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7
귀환 마교관
477화
“똥…이라고 했나?”
아라니우스 공작이 미간을 잔뜩 구긴 채 물었다.
그는 차마 그 불결한 것을 입에 담기도 싫다는 표정이었다.
그럼에도 굳이 정확한 단어로 되물어 본 것은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마계에도 ‘아끼면 똥 된다’는 속담이 있다.
하지만 이건 아니다.
분명히 드래곤 하트가 보관되어 있어야 할 상자였다.
한데…
“똥이라니! 웬 똥이란 말이냐!”
“그, 그것은 저도 잘….”
아일리드 자작은 머리를 조아리면서 창백한 얼굴로 대꾸했다.
일전에 손허정과 오요광을 일격에 날려 버릴 때의 냉정함은 결코 찾아볼 수 없는 얼굴이었다.
“틀림없이 그게 똥이었단 말인가?”
“그, 그렇습니다. 분명 똥이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아일리드 자작 역시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번 임무는 너무나 쉬웠다.
오히려 너무 쉬워서 흥미가 떨어질 정도였다.
이계에 도착하자마자 처음으로 맡은 임무가 드래곤 하트를 가져오라는 거라니.
사실 이런 임무는 하급 마족들에게 시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드래곤 하트가 보통 물건은 아니니 애써 납득하면서 토이산으로 향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결과가 될 줄이야!
“위치가 틀린 것은 아닐 테지?”
“분명 그곳입니다. 결계도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그럴 리가… 설마 차원 전송에 실패한 것인가? 아니다.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만약 그랬다면 바리탄 후작이 저렇게 돌아다니지도 못할 터. 자네가 잘못 본 것은 아닌가?”
“설마하니 제가 드래곤 하트와 똥도 구분 못하겠습니까? 그래도 혹시 몰라서 상자를 가져오긴 했습니다.”
“상자를 가져와?”
“예. 공작님.”
“아니, 똥 든 상자를 뭐 하러 여기까지 가져왔단 말인가?”
“그래도 혹시 몰라서….”
“치우게! 내게 똥내나 맡으란 소린가?”
“그, 그럴 리가요! 죄송합니다!”
“이런 제길!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아라니우스 공작은 입술을 질끈 씹고는 불같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하지만 그는 곧 이어질 끔찍한 소식들에 대해서 조금도 짐작하지 못했다.
**
굵은 기둥이 높은 천장을 장엄하게 떠받치고 있었다.
기둥을 휘감아 오르는 줄기의 조각은 마치 수백 마리의 뱀이 살아서 꿈틀거리며 하늘로 올라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기둥 사이에 길게 깔린 붉은 색 융단.
융단의 양쪽으로는 상급 마족들이 엄숙한 표정으로 도열해 있었고, 맨 안쪽의 단상 위에는 태사의에 마왕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태사의 옆에는 거대한 블랙 드래곤이 웅크리고 앉아 있었는데, 마치 마왕의 손길을 느끼듯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일정한 간격으로 콧김을 뿜어내고 있었다.
건장한 체격의 중년 남성 모습을 한 마왕은 외형적으로 볼 땐 인간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다만 그의 전신에서 우러나오는 강렬한 마력 때문에 주변의 공기는 숨이 막힐 정도로 답답했다.
게다가 ‘마왕’이라는 존재 자체가 뿜어내는 위압감은 가히 상상을 초월할 지경이었다.
어지간한 무인이라도 그 앞에 선다면 온전한 정신을 유지하기 힘들 정도.
아라니우스 공작이 한 걸음 나서며 고개를 깊이 숙인 채 머리를 조아렸다.
“송구합니다, 폐하.”
스르륵. 스르륵.
마왕, 타란트는 여전히 눈을 지그시 감은 채 팔을 의자 밖으로 척 늘어뜨리고는 블랙 드래곤의 콧잔등을 쓰다듬고 있었다.
아라니우스 공작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이미 모든 보고를 올린 상황.
더 이상 할 말이 없는데, 마왕은 그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마왕의 의중을 알 수 없었기에 그는 그저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마왕의 무거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결국… 아무것도 회수하지 못했다는 건가?”
그가 실눈을 떴다.
그 순간 장내의 모든 마족들은 그 자리에서 그대로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타란트의 붉은 눈동자에서 한기가 풀풀 휘날렸다.
