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6
귀환 마교관
496화
“네놈이 뭐가 됐든 나와 함께 가야겠다.”
이제 아라니우스의 두 눈은 붉게 충혈되다 못해 온통 핏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듯했다.
손등을 따라 불거져 나오는 핏줄도, 입가를 타고 흐르는 침도, 등줄기를 타고 축축하게 흘러내리는 땀도.
그는 본인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
사비강은 점점 기괴하게 일그러지는 아라니우스를 보며 속으로 조소를 지었다.
‘반응이 오는군.’
아라니우스는 한 가지 사실을 간과했다.
바로 베르타스가 원래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
분명 그 역시 알고 있었으리라.
하지만 거기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물론 그 이유도 대충 짐작이 간다.
베르타스의 모양이 바뀌었지만, 한낱 인간이 그걸 들고 설쳐대니 특별히 신경 쓸 부분이 아니라고 여겼으리라.
하지만 그는 신경 썼어야 했다.
적어도 베르타스가 뿜어내는 기운이 예사롭지 않으며 과거에 비해 강렬해졌다는 것 정도는 인지했어야 했다.
게다가 베르타스는 자베린의 몸을 관통하면서 일순간 그의 몸에 남은 피를 모조리 흡수했다.
자베린은 굶주린 피의 악신에게 가호를 받는 마족이었다.
그의 피는 특별할 수밖에 없었다.
한데 그 피를 모두 흡수했으니, 그렇잖아도 강렬한 마력을 품은 베르타스가 더욱 거칠어질 수밖에.
사비강이 어깨를 으쓱이고는 말했다.
“원래 그런 법이지. 사람이든 마족이든 똥 싸기 전이랑 똥 싸고 나서 마음이 다르거든.”
“크크크! 그 나불거리는 주둥이는 이제 그만 닥쳐라!”
침을 튀며 소리친 아라니우스가 광기 서린 표정으로 날아들었다.
쒸에에에에엑!
한데 마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린 그 순간,
“크억!”
당황한 아라니우스가 그대로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콰당탕!
꼴사납게 추락한 아라니우스는 이를 악다문 채 신음을 내질렀다.
“크으으읍!”
그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리 회귀를 했다지만, 인간도 다룬 베르타스가 아닌가?
한데 자신이 베르타스의 마력을 다루지 못할 줄이야!
베르타스는 점점 아라니우스의 팔을 비틀어 갔다.
이제는 베르타스를 던져 버리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상황!
“크이이이익!”
그가 피가 나도록 이를 악다물며 괴성을 내질렀다.
우두두둑!
“크아아악!”
마침내 아라니우스의 팔이 완전히 꺾여 버리고 말았다.
베르타스는 그야말로 마족의 피에 굶주린 것처럼 요동을 쳤다.
그제야 사비강이 뒤통수를 긁으며 말했다.
“참, 깜빡하고 말을 안했는데… 그 녀석 다룰 때 좀 조심해야 해. 마력을 생각없이 사용하다간 오히려 그 녀석에게 잡아먹힐 수가 있거든.”
“제기랄…!”
아라니우스는 지금의 상황을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물론, 베르타스는 인간의 피보다는 마족의 피를 더 좋아한다.
베르타스가 가진 마력의 원천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이유로 마족들은 함부로 반역을 일으키지 못한다.
베르타스가 유일하게 탐내지 않는 피가 마왕의 피니까.
아무리 그렇다곤 해도 베르타스를 다루는 건 인간보다야 마족이 낫다.
한데 이래서야…!
아라니우스는 이제 덜덜 떨면서 자신의 목을 향해 천천히 검신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그의 전신에서 핏줄이 터져 나올 것처럼 불거졌다.
마력을 끌어올리는 순간, 베르타스의 힘이 더욱 강렬해져서 신갑을 착용할 수도 없는 상황.
사비강이 부들부들 떨고 있는 아라니우스를 보며 야비한 웃음을 지었다.
“저항하지 마. 포기하면 만사가 편해.”
“크윽! 젠장할! 내 피가 아니다! 저놈의 피를 빨아먹으란 말이닷!”
아라니우스가 마지막으로 비명 같은 외침을 내질렀을 때,
슈커억!
베르타스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아라니우스의 목을 그어 버렸다.
“커억!”
상처를 통해 흘러나온 피를 베르타스가 꿀꺽꿀꺽 흡수해 갔다.
“크아아아아압!”
마침내 아라니우스가 괴성을 내지르며 마지막 힘을 짜내 베르타스를 바닥에 내팽개쳐 버렸다.
베르타스가 피를 흡수하는데 집중하느라 일시적으로 마력이 약해졌던 것이다.
비틀거리며 물러난 아라니우스가 철퍼덕 주저앉고 말았다.
사비강이 손을 뻗자, 저만치 내팽개쳐져 있던 베르타스가 휙 날아와 잡혔다.
