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2
귀환 마교관
492화
등골이 서늘해진 카시스가 휙 돌아서며 검을 휘둘렀다.
까앙!
두 자루의 검이 부딪치며 불꽃이 일어났다.
흑귀가 튕기듯 물러나자, 카시스가 재빨리 뒤쫓았다.
그 순간,
팟!
다시 암흑이 사방을 에워쌌다.
이 광경을 밖에서 볼 땐 그야말로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으음…!”
은기륭은 나직이 침음을 흘렸다.
그래도 초절정의 영역에 오른 그였다.
한데 이들의 싸움을 아무리 눈으로 쫓고 이해하려고 해도 도저히 불가능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흑귀의 몸에서 어둠이 뿜어져 나오더니, 거뭇한 안개가 안마당을 뒤덮었다.
마치 연막탄이 터진 듯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연막탄보다 훨씬 완벽한 어둠이라는 점이었다.
어둠 속에서 금속성과 함께 불꽃이 일어나면, 다시 둘의 모습이 온전하게 나타났다가, 또 다시 어둠에 휩싸이곤 했다.
팟! 까앙! 파팟! 깡! 팟!
그야말로 번쩍번쩍 할 때마다 둘의 모습이 연신 나타났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보이는 건 제한적이었지만, 이들이 지금 얼마나 치열한 싸움을 벌이는지는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천 부장, 저자는 대체 누군가?”
은기륭의 목소리에 천세명이 돌아서며 대답했다.
“사실 저도 자세히는 모릅니다. 오는 길에 우연히 마주쳐서….”
천세명이 흑귀를 만나게 된 계기에 대해 알려 주자, 은기륭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또한 인연이리니….”
어쨌거나 흑귀 때문에 당장의 위기에서 조금이나마 여유를 가지게 됐다.
다만 이 싸움도 영원하지는 않을 터.
누가 이기든 남은 마족들이 어떻게 나오느냐가 중요하리라.
은기륭이 착 가라앉은 시선으로 맞은편의 아라니우스를 노려보았다.
**
“서둘러라! 지금 용천관이 위험하다!”
용천관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에 터를 잡은 문파, 웅실문(雄實門).
웅실문 무인들이 산기슭을 따라 달렸다.
웅실문은 용천관의 습격 소식을 듣자마자 곧바로 타격대를 구성해서 파견했다.
만약 용천관이 무너지면, 그 다음은 자신들의 차례가 되리라는 걱정 때문에라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타격대주가 뒤를 돌아보고 다시 소리쳤다.
“경공을 최대한 펼치되 싸울 힘은 남겨 둬야 한다!”
“옛!”
중소 규모의 문파였기에 타격대주가 겨우 절정 수준이었고, 나머지는 대부분 일류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아쉬울 때는 삼류 무사 한 명도 귀한 법이 아니던가?
타격대주가 다시 돌아서서 달리려고 할 때였다.
팟! 후우우우우우우웅! 팟!
뭔가 번쩍하면서 그림자가 생기는 것 같더니 이내 세찬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바짝 마른 낙엽과 눈발이 흩날리면서 타격대주가 눈살을 찌푸렸다.
“음? 방금 뭐지?”
“뭔가… 지나간 것 같은데요? 그냥 바람인가?”
곁에 서 있던 부대주가 눈을 비비며 말했다.
하지만 단순한 바람이라기에는 그들을 스쳐 지나간 모종의 기운이 매우 강렬했다.
“일단 서두르자!”
“예, 대주님!”
그들은 다시 내공을 아낄 수 있는 수준에서 경공을 펼치며 야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사실 조금 전에 그들을 지나친 것은 사비강이었지만, 블링크와 천해심보를 섞어 가며 워낙 빠른 속도로 이동했기에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
은기륭은 물론 함께 지켜보던 무인들 모두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흑귀와 카시스를 번갈아보았다.
놀랍게도 카시스는 전신이 난자당한 상태로 숨만 간신히 붙어 있는 정도였다.
아라니우스는 영 탐탁찮은 얼굴이었다.
그의 곁에 있던 자베린이 뭐라고 귓속말을 했고, 아라니우스가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 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른 것에 신경 쓰기에는 지금 눈앞에 펼쳐진 현상이 너무 놀라웠다.
모두의 예상과 달리 흑귀는 카시스를 제압하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가 어둠을 스무 번도 펼치기 전에 카시스는 전신을 난자당한 것이다.
