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3
귀환 마교관
483화
매설란은 괜히 주변을 한 번 두리번거렸다.
눈앞에 놓인 것은 만년설삼 일곱 뿌리!
아무리 이곳이 정도맹 내원이고, 옆에 사비강이 있다지만 역시나 가슴이 떨렸다.
당장이라도 검은 손이 불쑥 뻗어 나와 만년설삼을 움켜쥐고 달아날 것만 같은 기분.
매설란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어떡하긴. 만찬이 차려졌으니 맛있게 먹어야지.”
“이걸 전부? 혼자?”
“그럼?”
“돼지네.”
매설란이 왠지 실망한 투로 말하자, 사비강이 웃으며 받아쳤다.
“만년설삼 일곱 뿌리를 먹고 소화하는 돼지라면 그것도 나쁘지 않네.”
“정말이야? 정말 이걸 혼자 다 먹겠다는 거야?”
그제야 사비강이 고개를 저었다.
“진짜로 내가 만년설삼 일곱 뿌리씩 집어삼키는 돼지로 보여?”
“그건 아니지만… 왠지 당신이 그러겠다고 하면 정말 그럴 것 같거든.”
사비강이 잠깐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매설란이 풋 웃음을 터뜨렸다.
결국 두 사람은 한동안 웃음을 터뜨렸다.
영약이나 단환 따위는 한꺼번에 많이 복용한다고 해서 그만큼 내공을 얻는다는 보장이 없다.
오히려 부작용이 일어날 확률이 더 높다.
가장 좋은 방법은 충분한 기간을 두고 차례로 복용하는 것이겠지만, 당장 마족이 강림한 상황에서 여유를 부릴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아무나 나눠 줄 수는 없다.
가령 삼류 무사가 만년설삼을 복용하면 일 갑자는커녕 그 절반의 내공도 얻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한 마디로 돼지 목에 걸린 진주가 되기 십상이다.
물론 무공이 강하다고 무조건 만년설삼이 효율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누구에게나 적절한 시기가 있는 법.
만년설삼이 품고 있는 기운을 가장 효율적으로 뽑아 낼 수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는 게 가장 좋다.
하지만 그 전에 먼저….
“내 몸부터 챙겨야지.”
사비강이 만년설삼 한 뿌리를 빼냈다.
“이건 내가 먹고.”
그가 다시 한 뿌리씩 빼냈다.
“이건 추량, 이건 적무린, 그리고 이건 단리정.”
마치 처음부터 생각해 두었다는 듯이 사비강은 거침이 없었다.
눈앞에 놓인 것이 만년설삼이 아니라 무슨 엿가락쯤 되는 것처럼 거침없이 나눠 갔다.
“추량은 반묘와 함께 폐관 수련을 시켜야겠고… 아, 이건 맹주님을 드려야겠군.”
“나머지 두 개는?”
“하나는 흑귀에게 줄 거야. 그 녀석이 아직 살아 있다면 분명 최대 효과를 볼 테니까.”
“그럼, 마지막 남은 건?”
정말이지 순수한 궁금증이었다.
그런데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아니, 행동이 돌아왔다.
사비강이 만년설삼 한 뿌리를 집어 들더니 매설란에게 불쑥 내민 것이다.
“어…?”
“이건 당신 거야.”
“나?”
매설란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사비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 더 강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든 적 없어?”
“그런 생각이야 늘 하지. 하지만….”
매설란은 지난 날 멸마관의 마지막 싸움을 떠올렸다.
그날 그녀는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일신마를 상대하면서 자신의 한계를 너무나 명확하게 깨달았다.
분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강하다는 것을.
괴물 같았던 일신마는 결국 수십 자루의 창검에 꿰뚫려 쓰러졌지만, 일대일의 승부였다면 어림도 없었을 것이다.
매설란이 솔직히 말했다.
“요즘은 더욱 그런 생각이 들어.”
사비강이 웃었다.
“당연할 거야. 지금쯤 다시 하나의 벽이 나타났을 테니까. 복용해. 도움이 될 거야.”
“고마워. 사양하지 않을게.”
