 게.”

사비강이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신이 인간에게 딱 그만큼만 여유를 준 걸지도. 절망 속에서도 그렇게 오늘을 살아갈 여유. 그리고 그게 인간을 강하게 만드는 걸지도.”

“그런 의미에서 한 번 더 하고 싶어.”

매설란의 돌발 발언에 사비강이 멈칫거렸다가 곧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그럼, 어디 한 번 더 강해져 볼까?”

사비강이 그대로 일어나 앉으며 매설란의 입술을 덮쳤다.

**

능운파는 대연무장에 모인 무인들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모두 필살의 의지를 담은 얼굴.

지난번 강림지 전투 이후로 처음 가지는 공식 출정식이었다.

물론 지금까지 각지의 크고 작은 문파에서는 소환지 토벌대를 구성해 중원 곳곳으로 파견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도맹의 공식적인 출정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토벌대는 맹주가 직접 이끄는 만큼 정예 중에서도 정예로만 구성됐다.

뿐만 아니라 토벌대의 구성은 하나부터 열까지 맹주가 직접 일일이 개입하고 지시했다.

그만큼 능운파가 이번 토벌대에 들인 공은 컸다.

이 과정에서 멸마관과 관련된 인물은 단 한 명도 포함되지 않았다.

여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표면적 이유는 여러모로 공을 세운 멸마관에게 한동안의 휴식을 제공한다는 것이었지만, 속내는 멸마관의 비대화를 막기 위한 조치였다.

이는 능운파의 의지라기보다는 정도맹 수뇌 인사들이 직접적으로 나서면서 제안한 사항이기도 했다.

어쨌거나 능운파는 이번 토벌대를 통해서 노리는 것이 많았다.

실추된 맹주의 권위를 회복하고, 승전보를 들고 돌아와 강호인들의 결속을 다지며, 다시 한 번 자신이 건재함을 알려야 했다.

그렇게 무너져 가던 자존심을 세우고, 다시 한 번 초석을 다져 일어설 계기로 삼으려고 한 것인데….

‘어째서 그리도 나약한 생각을 했단 말인가?’

능운파는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던 행동에 내심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불과 며칠 전 자신은 맹주의 자리에서 물러나려고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왜 그리 한심한 생각을 한 것인지….

그러던 중에 그의 시선이 무인들 가운데에 선 매설란에게 향했다.

과연 그녀는 무리 속에서도 빛나는 외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래, 매 총관과 대련을 하고 나서 그런 마음이 들었지.’

아름다운 여자는 요물이라던가?

그러고 보면 참 요물은 요물이 아닌가?

그녀와 대련한 후 거짓말처럼 마음이 약해졌으니.

이제 다시는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하지 않으리라.

그리고 이번 토벌대의 성공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 보리라.

능운파가 단상에서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평소와 달리 그는 냉엄한 눈동자로 무인들을 훑어보다가 소리쳤다.

“마족이 강림할 것을 알고도 막지 못했다. 하지만 본맹은! 이번 토벌 작전을 통해 실추된 맹의 권위를 되찾고, 강호의 결속을 다지며, 위기에 빠진 중원을 구하는 초석을 다질 것이다!”

“와아아아아아!”

대연무장 가득 함성이 솟구쳐 올랐다.

능운파는 흡족한 표정으로 무인들을 물끄러미 보았다.

일부러 출정 연설을 할 때, 마족 강림을 막지 못한 실패에 대해서는 주어를 붙이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까지 사비강의 업적에 대해서는 ‘실추된 권위’라는 말로 모두 묻어 버렸다.

사실 특별히 사비강을 의식해서 한 발언은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나온 발언이다.

능운파는 함성을 내지르는 무인들을 보며 다시 한 번 다짐했다.

‘그래, 다시 한 번 더 일어서리라!’

그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마침 처마 끝에 앉아 있던 새가 푸드득 날아올랐다.

**

“정도맹이 움직이는구나.”

바리탄이 나직이 읊조리며 손을 한 차례 휘젓자 수정구가 곧 빛을 잃었다.

존야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대꾸했다.

“토벌대에서 멸마관이 제외된 것은 역시….”

“그렇다. 아들러 백작의 수가 통한 것일 테지. 그가 맹주의 심상을 잘 이용했다. 만약 그대로 내버려 두었더라면 맹주는 스스로 심상을 치유할 길을 찾았을 테니.”

