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0
귀환 마교관
470화
언덕 위에 선 소녀는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저만치 보이는 흑성을 가만히 응시했다.
살을 엘 것만 같은 추위였음에도 소녀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얇은 경장 한 벌이 전부였음에도 그녀는 전혀 추위를 타지 않는 듯 평온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아니, 오히려 모종의 기대를 품은 얼굴로 흑성을 보았다.
“보이느냐?”
“보입니다.”
소녀가 자문자답했다.
“네가 이룬 것이다.”
“저 혼자서는 이룰 수 없었을 겁니다. 주군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겁니다.”
“내 육신을 찾으면 너의 공을 크게 치하하겠다.”
“감사합니다.”
소녀는 바로 ‘존야’였다.
그녀는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아오른 검은 첨탑을 감회에 젖은 얼굴로 바라보았다.
아성의 첨탑은 구름 위까지 치솟아서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 주변으로는 와이번들이 날갯짓을 펄럭이며 유유히 선회하고 있었다.
마침 존야가 문득 기억난 듯 입을 열었다.
“한데… 그 녀석의 죽음을 완전히 확인하지 않았는데 괜찮을까요?”
흑귀를 두고 말한 것이었다.
절벽에서 추락하던 중에 흑귀는 존야와 따로 떨어졌다.
그 후 존야는 흑귀의 죽음을 확인하지 않은 채 곧장 이곳으로 온 것이다.
“아마 죽지 않았을 테지. 놈은 악신과 계약을 맺은 몸이다. 쉽게 죽진 않았을 거다.”
“그럼…”
“상관없다. 어차피 그놈은 우리 마족들에게 걸리면 언젠간 죽게 된다. 다만 신경 쓰이는 것은….”
“역시 사비강입니까?”
“그렇다. 그자가 어찌하여 마계에 대해 아는 것인지 알 수 없군. 이 부분은 마왕께 보고를 해야겠지.”
“그렇군요.”
말을 마친 존야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
“가자.”
순간 존야가 언덕 위에서 사라졌다.
대신 그는 성문 바깥 지역의 막사가 펼쳐져 있는 공터 복판에 나타났다.
워낙 자연스럽게 나타났기에 막사 근처에서 어물쩍거리던 병사들도 그를 단번에 알아채지 못했다.
병사들은 마족이나 인간이 아닌, 고블린과 같은 몬스터들이었다.
애초에 마왕성 근처에 터를 잡고 지내던 몬스터들이 대거 소환되었기 때문에 녀석들은 마왕성을 지키는 병력이라고 볼 수 있었다.
“크익! 웬, 웬 놈이냐!”
“인간! 인간이다!”
마침 근처에서 서성거리던 고블린들이 뒤늦게 존야를 눈치 채고는 창검을 내밀었다.
“비켜라. 하등한 생물들아.”
존야가 싸늘한 눈길로 고블린들을 훑어보았다.
그러자 고블린 중에서도 우두머리로 보이는 녀석이 고함을 지르며 나섰다.
“취잇!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퍼억!
우두머리 고블린은 더 이상 말을 잇지도 못하고 머리에 칼이 박힌 채로 넘어갔다.
마침 고블린 중 한 마리가 화들짝 놀라면서 소리쳤다.
“취이잇! 내, 내 칼이…!”
그가 허리춤에 패용하고 있던 칼이 저절로 뽑혀 날아가서 우두머리의 이마에 박혔던 것이다.
차차차차차창!
순간 고블린들이 일제히 존야를 에워싸고는 무기를 앞세웠다.
녀석들의 칼날에서 살기가 흉흉하게 일어났다.
존야가 눈살을 찌푸리고 귀찮은 표정을 짓는데,
“물러나라.”
묵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고블린들이 흠칫거리고는 돌아보니 검은 갑옷을 입은 사내가 커다란 흑마를 타고 있었다.
“그, 글레이드님!”
