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5
귀환 마교관
495화
“말도 안 되는…!”
아라니우스는 여전히 꿈쩍도 할 수 없었다.
사비강이 내뱉은 말은 마족만이 알고 있어야 하는 내용들이었다.
아니, 마족 중에서도 극소수만이 아는 내용.
자신만큼이나 책벌레 정도가 되어야 알까말까 한 내용들이었다.
한데 사비강은 알고 있다.
고대의 악신 노이제룬에 대해서!
하면 정말로 이 인간은 미래에서 회귀를 했단 말인가?
시간의 바퀴에서 역행을 했단 말인가?
그게 가능하긴 하단 말인가?
이론상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불가능에 가까운 아니, 절대 불가능한 일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정말 이놈이 회귀했다고?
혹시 마족이 아니라 인간이기에 가능했을까?
이 모든 생각들이 찰나지간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믿기 힘든 말이었지만, 지금 일어나는 이 모든 현상을 단번에 이해시키는 발언이기도 했다.
‘정말로 이 녀석이 미래에서 회귀한 것이라면….’
도대체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났단 말인가?
자신은 어째서 이런 하찮은 인간에게 그런 엄청난 사실들에 대해 떠벌렸단 말인가!
결국 이 인간 같지도 않은 괴물을 만든 건 자신이란 말인가?
톱니가 딱딱 맞물려 돌아가듯이 의식의 사고가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이 녀석은 정말 위험한 놈이다…!’
반드시 흑성으로 돌아가 마왕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
이놈이 미래에서 어떤 일을 겪었는지 모르겠지만, 진정한 회귀자라면 마왕 역시 가볍게 볼 수 없는 존재이리라.
자신을 발아래에 두었다는 말 역시 허황된 거짓은 아니리라.
‘내 풀 네임을 알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이 녀석의 말이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어!’
그때였다.
사비강의 목소리가 다시 서늘하게 와닿았다.
“우선 이 거추장스러운 것부터 좀 벗자.”
다음 순간,
툭!
베르타스가 뒷목 중앙 부분을 가볍게 찔렀다.
쩌적…! 쩍, 쩌억…!
마치 아라니우스의 몸에 균열이 가는 것처럼 얇은 금속에 금이 가면서 깨져 나갔다.
이윽고,
까차아앙!
빛 알갱이들이 터져 나가듯 사방으로 비산했다.
그와 동시에,
촤촤촤촤촤촤촤악!
사비강의 베르타스가 섬광을 터뜨렸다.
“크아악!”
등이 찢어진 아라니우스가 비명을 내지르고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젠장! 이놈이 정녕 회귀자라면 베르타스를 빼앗을 수단으로는 그 방법밖엔 없겠군!’
아라니우스가 바닥을 박차고는 그대로 쏜살같이 달리기 시작했다.
전각의 지붕을 타고 빠른 속도로 이동하는 아라니우스의 시선이 저만치 관주전으로 향했다.
반면 그 뒤를 쫓는 사비강은 아라니우스의 등에 새겨진 상처를 착 가라앉은 눈길로 보았다.
**
자베린은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두 눈을 부릅뜬 채 하늘만 바라보았다.
그는 더 이상 눈을 깜빡이지 않았다. 아니, 깜빡할 수 없었다.
그의 목이 몸에서 완전히 찢어져 나가 있었기에.
바닥에 떨어진 머리와 달리 그의 몸은 관주전 안마당 복판에 무릎을 꿇은 채로 굳어 있었다.
전신에 손가락만한 구멍이 뚫려 있었는데, 마치 작은 벌레들이 그의 전신을 파먹은 것처럼 흉측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자베린 앞에서 어깨를 들먹이며 선 조문탁.
작고 검은 돌기가 그의 주변을 윙윙 회전했고, 후들거리는 두 다리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이걸로… 끝났군요.”
조문탁이 힘겨운 미소를 지으며 돌아섰다.
은기륭은 물론, 천세명을 비롯한 교관들이 모두 감격한 눈으로 조문탁을 보았다.
모두가 절망감에 사로잡혀 있을 때, 기적처럼 조문탁이 나타나 자베린을 처리한 것이다.
사실 학관을 다닐 때는 별로 눈에 띄지도 않는 생도였다.
한데 그가 이렇게도 훌륭하게 성장할 줄 누가 알았으랴.
주변의 싸움도 어지간히 정리되고 있었다.
자베린이 쓰러지자 마물들은 통제력을 잃어 아무렇게나 설쳤고, 용천관 교관들은 차분히 합격술과 차련술을 펼치면서 대응했다.
그 결과 이제는 거의 모든 마물들이 사체가 되어 나뒹구는 상태였다.
