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9
귀환 마교관
489화
“흐아암! 오늘 같은 날은 기루에서 계집질이나 했으면 딱 좋겠는데.”
용천관의 수문장 낙회도(落回道)가 기지개를 켜면서 늘어지도록 하품을 했다.
옆에 있던 수하 안철주(安鐵週)가 웃으며 대꾸했다.
“그러다 걸리면 큰일 나려고요. 그렇잖아도 천세명 교관님이 복귀하실 날이 다 되었는데.”
“그러게 그분은 왜 갑자기 강호 기행을 떠나셨대.”
“그거야 모르죠. 갑자기 어떤 충동이 빡 왔나 보죠.”
“그래서 너도 요즘 어떤 충동이 빡 오냐? 막 가출을 하고 싶다거나. 수문무사 노릇 때려치우고 싶다거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 그저께 애 아빠 됐습니다. 열심히 돈 벌어서 처자식 건사해야죠.”
“짜식. 애 아빠 되더니 어른 됐구나.”
“어른이 되긴요. 이제 어쩔 수 없이 어른인 척하게 된 거죠.”
“그래도 넌 돌아가면 반갑게 맞아 줄 마누라와 아이가 있잖아.”
“마누라는 그렇다고 쳐도 갓난애가 뭘 알겠습니까? 그래도… 뭐 보고 있으면 신기하고 귀엽고 사랑스럽고 그렇지요.”
“네 눈빛만 봐도 알만하다. 에혀, 난 언제 장가라도 가보냐? 세상이 불공평하다니까.”
안철주가 사람 좋은 미소를 그리며 낙회도를 달랬다.
“형님도 언젠간 좋은 형수 만날 겁니다. 그보다 경계 근무 확실히 서야죠. 마족도 나타나서 요즘 분위기가 뒤숭숭한데.”
“아서라, 마족이 뭐 하러 여기까지 오겠냐? 강림지에서 여기까지 한참이나….”
말을 꺼내던 낙회도는 눈살을 구기고는 안철주를 보았다.
“왜 그래?”
“저기 뭔가…”
안철주가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는 저만치 어둠 속을 보았다.
낙회도가 그의 시선을 쫓아가 보니 과연 먼발치의 어둠 속에서 그림자가 움직이는 듯했다.
그가 눈을 비비고는 입을 열었다.
“음? 저게 뭐지?”
“글쎄요. 짐승인가? 뭔가 이쪽으로 오는 것 같은데….”
“혹시 모르니까 준비해.”
“알겠습…”
쒸에에엑, 푹!
“컥…!”
“철주야!”
낙회도가 버럭 소리쳤다.
안철주는 자신의 목을 꿰뚫은 화살을 오른손으로 쥐고는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가 입 밖으로 피를 울컥울컥 토해내면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
“형… 형님… 크억…!”
“철주야! 얀마, 정신 차려! 이런 개 같은 것들! 도대체 누구…!”
일갈을 터뜨리던 낙회도는 자신의 안면을 가득 덮으며 날아드는 불덩이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다음 순간,
화르르르륵, 콰아앙!
불덩이가 낙회도의 얼굴에 작렬하면서 머리가 통째로 불이 붙은 채로 날아가 버렸다.
머리를 잃은 그의 몸이 그 자리에 털썩 쓰러지면서 핏물을 쏟아냈다.
잠시 후, 시커먼 그림자들이 해일처럼 용천관 정문을 향해 밀려들었다.
뎅! 뎅! 뎅! 뎅…!
비상종이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적의 침입을 알리는 신호였다.
**
깡! 까강! 퍼엉! 쩡!
곳곳에서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고, 여기저기 전각들이 화마에 삼켜져 타올랐다.
“다들 정신 차려라! 마족이 침입했다!”
“이런 젠장, 마족이 도대체 왜 여기까지!”
“이익! 이 짐승 새끼들아! 인간을 우습게 보지 마라!”
분노에 찬 고함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마구 솟구쳐 올랐다.
학장 주유천은 지붕을 타고 달리면서 주변을 빠르게 살폈다.
‘어째서 이렇게 많은 마족이 본관을…!’
그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많은 마족이 이곳까지 이동하려면 여러 도시와 마을을 지나쳤을 것이다.
산과 들을 지나왔다고 해도 분명히 목격자는 있었을 것이다.