고블린들이 일제히 물러나면서 흑기사를 향해 고개를 깊이 숙여 보였다.
흑마를 탄 채 형형한 안광을 내뿜으며 다가온 글레이드는 존야 앞에서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너는 누구냐?”
존야는 글레이드를 가만히 보더니 입매를 슬쩍 말아 올렸다.
“오랜만이구나, 글레이드.”
“……!”
글레이드가 미간을 좁혔다.
그러자 그의 푸른 안광이 유난히 빛을 뿜는 것만 같았다.
일단 인간이 마계의 언어를 사용한다는 사실에 놀랐다.
물론 이곳이 마계라면 그럴 수 있는 문제다.
하지만 여긴 중원이라는 곳이 아니던가?
이곳이 마계와 같은 언어를 사용할 리는 없었다.
게다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
분명 자신을 잘 알고 있는 자의 태도였다.
순간 그의 머릿속을 스치는 기억이 떠올라 눈을 크게 떴다.
“설마… 바리탄 후작님…?”
“이제야 날 알아보다니. 감이 떨어졌군. 하긴 너무 오랜만이기도 하지.”
존야가 냉소를 지으며 말하자 글레이드가 흠칫거리고는 말에서 내려와 고개를 숙였다.
“알아 뵙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그러자 주변에서 어정쩡하게 서 있던 고블린들이 엉겁결에 무릎을 꿇으며 바닥에 머리를 찧었다.
존야가 재미있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불과 삼백 년 전까지만 해도 너는 마왕성의 경비대장을 맡고 있었는데… 어느새 기사단장이 되었나 보군.”
“타몬스 기사단을 맡고 있습니다.”
“호오. 많이 컸군.”
글레이드가 쓴 웃음을 지었다.
“무려 삼백 년입니다. 그곳의 삼백 년은 이곳보다도 훨씬 길지요. 제게도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후후. 어딘가에 갇혀 영원의 시간을 느끼다 보면 조금 더 길고 짧은 차이는 별 것 아닌 것처럼 느껴지지.”
“…….”
“아성에는 누가 계신가?”
“아라니우스 공작님이 계십니다.”
존야가 조금은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아직은 마왕이 강림하지 않은 것이리라.
하지만 마왕의 강림은 이제 시간문제였다.
다만 마왕이 지닌 에너지가 워낙 강렬하기에 시간이 조금 걸릴 뿐.
어쨌거나 여기까지 왔으니 아라니우스 공작을 만나야 할 것이다.
그는 마왕성에서 ‘다섯 별’이라고 부르는 권력자 중 한 명이었다.
다만 반역을 계획했던 자신을 병적으로 싫어한다는 점이 다소 걸리긴 했다.
‘하지만 백 년도 더 지난 일이니….’
지금은 또 어떤 입장이 되어 있을지 알 수 없다.
어쨌거나 언젠간 부딪쳐야 할 자다.
존야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안내하게.”
“따라오시지요.”
글레이드가 몸을 돌려 앞장섰다.
**
촤아악!
두꺼운 가죽이 찢어지면서 녹색 피가 튀어 올랐다.
“크아악!”
주둥이가 길게 튀어나온 리자드맨이 비명을 내지르며 쓰러졌다.
“헉, 헉, 헉…!”
추량은 마나 검과 마나 방패를 앞세운 채로 주변을 경계하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끝이 없는 싸움이었다.
이제는 추격조도 지쳐 포기할 때쯤이 되었건만 녀석들은 그야말로 아교처럼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정말이지 징글징글하군.”
추량이 이마에서 흐르는 땀을 소매로 대충 닦아내고는 이를 빠득 갈았다.
곳곳에 난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운에 따라 갈라지는 일이 빈번했다.
한 녀석을 죽이면, 다른 한 녀석에게 죽는 무인들이 수두룩했다.
어젯밤부터 정사연맹을 습격한 마물들은 오늘 해가 질 때까지 쉴 틈을 주지 않고 몰려오고 있었다.
