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3
귀환 마교관
473화
고급스러운 융단이 깔린 집무실.
분명 중원의 느낌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마치 서역의 왕실과 닮은 곳.
여긴 바로 마족 아라니우스 공작의 집무실이었다.
나이 지긋한 그는 이제 막 문을 열고 들어서는 소녀를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소녀는 존야였다.
잠시 서 있던 그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바리탄 경?”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라니우스 공작 저하.”
“정말 바리탄 경이었군.”
인자한 노인의 얼굴을 한 아라니우스가 푸근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역겹군.’
소녀의 몸을 한 바리탄은 내심 그의 웃음을 경멸했다.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이 늙은 구렁이가 짓는 미소는 온전한 웃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겉과 속이 완벽하게 다른 인간이 바로 아라니우스다.
뿐만 아니라 마계 귀족들 중에서도 유달리 자신을 싫어하는 마족이 바로 아라니우스였다.
“어쩌다 그런 계집의 몸에 들어가게 되었나?”
“안 될 게 있습니까?”
“안 될 건 없지.”
아라니우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말을 이었다.
그는 창가로 걸어가서 찻잔에 찻물을 채웠다.
돌아선 그는 바리탄에게 차를 권하지도 않은 채, 예의 그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 갔다.
“그래도 나는 자네가 좀 더 우람한 모습으로 나타날 줄 알았네. 사실 나는 이 계획에서 회의적이었지. 소울비드에 자네의 영혼을 봉인해 봐야 화신을 찾아낼 가능성은 극히 드무니까. 한데 강림 시기를 이만큼이나 앞당겼으니, 그야말로 운이 좋았어.”
바리탄이 씨익 웃으며 말을 받았다.
“예전에 말씀하셨지요. 세상에 운이란 없다고. 모든 것이 필연적인 결과에 의한 것이라고.”
바리탄은 은근히 자신의 역량을 과시했다.
하지만 아라니우스는 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나?”
“예, 분명히 그러셨지요.”
“너무 오래 된 일이라 잊은 모양이로군.”
“저하께서도 이제 기억력이 약해지셨나 봅니다.”
바리탄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아라니우스는 눈살을 게슴츠레 뜨더니 곧 빙그레 웃으며 대꾸했다.
“그런가보네. 하긴 그러지 않았더라면 내 어찌 자네와 이렇게 한 자리에 있겠는가? 반역에 대한 감정마저도 희미해지니까 이렇게 마주보며 웃을 수 있는 것일 테지.”
언중유골에 바리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망할 영감…!’
그와는 달리 아라니우스는 여전히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어쨌거나 고생 많았네. 자네 덕에 계획보다 빨리 진행할 수 있게 되었네.”
“아들러 백작이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겠군요.”
“그렇겠지. 칠죄종에 걸린 인간들은 모두 그의 노리개가 되니까. 물론 그는 잡은 물고기보다 놓친 물고기에 흥미를 더 드러내지만.”
“생각보다 쓸 만한 노리개가 많을 겁니다.”
“듣기 좋은 소식이로군.”
“해서 말인데….”
바리탄이 넌지시 기대하며 입을 열었다.
“제 본체를 되찾을 때가 되지 않았…”
“더 자세한 이야기는 또 하세.”
아라니우스가 말을 끊으며 돌아섰다.
바리탄은 이마에 핏대가 서는 것을 느꼈다.
‘이 영감탱이가 말을 돌려?’
그렇다고 순순히 물러날 그가 아니었다.
“생각보다 쉽지만은 않은 일이었습니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제가 많은 걸 도울 수 있을 겁니다.”
그제야 아라니우스 공작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아주 잠깐 눈매가 가늘어졌을 뿐인데, 그 작은 변화만으로도 방안의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는 듯했다.
‘과연 굉장한 마력이로군.’
바리탄은 이 늙은 구렁이가 말만 화려하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은 나약한 노인네 흉내를 내고 있지만, 그가 진정으로 화가 났을 때는 누구보다 무서운 자다.
“자네의 도움이라….”
“거래만큼은 반드시 지킵니다.”
바리탄이 다시 한 번 말했다.
그는 은근히 강조하고 있었다.
자신이 상명하복에 따라 움직인 게 아니라는 점을.
‘신의’가 아닌, ‘거래’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과거 자신의 반역은 별개의 일로 치부하고, 상대에게는 계약의 책임도 추궁할 수 있는 셈이 되는 것이다.
물론 아라니우스 역시 그런 얄팍한 수에 순순히 넘어갈 정도로 단순하진 않았다.