그것도 사지가 구속된 상태에서!
흑귀가 카시스를 향해 절그렁절그렁 사슬을 끌며 걸어갔다.
이제 카시스의 몸에 깃든 악신을 흡수할 차례였다.
계통이 비슷했기 때문에 누가 누굴 흡수하든 이긴 쪽이 중급이나 상급으로 상향 조정될 가능성이 컸다.
푸확!
마침내 흑귀의 전신에서 어둠이 폭사하듯 터져 나왔다.
찰나,
쉬이이이잇!
푸욱!
“커억!”
흑귀가 피를 토하면서 뒤로 튕기듯 날아갔다.
“엇!”
“이런 비겁한!”
지켜보던 무인들이 저마다 이를 갈며 소리쳤다.
흑귀를 덮친 것은 자베린의 검이었다.
자베린이 앞으로 저벅저벅 나오며 말했다.
“이래서 인간은 안 된다니까. 매사에 비겁하고 간사하면서 저런 말을 잘도 입에 올리다니. 애초에 너희들은 셋이 덤빈 셈이지 않나?”
“닥쳐라! 이 악마야!”
“죽어 버렷!”
천세명과 상필지가 노호성을 터뜨리며 허공을 붕 날아갔다.
“안 돼!”
불길한 예감에 은기륭이 얼른 소리쳤지만 이미 늦어 버린 후였다.
자베린이 양팔을 활짝 펼친 순간,
파파파파파파팍!
“크헉!”
“커어억!”
허공에 뜬 상필지와 천세명이 느닷없이 허리를 활처럼 휘며 피를 토하는 것이 아닌가?
그뿐 아니라 전신에서 피가 터져 나오면서 눈을 허옇게 뒤집었다.
놀라운 것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쿵!
털썩!
두 사람이 속절없이 바닥에 추락했는데도 그들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핏방울은 여전히 허공에 부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서로 모여들면서 뭉글뭉글 뭉치기 시작했다.
“피, 피가…!”
은기륭 곁에 서 있던 여영이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놀랍게도 허공에서 뭉친 피는 점점 단단하게 응고되더니 기다란 혈창(血槍)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닌가?
자베린을 수호하는 것은 바로 굶주린 피의 악신이었다.
날카롭게 다듬어진 혈창에서 섬뜩한 예기가 뿜어져 나왔다.
위잉. 위잉. 윙. 윙!
혈창이 허공에서 빙글빙글 회전하면서 벌떼가 우는 것만 같은 소리를 냈다.
윙. 윙윙. 윙윙윙…!
점점 빠르게 돌아가는 창봉은 정확히 흑귀의 심장을 노리고 있었다.
마침내 자베린이 손을 가볍게 저었다.
찰나,
쒸이이이이이이잉!
회전하는 창이 흑귀의 심장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갔다.
“헛!”
지켜보던 무인들이 모두 헛바람을 삼켰다.
찰나지간,
“크아아아아아!”
흑귀가 괴성을 지르면서 양손을 내리쳤다.
쩌까아앙!
금속성과 함께 혈창이 산산이 부서졌다.
동시에 흑귀의 양손을 구속하고 있던 쇠사슬도 단숨에 잘려 나갔다.
“크아아아!”
흑귀가 포효를 내지르더니 자베린을 향해 단숨에 도약했다.
그 순간, 자베린이 다시 한 번 양손을 활짝 펼쳤다.
그러자 조각조각 흩어져 날아갔던 혈창의 파편이 다시 허공에서 뭉치더니 흑귀의 등을 노리며 날아들었다.
찰나,
팟!
사방이 자욱한 어둠으로 휩싸였다.
어둠 속에서 다시 금속성이 연신 울렸다.
“어떻게 된 거지?”
“저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겠군.”
가까스로 몸을 추스른 천세명과 상필지가 어둠을 보며 중얼거렸다.
잠시 후,
팟!
거짓말처럼 어둠이 사라지더니, 복부에 혈창이 박힌 흑귀가 울컥 피를 토하면서 무릎을 꿇었다.
“흑귀!”
천세명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반면 자베린은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흑귀에게 자박자박 다가왔다.
“꽤 훌륭했다. 하지만 여기까지가 너의 한계다.”
츄아아악!
혈창이 뽑혀 나오자, 흑귀의 복부에서 피가 울컥울컥 흘러나왔다.
