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6
귀환 마교관
486화
“정말… 괜찮으십니까?”
“응? 아, 그럼. 괜찮지.”
“어디 아프신 곳은….”
“없어. 오히려 몸이 굉장히 가뿐해졌는 걸?”
“아… 다행입니다.”
“음? 설마… 무린, 지금 우는 거야?”
서래향이 당황한 표정으로 적무린에게 물었다.
적무린이 소매로 얼른 눈가를 훔치고는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정말 홍묘님이 돌아가시는 줄….”
“호호, 나 그렇게 쉽게 안 죽어.”
라고 말했지만, 정말 죽을 뻔 했지.
서래향은 가슴 한편이 서늘했다.
사비강이 자신을 지나치면서 순식간에 혈을 점했을 때는 정말이지 숨이 턱 막혀 왔으니까.
그리고 아찔한 고통에 그대로 의식을 잃어버렸다.
적무린은 적무린대로 놀랐다.
서래향이 죽은 줄로만 알았다.
분명 맥박이 뛰지 않았으니까.
나중에 의식이 돌아온 직후 서래향을 끌어안은 채 울부짖었다.
제발 일어나 달라고.
나를 두고 영영 떠나지 말라고.
근데 서래향이 돌연 눈을 뜬 것이다.
마치 깊은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적무린은 순간 혼비백산했다.
일어나란다고 죽은 사람이 정말로 일어나다니!
겨우 마음을 진정시키고 주변을 둘러보니 서래향뿐만 아니라 죽은 줄 알았던 무인들이 하나둘 깨어나는 게 아닌가?
서래향의 맥을 짚어 보니 확실히 힘차게 뛰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전보다 훨씬 더 기의 흐름이 좋아진 걸 느낄 수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적무린 역시 기절했다가 깨어났다.
하지만 더 나아진 건 딱히 느낄 수 없었다.
어쨌거나…
“정말 다행입니다.”
적무린은 다시 한 번 가슴을 쓸어내렸다.
만약 이대로 서래향과 영원한 이별을 겪어야만 했다면, 절대 견딜 수 없었으리라.
한편 서래향만큼이나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눈을 멀뚱멀뚱 뜨고 있는 사람이 또 있었다.
목단화였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다시 한 번 내공을 일주천해 보았다.
‘이상해. 분명히…’
내공이 늘었다.
몸도 훨씬 가벼워졌다.
‘설마 이건….’
그녀는 사비강이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손을 뻗었을 때를 떠올렸다.
몇 군데의 혈을 점하면서 기의 흐름이 탁 막히고 아찔한 고통에 정신을 잃었다.
그런데…
‘기의 흐름이 이전보다 훨씬 좋아졌어!’
그때 사비강은 단순히 공격을 한 것이 아니다.
자신의 막혔던 혈맥을 뚫어 준 것이리라.
천년설삼을 복용하고도 완전히 소화해내지 못한 것 같은 아쉬움이 은근히 있었는데, 이제야 비로소 제대로 약효를 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자신과 비슷한 상태를 느끼는 사람이 많은 듯했다.
누군가는 내공이 늘었다며 놀라워했고, 누군가는 아무런 변화를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하지만 아무런 변화를 느끼지 못한 자들 대부분은 이미 약효의 최대치를 흡수한 자들이었다.
연무장 한쪽에 쓰러졌다가 겨우 정신을 차린 매설란도 마찬가지.
그녀는 만년설삼을 먹고 일 갑자 하고도 이십 년 치의 내공 상승을 이루어냈다.
그것만 해도 훌륭한 것이라 생각했다.
한데 사비강에게 점혈을 당하고 나서 기절했다가 깨어나니 내공 량이 달라져 있었다.
무려 십 년 치의 내공이 상승했다.
물론 이미 얻은 내공 량이 있어서 십 년 치의 내공이 상승했다고 해봐야 별 차이가 없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르다.
이건 질적으로 다르다.
전신의 혈맥을 타고 흐르는 내공의 질이 이전과 달리 매우 힘차고 밀도가 높다.
한 마디로 몸이 전체적으로 더욱 건강해진 느낌이다.
‘당신… 이런 의도였구나.’
이번 비무의 의미다.
물론 비무에 임한 모든 사람들의 내공이 상승한 것은 아니다.
사비강이 정한 기준.
그 기준 아래의 사람들은 혈맥을 뚫어 내공 증진에 도움을 주었다.
이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무호흡에 심박 정지 현상이 나타난다.
때문에 그 순간 쓰러진 자를 만지면 마치 죽었다고 착각할 수 있다.
적무린이 오해했던 것도 그런 이유였다.