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거래도 곧 신의에 의한 것. 자네의 화려한 전적을 생각한다면 쉬이 믿을 수 없는 문제군.”
“기억력이 그세 좋아지셨나 보군요.”
바리탄이 가시 돋친 말을 하자, 아라니우스는 오히려 굳은 표정을 풀고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기뻐해야 할 일이 아닌가? 이 늙은이가 아직 정정하다는 뜻일 테니.”
“아무렴 그렇지요.”
“폐하께서 곧 강림하실 테니 자세한 이야기는 그때 나누세.”
바리탄이 아라니우스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희미한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이제부터 바빠지겠군요.”
“그럴 테지. 본성을 중심으로 테라포밍 지역이 확장될 걸세. 마왕께서 강림하시면 이곳의 마계화 속도는 더욱 빨라질 테지. 물론 그땐 열두 악신의 보살핌으로 언어도 문제가 없을 테고.”
“그렇군요.”
“아, 그전에 먼저 전송했던 도구들부터 회수해야겠군.”
드래곤 하트를 비롯한 온갖 마법 도구를 말하는 것이었다.
바리탄은 내심 조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또 보세.”
아라니우스가 빙그레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바리탄이 방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참.”
아라니우스가 잊은 게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그 몸… 제법 자네하고 잘 어울리는군.”
“감사합니다.”
바리탄이 씹어뱉듯이 말하고는 돌아섰다.
공작의 집무실을 빠져 나온 그녀의 얼굴은 벌레라도 씹어 삼킬 정도로 흉악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도구 회수라… 공작의 얼굴이 어찌 변할지 궁금하군.’
존야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죽여 버리면 안 됩니까?”
무척이나 패도적인 말에 바리탄은 흠칫거렸다가 피식 웃었다.
“그리 쉬운 자가 아니다.”
“저들이 약속을 지킬까요?”
“폐하께서는 반드시 지킬 것이다. 조금만 기다리면 된다.”
“저로선 상관없습니다만. 주군께서 상심이 크실까 걱정입니다.”
“걱정할 것 없다. 때가 되면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올 테니.”
“알겠습니다.”
그렇게 자문자답을 하는 소녀는 복도를 따라 어디론가 바삐 걸었다.
**
바람이 선선하게 불었다.
얼마 만에 가져보는 여유인가?
갑판으로 나온 능운파는 마주쳐 오는 바람을 음미하면서 눈을 지그시 감았다.
지친 몸은 당장이라도 쓰러져 잠이 들 것만 같은데,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았다.
침상에서 잠시 뒤척이다가 몸을 벌떡 일으킨 그는 갑판에서 찬바람을 맞으며 어둑하게 스쳐가는 뭍의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뭍이 아닌 그 너머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곳에서는 거대한 식물 줄기에 얽매여서 허우적거리는 연맹의 무인들이 바글거리고 있었다.
헐벗은 남녀가 서로 뒤엉켜서 열락의 신음을 터뜨렸고, 분노와 시기, 교만이 넘쳐흐르는 인간들이 세상을 비웃으며 자멸했고, 흉포한 마물들이 인간들을 산 채로 뜯어먹었다.
“맹주님! 살, 살려 주십시오! 크아악!”
“맹주! 당신이 강호의 주인 아니오? 어째서 이 사태를 보고만 있는 거요!”
“더 이상 우리에겐 희망이 없다! 크아악!”
수많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귀에 쟁쟁 울렸다.
어떤 정파 무인은 애원을 했고, 어떤 사파 무인은 원망했으며, 또 어떤 이는 절망했다.
그 모든 절규를 들으며 능운파는 미간을 지그시 모았다.
그렇게 소음 속에 잠기다 보니 오히려 적막이 찾아왔다.
촤르륵. 촤르륵.
배가 물결을 가르며 나아가는 소리만 울렸다.
천천히 눈을 뜬 능운파는 물결에서 뭔가 이상한 것을 보았다.
“맹주…! 혼자 살아남으셔서 좋으시오?”
“당신은 강호의 기둥이 되겠다고 자처하지 않았소?”
“어째서 그 배에 올라탄 것이오? 우리를 버리고….”
수면이 솟아오르면서 마치 사람의 상반신 모양으로 변하며 소리치는 것이 아닌가?
순간 능운파는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허상이 보이는 것인가!’
그는 적잖게 당황했다.
보통 이런 환영은 기력이 쇠했을 때나 눈앞에 보이는 것.