“뭘. 당신도 같이 애썼으니까.”
만약상을 찾아갔던 날, 매설란은 싸움의 전면에 나서는 대신 사람들에게 최대한 피해가 가지 않도록 힘을 썼다.
만약 그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주변을 정리하지 않았더라면, 그날 그 마을의 희생자는 훨씬 많았을 것이다.
사비강이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정말 고맙다면 오늘 밤은 특별히….”
“거기까지만. 더 얘기하면 당신에 대한 내 감정이 깨질 것 같아.”
“쩝.”
사비강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매설란이 농담처럼 말했지만 내심은 그가 진심으로 고마웠다.
그리고 이렇게 장난을 쳐도 되는 사내가 사비강이어서 정말 행복했다.
“어쩌면 난 세상에서 가장 운이 좋은 여자일 거야.”
“만년설삼 때문에?”
“아니, 당신 때문에.”
매설란이 빙긋 웃음 지었다.
선녀의 미소가 있다면 이럴까?
사비강이 라겔의 주머니를 꺼내다말고 멈칫하고는 물었다.
“좋아. 오늘 밤이 안 된다면 지금은 어때?”
“닥쳐.”
결국 사비강이 체념을 하고는 라겔의 주머니를 꺼내들었다.
이제 천년설삼을 나눌 차례였다.
그것 외에도 효능이 좋은 영단이 여러 가지 있었다.
**
능운파는 탁자 위에 놓인 만년설삼을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만년설삼이군.”
벌써 같은 말을 세 번째 반복하고 있었다.
옆에 선 욱청풍이 빙그레 미소 지으면서 말했다.
“정말 만년설삼이지요. 저도 처음에는 쉽게 믿어지지가 않더군요. 만약상을 이렇게 빨리 찾아낸 것도 놀라웠는데, 그것을 아무 조건 없이 이렇게 나눈다는 것도 참 대단합니다.”
“이걸… 사비강 관주가 줬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다른 무인들에게도 진귀한 영약들과 단환들을 나눠 주었다고 합니다.”
“그렇군.”
“이걸로 마족들에게 대항할 힘을 크게 키웠다고 볼 수 있지요.”
능운파가 묵묵히 만년설삼을 내려다보다가 시큰둥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마도 멸마관 무인들 중심으로 나눠 줬을 테지.”
“물론 그렇습니다만, 앞으로 그들이 이 강호를 지켜 나갈 버팀목들 아니겠습니까?”
욱청풍의 너그러운 목소리에 능운파가 심기 불편한 표정이 되어 슬쩍 돌아보았다.
“욱 회주께서는 언제부터 그리 그에게 후한 감정을 가지셨소?”
“허허, 한때 그에게 반감을 가진 적이 있으나, 이번 전쟁을 겪으면서 생각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모든 것이 다 수양이 부족한 이 늙은이의 치기어린 질투심이었지요.”
능운파가 어딘지 차가운 미소를 그렸다.
‘치기어린 질투라….’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회주께서는 뭘 받으셨소?”
“허허, 이 늙은이가 받아 봐야 그 기운을 어디에 쓰겠습니까? 전 아무것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셨군. 이거 나만 이렇게 좋은 걸 복용해도 되는지 모르겠소.”
“암. 드셔야지요. 맹주님 또한 이 강호를 지킬 기둥 아니십니까?”
능운파가 피식 웃었다.
“기둥이라. 그 기둥이 너무 많아서 발 디딜 틈도 없겠구려. 그게 아니라면….”
‘…동정일 테지.’
뒷말은 가슴으로 삼켰다.
생각을 거둔 능운파가 욱청풍을 돌아보며 웃어 보였다.
“아무튼 전해 줘서 고맙소. 사비강 관주에게도 고맙다고 전해 주시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욱청풍이 방을 나가고 나자, 능운파는 만년설삼을 무서운 눈길로 노려보았다.
그의 귓가에 사비강을 칭송하는 소리가 자자하게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도대체 어디까지 오르려는가? 사비강…!’
그가 어금니를 빠득 갈았다.
