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7
귀환 마교관
487화
탁!
등부형이 탁자 위에 호리병을 딱 내려놓았다.
창틈으로 스며든 햇살이 호리병을 고고히 비추고 있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광경인가?
‘영약을 복용한 지가 얼마만인지.’
그도 그럴 것이 영약은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수십, 수백 냥씩 한다.
하물며 천년설삼 따위는 조교 생활을 하면서 받은 돈으로는 꿈도 꾸지 못한다.
한데 구하기도 힘든 백초기환탕이라니.
천년설삼만큼이나 좋은 효능을 자랑하는 영약이 아닌가?
십 년을 돈 한 푼 쓰지 않고 모은다면 백초기환탕을 살 수나 있을까?
아무튼 그 정도로 귀한 것을 사비강이 덥석 내준 것이다.
그야말로 횡재가 아닌가?
“스으읍, 후우우!”
등부형이 자세를 가다듬고 심호흡을 했다.
어차피 영약을 소화하기 위한 운기가 따로 필요 없는 백초기환탕이지만, 그래도 마음가짐은 단단히 다지는 게 좋지 않겠나?
경건한 마음으로.
‘좋아, 마시자!’
백초기환탕은 복용법이 까다롭다.
대신 누구라도 마시면 다른 운기를 할 필요도 없이 내공이 즉각 상승한다.
‘이걸로 반 갑자를 늘릴 수 있다!’
마음을 굳힌 등부형이 천천히 손을 뻗어 호리병의 마개를 열었다.
역시나 독특한 향이 코를 찔렀다.
‘좋구나. 좋아.’
등부형은 눈을 감고 호리병을 입으로 가져갔다.
한 번에 다섯 모금씩 일 각 간격으로 세 번에 나누어 마신다.
반드시 지켜야 할 복용법이다.
만약 이를 지키지 않으면, 그냥 맹물을 마신 것과 진배없다.
꿀꺽, 꿀꺽, 꿀꺽…
정확히 다섯 모금!
등부형은 그 자리에 다시 호리병을 내려 두었다.
이제 두 번 남았다.
한데도 벌써 뱃속에서 뜨끈한 기운이 뭉쳐서 금방이라도 일어날 것만 같다.
‘흐흐흐! 반 갑자다! 반 갑자!’
무려 삼십 년을 수련해야만 얻을 수 있는 내공을 삼 각 만에 쌓을 수 있다니!
어찌 신이 나지 않겠는가?
마음 같아서는 일어나서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었다.
하지만 등부형은 경거망동하지 않았다.
아무리 복용법만 지키면 아무런 문제도 없다지만, 혹시라도 실수하면 말짱 도루묵이 되지 않겠나?
그래서 그는 조심스럽게 내공을 운기해 보았다.
확실히 아직까지는 달라진 게 없었다.
‘좋아, 이제 조금만 기다리면 된다.’
마침내 일 각이 지났을 때, 등부형은 다시 호리병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쾅쾅쾅!
누군가 문을 거칠게 두드리는 것이 아닌가?
흠칫 몸을 떤 등부형이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쾅쾅쾅!
“등 조교! 안에 없소? 나, 묵양제요!”
‘저 인간이 갑자기 왜?’
등부형이 미간을 잔뜩 좁히고는 생각에 잠겼다.
멸마관에서 그와 손을 잡고 후일을 도모하겠다고 마음먹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먼저 차가운 표정으로 거절한 사람은 묵양제였다.
그 후로는 그를 거들떠도 보지 않았는데, 갑자기 자신을 찾아오다니.
그것도 하필이면 오늘 같은 날.
‘아니다, 신경 쓰지 말자. 괜히 부정 탈라.’
등부형은 눈을 지그시 감고 호리병을 집어 들었다.
괜히 엉뚱한 곳에 정신을 빼앗겼다가 복용법에 문제가 생기면 안 된다.
쾅쾅쾅!
“등 조교! 안에 있으면 대답해 보시오! 얘기 좀 합시다!”
‘지금 당신과 수다 떨 때가 아니오!’
등부형은 무시하면서 곧바로 호리병을 들어 마셨다.
꿀꺽… 꿀꺽… 꿀꺽…
그때였다.