하지만 지금 그는 운기조식을 막 마친 상황이었기에 어느 정도의 기력은 회복한 상태였다.
‘나는… 나는 자네들을 버리지 않았네.’
“그럼 무엇이오? 능력이 모자랐다는 핑계를 대는 거요?”
“하긴, 핑계가 아니라 사실이지. 애초에 그는 우릴 구할 능력이 없었으니까.”
“자괴감에 빠져 있는 척하면 모든 게 용서될 줄 알았소?”
능운파가 입술을 질끈 씹었다.
‘그만…!’
“뭘 그만 하란 소리요? 이젠 우리의 하소연조차 못 듣겠소?”
“자, 보시오. 여기 희생당한 무인들을. 우린 당신만 믿었소!”
“한데 그 믿음에 배신당했지!”
“당신은 죽어 가는 동지들을 두고만 보았어!”
이제 강물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상반신을 내밀고 원망을 잔뜩 쏟아내고 있었다.
그 아우성에 고막이 멍멍할 지경이었다.
‘그만… 그만…!’
“맹주님.”
‘그만…!’
“왜 그러십니까? 맹주님!”
문득 등을 때리는 목소리에 능운파가 격노해서 돌아섰다.
“그만하라고 하지 않았던가!”
쉬이이이익!
순간 일장을 뻗은 능운파가 상대를 확인하고는 흠칫 떨며 얼른 공력을 회수했다.
하지만 이미 뻗어 나간 힘이 상당했기에 공격을 완전히 멈출 수는 없었다.
휘리릭, 탁!
천만다행히도 상대는 상반신을 젖히면서 능운파의 장력을 피하고는 반사적으로 그의 손목을 낚아챘다.
“맹주님!”
“욱, 욱 회주…!”
능운파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면서 놀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욱청풍이 미간을 잔뜩 모으고는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아, 아무것도 아니도. 잠시 생각에 잠겨 있었소. 미안하오.”
능운파가 얼른 손을 거둬들이며 사과하자, 욱청풍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주무시지 않으십니까?”
“많은 일을 겪었지요.”
능운파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시선이 건너편 배의 갑판으로 향했다.
그곳에서는 연맹의 무인들이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웃고 떠드는 소리가 가득했다.
마침 그들이 이쪽에 선 능운파를 보았는지 소리쳤다.
“엇! 맹주님이시다! 맹주님 만세!”
“맹주님 만세!”
무인들이 외치는 소리에 능운파가 쓴 웃음을 지었다.
“손이라도 흔들어 주시지요.”
욱청풍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하자, 능운파가 가만히 중얼거렸다.
“이제야 들어보는군.”
“무슨 말씀이신지…?”
“저들은 사비강 관주와 총군사를 향해 만세를 불렀소. 곤륜과 공동을 향해서도. 하지만 내게는 이제야 부르는군.”
“허허허.”
욱청풍은 능운파가 속 좁은 척 농담을 한다고 생각하며 너털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그는 곧 능운파의 표정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느끼고는 미간을 슬쩍 좁혔다.
게다가 조금 전…
‘잘못 본 것인가?’
언뜻 능운파의 눈빛에서 강렬한 증오가 느껴진 것이다.
어쩌면 일렁이는 횃불이 비쳐서 유독 그렇게 보였는지도 모른다.
분명한 건 능운파의 표정이 어딘지 잔뜩 경직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맹주님…”
욱청풍이 넌지시 부르자, 맹주가 돌아보았다.
“괜찮으십니까?”
그 순간, 아주 잠깐 맹주의 표정에 다시 한 번 짜증이 솟구쳤다.
하지만 주변이 어두운 데다 아주 짧은 순간에 일어난 일이었기에 욱청풍도 눈치 채지 못했다.
능운파가 다소 무뚝뚝하게 답했다.
“또 그 소리로군. 회주께서도 내가 썩 미덥지 못하오?”
“아닙니다. 심기를 불편하게 해드렸다면 죄송합니다.”
“뭐, 그렇게까지. 다만 오늘 그 소리를 자주 듣는구려. 나는 아주 괜찮소.”
“다행입니다.”
“그럼 그만 쉬시오. 나 또한 휴식을 취해야겠소.”
말을 마친 능운파가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는 마지막까지 환호하는 무인들을 향해 손을 흔들지 않았다.
아마도 자격지심 때문이리라.
욱청풍은 그리 생각하며 가만히 중얼거렸다.
“맹주님께 감사를 표하지 않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일 겁니다. 심려치 마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