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9
귀환 마교관
479화
마차가 들어선 곳은 굉장히 번화한 도시였다.
무한만큼은 아닐 지라도 그곳 못지않게 많은 사람들로 붐볐고, 상권이 빼곡하게 형성된 곳이었다.
매설란은 창밖으로 스치는 풍경을 보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한 번 실컷 울어 버리니 마음이 홀가분했다.
묵은 때를 벗긴 느낌.
사비강의 품에 안겨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한 번 터진 울음은 좀처럼 그칠 줄을 몰랐고, 밀려드는 그리움은 떠날 줄을 몰랐다.
곡보옥과 투닥거리면서 누가 더 낫냐고 따져 묻던 백공보가 보고 싶었고, 설서린과 함께 알콩달콩 오누이의 정을 나누던 설수민도 그리웠다.
비술을 자랑하는 도비천과 잘난 척 떠들어대던 진조영도 보고 싶었다.
그런데 그 많은 그리움들을 눈물에 섞어 쏟아내고 나니, 가슴이 한결 후련해졌다.
이제야 말로 떠난 이들에 대한 마음 정리가 된 느낌.
조금 과장하자면 다시 태어난 것만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나를 내려놓는다.
그게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나를 내려놓고 잠시 쉬었더니 다시 힘이 생겼다.
그리운 이들을 영영 빼앗아 간 그들과 맞서 싸울 힘이.
사비강의 말대로 더 큰 짐을 짊어질 용기가 생겼다.
매설란이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좋아. 뭐든 오라고 해. 더 강해져서 싸워 주겠어!’
그녀가 입술을 꼭 깨물자, 사비강이 슬쩍 보고는 농담처럼 말했다.
“뭐든 다 때려 부술 것 같은 표정인데?”
“앗, 그런 건 아닌데.”
매설란이 당황하면서 말을 얼버무리자, 사비강이 피식 웃었다.
“농담이야. 하지만 일단은 모든 걸 힘으로 해결할 수는 없으니까.”
“물론이지. 하지만 이제 겁먹지도 않을 거야. 걱정보다는 대책부터. 그리고 내 앞에 놓인 길을 차근차근 걸어갈 거야.”
“좋은 자세군.”
“그나저나 여기 정말 복잡하네. 이런 곳에서 큰 싸움이 나면 많은 사람들이 다치겠는 걸?”
“역시 벌써부터 다 때려 부술 생각부터 하는군.”
“앗, 그게 아니라니깐!”
“하하하!”
사비강이 기분 좋게 웃었다.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서 당황해하는 매설란의 모습이 오늘따라 귀엽게 보였다.
그러는 사이 마차가 허름한 전각 앞에 멈췄다.
지금까지 지나온 거리가 굉장히 화려했다면, 이곳은 왠지 가난한 상인들이 모여 사는 동네처럼 전각들부터 허름하고 낡아 보였다.
[도착했습니다, 관주님]
마부석에 앉아 있던 홍염이 전음을 보내왔다.
사비강과 매설란이 마차에서 내려 전각의 현판을 올려다보았다.
만병통치(萬病通治).
그야말로 노골적인 현판.
여느 저자거리에서나 볼 수 있는 싸구려 약재상의 분위기와 딱 들어맞는 현판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꼽추 노인이 힐끔 쳐다보았다.
그는 잠깐 놀란 표정을 지었는데, 사비강이 아니라 매설란 때문이었다.
이런 허름한 약재상을 찾아오기에는 그녀가 너무나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실제로 무공이 상승한 그녀는 예전에 비해서도 훨씬 아름다운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노인은 곧 시선을 거두고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물었다.
“찾는 거라도 있는가?”
“이곳이 강호인들이 가장 좋아한다는 약재상 맞소?”
사비강이 모른 척 묻자, 꼽추 노인이 피식 웃으며 현판을 가리켰다.
“저기 걸려 있는 걸 보지 못했는가?”
“현판이야 아무나 내다 걸지.”
“흥! 믿지 못할 것 같으면 그냥 돌아가시든가?”
그야말로 배짱 장사가 따로 없었다.
사비강은 말없이 진열대에 놓인 약초나 약재 따위들을 보았다.
평범했다.
의원 같은 곳에서 흔히 사 갈 만한 약재들이 가득했다.
사비강과 매설란이 뜸을 들이자, 불편한 표정으로 힐끔거리던 꼽추 노인이 다시 물었다.
“보아하니 의원에서 나온 건 아닌 것 같고. 어디가 안 좋은 건가?”
“말 그대로 만병통치약을 찾고 있소. 특히 강호인들이 좋아하는.”