“송, 송구합니다.”
아라니우스 공작이 다시 한 번 고개를 조아리자, 타란트는 무심한 눈길을 한 번 던지더니 다시 스르르 눈을 감았다.
숨 막힐 듯한 시간이 흘렀다.
누구도 쉽게 입을 열지 못하는 상황.
그도 그럴 것이 그토록 오랜 기간 계획을 해온 일이었다.
한데 차원 전송을 한 그 많은 물건들이 대부분 사라진 상황이 아닌가?
그나마 바리탄이 보유하고 있는 몇 가지 물건들만 받아 놓은 상황.
하지만 전송했던 수많은 물품들에 비하면 그 양과 질에 있어서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특히 마왕의 검인 베르타스를 찾아내지 못한 건 뼈아픈 부분이었다.
베르타스는 사비강이 가지고 있었지만, 이미 한 차례 그 모양이 변한 적이 있었기에 마계수의 기억을 흡수한 아들러 백작도 미처 알아보지 못했다.
어쨌거나 이 뜻하지 않은 상황에 마족들은 어쩔 줄을 몰라 고개만 조아리는 상황.
그렇다고 단순히 회수만 담당했던 아라니우스 공작을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때 마침 거대한 성문 밖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바리탄이 뵙기를 청하옵니다.”
순간 장내가 술렁거렸다.
바리탄 후작은 반역을 일으켰던 중죄인.
아무리 그가 이번에 공을 세워서 차원 이동이 앞당겨졌다지만 고작 칠 년에 불과하다.
무한한 세월을 살아가는 마족들에게 칠 년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닌 차이.
한데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나타난단 말인가?
몇몇 마족들이 노골적으로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폐하, 그가 들어올 자리가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폐하. 추후에 따로 들라 하심이 좋을 듯합니다.”
“그는 중죄인입니다. 이런 자리에 그가 들어서는 것은….”
하지만 그들의 발언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시종 눈을 감은 채 무심히 듣기만 하던 타란트가 손을 들어 제지한 것이다.
“들라 해라.”
타란트의 묵직한 음성이 떨어지자 그 누구도 반박하지 못했다.
마왕의 명은 절대적이었다.
잠시 후 붉은 색의 긴 융단을 따라 앳된 소녀가 자박자박 걸어왔다.
강렬한 마력을 발산하는 마족들 사이에서 조그마한 체구의 소녀가 들어서니 마족들의 얼굴에 저마다 가소로움이 내비쳤다.
하지만 소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마침내 단상 앞에 다다른 소녀가 한쪽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깊이 숙였다.
“폐하를 뵙습니다.”
“나를 찾아온 이유는?”
타란트는 긴 말을 하지 않고 본론부터 꺼냈다.
고개를 숙인 소녀의 표정에 쓴 웃음이 스쳤다.
‘역시 성품은 여전하시군.’
소녀의 모습을 한 바리탄이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말을 이었다.
“차원 전송한 물품들을 회수하지 못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해서,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뵙기를 청하였습니다.”
“말하라.”
“이곳 중원이라는 곳에는 각종 영약이 있습니다. 이를 테면 만년설삼이라든지 공청석유와 같은 것들인데, 그것들을 복용한다면 상당한 내공을 흡수하게 됩니다. 그 내공을 마나로 치환한다면 차원 전송한 물품들을 회수하지 못하더라도 큰 문제는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자 듣고만 있던 아라니우스 공작이 코웃음을 쳤다.
“말은 쉽군. 하나 이곳에서도 그런 영약들은 구하기가 쉽진 않을 것인데 무슨 수로 그것들을 수집한다는 건가?”
“물론 일일이 그 영약을 다 찾아다니면서 수집하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중원에는 어둠 속에서 번거러운 일을 대신 해주는 존재들이 꽤 있습니다. 물론 그들에게는 상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원하는 걸 얻는 게 이곳의 규칙이지만….”
“짧게 말하라.”
“죄송합니다. ‘만약상(萬藥商)’이라는 자가 있습니다. 중원의 각종 진귀한 영약을 보유하고 있으면서 그것으로 장사를 하는 자지요. 그 자를 찾아내면….”
“찾았나?”
타란트가 본론만 말하라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
바리탄이 고개를 숙이며 대꾸했다.
