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 마교관-498화 (498/670)

# 498

귀환 마교관

498화

탁.

능운파는 술잔을 내려 두고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그는 오늘 낮에 있었던 매설란과의 비무에 대해 복기해 보았다.

‘마법…’

분명 사비강은 그 기묘한 술법을 마법이라고 불렀다.

허를 찔렸다.

하지만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자신이 이성을 잃을 뻔했다는 것이다.

순간적으로 감정을 조절하지 못해 매설란에게 살초를 펼칠 뻔했다.

“흐음.”

그가 나직이 침음을 흘리고는 술잔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술잔을 잡은 손이 가늘게 떨렸다.

그는 스스로에게 조용히 물었다.

‘무엇이 그리 두려운가?’

분명 자신은 두려워하고 있었다.

한데 그 대상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뭐가 문제인가? 어쩌다가 이리 된 것인가?’

가슴이 답답했다.

마지막 살초를 펼쳤을 때, 매설란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버리는 것을 보았다.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외모와 누구보다 강단 있는 성격으로 주변의 존경을 한몸에 받던 여인이 완벽한 무력감에 빠져 얼어붙어 있었다.

살짝 겁을 먹은 듯한 얼굴은 그의 심연에 잠재된 모종의 본능을 일깨워 버리는 듯했다.

“미친….”

능운파는 어금니를 빠득 갈고는 중얼거렸다.

자신의 입에서 이토록 상스러운 말이 튀어나올 줄은 몰랐다.

그리고 그 대상이 자신이 될 줄은 정녕 몰랐다.

‘심상… 인가?’

강림지에서 빠져나왔을 때, 사비강은 무인들 모두에게 매일 같이 운기조식을 통해 마음을 다스리도록 지시했다.

겉으로는 괜찮을지 몰라도 심상을 입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였다.

능운파 역시 그가 말한 대로 했다.

하지만 그즈음부터 심연의 변화가 시작된 것만은 분명했다.

그 변화는 아주 서서히 찾아왔다.

스스로 자각하지 못할 정도로.

한데 어느 날 돌이켜보니 자신은 시기와 질투, 집착과 분노의 화신이 되어 있었다.

오늘만 해도 어째서 매설란에게 대련을 제안했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래, 만년설삼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사비강이 만년설삼을 준 사람 중 한 명이 바로 매설란이었으니까.

그녀가 만년설삼을 복용하고 나서 얼마나 강해졌는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

‘한심한. 그런 걸 왜 확인하고 싶단 말인가?’

능운파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잔에 술을 따랐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매설란에게 살심을 가진 직후에 거짓말처럼 이성이 돌아왔다는 점이다.

자칫 매설란을 죽일 뻔하지 않았나?

‘그래, 이제부터라도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 아직도 한참 멀었도다.’

능운파는 깊이 자책하며 마지막 술잔을 들이켰다.

그의 눈빛에 모종의 결심이 떠올랐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내가 점점 추악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더 추악해지기 전에 스스로를 구할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더 이상의 집착을 버리고 정도맹 일선에서 물러나는 것.

사비강이라면 충분히 믿을 만했다.

향후 강호의 운명을 맡기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래, 내일 날이 밝으면 긴급회의를 소집하고 내 결심을 알리리라.’

이 강호는 더 이상 자신이 끌고 가서는 안 된다.

마족에 대해서 가장 잘 알고, 그 누구보다 강하면서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인물.

역시 사비강뿐이다.

몇몇 장로들과 수뇌 인사들이 반대할지도 모르지만 능운파는 결단을 확고하게 다졌다.

어찌 보면 오늘 매설란과 가진 대련이 그를 눈 뜨게 해준 셈이었다.

‘모든 것을 벗어던지고 초야에 묻혀 수양이나 더 해야겠다.’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강림지 전투에서 돌아온 이후 줄곧 그를 괴롭혔던 번뇌가 일시에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왜 진작 이런 결심을 하지 못했을까?

어째서 그 미련한 집착을 보이고 추한 모습을 고집했던가?

마음을 정리하고 나니, 그간 자신을 걱정스럽게 바라봐 주던 욱청풍이 떠올랐다.

이 모든 상황을 정리하고 나면 제일 먼저 그를 찾아가 사과부터 해야겠다.

“천무(千武).”

능운파가 나직이 입을 열자 허공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 맹주님.”

그는 능운파의 수신호위였다.

“내일 중대한 발표를 할 것이니 구 군사에게 긴급회의를 준비하라 이르게.”

“…좀 더 시간을 두고 천천히 생각해 보심이 어떠신지요?”

천무가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오랜 세월 능운파를 지켜온 그는 지금 맹주의 심정을 어느 정도 꿰뚫고 있었다.