도대체 얼마나 강하면 이런 경지에 다다를 수 있을까?
단 일합을 통해서 순간적으로 상대의 기도를 파악하고, 그 짧은 순간 혈맥을 뚫어 내공을 증진시켜 준다니.
물론 영약을 복용한 직후인 만큼 특별한 상황이긴 하다.
그런 걸 감안해도 대단한 건 대단한 거다.
다만 그가 정한 기준 이상을 이룬 자들은 특별히 내공이 향상되진 않았다.
대신 그들은 내공의 질이 달라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내공의 흐름이 조금 더 부드러워졌다거나, 조금 더 거칠어졌다거나.
체질에 따라 각기 다르게 변형됐다.
‘정말이지 이럴 땐 인간이 아닌 것 같다니까.’
매설란은 맥이 탁 풀렸다.
도대체 속을 알 수 없는 남자.
언제나 자신의 생각을 뛰어넘는 남자다.
이러니 반하지 않을 수가 있나?
그때였다.
서래향 곁에 있던 적무린이 벌떡 일어나더니 어금니를 꽉 다문 표정으로 사비강에게 저벅저벅 걸어갔다.
매설란이 불안한 마음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혹시라도 속인 것에 화가 난 것일까?
하긴 사랑하는 여인이 정말 죽었다고 생각했던 그였으니까 화가 날 만도 하리라.
사비강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간 적무린이 어금니를 꽉 씹고는 주먹을 콱 말아 쥐었다.
사비강은 말없이 그런 적무린을 물끄러미 보기만 했다.
다음 순간,
털썩! 쿵!
느닷없이 적무린이 무릎을 꿇더니 바닥에 이마를 찧는 것이 아닌가?
그가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감사합니다, 주군!”
그의 입에서 처음으로 ‘주군’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왔다.
정도맹을 나서서 서래향과 함께 멸마관을 찾아갔을 때도 그는 ‘관주님’이라는 호칭만 사용했다.
하지만 이제야말로 사비강을 진정한 자신의 주인으로 인정한 셈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무인들이 저마다 자리에서 하나둘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일제히 그들이 무릎을 꿇으며 절을 올렸다.
“감사합니다, 주군!”
그들의 우렁찬 목소리가 하늘에 쩌렁쩌렁 울렸다.
**
“영단이라….”
등부형은 턱을 괴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래, 가자! 그래도 옛정이 있는데!’
그가 결심을 굳히고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문 앞에 다다른 그는 금방 휙 돌아서서는 다시 발길을 돌렸다.
‘아니지. 그래도 자존심이 있는데… 그럴 수는 없지!’
‘아냐, 자존심이 밥 먹여 주는 것도 아니잖아?’
‘그래도 그 녀석이 내 도를 몇 자루나 부쉈는지를 생각해야지!’
‘그래도 마지막 칼은 다른 놈이 부순 거니까….’
‘근데 그놈은 천년설삼이라도 받았다잖아!’
등부형은 문 앞에서 한참이나 서성였다.
그의 마음을 이토록 어지럽히고 있는 것은 단 하나.
멸마관 소속의 교관과 조교 출신 중 상당수가 영약이나 단환을 제공 받았다는 점.
하지만 자신은 하나도 받지 못했다.
그래도 만약상을 탈탈 털었다는데, 자신에게 건네 줄 영약 하나 없겠는가?
아마도 깜빡한 것이리라.
그래서 이렇게 사비강에게 직접 찾아온 것이었다.
하지만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 발길을 붙들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여기서 뭐하시오?”
“으헉!”
등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등부형이 화들짝 놀라 껑충 물러났다.
사비강이 사람 좋은 미소를 그리며 등부형을 보고 있었다.
“관, 관주님…!”
사비강에게 극존칭을 쓰는 것이 여전히 어색하긴 했지만, 등부형은 일단 허리를 숙이며 머리를 조아렸다.
한때 자신보다 한참 아래였던 부교관 시절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이라 할만 했다.
“하하, 뭘 그리 깍듯하게 대하시오? 등 형께서는 내 선배이기도 하니 편히 말하시오.”
“그, 그리 생각해 준다니 고맙네.”
“그런데 무슨 일로 여기에 오셨소?”
“아, 그것이….”
등부형이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고 멋쩍은 웃음만 흘렸다.
사비강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서 있자 등부형이 에둘러 말을 꺼냈다.
“얼마 전에 멸마관 무인들 상당수에게 영약과 단환을 나눠 주었다고 들었네.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하셨어. 아주 감명 받았다네.”
“그거야 중원의 안위를 위해서라면 당연한 일 아니겠소? 어차피 나 혼자 다 소화도 못 시킬 테니.”
