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 마교관-478화 (478/670)

# 478

귀환 마교관

478화

“이곳이다.”

아라니우스 공작이 모래로 가득 찬 탁자 위에 깃발을 꽂았다.

모래는 마치 실제 지형을 축소해 놓은 것처럼 산과 들과 길을 보여주고 있었는데, 중원의 강북 지대를 나타내고 있었다.

아라니우스가 손바닥을 펼치고 모래 위를 한 차례 훑듯이 휘젓자 모래더미가 스르르 무너지면서 다시 조성되고 있었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깃발을 꽂아 둔 곳을 중심으로 마치 확대라도 한 것처럼 자세한 지형이 스르르 눈앞에 펼쳐졌다.

“약재상이라더군. 하지만 진열대에 늘어놓은 것들은 쓸모가 없고, 지하 창고에 넣어 둔 것들이 진짜라고 한다.”

“다른 주의할 점은 있습니까?”

눈을 빛내며 물어보는 자는 아일리드 자작이었다.

“이곳에는 무공을 익힌 무인들이 있다고 한다. 그들의 능력이 천차만별이긴 하나 정말 강한 자는 소드 마스터급 실력을 지니고 있다는군.”

“이제는 개나 소나 소드 마스터군요.”

아라니우스 공작이 피식 웃었다.

확실히 아일리드 자작의 말대로 개나 소나 소드 마스터다.

예전에는 소드 마스터가 이렇게 흔하지 않았다.

전 인류를 통 틀어서 소드 마스터가 한 명이라도 생기면 하늘에서 내려온 전사라는 둥, 구국의 영웅이라는 둥 떠들어댔다.

한데 언제부턴가 소드 마스터가 동네 개 이름 수준이 됐다.

어찌 보면 이게 다 드래곤과 마족들 때문이다.

마족과 드래곤이 걸핏하면 인간 세계에 내려가서 실력 자랑을 해대니, 처음에는 불꽃만 만들어도 박수치며 신기해하던 하등한 인류가 어느새 8서클의 마법사까지 만들어내지 않는가?

마계까지 끌려왔다가 기적처럼 인간계로 돌아간 녀석들도 인류 발전에 이바지한 것들이다.

하지만 그 하등한 인류 때문에 마족 역시 발전한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들의 연대감과 협업 방식, 인류학적 지식과 감정의 교류 등은 확실히 마족들에게 많은 자극을 주었다.

마왕 타란트가 끊임없이 인간계를 침입하고 그들을 납치해 오는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정말이지 신기하게도 인간들은 다양한 문화를 가지고 살아간다.

하나의 세계에서만 여러 종류의 문화를 이룬다.

하물며 차원이 다른 곳에 존재하는 인간계는 말할 것도 없다.

어떤 곳은 과학의 발전을 이루었고, 어떤 곳은 중원처럼 무공의 발전을 이루었다.

또한 마족처럼 소드 마스터가 넘쳐나는 인간계가 있는가 하면, 하이서클 마법사들이 득실거리는 세상도 있다.

극히 유한한 삶을 사는 인간이 그처럼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신기한 일이다.

때문에 타란트는 다양한 인간계를 침입한 다음 그들을 납치해서 갖가지 실험을 해왔다.

그리고 그 결과를 받아들여 마족들을 발전시켜 왔다.

그런 덕분에 타란트는 지금의 마족들을 마계에서도 권위 있는 위치에 올려놓았다.

물론 세계를 침략당한 인간들의 입장에서는 타란트가 미울 수밖에 없으리라.

평화롭게 잘 지내고 있던 삶이 마족의 침공으로 하루아침에 풍비박산이 났을 테니까.

하지만 아라니우스는 오히려 인간들이 타란트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만약 그가 아니었다면.

천만분의 일로 바리탄 후작이 반역에 성공했더라면.

그랬다면 지금의 인류는 씨도 남아나지 않으리라.

바리탄은 그 누구보다도 마족 우월주의 사상에 빠진 자였으니까.

그에게 인간은 그저 하등한 생물일 뿐이며, 숱한 세계에 기생하는 악성 기생충으로 반드시 박멸해야 할 대상으로만 보았다.

만약 그가 마왕이 되었더라면, 장담컨대 전 우주에서 살아남은 인류는 몇 되지 않았을 것이다.

“자네도 인류를 박멸해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하는가?”

“굳이 박멸하지 않아도 눈에 보이면 거슬리니 죽이는 게 낫다고 봅니다.”

그야말로 그에게는 방바닥을 기어가는 벌레와 인간이 다를 바가 없었다.

아라니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하지만 우린 일전에 과학문명이 발전한 인간들을 납치해 온 적이 있었지.”

“기억납니다.”

“그들은 엄청난 문명의 발전을 이루었어. 비록 그들의 자만 때문에 무너졌지만.”

“그랬지요.”