물론 용천관도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미처 관주전으로 피하지 못한 다수의 생도가 희생됐으며, 교관들 중에서도 상당수가 목숨을 잃었다.
“정말 훌륭하게 성장했구나.”
천세명이 진심어린 감탄을 흘리며 다가갔다.
그 순간!
쿠드드드득!
천세명의 등 뒤로 느닷없이 땅이 솟구쳐 오르는 것이 아닌가?
조문탁이 얼른 달려가려고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검은 벌집을 사용하느라 엄청난 양의 마나를 소진한 탓이었다.
“교관님!”
잠시 후 조문탁은 자신의 뒤에도 정체불명의 그림자가 솟구쳐 올라온 것을 깨달았다.
그가 얼른 몸을 돌리려는데, 묵직한 팔이 그의 목을 졸랐다.
“크윽!”
당황한 조문탁이 얼른 돌기들을 날렸다.
따다다다다다다다당!
돌기들이 부딪치면서 요란한 소리와 함께 불꽃을 터뜨렸다.
하지만 마력으로 만들어진 골렘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깨진 돌가루가 마구 비산했지만, 여전히 조문탁의 목을 조른 채 끄떡도 하지 않았다.
마지막 남은 한 줌 마나까지 쏟아 부은 조문탁은 그대로 축 늘어져 겨우 의식만 붙들고 있는 수준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정문을 지키던 교관들 모두가 골렘에게 사로잡혀 옴짝달싹도 하지 못했다.
마침내 그들 사이로 아라니우스가 내려섰다.
그는 싸늘하게 식은 시선으로 사체가 된 자베린을 힐끔 보았다.
“쯧쯧… 한심한…!”
그의 눈빛에는 일말의 동정심조차 없었다.
그가 골렘에게 사로잡힌 교관들을 보면서 혀를 끌끌 찼다.
“정말이지 바퀴벌레만큼이나 지긋지긋한 놈들이라니까. 어차피 뒤질 운명이면서 끝까지 발악하는 꼴이라니.”
때마침 사비강이 맞은편에 내려섰다.
“관주님…!”
조문탁이 송구한 표정으로 사비강을 불렀다.
힘이 되겠다고 쫓아왔건만 결국 인질이 된 신세라니.
한편, 아라니우스는 차가운 조소를 지으며 말했다.
“너에 대해 알려 준 건 고맙게 생각하지. 아무래도 네놈이 한 말은 전부 사실인 것 같군. 그러지 않고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것들뿐이니까.”
“이건 고맙게 생각하는 태도가 아닌 것 같은데?”
사비강이 차가운 표정으로 대꾸하자, 아라니우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지. 내가 고마워하기 때문에 이쯤에서 해결하려는 거다.”
“말은… 어디 한 번 씨불여봐라.”
사비강이 피식 웃으며 대꾸하자, 아라니우스가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내가 이곳에 온 목적은 사실 단 하나다.”
그의 손가락이 베르타스를 가리켰다.
사비강이 베르타스를 들어 보였다.
“이 녀석을 원하는 건가?”
“그래. 한낱 인간이 어째서 베르타스를 들고도 멀쩡한지 궁금했는데…. 역시나 회귀자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군. 확실히 대단해. 이렇게 직접 와서 보길 잘했어.”
아라니우스가 주변을 한 차례 둘러보고는 말을 이었다.
“네놈과의 결판은 다음으로 미루지. 다만… 내게 협조를 좀 해줘야겠다. 그러지 않으면….”
그가 손가락을 까딱거리자, 골렘 한 기가 인질로 잡고 있던 교관의 목을 단숨에 비틀어 버렸다.
우두둑!
“커억!”
교관이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쓰러지더니 다신 움직이지 못했다.
즉사였다.
“이런 개 같은…!”
몇몇 교관이 분개하며 소리쳤지만, 그들이라고 별 수가 있는 건 아니었다.
아라니우스가 어깨를 으쓱이고는 말했다.
“더는 말하지 않아도 될 테지. 셋을 세겠다. 순순히 그걸 내놓는다면 더 이상의 희생자는 없을 거다. 약속하지.”
사비강이 아라니우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라니우스가 비릿한 웃음을 머금은 채 입을 뗐다.
“하나.”
“…….”
“둘.”
“잠깐.”
아라니우스가 미간을 좁히고 바라보자, 사비강이 베르타스를 천천히 들었다.
“그렇게 원한다면 주지. 가져가라.”
말을 마친 것과 동시에 사비강이 베르타스를 날렸다.
‘베르타스, 평소 먹고 싶었던 피를 실컷 처먹어라!’
쒸에에에에엑!
베르타스가 허공을 가르며 쏜살같이 날아갔다.