하지만 능운파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 마음이 이미 굳었네. 가서 구 군사에게 전하고, 자네도 오늘만큼은 모처럼 쉬도록 하게나.”

“하면 다른 호위를….”

“아닐세. 오늘은 혼자 잠자리에 들고 싶군.”

“…알겠습니다.”

곧 허공에서 기척이 사라졌다.

‘그래, 이거면 된 거다.’

능운파는 씁쓸한 웃음을 머금고는 침상으로 걸어갔다.

막상 마음을 굳히고 보면 이리도 간단한 진리를 왜 몰랐을까?

이제라도 알아서 다행이다.

그는 이런저런 생각을 잠시 떠올리다가 곧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능운파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가 천장을 바라본 채로 가만히 입을 열었다.

“누군가?”

“…….”

상대는 대답이 없었다.

대신 어둠 속에서 자박자박 발걸음 소리만 울렸다.

능운파가 기척을 눈치 챈 것에 대한 놀라움도 보이지 않았다.

능운파는 자리에서 일어나 비교적 날카로운 눈매로 어둠 속을 빤히 응시했다.

“자네는…?”

뜻밖의 인물을 확인한 능운파가 이맛살을 구겼다.

“창신단주 이자준, 맹주님께 인사 올립니다.”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온 이자준이 한쪽 무릎을 꿇으며 예를 갖췄다.

능운파가 이자준의 방문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늦은 시간에 예고도 없이 무슨 일인가?”

“실은 다른 눈이 보지 않을 때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아서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뵈었습니다.”

“무슨 일로?”

이자준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공손히 내밀었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별 모양의 목걸이였다.

한데 그 별 모양 안에는 깨알 같은 글씨가 빽빽하게 새겨져 있었다.

물론 한자는 아니었다.

능운파는 눈살을 슬쩍 찌푸리고는 목걸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척 보기에도 요사스러운 물건이라는 느낌이 왔다.

“이게… 뭔가?”

“강림지에서 주운 물건입니다. 제가 지니고 있다 보니 보통 물건은 아닌 것 같아 이렇게 맹주님께 찾아왔습니다.”

능운파는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는 가만히 목걸이를 응시했다.

그는 그 순간 아무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모종의 기운을 뿜어내는 이 목걸이만이 시야 가득 들어올 뿐이었다.

마치 목걸이가 의지를 가지고 속삭여 오는 것만 같았다.

그 묘한 갈증에 능운파는 헛기침을 하고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마침내 목걸이를 받아든 능운파가 그것을 세세히 관찰했다.

‘볼수록 기이한 물건이로다.’

묘하게 설레는 기분.

이걸 어찌 표현해야 할까?

목걸이는 끊임없이 속삭이고 있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속삭임이었지만, 무척이나 달콤한 기분.

능운파는 그 속삭임에 홀린 듯 한참을 바라보았다.

“맹주님…?”

이자준이 조심스럽게 부르자, 그제야 고개를 든 그가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커흠. 확실히 요사스러운 물건이로다. 내가 한 번 알아보도록 하겠네. 자네는 그만 가 봐도 좋네.”

“알겠습니다. 그럼.”

이자준이 깍듯하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돌아갔다.

능운파는 잠자리에 들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어둠 속에서 그 목걸이만 응시했다.

신기하게도 온통 어두운 공간에서 그 목걸이만은 밝게 빛나는 듯했다.

‘참으로 기이한 물건이로고.’

그가 넋을 놓고 들여다보고 있는데, 마침 문밖에서 목소리가 불쑥 들렸다.

“맹주님, 들어가겠습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능운파가 목걸이를 얼른 손에 말아 쥐고는 일어났다.

놀랍게도 벌써 날이 밝아 있었다.

잠깐 목걸이를 지켜보고 있었을 뿐이었는데, 어느새 시간이 많이 흘러 동이 튼 것이다.

문을 열고 들어선 사람은 다름 아닌 천무였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서 바로 들어온 사람이 있었다.

총군사 구윤이었다.

그가 어딘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긴급회의를 소집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죄송하지만 무슨 안건인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그는 최근 들어 맹주의 상태가 다소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해서 혹시나 돌발 발언을 하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그런데 능운파의 입에서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아, 그건 신경 쓰지 마시게. 긴급회의는 없던 일로 하겠네.”

“혹시 무슨 일로….”

“그저 늙은이의 변덕이라고 생각하시게. 괜한 일로 신경 쓰게 해서 미안하군.”

“아닙니다. 그럼.”

군사가 돌아가자, 능운파는 손에 쥔 목걸이를 더욱 힘주어 잡았다.

**

소천악은 의신각 안마당을 연신 서성거리며 안절부절 못했다.