“한데 그렇게 자만으로 똘똘 뭉친 인간들도 결국 하등한 곤충들을 본떠서 기계를 만들었지. 그들은 마법을 쓰지 못하면서도 하늘을 날았고, 오러를 다루지 못하는데도 광선검을 사용했네.”

“하등한 벌레라도 관찰은 필요한 법이군요.”

아라니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관찰해 보고 볼 게 없다면 그때 눌러 죽여도 늦지 않아.”

“명심하겠습니다.”

“생각을 깊게 하게. 인간들이 매사에 고심을 하는 건, 그들의 삶이 유한하기 때문이지. 너무 짧거든. 그러니 한 번의 실수로 한 번 뿐인 짧은 인생을 그르치기 싫은 게야. 그러니 때론 하등한 인간의 마음으로 생각해 보는 것도 나쁘진 않네.”

“그렇군요. 그런 의미에서… 혹시 함정은 아닐까요?”

아일리드 자작이 모래 지도를 바라보며 물었다.

“누구의 함정이 아닐까 묻는 건가? 인간? 아니면 바리탄?”

“물론 후자입니다.”

“흐음.”

아라니우스가 눈을 가늘게 뜨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닐 걸세. 그가 무슨 재주로 이런 함정을 판단 말인가? 소드 마스터급의 인간이 떼거지로 몰려 있다면 몰라도.”

“그럴 리야 없겠지요.”

“바리탄은 이제야 육신을 되찾도록 허락 받았네. 그간 인간의 육신을 가지고 무슨 함정을 만들겠는가?”

“하긴 그것도 그렇군요.”

“가서 영약들을 잘 챙겨 오시게. 어려운 일은 아닐 테니.”

“오히려 조금 어려웠으면 싶군요.”

아일리드 자작이 비릿한 웃음을 머금으며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럼 곧 좋은 소식 가지고 돌아오겠습니다, 공작님.”

**

세워져 있는 관에서부터 강렬한 빛이 뿜어졌다.

그 순간 존야는 자신의 몸에서 무언가가 쑤욱 빠져나가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마치 현기증이 일어나면서 기절할 것만 같은 느낌.

하지만 그녀는 잠시 휘청거렸을 뿐 얼른 정신을 다잡았다.

‘주군…?’

속으로 바리탄을 불렀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오랫동안 자신과 한몸을 공유하고 있던 그가 완전히 분리되어 나간 것이 틀림없었다.

대신 눈앞에 세워져 있는 관에서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마침내 도저히 눈을 뜰 수 없는 상황에 다다라서야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파핫!

어느 순간 빛이 터지는 것만 같은 소리를 내더니 순식간에 사방이 고요해졌다.

존야는 착 가라앉은 어둠 속에서 천천히 눈을 떴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금세 주변의 사물이 구분되기 시작했다.

마침내 관의 덮개가 ‘덜컥’ 소리를 내며 열렸다.

콰당!

덮개가 육중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저벅… 저벅…!

관 속에서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

아직은 어둠에 가려져 남자의 얼굴이 정확히 보이진 않았다.

창틈으로 스며드는 빛에 다가설 때까지 존야는 숨도 쉬지 않은 채 기다렸다.

드디어 주군의 본래 모습을 영접하는 순간이었다.

마침내 창틈으로 스며든 달빛이 남자를 비췄다.

“아…!”

존야는 저도 모르게 탄성을 터뜨리고 말았다.

달빛은 금빛이 되어 머릿결을 따라 흐르고 있었다.

길고 부드러운 금발 머리카락은 허리까지 차분하게 늘어져 있었다.

반듯한 이마와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 오뚝하게 날이 선 코와 한일자로 다물어진 입술.

훤칠한 키를 가진 남자는 말로 표현하기 힘들만큼 아름다웠다.

마치 이 세상의 인간이 아닌 것처럼.

하긴 그는 이 세상의 인간이 아니었으니까 어쩌면 당연한 표현이다.

그가 바로 마족 바리탄이었으니까.

존야가 멍하니 서 있자, 바리탄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물었다.

“왜 그리 보느냐?”

바리탄은 목소리조차 아름다웠다.

분명 묵직하고 낮은 남성의 음성이었지만, 아름답다는 표현이 가장 어울리는 목소리였다.

존야가 얼른 정신을 차리곤 대답했다.

“제… 생각보다 훨씬 아름다우셔서….”

바리탄이 피식 미소를 지었다.

평범한 여인이었다면 그 미소를 보는 것만으로도 그 자리에서 혼절을 했으리라.

사실 바리탄을 수호하는 악신 중에서 질투와 미혹의 악신이 있었으니, 그의 외모가 이처럼 수려한 것도 이해 못할 일은 아니었다.

어쨌거나 존야는 바리탄의 미소를 보는 순간 심장이 멎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며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서는 소리쳤다.

