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 마교관-469화 (469/670)

# 469

귀환 마교관

469화

가죽 수통 끝에 물 한 방울이 매달려 있다가 뚝 떨어졌다.

혀를 길게 빼고 있던 무인이 욕지거리를 뱉으며 텅 빈 수통을 집어던졌다.

“니미럴, 목이 타서 죽을 것만 같군.”

마침 맞은편 나무 기둥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던 무인이 날아든 수통에 어깨를 맞고 눈을 부라렸다.

“어이, 물건은 조심히 다뤄야지. 아무리 배운 게 없기로서니. 쯧….”

수통을 던졌던 무인이 눈썹을 성큼 치켜 올렸다.

그는 혈사련에서 파견 나온 혈랑대주(血浪隊主) 막불추(莫不醜)였다.

그가 인상을 쓰자 뺨에 새겨진 열십자 모양의 자상이 팍 구겨졌다.

“꼬마야. 뭐라고 했느냐?”

막불추가 탁한 목소리로 묻자, 맞은편에 앉아 있던 사내가 콧잔등을 씰룩이며 으르렁거렸다.

“꼬마? 어디서 족보도 없는 사파 나부랭이가 주둥이를 함부로 놀리는 것인가?”

사내는 한때 그래도 꽤나 귀공자의 풍모를 지녔을 것 같은 남자였다.

하지만 지금은 찢어진 옷에 피와 땀이 엉겨 붙은 머리카락, 여기저기 베이고 데인 상처들만 가득했다.

사내가 허리춤에서 검을 스르릉 뽑아 들었다.

검 역시 한때는 화려한 장식과 섬세한 세공으로 꽤나 멋들어진 모습이었을 것 같았지만, 이제는 말라붙은 피와 마물들의 체액들로 검신이 얼룩져 있었다.

그는 정도맹에 소속된 야율세가(耶律世家)의 장남이자 소가주인 야율천(耶律天)이었다.

그렇잖아도 이번 강림지 전투에서 적잖게 잃은 수하들 때문에 심기가 뒤틀려 있던 그였다.

떨어지는 낙엽 하나에도 신경이 쓰일 법한데, 상대가 이렇게 나오니 절로 열불이 뻗쳐 올라왔다.

막불추 역시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이백 명에 달했던 혈랑대가 지금은 열다섯 명만 남았다.

생존자가 채 일 할도 되지 않는 상황.

마음이 심란하기로 말할 것 같으면 그 역시 야율천 못지않았다.

한데 사파가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심기를 건드려 오니, 오히려 이 기회에 분이라도 풀고 싶을 지경이었다.

막불추가 도를 뽑아 들자 사기가 풀풀 풍겨져 나왔다.

“꼬마야, 어르신에게 한 번 덤벼 보겠다는 거냐?”

“무엄하다! 감히 누구보고 함부로 입을 놀리는가? 예를 차리지 못할까!”

이번엔 야율천 곁에 있던 정도맹 소속 무인이었다.

그는 야율세가의 사람은 아니었지만, 시비가 일어나자 같은 정도를 걷는 무인으로서 야율천을 편든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막불추의 수하 역시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흥! 꼴통 같은 네놈들에게 예를 차릴 바엔 지나가는 개에게 절을 하겠다.”

“뭣이?”

싸움은 순식간에 번졌다.

졸지에 근방에 있던 정파 무인 십여 명과 혈랑대원 십여 명이 서로 으르렁거리며 살기마저 드러내기 시작했다.

다른 이가 본다면 고작 수통 하나 때문에 이런 상황이 벌어졌다는 걸 믿지 못할 만큼이나 서로에게 적의가 가득한 모습이었다.

특히 막불추와 야율천은 당장 도검을 부린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분위기였다.

막불추가 노골적으로 조소를 지었다.

“뭐하나? 사내가 검을 뽑아 들었으면 무라도 썰어야지. 혹시 쫄아서 꿈쩍도 못하는 건가? 하긴 하룻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설치면 뒈지기 십상이긴 하지.”