갑자기 창가에 시커먼 그림자가 비치더니 한 남자가 불쑥 나타나서는 따지는 게 아닌가?
“거참, 방에 있으면서 왜 대답을 안 하는 거요?”
꿀…컥…! 쿠읍컥!
“켁, 켁! 콜록, 콜록!”
화들짝 놀란 등부형이 사례에 걸린 듯 기침을 해댔다.
그런 와중에도 그의 머릿속은 빠르고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방금 다섯 모금을 마신 건 분명하지? 그래, 틀림없이 다섯 모금이다. 다행히 입 밖으로 뿜어내진 않았으니! 그나저나 이 인간이 갑자기 왜 나타나서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등부형이 호리병을 탁 내려놓고는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내 방에서 내가 대답을 하든 말든! 당신이 뭔 상관이오? 왜 뜬금없이 날 찾아와서 귀찮게 하는 거요?”
“거참, 모처럼 찾아왔는데 너무 하는군.”
“일 없소! 난 지금 수다나 떨 기분이 아니니 그만 돌아가시오!”
거칠게 소리친 등부형이 창문을 닫으려는데, 묵양제가 얼른 막아섰다.
“허어, 거 왜 그렇게 화를 내시오? 일전에 내가 퉁명스럽게 대했다고 아직도 화가 난 거요? 그렇다면 뭐… 미안하게 됐소. 당시엔 내가 기분이 영 좋지 않아서… 쩝.”
묵양제가 먼 산을 보며 사과를 건네 왔다.
등부형이 이맛살을 슬쩍 찌푸렸다.
‘뭐하는 거야? 목전에서 무시해댈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갑자기 사과라니? 흥!’
등부형이 내심을 갈무리하고는 말했다.
“난 그저 조용히 생각을 하고 싶을 뿐이외다. 그러니 돌아가시오!”
“잠시만 얘기 좀 합시다.”
“대체 뭔 얘기를 하자는 거요?”
“응? 그런데 그건 뭐요? 그 호리병에 든 거.”
“이, 이게 뭐든 무슨 상관이오?”
“아니, 뭐 상관은 없지만 그냥 궁금해서 물어봤을 뿐이외다. 뭘 그리 까칠하게 구시오?”
“상관할 바 아니지 않소? 기분이 꿀꿀하여 술이나 한 잔 하고 있었소.”
“아, 술이었군. 아무튼 나하고 얘기 좀 합시다. 잠시 실례하겠소.”
“엇! 이 사람이 지금 어디로 들어오는 거야!”
등부형이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그 바람에 탁자 위에 든 호리병이 흔들리면서 넘어지려고 했다.
대경실색한 그가 얼른 손을 뻗어 호리병을 바로 잡으려는데,
척.
묵양제가 얼른 그것을 먼저 낚아채는 게 아닌가?
그가 어느새 창틀을 밟고 넘어와 맞은편 의자에 앉아 버린 것이다.
“그, 그거…!”
“음? 이거 말이오?”
묵양제가 호리병을 들어 올리자, 등부형이 열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묵양제가 어깨를 으쓱이고는 웃었다.
“뭐, 이 정도 순발력을 보고 놀라시오? 아무튼 그 얘기 들었소?”
“뭐, 뭘 말이오?”
“사비강 관주 말이외다. 만약상을 찾아서 엄청난 양의 영약과 단환들을 구했다고 합디다. 그런데 그걸 죄다 멸마관 무인들 위주로 나눴다는 것 아닙니까?”
“아, 그 얘긴 들었소. 그게 어때서?”
“그게 어때서라니? 등 형은 분하지도 않으시오? 등 형이야말로 용천관에서부터 친분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번에 등 형은 쏙 빠졌잖소? 물론 나도 빠졌지만.”
‘훗, 난 아니다.’
등부형이 속내를 숨기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 엿을 나누는 거야 엿장수 맘이 아니겠소? 내가 왈가왈부할 일은 아니지.”
“그러지 말고 우리 같이 사비강 관주를 찾아가 보는 건 어떻소? 그래도 우리 역시 멸마관에서 보낸 시간이 있으니….”
“싫소. 묵 형은 자존심도 없소? 나는 구걸 따윈 못하겠소.”
“이건 구걸이 아니라 정당한….”
묵양제도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정당한 요구라고 하기엔 뭔가 맞지 않았기에.