“죄, 죄송합니다! 제, 제가 감히 주제 넘는 소리를! 저 같은 늙은이가 감히…!”

하지만 그녀는 말을 마저 잇지 못했다.

어느새 바리탄의 가느다란 손길이 그녀의 턱을 들어 올린 것이다.

바리탄과 눈이 마주친 존야는 얼굴이 홍시처럼 달아올랐다.

바리탄이 존야의 뺨을 쓰다듬으며 미소지었다.

“감히 내 앞에서 세월을 논하느냐? 너는 아직도 한참 어리다.”

“죄, 죄송… 흡!”

순간 존야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감지 못했다.

아니, 그 자리에서 기절하지 않는 것만도 다행이었다.

그녀가 어떻게 할 겨를도 없이 바리탄이 그녀의 입술을 덮쳐 온 것이다.

존야의 눈가에서 이슬이 맺혔다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한참이나 이어진 입맞춤 끝에 바리탄이 몸을 물리고는 존야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존야는 그 외모처럼이나 수줍은 소녀의 마음이 되어 시선을 어디다 둘지 몰랐다.

“내 너를 아끼겠노라.”

“주인님을 위해서… 목숨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존야가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었다.

바리탄이 고개를 저으며 존야의 뺨을 어루만졌다.

“아니. 너의 목숨도 이제는 너의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도록 하라.”

“명심하겠습니다.”

존야가 깊이 고개를 숙였다.

**

마차가 관도를 따라 힘차게 달리고 있었다.

마차 안에는 사비강과 매설란이 타고 있었다.

창밖을 바라보는 매설란의 눈빛은 어딘지 복잡한 심경을 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해?”

사비강의 목소리에 매설란이 고개를 돌렸다.

사비강은 희미한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아, 저 웃음.

얼마 만에 보는 건가?

괜히 울음이 나올 것 같다.

그간 너무 큰일을 겪었다.

사비강이 없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가슴 아픈 이별을 해야만 했다.

돌이켜보면 그 험난한 과정을 어떻게 견뎌 온 것인지 잘 모르겠다.

지금도 어딘가 마취를 당해서 감정이 의지와 상관없이 제멋대로 흐르는 것만 같다.

어느 순간 울적해졌다가 어느 순간 가슴이 부풀고.

사실 조금 전만 해도 그녀는 심란했다.

창밖으로 스쳐 가는 초겨울의 풍경이 너무나 쓸쓸하였기에.

그럼에도 그 풍경은 아름답기까지 해서 죽은 자들이 떠올랐다.

그들은 이런 모습들을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다가 사비강을 돌아보니 그가 옆에 있다는 것이 너무나 감사하다.

이렇게 단 둘만의 공간에서 둘에게만 집중할 수 있었던 시간이 언제였던가?

그가 맹으로 돌아온 직후에는 여러 일로 바빠서 서로를 돌아볼 틈도 없었다.

그러다 이렇게 둘만의 공간에 남게 되니 그간 억눌렀던 감정이 자꾸 치솟는다.

그의 품에 안겨 흐느끼고 투정을 부리고 싶다.

그리고 다 잊은 채 소풍이라도 나온 것처럼 들뜬 마음으로 여행을 하고 싶다.

하지만 매설란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약해져선 안 돼.’

그래,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진정한 싸움은 이제 시작되지 않았나?

자신은 물론 강호인들에게서 많은 것들을 빼앗아 간 마족들이다.

인류의 불청객은 이런 나약한 마음을 비집고 들어온다고 했다.

독해지고, 강해져야 하리라.

사비강이 맹으로 귀환하던 그날, 그의 품에 안겨 한껏 흐느끼려고 했지만 그녀는 결국 그러지 못했다.

사비강에게 자신이라는 또 하나의 짐을 짊어지게 하고 싶지 않았기에.

그래, 더욱 악착같이…

“울고 싶을 땐 울어 버려.”

“……?”

매설란이 움찔거리고는 사비강을 보았다.

사비강이 창밖의 노을을 보며 중얼거렸다.

“우는 건 짊어진 짐을 포기하는 게 아냐. 더 강해지기 위해 ‘나’를 잠시 내려놓는 것일 뿐.”

“…….”

“울고 싶을 땐 마음껏 울어. 적어도 내가 당신 옆에 있을 땐 그 짐들을 지켜 줄 테니까.”

매설란은 충혈된 눈으로 사비강을 보았다.

결국 그녀가 잔뜩 젖은 목소리를 꺼냈다.

“당신… 어째서 날 울리는 거야….”

비로소 눈물이 흘렀다.

모든 이를 떠나보내고, 그녀는 가장 늦게 눈물을 흘렸다.

참고 참고 또 참다가 마지막에야 눈물이 흘렀다.

마차는 관도를 따라 꾸준히 달렸다.

새로운 싸움이 시작될 그곳으로.

두 사람의 운명을 짊어진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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