**
이자준은 황망한 시선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싸늘한 밤공기가 그의 뺨을 스치고 있었다.
어디선가 바짝 마른 낙엽이 구르는 소리도 들렸다.
그냥 평범한 숲.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그런 풍경이었다.
하지만 이자준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니 그보다도….
‘도대체 여기가 어디지?’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왜 자신이 이런 곳에 와 있단 말인가?
분명 자신은 어젯밤 일찍 수련을 마치고 잠자리에 누웠다.
그리고 눈을 떠 보니….
“왜 여기에…?”
이자준은 그 어느 때보다도 심각한 표정으로 자신의 양손과 발을 내려다보았다.
옷은 모두 갖춰 입었다.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했다.
누군가에게 납치를 당한 것은 아니다.
스스로 이곳으로 온 것이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어딘지 알 수 없는 이 숲 복판에 서 있었으니까.
가슴이 뛰는 걸 보면 경공을 펼쳐서 여기까지 온 게 분명했다.
혈맥을 따라 내공이 빠르게 회전하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경공을 펼쳤다는 증거다.
‘제길!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는군!’
처음에는 꿈인가 싶었다.
하지만 이처럼 생생한 현실이 절대 꿈일 리는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서성이며 걸었을까?
마침 저만치 낡은 전각이 보였다.
버려진 사당이었다.
‘저건…?’
그제야 그는 이곳이 어디쯤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저 낡은 전각은 분명 정도맹 본단에서 북서쪽에 위치한 산 중턱에 버려진 사당이었으니까.
어쨌거나 잠자리에 들었던 자신이 의식도 하지 못하는 사이에 옷을 모두 갖춰 입고 이곳으로 달려온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거짓말처럼 의식을 되찾았다.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처음에는 몽유병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가, 어쩌면 사술에 홀린 걸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는 강림지에서 뭔가에 홀린 게 아니란 생각까지.
그때였다.
끼이이익…!
사당 문이 열리면서 그림자가 나타났다.
흠칫거린 이자준이 미간을 잔뜩 모으고는 그림자를 노려보았다.
상대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이곳까지 달려온 것과 분명 관련이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이윽고 달빛에 상대의 얼굴이 드러났을 때, 이자준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일그러뜨렸다.
인간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흉측한 외모.
하얀 돌기가 얼굴 곳곳에 빼곡하게 박혀서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비위가 약한 일반인이라면 그 자리에서 구역질을 해도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였다.
‘마족…?’
이자준이 반사적으로 경계 태세를 취하면서 바닥에 떨어진 기다란 나뭇가지를 주워 들었다.
창술의 달인이라는 소리까지 듣는 그로서는 어지간한 막대기만 있어도 웬만한 살상용 무기 이상의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그가 날카롭게 기를 다듬는데,
“놀랄 것 없다. 내 아이야. 이리 오너라.”
정체 모를 괴인이 손짓을 하며 부드럽게 부르는 것이 아닌가?
이자준이 흠칫거리고는 입을 열었다.
“무슨 미친 소리를…! 헉!”
다음 순간, 이자준은 말을 마저 잇지 못한 채 멍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그는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뚜벅뚜벅 걸음을 옮겨 괴인에게 다가갔다.
괴인은 바로 아들러 백작이었다.
“부르셨습니까?”
이자준이 전혀 다른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물었다.
아들러 백작이 품에서 뭔가를 꺼내 내밀었다.
그것은 별 모양의 펜던트가 달린 목걸이였다.
“이걸 가져가서 네 주인에게 주어라.”
“알겠습니다.”
“너는 이걸 어디에서 찾았느냐?”
“지난 강림지 전쟁에서 주웠습니다.”
“그렇지. 잘 기억하고 있어라.”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가보아라.”
이자준이 전혀 다른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고개를 깊이 숙여 보이더니 돌아섰다.
잠시 후 그는 빠른 속도로 경공을 펼치면서 정도맹 본단을 향해 날아갔다.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아들러가 가만히 중얼거렸다.
“인간들이란… 언제나 재미있단 말이지.”
뒤이어 그의 몸이 모래성처럼 허물어지면서 스르르 사라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