결국 화가 난 그가 호리병을 들더니 무심결에 입으로 가져갔다.
“으아앗! 그건…!”
하지만 이미 속이 상할 대로 상한 묵양제는 등부형의 반응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호리병 안에 든 걸 벌컥벌컥 들이켜고 말았다.
순간 등부형이 바위처럼 굳어 버리고 말았다.
호리병을 완전히 비워 버린 묵양제가 트림을 길게 내뱉더니 눈살을 구겼다.
“이거 맛이 뭐 이래? 아무래도 술이 상한 것 같소. 뭐 이런 술을 자작하고 계시오?”
“야이, 개새끼야!”
눈이 뒤집힌 등부형이 묵양제에게 달려들어 멱살을 집어 들더니 주먹을 휘둘렀다.
퍽! 퍽!
“큭! 이, 이거 왜 이러는 거야? 이런 미친놈을 봤나! 이봐! 너 내가 누군지 알아? 나 본단에서….”
“닥쳐! 이 개새끼야! 누구긴 누구냐! 멸마관에서 허드렛일이나 하는 따까리 새끼지!”
“으윽! 따, 따까리? 이런 미친…!”
“죽어! 이 새끼야!”
“이 미친놈이 갑자기 약을 처먹었나? 왜 이러는 거야!”
“너 때문에 약도 못 처먹었다! 이 썩어문드러질 놈아!”
“하! 이런 호로 자식을…!”
퍽! 퍽! 팍! 퍽!
이젠 아예 두 사람이 서로 멱살을 쥐고는 주먹다짐을 벌이기 시작했다.
등부형의 눈에서는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천 부장님. 저는 어쩌면 좋습니까? 이것도 업보일까요? 전부 저의 과업일까요? 저는 앞으로 어찌 살아야 합니까?’
**
‘뉘우치며 살아야지.’
천세명은 하늘을 올려다보고는 그렇게 가슴으로 중얼거렸다.
이제부터는 뉘우치는 마음으로 살리라.
후우우웅.
제법 쌀쌀한 겨울바람이 그의 머리카락을 흩날리고는 지나갔다.
그는 시선을 내려 언덕 아래로 이어진 길을 보았다.
이 길을 따라 가면 마을이 나타날 것이고, 그 마을을 지나 산으로 올라가면 용천관이 나온다.
정확히 석 달 만이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그는 석 달 전, 돌연 용천관 교관부장 직을 내려놓고 강호 기행에 올랐다.
이유 따위는 없었다.
그저 모든 게 부질없게 느껴진 탓이다.
조금이라도 발전하기 위해 악착같이 살았다고 생각했다.
한데 그토록 시기하고 질투했던 사비강은 멸마관주가 되어서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었고, 자신은 용천관에서 여전히 교관부장에 머물러 있었다.
회의감이 들었다.
해서, 모든 직위를 내려 두고 여행길에 올랐다.
석 달 간의 여행 중에 크고 작은 일이 많이 있었다.
그런 중에 깨달음도 있었다.
자신은 발전을 위해 노력한 것이 아니라, 높은 자리를 위해 악을 썼던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자 강호 기행이 무소용이었다.
다시 발길을 돌려 용천관으로 돌아오는 와중에 마족의 강림 소식까지 들었다.
이제는 정말 이 강호를 위해 뭐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더욱 뉘우치고 반성하며 겸손하게 살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이 강호를 지켜 줄 후기지수를 많이 양성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관주님은 잘 계시려나?’
그렇게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기려고 할 때였다.
문득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져 돌아보니 시커먼 거적때기를 걸친 사내가 허겁지겁 달려오는 것이 아닌가?
그는 뭔가를 질질 끌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굵고 긴 쇠사슬이었다.
그것은 목과 양손 그리고 양 발목에 각각 이어져 있었다.
때마침 그 뒤에서 거한 두 명이 날카롭게 소리치며 날아왔다.
“게 서지 못할까!”
“이놈이 어딜 도망가려고!”
경공을 펼치며 달려오는 두 사람은 상당한 무공 수위를 자랑하고 있었다.
순식간에 거적때기 사내 앞을 막아선 두 사람이 칼을 뽑아 들고는 으르렁거렸다.