한데 그런 징조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어찌 이렇게 갑자기 나타날 수 있는 거지?’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순간이동을 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강림지를 토벌하려던 정사연맹이 기련산으로 순간이동을 했다는 건 유명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막상 전투가 벌어진 후에는 마물들이 순간이동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소환지를 떠올렸다.
그렇잖아도 며칠 전 정도맹으로부터 공문을 받았다.
자칫 소환지가 개방이 되면 마물들이 밖으로 튀어나올 수 있으며, 그땐 인근 주민들의 피해가 발생할 수 있으니 주의하라는 경고였다.
해서, 혹시라도 주변에 소환지가 있다면 철저히 감시하고 신경을 써 달라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용천관 근처에는 소환지가 존재하지 않았다.
제일 가까운 소환지가 백 리는 넘게 떨어진 곳이었다.
‘만약 우리가 발견하지 못한 소환지가 있었다면….’
그렇다면 이 녀석들이 갑자기 나타난 것도 어느 정도 말이 된다.
그때였다.
“꺄아악!”
마침 건물 아래쪽에서 단말마의 비명소리가 솟구쳐 올랐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웨어울프 다섯 마리가 여자 생도 한 명을 에워싸고는 공격하고 있었다.
그녀는 옆구리에 기다란 자상을 입고 있었는데, 서 있는 것조차도 힘겨워 보였다.
마침 웨어울프 한 마리가 괴성과 함께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크르렁! 죽어랏!”
“하아앗!”
생도 역시 마지막 기합성을 터뜨리며 검을 내질러 갔다.
까앙!
금속성과 함께 생도가 휘청거리며 물러났다.
곧이어 발톱을 날카롭게 드러낸 웨어울프가 여인의 심장으로 곧장 앞발을 내뻗으며 쇄도했다.
찰나,
쉬까앙!
갑자기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지듯 섬광이 내리쳤다.
발톱이 썩둑 잘려 나간 웨어울프가 당황하는 사이,
쒸이이이잇!
한 줄기 빛이 호선을 그리며 그대로 목을 베고 지나갔다.
츄아아앗!
“커억…!”
녀석은 눈을 부라리며 자신의 목을 어루만졌다.
이내 진득한 피가 배어 나오는가 싶더니 곧 분수처럼 터지기 시작했다.
츄아아아아아!
“크르르! 건방진 인간!”
“죽인다! 크르르! 저 늙은이!”
웨어울프 네 마리가 동시에 달려들었다.
“이놈들!”
주유천이 노호성을 터뜨리며 몸을 빙그르 회전하면서 날아올랐다.
까라라라라랑!
사방에서 불꽃이 튀어 올랐다.
다음 순간 웨어울프 한 마리가 허리를 꺾어 들며 포효했다.
- 아우우우우우!
기묘한 하울링이 허공에 울려 퍼지자, 주유천은 순간 온몸이 바짝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이런 제길! 이건 음공(音功)의 일종인가?’
- 아우우우우!
한 녀석의 하울링이 끝나자, 또 다른 녀석이 허리를 꺾고 울음을 토해냈다.
주유천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재빨리 내공을 끌어올리려고 해도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하울링을 듣기 전에 미리 대비를 했어야만 했다.
쉬이이잇, 쉬이이잇!
마침 그 틈을 타서 웨어울프 두 마리가 재빨리 치고 들어왔다.
동료들의 하울링이 끝나기 전에 주유천을 끝장낼 작정인 듯했다.
‘위험…!’
내공이 마음대로 다스려지지 않는데다 몸이 굳은 주유천은 목과 가슴을 향해 날아드는 날카로운 발톱을 그저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절체절명의 순간,
슈아아아악!
무언가가 나타나 웨어울프의 손목을 뎅겅 잘라내는 것이 아닌가?
“크와악!”
“쿠아아악!”
웨어울프 두 마리가 비명을 내지르며 허우적거렸다.
그림자는 곧바로 그 두 마리를 향해 섬광을 펼쳤다.
쉬이이이이잇!
써컹! 썩둑!
푸른빛의 강기가 웨어울프의 허리를 베며 지나갔고, 다른 웨어울프는 그대로 목이 날아가 버렸다.
“크윽…! 이건… 뭐…”
허리가 베인 웨어울프는 말을 마저 잇지 못한 채 그대로 피를 터뜨리며 쓰러지고 말았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이리 설치는 것인가?”
웅혼한 내력을 담은 목소리가 허공에 쩌렁쩌렁 울렸다.
“관주님…!”
주유천이 반색하며 소리쳤다.