그가 눈을 한 번 부라리면 지나가던 강아지도 오줌을 지린다는 말이 떠돌던 때가 있었다.

그런 그가 지금은 정도맹 의신각 앞에서 초조한 표정으로 똥마려운 강아지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가 평생을 살면서 이런 표정을 지은 적은 딱 두 번뿐이었다.

그의 아들 소유강이 실종된 사실을 알았을 때.

어지간한 무인 앞에서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그였지만 자식과 관련된 일이라면 한 없이 약해지는 그였다.

결국 그 역시 사파 무인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아버지였던 것이다.

불안한 표정으로 그를 지켜보던 호신위가 넌지시 말했다.

“객당에서 조금이라도 눈을 붙이시지요.”

“강아 녀석이 어찌 될지 모르는 판국에 잠이 오겠는가?”

“사비강 관주도 말하지 않았습니까? 무랑도사와 초환당주는 이 시대의 최고 명인들이라고 말입니다.”

“그래, 그래야지.”

“공자님은 무사히 회복하실 겁니다.”

“그래, 그래야지.”

소천악이 같은 말을 반복했다.

벌써 사흘 째였다.

용천관으로 떠났던 사비강은 소유강을 데리고 돌아왔다.

하지만 소유강은 온전한 이성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를 치료하기 위해서 정도맹 의신각으로 곧바로 이송됐다.

이곳에서 무랑도사라는 자와 진백 당주가 직접 치료한다고 했다.

그런데 아직까지 감감무소식이었다.

두 번이나 실종되었던 아들을 이제 겨우 찾았는데, 자신을 알아보지도 못한다면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리라.

그때였다.

의신각 문이 열리면서 사비강이 나타났다.

소천악이 얼른 달려가며 물었다.

“사비강 관주! 어떻게 됐소?”

사비강이 희미하게 웃으며 옆으로 물러났다.

그러자 바로 뒤에 서 있던 흑귀, 소유강이 소천악을 보고는 웃음을 지었다.

“아버지. 오랜만에 뵙습니다.”

“강아…! 정녕 날 기억하는 것이냐? 아니, 그보다 너 이제는 햇빛을 볼 수 있는 것이냐?”

햇빛을 받기만 해도 살이 타들어가는 저주에 걸린 아들이지 않았던가?

한데 지금은 멀쩡히 햇빛을 받으며 서 있었다.

소유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습니다.”

“맙소사…! 이 아비는 이제 원이 없구나!”

소천악이 한달음에 달려가 소유강을 얼싸안았다.

그는 정말이지 춤이라도 추고 싶을 지경이었다.

아들이 잃었던 기억을 되찾은 데다 저주마저 풀어졌으니 어찌 기쁘지 않을까?

사실 기억만큼은 무랑도사와 진백의 능력으로 치유한 것이지만, 빛을 보지 못했던 저주는 카시스의 악신을 집어삼키면서 저절로 풀어진 것이었다.

어쨌거나 그로서는 한 가지 귀찮은 제약이 사라졌으니 이보다 좋을 수도 없었다.

한편 두 사람이 기뻐하는 모습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자들이 있었다.

“정말 다행이에요. 기억을 되찾았다니.”

유정이 옆에 선 자운룡에게 말했다.

자운룡이 잠시 뜸을 들이다 물었다.

“부러운… 것이냐?”

“글쎄요. 조금은 그런 걸지도.”

“되살린 기억 중에서 나쁜 것도 있을 텐데.”

“설령 나쁜 기억이라고 해도 저 ‘흑귀’라는 분은 그걸 함께 아파해 줄 사람이 있잖아요.”

“……!”

순간 자운룡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오랫동안 알지 못했던 답.

조금 전 그의 머릿속에 그 해답이 스쳐 지나간 듯했다.

‘그랬던가…! 결국 네가 지운 것은 나의 과오가 아니라, 나의 무책임이었던가?’

손끝이 가늘게 떨려 왔다.

생각지도 못했다.

자운룡이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하면 너는… 잃었던 너의 기억에 대해 함께 아파해 줄 이가 있다면… 그 기억이 아무리 끔찍해도 되찾고 싶으냐?”

유정이 자운룡을 돌아보며 미소 지었다.

“네. 그게 진정한 저의 모습일 테니까요.”

그 순간 자운룡은 그 자리에서 허물어지듯 주저앉고 말았다.

‘이거였소? 당신이 말한 정답이…? 이리도 잔인한 거였소…?’

자운룡의 시선이 저만치 사비강에게 향했다.

한편 깜짝 놀란 유정이 얼른 자운룡에게 다가갔다.

“사부님? 왜 그러세요? 괜찮으세요?”

고개를 든 자운룡의 얼굴은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

“네게… 꼭 할 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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