정사연맹은 후퇴와 전투를 거듭하면서 버티고 있었지만, 이대로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마침 추량을 에워싼 리자드맨들이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크룩! 저놈 마계의 무기를 사용한다! 크룩! 어떻게 된 거지?”
“크룩! 내가 어떻게 알아? 크룩!”
“멍청한 고블린 녀석들에게서… 크룩! 빼앗은 건가?
“그렇겠지!”
하지만 추량은 리자드맨들이 나누는 대화를 단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했다.
이따금씩 딸꾹질이라도 걸린 것처럼 ‘크룩!’ 하고 내뱉는 의미 없는 소리만 귀에 박혀들 뿐이었다.
리자드맨이 사용하는 언어는 마계어, 즉 마족들이 사용하는 언어였기에 중원에서 사용하는 한어와는 전혀 달랐다.
‘이 도마뱀 같이 생긴 것들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역시나 몇 번을 겪어도 마물들이 의사소통을 한다는 것에는 익숙해지지 않았다.
“크루룩! 아무래도 상관없다! 크룩! 저놈을 죽인 놈이 저 물건 주인이다! 크룩!”
“크룩! 당연한 소리! 하지만 결국 내가 주인이 된다!”
“흥! 그건 두고 봐야 한다! 크루루루룩!”
리자드맨 중 한 녀석이 독특한 호흡을 내뱉으며 추량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래, 와라! 이 도마뱀 새끼들아!”
추량 역시 물러나지 않고 마주 부딪쳐 갔다.
어차피 물러날 곳도 없었다.
사방이 도마뱀과 늑대, 돼지 새끼들 천지였다.
이제 오백 명도 남지 않은 연맹의 무인들을 아예 말살하려고 작정하고 달려드는 마물들이었다.
이쯤 되니 그들에 대한 공포보다도 분노가 더 솟구쳐 올라왔다.
까앙!
마나 검과 녀석의 칼이 부딪치자 불꽃이 튀었다.
마나 검에 내공까지 실었는데, 팔이 저릿저릿하게 울려 왔다.
과연 마물 녀석들은 체내에 마나를 어느 정도 보유하고 있다더니 그게 사실인 듯했다.
“쿠와아악!”
배후에서 또 다른 리자드맨이 괴성을 내지르며 덮쳐 왔다.
얼른 몸을 돌린 추량이 마나 방패를 들어 막았다.
쩌엉!
“크웃!”
머리가 울릴 정도의 충격이었다.
파치짓!
순간 내기가 흐트러지자 마나 방패가 균열이 가는 것처럼 흐릿해졌다가 다시 생겨났다.
“제기랄, 죽어 버렷!”
추량이 어울리지 않는 욕지거리를 뱉어내며 마나 검을 쑤욱 뻗었다.
푸욱!
“커억!”
혼신을 다한 일격이 통한 것인지, 마나 검이 녀석의 복부를 뚫었다.
때마침 주변을 포위한 리자드맨 일곱 마리가 동시에 추량을 향해 달려들었다.
“크룩! 지금이닷!”
“죽여랏!”
“크룩크룩!”
찰나지간 추량은 죽음을 직감했다.
‘제길, 이런 곳에서 이름도 모르는 마물 따위에게 죽다니. 내 인생도 참 기구하네!’
평소라면 이렇게 허무하게 당하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너무 지쳤다.
벌써 며칠 째 잠도 자지 못한 채 싸우지 않았나?
온갖 서러운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는데, 갑자기 거짓말처럼 힘이 솟는 것이 아닌가?
추량은 본능적으로 그 기운을 발산하면서 기합성을 터뜨렸다.
“흐아아아압!”
순간,
쩌저적…!
콰차차차차차창!
그가 내질렀던 마나 검이 순식간에 산산조각 나면서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필살기로 익혔던 파기검이었다.