촤아악!
베르타스는 그대로 자베린의 몸을 뚫으며 지나갔는데, 그 찰나의 순간에 자베린은 바짝 말라버린 고목처럼 변하고 말았다.
한편 졸지에 베르타스가 안면으로 날아들자, 아라니우스가 얼른 몸을 비틀어 피했다.
피츗!
그의 뺨을 스치고 지나간 베르타스가 그대로 밤의 허공으로 날아갔다.
아라니우스가 이를 빠득 갈고는 사비강을 노려보았다.
“두고 보자!”
타앗!
아라니우스가 곧장 베르타스를 쫓아 날아가자, 교관들을 사로잡고 있던 골렘들이 곧 힘없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인사는 나중에 드리겠습니다.”
사비강이 은기륭에게 말을 건네고는 곧장 바닥을 차고 아라니우스의 뒤를 쫓아갔다.
**
커다란 구슬을 바라보던 존야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라니우스 공작과 사비강이 꽤 길게 대화를 나누더군요.”
“원래 아라니우스 공작은 그런 자다. 말이 많지. 한데 어째서 그가 신갑(神鉀)을 착용하지 않았는지 궁금하군.”
‘신갑’이란 아라니우스 공작이 온몸에 둘렀던 완전무결한 갑옷의 이름이었다.
수정구와 연결된 올빼미는 지금까지 관주전을 중심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워낙 먼 거리였기에 올빼미를 함부로 움직이다간 연결이 끊어질 수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혹시라도 아라니우스가 눈치를 채면 안 되기에.
다행히 아라니우스가 마지막 순간 관주전으로 돌아오는 바람에 바리탄은 마지막까지 그 과정을 지켜볼 수 있었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수정구를 통해선 그들의 목소리까지 들을 수 없다는 점이었다.
옵저버 마법에 비하면 상당히 먼 거리까지 염탐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단점도 있었다.
때문에 그는 사비강과 아라니우스가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존야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결국 아라니우스 공작은 베르타스를 취했군요.”
“그리 생각하느냐?”
바리탄이 되물으며 손을 한 차례 휘젓자 수정구에서는 더 이상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지 않겠습니까?”
“하긴. 취하긴 취하겠지. 다만….”
“……?”
“저 베르타스는 어딘가 다르다. 원래 저런 모양이 아니었어.”
“그게 상관있는지요?”
“글쎄… 보자꾸나. 어떻게 상관이 있을지. 자, 그럼 이제 슬슬 마중 나갈 준비를 해볼까?”
바리탄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맴돌았다.
**
우웅. 우우웅…!
암벽에 깊숙이 꽂힌 베르타스가 이따금씩 몸을 떨며 진동했다.
허공으로 솟아오른 아라니우스는 베르타스를 보며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베르타스…!’
마왕 타란트는 다른 무엇보다도 베르타스를 회수하지 못한 것에 대해 분개했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이 이걸 가지고 돌아간다면 대공의 작위를 받는 건 시간문제리라.
우웅… 웅… 웅…!
“그래, 그동안 주인을 찾지 못해 오랫동안 방황했을 테지. 이제 진정한 너의 주인에게 돌아가자.”
아라니우스가 광기에 가까운 미소를 지으며 손을 뻗었다.
쑤우우욱!
암벽에 박혔던 베르타스가 매끄럽게 뽑혀 나왔다.
검붉은 검신이 달빛에 시리도록 빛났다.
마침내 그가 허리를 꺾어 들고 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하하하!”
비록 심복인 자베린을 잃었지만, 베르타스를 얻었다.
이 정도면 그리 실패한 투자는 아니었다.
한참 앙천광소를 터뜨리는데 문득 밑에서 기척이 들리더니 목소리가 툭 튀어나왔다.
“좋냐?”
아라니우스가 흠칫거리고 아래를 내려다보자, 사비강이 팔짱을 낀 채 거만한 자세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저 회귀자가… 또!’
잠시 흥분해서 사비강의 존재를 잊었다.
아라니우스가 차갑게 웃었다.
“여기까지 따라오다니 제 무덤을 스스로 파는 성격이구나.”
“뭐, 그런 소리도 이따금씩 듣지.”
순간 아라니우스의 전신에서 마력과 살기가 뒤섞이면서 광풍처럼 휘몰아쳤다.
사비강이 조소를 지었다.
“그걸 가지면 얌전히 돌아간다고 하지 않았던가?”
아라니우스가 히죽 웃었다.
어딘지 광기에 젖은 웃음이었다.
“하악. 그랬…지. 그런데 방금… 생각이 바뀌었다. 흐흐학!”
아라니우스의 손등을 따라 핏줄이 불거져 나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