자베린이 손짓하자, 흑귀의 피마저 허공을 넘실넘실 떠오르더니 이내 혈창으로 날아가 하나로 융합됐다.
그 덕에 혈창은 조금 전보다 훨씬 커졌다.
흑귀가 조금이라도 움직인다면 당장이라도 날아들 것 같은 기세였다.
모두가 숨을 죽인 가운데, 카시스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인간 주제에 감히…!”
카시스가 분노 가득한 표정으로 흑귀에게 다가왔다.
“네놈에게 깃든 신은 내가 먹어치워 주마!”
순간 카시스의 그림자가 거대하게 솟구쳐 오르더니 순식간에 흑귀를 덮어 갔다.
그때였다!
쒸에에에에에에에엑!
허공을 찢어발기면서 날아드는 검 한 자루!
“자베린!”
아라니우스가 소리쳤고, 자베린이 반사적으로 돌아서며 혈창을 발사했다.
뚜카앙!
금속성과 함께 거대한 혈창이 산산조각 나면서 핏빛 연무가 되었다.
한편 혈창에 부딪친 검은 방향이 틀어지면서 그대로 카시스에게 향했다.
“헛!”
당황한 자베린이 헛바람을 삼켰지만 이미 손을 쓰기엔 늦어 버린 상황!
쒸이이이익, 푸욱!
슈우우우욱, 꽈다앙!
검에 심장이 뚫린 카시스는 그대로 관주전까지 날아가 벽에 부딪치고 말았다.
“끄으으으…!”
그는 졸지에 심장이 검에 뚫린 채로 벽에 매달려 버린 신세가 됐다.
한편 이를 본 아라니우스의 표정이 흠칫 일그러졌다.
“가만, 저 검은… 설마?”
낯설지만 어딘지 익숙하다.
검을 직접 보기 전엔 미처 몰랐는데, 이렇게 바로 옆을 스쳐 지나가니 검의 정체가 단박에 파악된다.
“베르타스…!”
아라니우스의 반응에 자베린이 흠칫거리고는 돌아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커졌다.
틀림없다!
저건 베르타스다!
자베린은 사방에 자욱했던 핏빛 안개가 어느새 사라지고 없어졌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베르타스가 모두 흡수해 간 것이다.
게다가 카시스의 피마저 모두 흡수하는 중이었다.
굶주린 피의 악신에게 있어서 피를 모조리 흡수하는 베르타스는 그야말로 상극이었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아라니우스가 표정을 싸늘하게 굳히고는 나섰다.
“자네는 이제 물러나 있게.”
“죄송합니다.”
자베린은 고집부리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푹 숙여 보이고는 뒤로 물러났다.
상대가 누구든 베르타스를 든 자라면 조심해야 했다.
아라니우스가 베르타스를 향해 떨리는 걸음을 내디딜 때였다.
파앗!
갑자기 어둠이 펼쳐지면서 벽에 꽂혀 있던 카시스를 덮쳐 버리는 것이 아닌가?
흑귀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카시스의 악신을 잡아먹는 순간이었다.
아라니우스의 뺨이 씰룩였다.
‘감히 내 앞에서 내 수하를 잡아먹어?’
그가 미간을 팍 구기고는 바닥을 차고 날아가려고 할 때였다.
척!
“음?”
아라니우스가 흠칫거리고는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이 물러났다는 사실에 적잖게 당황했다.
‘이건 또 뭐야? 설마…?’
아라니우스가 앞을 가로막으며 나타난 사내를 보고는 눈살을 팍 구겼다.
갑자기 나타난 사내가 싸늘한 웃음을 지었다.
“맛있게 먹고 있잖아.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린다는 인간의 속담이 있다.”
“네놈이… 사비강?”
“오랜만이군, 아라니우스 공작.”
“오랜만…? 어떻게 네놈 따위가 감히 내 이름을…?”
그보다 이 자를 본 적이 있긴 하던가?
아라니우스가 표정을 일그러뜨린 채 생각에 잠긴 사이, 사비강이 손을 불쑥 뻗었다.
슈우우우우우욱, 탁!
어둠 속에서 뽑혀 나온 베르타스가 사비강의 손에 착 감겼다.
사비강의 입매가 길게 찢어졌다.
“다행히 시간에 맞춰 왔군. 자, 이제 옛정을 떠올려 보자고.”
구오오오오…!
아라니우스는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사비강을 보았다.
그에게서 뿜어지는 기운이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강렬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