조각조각 흩어진 마나 검의 파편들이 그대로 날아가 리자드맨을 고슴도치로 만들어 버렸다.
푹푹푹푹푹!
“크아악!”
“쿠아아악!”
비명과 함께 리자드맨들이 몸을 뒤집으며 쓰러져 갔다.
“고맙다… 반묘.”
그렇게 중얼거린 추량이 비틀거리며 쓰러지려는 순간, 그의 품에서 반묘가 폴짝 뛰어내렸다.
- 크르러렁!
반묘가 울음을 터뜨리면서 거대한 몸집으로 변했다.
“반묘! 여기로!”
마침 한쪽 언덕 너머에서 능소소가 소리쳤다.
이제 분지에서 싸우던 연맹의 무인들이 일제히 언덕 위로 오르고 있었다.
사비강이 지시한 작전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다.
반대쪽에서는 고블린과 리자드맨 부대가 충원이 되어서 파도처럼 밀려들고 있었다.
추량이 가까스로 반묘의 등에 매달리자, 녀석이 비호처럼 날렵하게 달리기 시작했다.
**
“이대로는 전멸을 피할 수 없다.”
사비강의 무거운 목소리에 사람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염자량이 지친 얼굴로 물었다.
정말이지 지긋지긋했다.
싸우고 후퇴하고, 싸우고 후퇴하고.
그야말로 끝없는 추격전이었다.
녀석들의 끈질긴 추격 때문에 생존자는 계속해서 줄어들고 있었다.
“강렬한 한 방이 필요하단 말이지.”
“하지만 사부님은 이미 너무 많은 포션을 사용하셨습니다. 이러다간 몸이 남아나지 않습니다.”
추량이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실제로 사비강은 꽤나 무리하고 있었다.
이미 그가 마신 마나 포션만 해도 셀 수 없을 정도였다.
만약 보통 사람이었다면, 벌써 심장이 마른 논바닥처럼 갈라져서 죽었으리라.
잘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어차피 차고 넘치는 마나 포션이니 무한정으로 들이켜서 하이 서클의 마법을 맹폭하면 안 되냐고 물을 것이다.
안 된다.
애초에 마법이라는 건 드래곤의 산물.
그런 만큼 인간이 무리해서 사용하면 자연히 신체의 부작용이 따르기 마련이다.
제일 먼저 심장에 이상이 생긴다.
이런 부작용을 피하기 위해서는 저주에 가까운 주술을 이용해서 심장을 따로 꺼내서 보관하는 방법이 있다.
그게 바로 언데드 마법사 리치(Lich)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정상적인 인간으로서의 삶은 포기해야 한다.
쉽게 말해서 강호인이 영약만 백만 가지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주야장천 상승 무공을 사용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보면 된다.
물론, 마나 포션은 그보다 훨씬 단순하면서도 복용법이 쉽지만, 무엇이든 과유불급이란 만고의 진리인 법.
그나마 천해경에 이른 사비강이니까 이만큼이나 버텨낸 것이다.
그런데 사비강이 꺼낸 말은 뜻밖이었다.
“물론, 난 거의 한계에 다다랐다. 하지만 너희들은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냐?”
“갑자기 무슨 말씀을…?”
사비강이 추량과 연우경, 석탄강 등을 둘러보며 말했다.
“난 너희들을 가르친 교관이다. 비록 내가 한계에 다다랐지만, 너희들은 내게 많은 것을 배웠지. 나만큼은 아니더라도 네놈들이라면 저깟 몬스터쯤은 해치울 수 있도록 가르쳤어.”
그러자 맹가숙이 구절창을 바닥에 콱 찍으며 말했다.
“작전 들어보지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 해볼 테니까!”
다른 이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사비강의 시선이 능소소에게 향했다.
“이번 작전에서는 무엇보다 네가 중요하다.”
그녀를 바라보는 사비강의 눈빛이 깊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