“너 이 새끼! 얌전히 있으라고 했지?”
“얀마, 그 몸으로 도망가 봐야 오래 못살아. 햇빛도 못 보는 놈이 어딜 간다고 그래? 얌전히 따라와.”
두 명의 거한이 사내에게 다가가자, 거적때기를 덮어 쓴 사내가 짐승처럼 엎드려서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손과 발이 쇠사슬에 묶인 그로서는 뾰족한 수가 없어 보였다.
“좋은 말 할 때 와라. 복날 개 패듯 패는 수가 있으니까.”
“크르르…!”
“우리가 네 병을 낫게 해준다니까?”
“크으…!”
“역시 말로는 안 되겠군. 조져.”
“알겠습니다, 형님.”
결국 거한 두 명이 살기를 드러내며 사내에게 걸어가려는데,
휘리리릭!
순간 날렵한 그림자가 그 사이에 내려섰다.
거한의 사내들은 물론 거적때기 사내 역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갑자기 나타난 사람을 보았다.
그는 바로 천세명이었다.
“괜히 끼어들어 미안하오. 내가 원체 오지랖이 넓어서 그만. 허허.”
“뭐요?”
거한 한 명이 눈을 부라리자, 천세명이 정중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용천관 교관인 천세명이라고 하오. 혹시 무슨 일인지 사정을 여쭤도 되겠소?”
용천관이라는 말에 거한 두 명이 서로를 바라보면서 살짝 기가 눌렸다.
이곳은 용천관에서 멀지 않은 곳.
정도맹과도 친밀한 용천관을 괜히 잘못 건드려서 좋을 것은 없었다.
결국 두 사람이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천 교관님. 저희들은 ‘만물쌍웅(萬物雙雄)’이라 불리는 장독수(長督數)와 장독곤(長督坤)이라고 합니다.”
천세명은 그 두 사람을 바로 알아보았다.
천하의 모든 것을 사고판다는 것으로 알려진 두 사람.
그들은 스스로를 만물쌍웅이라고 소개했지만, 세간에서는 그들을 ‘만물쌍두(萬物雙頭)’라고 부르곤 했다.
정사지간의 무인들로서 그야말로 돈이 되는 거라면 뭐든 사고파는 인간들이었다.
어떤 면에서는 무인이라기보다는 장사치에 더 가까운 자들이었다.
저 쇠사슬에 묶인 남자 역시 아마 그들의 그런 ‘물건’ 중 하나이리라.
“만나서 반갑소.”
말을 마친 천세명이 눈짓으로 설명을 요구했다.
장독수가 나서서 대답했다.
“이 녀석은 우리가 저 위 지방에서 주운 건데, 독특한 병을 앓고 있소. 해서 우리가 이자의 병을 낫게 해주기 위해서 먼 길을 가고 있는 중이오.”
천세명은 속으로 비웃었다.
‘병을 낫게 해주려는 게 아니라, 어디 돈 많은 괴짜 의원들에게 팔아먹으려는 거겠지.’
만물쌍두가 자주 저지르는 수법이다.
독특한 병에 걸린 자들을 치료해 주겠노라고 유혹한 뒤에 괴짜 의원들이나 마두 등에게 비싼 값으로 팔아먹는다.
그 후에는 환자들을 본 사람들이 없다.
해부를 하는 것인지, 실험을 하는 것인지 알 길도 없다.
이 바닥에선 어느 정도 유명한 이야기다.
하지만 천세명은 모른 척 물었다.
“그렇소? 참 대단한 일을 하시는군. 한데 내가 그 병을 고칠만한 사람을 알지도 모르니 말해 보시오. 이자의 병세가 어떻소?”
만물쌍두가 서로 눈짓을 주고받더니 곧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어차피 말해도 고칠 수 있는 병이 아니란 확신이 있는 모양이었다.
장독수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그게 아주 독특합니다. 저 녀석은 희한하게도 햇빛을 보면 살이 타들어갑니다. 무슨 귀신처럼 밤에만 행동해야 하지요. 낮에는 저렇게 시커먼 거적때기를 씌워 놓지 않으면 활동 자체가 불가능하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저 친구에게 별명을 붙여 줬습니다.”
“별명?”
“예, ‘흑귀’라고 붙였지요.”
장독수가 씨익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