그 모습을 본 아라니우스는 눈동자가 흔들렸다.
“어, 어째서…? 도대체 넌 뭐냐?”
“회귀자라고 말했잖아. 도대체 더 이상 얼마나 더 자세히 알려줘야 속이 시원하겠냐?”
아라니우스가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사비강이 눈살을 찌푸리고 중얼거렸다.
“그렇게 소중한 것처럼 달라더니, 이렇게 바닥에 내팽개치면 되겠어? 가져가라니까. 준다고.”
“이익…! 이 수모는… 언젠간 갚아 주마!”
다음 순간, 아라니우스가 서 있던 땅이 갑자기 눅눅하게 젖어들더니 순식간에 그를 집어삼켰다.
**
후우우우우웅!
매서운 칼바람이 눈보라와 함께 산등성을 따라 불었다.
꽁꽁 얼어붙은 대지는 그 어떠한 생명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곳에 이해하기 힘든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눈 덮인 땅이 어느 순간 촉촉하게 젖어들더니 이내 부글부글 끓으며 하얀 김을 모락모락 피워내는 게 아닌가?
잠시 후,
꾸드드드드드득!
잔잔한 진동과 함께 거대한 흙손이 튀어 올라왔다.
손바닥 위에는 목에 상처를 입은 아라니우스가 겨우 의식을 유지한 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가 숨을 내쉴 때마다 목구멍에서 쌔액쌔액 하는 소리가 울렸다.
만약 진흙을 이용해 상처를 급히 지혈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출혈 과다로 명을 달리 했을 터였다.
‘제기랄!’
그는 눈물을 머금고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마지막 남은 한 줌의 마력까지 도망치는데 모두 소모해 버렸다.
혹시나 사비강이 쫓아올까 봐 정말이지 사력을 다해 도망쳤다.
평소 그렇게 무시하던 인간을 상대로 이런 꼴을 보일 줄이야!
생각할수록 치욕스럽고 분노가 차올랐다.
결국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아니, 오히려 모든 것을 잃었다.
자신에게 늘 충성했던 카시스 자작을 잃었고, 누구보다 믿음직했던 심복 자베린을 잃었다.
물론 그들의 죽음에 슬퍼하진 않는다.
다만 끝없는 분노가 뱃속부터 끓어오를 뿐이었다.
‘이 수모는 언젠간 반드시 갚아 주마!’
아라니우스는 어금니를 빠드득 갈고는 비틀비틀 일어났다.
그는 눈 쌓인 산등성을 따라 걷고 또 걸었다.
마력을 완전히 소진한 데다 기력이 다해 걷다가 쓰러지길 반복했다.
마계처럼 공기 중에 마나라도 섞여 있다면 쉬면서 몸을 회복했을 텐데 그럴 수도 없었다.
마나 포션을 챙겨 오지 않은 것이 이렇게 후회될 줄이야.
어쩔 수 없다.
이렇게 된 이상 테라포밍이 완료된 흑성으로 돌아가서 몸을 완전히 회복할 수밖에.
그렇게 눈보라를 헤치며 얼마나 걸었을까?
마침내 저만치 흑성이 보였다.
“드디어… 도착했군.”
가까스로 안도의 숨을 내쉰 그가 힘겨운 걸음을 내디딜 때였다.
후우우우웅!
한 차례 칼바람이 스쳐 지나가면서 기척이 느껴졌다.
그가 고개를 돌아보니 눈앞에 바리탄과 존야 그리고 열 명의 기사들이 보였다.
‘바리탄…? 벌써 열 명을 자신의 측근으로 끌어들인 건가?’
과연 질투와 미혹의 악신에게 가호를 받는 바리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리탄이 그 아름다운 얼굴을 살며시 찡그리며 말을 건네 왔다.
“괜찮으십니까? 아라니우스 공작님. 몹시 힘들어 보이시는군요.”
“괜찮네. 그보다 할 말이 있네! 꽤나 중요한 말일세. 그자…!”
말을 꺼내던 바리탄은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이건…?’
그는 자신의 관념 속으로 뭔가가 침투하는 것을 느꼈다.
온 정신을 집중해서 미혹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설마…!’
아라니우스가 흔들리는 눈동자로 바리탄을 올려다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자신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바리탄 네놈이…!’
질투와 미혹.
그 두 가지 성질을 가진 기운이 아라니우스의 마음을 제멋대로 뒤흔들고 있었다.
아라니우스는 바리탄에게 완전히 의식을 제압당하기 전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날 치는 건 좋다! 하지만 이 말만은 꼭 하게 해 달라!’
하지만 바리탄의 눈빛은 그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대신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당신의 입에서 허튼 소리가 나올 수 없게 철저히 의식을 제압하겠다고.