“그래도 사람 마음이 어디 그렇게 생각하기가 쉽다던가? 하나를 가지면 둘을 욕심내는 게 사람이거늘. 참 대단한 일을 했네.”
“고맙소. 그 말을 하려고 오셨소?”
“뭐, 그렇긴 한데….”
“그렇긴 한데?”
“그… 영약 말일세. 모두 나눠 주었나?”
“뭐 대충은. 문제라도 있소?”
“커험, 아닐세. 아무것도. 그냥 뭐 만약상이 가지고 있던 건 어떻게 생겼나 궁금하기도 해서 말일세. 하하하!”
그제야 사비강이 등부형의 속내를 눈치 챈 듯 무릎을 탁 치며 말했다.
“아, 내가 등 형께 아무것도 드리지 않았구려.”
등부형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하하하! 이 사람도 참. 그렇게 말하니 내가 꼭 그걸 받기 위해 자네를 일부러 찾아온 것 같지 않은가?”
“설마 그렇겠소? 난 등 형이 그렇게 자존심도 없고 미천한 인간이 아니란 걸 알고 있다오.”
“끄음. 그, 그런가?”
“하지만 내 마음이 등 형을 그냥 보내드릴 순 없소이다. 자, 받으시오. 몸에 좋은 것이니 도움이 되면 좋겠소.”
“굳이 그렇게까지. 아, 혹시라도 보양환이라면 나도 많이 가지고 있으니….”
“보양환이 아니외다. 설마 내가 그런 걸 줄까 봐.”
‘그런 걸로 여러 사람 골렸다고 들었네만.’
물론 그 말을 밖으로 뱉진 않았다.
그러는 사이 사비강이 라겔의 주머니에서 호리병 하나를 꺼냈다.
등부형이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이건… 뭔가?”
“백초기환탕(百草氣環湯)이오.”
“맙, 맙소사! 백초기환탕이라니! 이걸 정말 내게 주려는 건가?”
“물론이오. 옛정이 있지 않소?”
“이, 이걸 제대로만 복용한다면….”
“그렇소. 최소 반 갑자의 내공 증진을 이룰 수 있을 거요.”
“역시…!”
등부형은 떨리는 마음으로 백초기환탕이 든 호리병을 받아들었다.
그가 조심조심 마개를 열고 냄새를 맡아보았다.
독하면서도 어딘지 독특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진짜다…! 이 약 향은 틀림없는 백초기환탕이다!’
등부형이 감격에 젖은 눈길로 사비강을 보다가 두 손을 덥석 잡았다.
“자네, 정말 고맙네! 정말 고마워!”
“고맙긴. 등 형과 내가 알고 지낸 세월이 얼마나 긴데.”
“난 자네를 오해하고 있었네. 날 미워한다고 생각했네.”
“내가 왜 등 형을 미워하겠소? 그런 생각 마시오. 어서 이 영약을 가져가 복용하시고 내공 증진을 이루길 바라겠소.”
“알겠네! 내 자네의 기대에 부응하도록 하지. 고맙네! 고마워!”
“아, 복용법은 아시겠지만….”
“물론 알고 있네. 일각에 다섯 모금씩 세 번을 나눠 마시면 되는 것 아닌가?”
“그렇소. 복용법이 까다롭긴 하지만 그 후에는 즉시 향상된 내공을 사용할 수 있을 거요. 그게 바로 백초기환탕이 좋은 점이지. 부작용 또한 없고.”
“그렇지. 자네의 마음에 이 우형이 깊이 감동했네.”
등부형은 진심으로 마음이 격동했는지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그동안 사비강을 경계했던 마음이 이제야말로 눈 녹듯이 사라지고 있었다.
이런 자를 원망하면서 묵양제와 손을 잡고 어떻게든 후일을 도모하려고 했던 자신이 한심하게만 느껴졌다.
사비강이 당부했다.
“부작용이 없는 영약인 만큼 복용법은 반드시 지켜야 하니 꼭 주의하시오.”
“물론일세. 아무리 좋은 탕약도 복용법을 지키지 못하면 한낱 오줌이 되고 말지.”
“그럼, 살펴 가시오.”
“고맙네, 고마워!”
등부형은 거듭 사례를 하고는 돌아섰다.
오늘따라 하늘이 푸르렀다.
그는 창공을 올려다보며 천세명을 떠올렸다.
자신을 이곳으로 보낸 천세명에게 감사하단 생각이 들었다.
‘천 부장님. 그는 사실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등부형이 사람 좋은 미소를 그리며 걸음을 옮겨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