사비강의 말에 꼽추 노인의 눈동자가 반짝 빛을 뿜었다.
그 직후 사방에서 강렬한 기운이 폭사하듯 뻗어 왔다.
매설란이 흠칫거리고는 은근히 내공을 끌어올렸다.
‘보통이 아니야. 지금까지 전혀 눈치 채지 못했는데.’
아마도 은신술 하나만큼은 도가 튼 자들이리라.
하지만 사비강은 이미 그들의 존재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는 듯 미미한 미소를 지었다.
곧이어 그가 내공을 끌어올려 발산하자,
“……!”
꼽추 노인은 물론 은신해 있던 자들의 기도가 동요하는 것이 느껴졌다.
사비강이 말을 이었다.
“물건 좀 볼 수 있겠소?”
“…끄음. 잠시만 기다려 주시게.”
꼽추 노인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더니 뒤쪽의 쪽문을 열고 복도를 따라 어디론가 향했다.
그가 사라진 동안 사비강과 매설란을 포위한 모종의 기운은 더욱 강렬해지고 있었다.
마치 쏟아지는 이 적의를 견딜 수 있다면 한 번 견뎌 보라는 듯.
한참 후 다시 돌아온 노인이 공손히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안으로 드시지요.”
조금 전의 태도와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
사비강과 매설란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노인을 따라 복도를 따라 들어갔다.
복도 끝에 다다르자, 노인이 벽 한쪽에 손을 가져다대고는 꾹 눌렀다.
그그긍…!
다음 순간 육중한 소리와 함께 벽이 스르르 밀리며 아래로 향하는 계단이 나타났다.
허름한 전각과 달리 지하로 향하는 계단의 벽면에는 값비싼 야명주가 박혀서 빛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계단 아래의 철문을 지나니 다시 굳게 잠긴 문이 나타났고, 그 앞을 지키는 거한의 사내가 눈을 부릅뜨고 서 있었다.
‘엄청난 기도네.’
매설란은 내심 감탄했다.
거한의 사내는 단지 덩치만 큰 것이 아니었다.
그가 지닌 내공의 깊이가 얼마나 심후한지 대번에 느낄 수 있었다.
“손님일세.”
꼽추 노인의 말에 거한의 사내가 허리를 숙이고는 옆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시종 공손한 태도였지만 그가 드러낸 기도만큼은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그만큼 이 안쪽은 중요한 공간이리라.
거한의 사내가 철문을 열자 실내에서부터 진한 약향이 물씬 풍겨 왔다.
그 향기를 맡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맑아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실내에는 탁자 하나가 단출하게 놓여 있었고, 그 너머로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파가 앉아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노파가 공손한 태도로 입을 열자, 사비강이 주변을 한 차례 둘러보고는 말했다.
“만병통치약을 사러 왔소.”
“사비강 관주님의 명성에 대해서는 익히 들었지요. 이렇게 직접 만나 뵙게 되니 영광입니다.”
노파의 말에 매설란이 내심 감탄했다.
그 짧은 순간, 이들은 사비강의 정체에 대해서 모두 밝혀낸 것이다.
사비강이 본론으로 바로 들어갔다.
“파시오.”
“얼마나 필요하신지요?”
“전부.”
노파의 눈이 살짝 커졌다.
다짜고짜 귀하디 귀한 영약들을 전부 사겠다니.
노파가 끌끌 웃으며 말했다.
“관주님께서는 이곳에 얼마나 많은 영약이 보관되어 있는지 잘 모르시는….”
“그런 건 상관없소. 많으면 많을수록 좋겠지.”
노파의 눈매가 빛을 반짝 뿜었다.
이것 봐라?
노파가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대답했다.
“전부라면… 오백 억 냥입니다.”
그녀의 대답에 매설란은 물론 그를 안내한 꼽추 노인도 놀랐는지 몸을 흠칫 떨었다.
그 역시 만약상의 주인인 저 노파가 오백 억을 부를 줄은 몰랐던 것이다.
물론 흥정을 감안하고 세게 부른 것이겠지만 나가도 너무 나간 게 아닌가?
사비강이 피식 웃었다.
노파는 어떤 대답이 나올지 기대한다는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사시겠습니까? 좀 비싼 감이 있다면 양을 조절해서 사시는 것도….”
“사지.”
순간 이번에는 노파와 꼽추 노인이 눈을 부릅뜨고 사비강을 돌아보았다.
매설란 역시 깜짝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정말 그걸 다 살 돈이 있는 거야?’
하지만 사비강의 말은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
“단, 돈은 한 푼도 줄 수 없어.”