슬쩍 돌아선 사람은 바로 용천관주 은기륭이었다.
그가 하얀 수염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수고하셨소. 그 아이는?”
여자 생도는 출혈과다 증세로 의식을 잃은 채 주유천에게 몸을 기대고 있었다.
“출혈이 심합니다. 우선은 점혈로 지혈했습니다만.”
“우선 생도들을 모두 관주전으로 대피시키고 기관 장치를 작동시켜서 출입구를 완전히 봉쇄하시오.”
“알겠습니다. 앗! 관주님!”
순간, 주유천이 눈을 크게 뜨고는 소리쳤다.
은기륭의 등 뒤로 솟아오른 두 그림자 때문이었다.
아직 남아 있던 웨어울프 두 마리가 은기륭이 잠시 한눈을 판 사이에 몸을 날려 온 것!
하지만 녀석들이 은기륭에게 닿기 직전,
쒸아악! 쒸아악!
두 줄기 섬광이 나타나면서 웨어울프들을 베어냈다.
츄츄아아아아!
피분수를 터뜨린 웨어울프들이 쿵, 소리와 함께 넘어갔다.
녀석들을 베며 나타난 사람은 다름 아닌 은기륭의 호신위인 여영이었다.
은기륭은 그녀가 나설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어 갔다.
“이제 그만 흩어집시다. 주 학장은 그 아이를 피신시킨 후 최대한 많은 생도들을 구해 주시오.”
“명심하겠습니다!”
대답과 동시에 그들은 각각의 방향으로 흩어졌다.
**
“배는 좀 부른가?”
천세명이 사람 좋은 미소를 그리며 묻자, 흑귀가 눈만 뒤룩뒤룩 굴리고는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허허, 자정이 넘도록 먹기만 하다니. 자네처럼 많이 먹는 사람은 본 적이 없네.”
“크으…!”
“아, 탓하는 건 아닐세. 그나저나 자네는 꽤나 고강한 무공을 익힌 것 같더군. 아마 사공일 테지. 자네 몸에서 느껴지는 사이한 기운으로 알 수 있네. 하지만 현 강호의 정세를 보면 정사가 무슨 소용이겠는가? 자네가 그리 된 것도 분명 마족의 강림과 관련이 있을 것 같은데, 이럴 때일수록 우리 강호인들끼리 똘똘 뭉쳐야 하지 않겠나?”
“크르르…”
“사실 나도 처음부터 이런 생각을 한 건 아닐세. 내 안위만 생각하고, 사파 무인들을 바라볼 땐 편견으로 가득했지. 그냥 이유 없이 미웠던 적도 많았네. 하지만 그게 틀렸다는 걸 보여준 자가 있었어. 그자는 오래전부터 정사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인간의 마음이 중요하다고 말했네. 당시엔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젠 확실히 알 것 같더군. 내게 그 사실을 알려준 자가 바로 ‘사비강’이라는 자일세.”
흠칫.
아주 잠깐.
흑귀의 몸이 흔들렸다.
하지만 그는 곧 그르렁거리며 짐승 같은 울음소리를 낼 뿐이었다.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절그렁거리는 쇠사슬 소리가 들렸다.
천세명이 껄껄 웃었다.
“자네도 사비강에 대해 들은 게 있나 보군. 하긴 그가 이젠 강호에서 가장 유명해졌지. 정말이지 삼 년 전만 해도 그가 이렇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네. 그저 용천관에서 별 볼 일 없는 부교관이었거든. 하지만 지금 보면 흙속의 진주였던 건지도 모르지.”
흑귀는 천세명의 이야기를 묵묵히 듣기만 했다.
“자, 이제 거의 다 왔네. 저 언덕에 오르면 용천관이 보일 걸세. 아마 자네도 마음 편히 지낼 수 있을 게야. 특히 요즘처럼 어수선한 시기라면 이런 곳에서 마음을 다스리는 것도 좋겠지. 그런데 좀 이상하군.”
천세명은 불길한 예감을 느끼며 언덕을 올려다보았다.
언덕 너머로 붉은 기운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잠시 먼저 가보겠네.”
말을 마친 그가 경공을 펼쳐 단숨에 언덕 위로 올라섰다.
다음 순간, 그는 흠칫거리고는 눈을 부릅떴다.
“아니, 이럴 수가…!”
언덕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용천관 곳곳이 불타고 있는 게 아닌가?
게다가 아스라이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와 비명소리가 날카롭게 스쳐 지나갔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