마침내 바리탄이 아라니우스의 두 눈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아라니우스 공작님,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난… 난 사비강이라는 자를 찾아갔다.”
“사비강이라면… 인간 중에서도 꽤나 강한 자가 아닙니까?”
“그렇지…”
“갑자기 그를 왜 찾아가신 겁니까?”
“그에게… 베르타스가 있다는 정보를… 들었다.”
그러자 바리탄이 화들짝 놀란 척하며 물었다.
“베르타스라니요? 설마 폐하의 검 베르타스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라니우스는 속으로 기도 안 찼다.
그 사실을 알려 준 자가 바로 바리탄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그는 능청스럽게도 연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속내와 달리 아라니우스는 전혀 다른 말을 꺼냈다.
이미 그의 의식은 두 갈래로 나뉘어져 있었다.
바리탄에게 완전히 제압당한 표면의식과 진정한 자아와 연결된 심연 의식으로.
만약 평소의 그였다면, 결코 이런 어처구니없는 수법에 당하지 않았을 터였다.
기본적으로 질투와 미혹의 악신에 대한 저항력은 웬만한 귀족들이 전부 가지고 있으니까.
하지만 현재 그는 마력을 완전히 소진한 상태였다.
게다가 기력도 남아 있지 않았다.
때문에 바리탄의 의식 공격에 저항할 방법이 없었다.
결국 그는 자신의 생각과 다른 말을 계속해서 주절거렸다.
“아일리드 자작이 사비강이라는 자를 직접 만나면서 베르타스로 의심되는 검을 보았다고 했지. 이에 내 심복 자베린을 보내 확인 절차를 거쳤다.”
“그런데 정말 베르타스였다는 겁니까?”
“어차피 이렇게 되었으니 모든 걸 이실직고 하지. 그렇다. 놈이 베르타스를 가지고 있었다.”
“하면 어째서 폐하께 알리지 않고 수하들과 함께 그곳으로 가신 겁니까? 설마 반역을….”
차차차차앙!
그 순간 열 명의 기사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고는 아라니우스를 겨누었다.
아라니우스가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들을 훑더니 마음에도 없는 말을 외쳤다.
“그렇다! 내게 베르타스가 있다면 절대적인 권능을 얻을 수 있을 테니까 폐하께는 알리지 않았다! 네놈도 반역을 일으킨 전적이 있지 않은가! 이제 모든 것을 알았으니 날 이 자리에서 죽여라. 어차피 베르타스 회수에 실패하면 반역이 들통날 거라고 생각했지! 네놈이 날 언제나 감시했으니까! 이제 살기는 글렀을 테지. 네놈처럼 영원한 옥살이를 하느니, 차라리 장렬하게 죽음을 받아들이겠다!”
‘제길! 이게 아니라고!’
아라니우스는 속으로 울부짖었지만, 달리 그 마음을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사비강 그놈은 회귀자란 말이다! 이 멍청이들아! 그 사실을 어서 폐하께….’
하지만 바리탄이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물론, 그의 입가에 야비한 미소가 살짝 스쳐간 것은 누구도 보지 못했다.
아니, 아라니우스만이 눈치 챘을 뿐이었다.
“공작님이 반역을 저지르실 줄은 몰랐습니다. 저는 지난 과오를 뉘우치고 다시 시작하려고 합니다. 공작님도 저처럼 일단 죄를 뉘우칠 기회를 가지는 게….”
“시끄럽다! 날 죽여라! 내게 기회만 있다면 열 번, 백 번도 다시 도전할 것이다! 베르타스만 내게 있다면…! 베르타스만…!”
그야말로 광기에 젖은 마족이 따로 없었다.
그를 둘러 싼 기사들이 살의를 드러내는데,
“흥! 차라리 내 손으로 끝을 보겠다!”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아라니우스는 남은 모든 힘을 짜내어 존야에게 덤벼들었다.
다음 순간, 그는 존야의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내더니 자신의 심장을 찔렀다.
“커억…!”
아라니우스는 스스로 행한 행동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이런 식으로 끝을 보게 되다니…!
그는 당황한 척 표정을 짓는 바리탄을 물끄러미 보았다.
‘내가… 네놈을 처음부터… 믿는 게 아니었는데….’
가물가물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허둥지둥 다가와 속삭이는 바리탄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린 서로가 언제나 눈엣가시였지. 잘 가시오, 아라니우스 공.”
그 순간 아라니우스의 등에 새겨진 상처가 점차 희미해지면서 사라지는 걸 본 자는 아무도 없었다.
**
허옇게 뒤집혀 있던 무랑의 두 눈동자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가 안도의 숨을 길게 내쉬었다.
“결국… 그리 됐구나. 마족의 내부 분열이라… 일단 사비강 관주에게 알려야겠군.”
그의 이마에는 특별한 문양이 그려져 있었는데, 사비강이 아라니우스의 등에 새겼던 상처와 같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