“음?”
“전부 공짜로 가져가겠다.”
“……!”
“……!”
순간 실내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동시에 사방에서 살기가 폭사되듯 쏟아졌다.
마침내,
“흘흘흘흘!”
노파가 입을 가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과연 사비강 관주님은 괴짜 중에서도 괴짜라더니… 소문이 사실이었군요.”
“좋을 대로 생각하도록.”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럴 수는 없습니다. 이곳에는 초절정 고수 십 인이 은신해 있습니다. 게다가 기관 장치도 매설되어 있지요. 무엇보다….”
노파가 좁은 방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곳에 영약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까? 아, 약향은 인위적으로 만든 것입니다. 그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하지요. 하지만 영약이 있는 곳은 저밖에 모릅니다. 뿐만 아니라, 그 영약 또한 기관을 작동해서 꺼내야 하지요. 그 기관을 작동하는 방법 역시 저밖에 모릅니다. 기관을 부수거나 파훼하는 것 또한 육 개월 이상 걸리지요. 장담합니다.”
노파는 아쉬울 것이 전혀 없다는 듯 조곤조곤 말을 이어 갔다.
사비강이 입매를 치켜 올렸다.
“대신 좋은 걸 제안하지.”
“우선 들어보지요.”
“그쪽 목숨을 살려 주지.”
“수긍하지 않으면 절 죽이실 생각입니까?”
노파는 끝까지 당당했다.
사비강은 정도맹에서 온 자다.
그들이 명분을 무시하고 영약을 강탈한다면 강호의 지지를 받을 수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문제는 자신이 죽어 버리면 영약은 영영 찾을 수 없게 된다.
그러니 사비강은 결코 자신을 죽일 수 없었다.
하지만 사비강이 입매를 비틀며 말했다.
“아니, 내가 왜 그쪽을 죽일까? 내게 꼭 필요한 존재인데. 난 그쪽을 살려 줄 거라니까.”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오늘 거래는 없던 걸로….”
“마족이 곧 쳐들어올 거야.”
노파가 눈살을 슬쩍 찌푸렸다.
그럴 리가 없다.
이곳의 위치는 정도맹 쪽에만 슬쩍 흘렸다.
무척 은밀히 흘렸기 때문에 정도맹조차도 눈치 채지 못할까 봐 걱정할 정도였다.
한데 마족이 벌써 눈치를 챘다고?
“그런 어쭙잖은 협박이라면….”
“협박이 아니라 사실이다. 너희들의 위치를 내가 흘렸거든.”
순간 허공의 살기가 숨을 쉬기 힘들 정도로 짙어졌다.
‘이런 미친 소리를…?’
노파는 사비강의 말을 일절 믿지 않았다.
그야말로 자신들의 무덤을 파는 일이 아닌가?
반면 매설란은 그제야 사비강과 홍염이 나눈 대화 내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저쪽은?”
“그쪽도 흘려 두었습니다.”
당시에는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는데….
‘그런 뜻이었구나.’
노파는 사비강의 눈빛을 보고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저 말이 사실이라면….’
진짜 미친 진상이 아닌가?
노파가 아직은 희망의 끈을 붙들고 말했다.
“후후. 마족들이 영약을 필요로 할까요? 그들은 복용법도 모르는….”
“마령교의 존야가 그들을 불러들였지. 적어도 존야는 각종 영약들이 강호인들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알고 있을 거고.”
쉽게 말해 마족들이 복용하진 않더라도, 강호인들에게 힘이 될 수 있는 영약들을 두고만 보진 않을 것이란 말.
“끄응.”
노파가 침음을 흘리자 사비강이 말했다.
“잘 선택하라고. 목숨을 건질지, 돈을 건질지. 그도 아니면 완전한 무소유를 이룰지.”
그때였다.
두웅…!
육중한 소음 끝에 바닥과 천장이 뒤흔들리더니 흙가루가 부스스 떨어져 내렸다.
마침 문이 벌컥 열리면서 거한이 소리쳤다.
“침입잡니다!”
“뭣이?”
노파의 시선이 사비강에 잠깐 향했다가 다시 거한에게 옮겨졌다.
“웬 놈들이란 말이냐!”
그때 또 다른 사내가 계단을 달려 내려와 다급히 보고했다.
“마족들입니다! 놈들이 쳐들어왔습니다!”
“이런 미친…!”
미쳤다는 말을 하는 상대가 마족인지 사비강인지 헷갈렸다.
당황한 그녀를 보며 사비강이 사악하게 웃어 보였다.
“자, 거래를 다시 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