“최근 꼬리를 밟았습니다. 제게 기회를 주신다면 반드시 영약들을 모두 가져와 폐하께 바치….”
“반역의 중죄를 저지른 죄인에게 그런 무거운 임무를 맡겨서는 안 됩니다, 폐하.”
아니나 다를까 즉각 반발이 일어났다.
“그렇습니다. 차라리 그에게 만약상의 위치를 물어 다른 자가 찾아가도록 하심이 옳다고 생각됩니다.”
“아라니우스 공작이 이번 일을 주관하시니 그에게 맡기십시오.”
여러 귀족들이 나서며 말했다.
아라니우스는 내심 흡족했다.
만약 다른 자들이 나서지 않았더라면 자신이 직접 나서서 말릴 생각이었다.
한데 알아서들 이렇게 나서 주니 상이라도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가 무릎 꿇은 바리탄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제 알겠나? 바리탄. 한 번 낙인이 찍히면 좀처럼 그 늪에서 벗어날 수 없는 법일세. 자네는 지나친 모험주의자야. 차린 밥상은 내가 잘 받아먹겠네.’
귀족들이 아우성치자 타란트는 다시 손을 들어 그들을 제지했다.
대신 그가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는 기사단장 헬무트를 보며 물었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감히 말씀을 올리자면, 바리탄에게는 정보를 제공한 정도에서 그 공을 치하하고, 만약상을 찾아가 영약을 회수하는 일은 아라니우스 공작님이 마무리 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그의 말에 모두가 동의한다는 듯 깊이 고개를 끄덕였다.
헬무트는 헬무트 기사단을 이끌고 있었는데, 주로 토벌 임무가 주어지면 선봉에서 맹활약을 하곤 했다.
타란트가 가장 신임하는 기사단장이자, 수많은 기사들의 존경을 받는 자였다.
때문에 작위는 비교적 낮았지만, 그 누구도 헬무트를 함부로 대하지는 못했다.
타란트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바리탄을 보며 입을 열었다.
“자네가 세운 공을 인정하지. 원하는 게 있는가?”
“감사합니다, 폐하. 중죄를 지은 죄인으로서 감히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다만 한 가지 원이 있다면… 제 보잘 것 없는 육신을 되찾고 싶습니다.”
“그건 안 될 말…!”
귀족들이 반발하려는데, 타란트가 손을 저으며 귀찮다는 듯 말했다.
“내줘라.”
“하지만 폐하…!”
타란트는 말하는 대신 눈을 뜨고 항의하는 마족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이미 그의 눈빛에서 확고한 의지가 읽혔다.
바리탄이 재빨리 무릎을 꿇으며 바닥에 이마를 쿵쿵 찧었다.
“감사합니다, 폐하!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사옵니다!”
한편 아라니우스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었다.
**
“드디어 찾았습니다.”
홍염의 보고에 사비강이 휙 돌아섰다.
“확실한가?”
“확실합니다. 오늘이라도 곧바로 떠나시면 됩니다.”
“저쪽은?”
“그쪽도 흘려 두었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매설란이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말했다.
“그런데 이해가 안 돼. 왜 지금까지 숨어 있었던 거지? 이렇게 혼돈한 시기라면 오히려 영약의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아서 벼락부자가 될 만도 할 텐데.”
사비강이 너무나 간단하게 대답했다.
“돈 보다는 목숨이 소중했을 테지.”
“목숨?”
“우리에게 영약을 팔았다간 마령교에게 전멸당할 가능성이 있을 테니. 일단은 숨을 죽이고 상황을 지켜보자는 거지.”
“그런데 지금은?”
“마령교가 멸망했고, 얼토당토않게 마족이 나타났잖아. 지금쯤이면 그 정보를 그들도 입수했을 것이고. 그렇다면 간단하잖아?”
“마족에게 영약을 팔수는 없을 테니까 연맹에 위치를 슬쩍 노출해서 일부러 찾아오게 한 거다?”
“그래.”
“어차피 마족은 영약 따위는 관심 없을 테니까. 반면 우린 부르는 대로 돈을 지불해서라도 영약이 필요할 거고.”
“그렇지.”
“왠지 좀 괘씸하네.”
“그게 장사꾼이야. 하지만….”
“하지만?”
“상대를 잘못 골랐어.”
“어느 상대? 마족? 우리?”
사비강이 입매를 비틀고는 대답했다.
“둘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