“그렇군요. 한데 주군께서는 아들러 백작님을 신뢰하시는지요?”

“신뢰?”

바리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돌아보더니 이내 피식 실소를 머금었다.

“이곳에서 신뢰란 없다. 그저 자신의 강함을 믿어야 할 뿐. 누군가를 신뢰한다는 것 자체가 스스로의 나약함을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하는 거지.”

“명심하겠습니다.”

“어쨌거나 맹주는 이 기회를 통해 반격의 초석을 깔려고 하겠지만….”

“오히려 아들러 백작님의 초석이 다져지는 셈이 되겠군요.”

“역시 이해가 빠르구나.”

바리탄이 부드럽게 웃어 보이자, 존야가 얼굴을 붉히고는 고개를 숙였다.

“과, 과찬이십니다.”

“그럼 인간들의 멍청한 출정식을 지켜보았으니, 이제 마족의 출정식을 구경하러 가자꾸나.”

“예.”

바리탄이 존야와 함께 방을 나갔다.

인간들은 모르고 있었겠지만, 오늘은 바로 마족이 본격적으로 출정하는 날이었다.

소환지 중 한 곳이 테라포밍을 끝내고 마계화에 성공한 터였다.

소환지가 완전한 테라포밍을 이루게 되면 이곳 흑성과 연결되는 포탈이 생기게 된다.

즉, 흑성에서 소환지로 곧장 이동할 수 있다는 뜻이다.

정사연맹이 제단에서 곧장 강림지로 이동했을 때처럼.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이런 번거로운 과정을 생략하고 곧장 중원을 휩쓸었을 것이다.

닥치는 대로 인간들을 베고 죽이며 납치했을 것이다.

하지만 각종 포션과 마법 도구들을 대부분 회수하지 못한 상황인데다 뜻밖의 강적을 확인했기에 좀 더 신중하게 움직이는 것이다.

테라포밍이 완료된 소환지부터 차례차례 이동하며 점차 범위를 넓혀 가는 방향으로.

바리탄과 존야는 복도를 따라 이동하다가 망루로 오르는 계단으로 들어섰다.

나선형 계단을 따라 한참이나 올라간 후에야 문을 열고 성벽 위의 보도로 들어설 수 있었다.

휘이이이잉!

매서운 칼바람이 존야의 뺨을 때렸다.

그녀는 잠시 멈칫거렸다가 걸음을 내디뎠다.

그리고 마침내 성벽 아래에 운집한 마족들과 마물들을 확인했을 때, 두 눈이 찢어지도록 부릅떴다.

‘이렇게나 엄청난…!’

마족 기사의 숫자는 불과 천 명에 지나지 않았다.

나머지는 마물들이었다.

하지만 천 명의 기사들이 뿜어대는 존재감은 그야말로 무시무시했다.

그들이 뿜어내는 강렬한 마력이 천지에 진동했다.

아! 이들 앞에서 인간은 얼마나 나약한 존재란 말인가?

검은 갑옷을 착용한 마족 기사들 앞에는 유난히 강한 존재감을 뿜어내는 자가 냉엄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저분은… 누구인지요?”

“저자가 바로 이번 돌격단의 천부장을 맡은 자카르트 백작이다.”

“자카르트 백작…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이 아라니우스 공작님을 넘어서는 듯합니다.”

“아라니우스? 하하하!”

바리탄이 기분 좋게 웃음을 터뜨리더니 말을 이었다.

“아라니우스 그 늙은이는 겁쟁이 마족에 지나지 않는다. 그저 날 두려워했던, 짜증나는 존재였을 뿐이지. 그를 가호하는 악신들이 전투와 무관한 편이기도 했고.”

“하면 무력으로는 자카르트 백작이 아라니우스 공작을 넘어선다는 말씀인지요?”

“당연하다. 다시 말하지만 아라니우스 공작의 전투력은 열 손가락 안에도 들지 못한다.”

바리탄의 시선이 성벽 아래에 운집한 마족 기사들에게 향했다.

이제 그들은 포탈을 이용해 이동하기 직전이었다.

바리탄의 입에서 서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제야말로 중원에 본격적인 혈겁이 불어 닥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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