“네 이놈!”

야율천이 버럭 소리 지르면서 검을 곧장 뻗어 왔다.

쒸에에에엑!

“기다렸다! 이 망나니 같은 새끼야!”

막불추 역시 고함을 내지르며 도를 베어 갔다.

두 사람의 도검이 허공에서 부딪치려는 순간,

휙!

뭔가 시커먼 그림자가 그 사이에 갑자기 끼어드는 것이 아닌가?

서컥!

쑤아악!

두 사람의 도검이 갑자기 끼어든 그림자를 깔끔하게 베어 내며 지나쳤다.

동시에 막불추와 야율천은 흠칫거리고 훌쩍 물러났다.

놀랍게도 그들이 벤 것은 거의 반쯤 죽어 가는 고블린이었다.

고블린은 야율천의 검에 심장이 뚫렸고, 막불추의 도에 목이 반쯤이나 찢어져 있었다.

갑자기 끼어든 고블린을 보고는 사람들이 혼비백산했다.

“엇! 이 새끼들이 언제 여기까지!”

“이런 젠장! 벌써 쫓아오다니!”

“다들 준비해!”

모여 있던 무인들이 허겁지겁 주변을 살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고블린을 집어 던진 사람은 다름 아닌 사비강이었다.

모여든 사람들 사이로 사비강이 냉랭한 표정으로 저벅저벅 걸어왔다.

서로에게 살기마저 드러내며 으르렁대던 사람들이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위압감에 눌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싸늘한 시선으로 사람들을 훑어본 사비강이 막불추와 야율천을 번갈아 보았다.

“진정한 적은 언제나 내부에 있는 법이지.”

사비강이 베르타스를 뽑아 들고는 죽어 가는 고블린의 머리를 푹 찍었다.

“이딴 마물이 두렵나? 하지만 이런 건 그냥 도검을 이용해서 베면 그만이다. 이렇게 숨통을 끊어 버리면 다시는 움직이지 못한다. 하지만 내부의 적은….”

사비강의 싸늘한 눈초리가 다시 한 번 막불추와 야율천을 번갈아 보았다.

두 사람은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로 한기가 스며들었다.

제아무리 천둥벌거숭이처럼 설치는 자라고 할지라도 사비강 앞에서는 감히 고개를 들 수 없으리라.

그가 이번 전투에서 보여준 무위는 그야말로 신의 경지였기에.

사비강이 말을 이었다.

“그 내부의 적은 인간의 마음을 가지고 놀기 마련이다. 시기하고, 분열하고, 불신하게 만들지. 나는 내부의 적을 가장 혐오한다. 똘똘 뭉쳐서 싸워도 모자랄 판에 서로 편을 가르고 칼을 들이댄다? 미치지 않고서야 불가능하지. 이런 미친 것들이야말로 진정한 적이다. 그리고 나는 적을 만나면 가차 없이 벤다.”

말을 마친 사비강이 베르타스를 쑤욱 뽑아 들었다.

베르타스는 검신에 묻은 피를 순식간에 흡수해 버렸다.

막불추와 야율천이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다음 순간,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고개를 깊이 숙이며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관주님!”

“생각이 짧았습니다, 관주님!”

한바탕 소란이 일어날 것만 같았던 일이 생각보다 싱겁게 정리됐다.

사비강은 각자 다른 방향으로 걸어가는 정사 무인들을 보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침 그의 곁으로 추량이 피곤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무리도 아닐 겁니다. 벌써 칠주야 째입니다. 추격 부대가 있으니 싸우면서 도망쳐야 하고, 그러다 보니 발이 느립니다. 잠을 자도 숙면을 못하고, 옆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만 들려도 놀라서 깹니다. 게다가 강림지에서 겪었던 그 일들은 다시 떠올리기도 싫을 만큼 끔찍한….”

추량이 말을 차마 잇지 못했다.

사비강도 안다.

그래서 더는 나무라지 않았다.

연맹의 무인들은 강림지에서 칠죄종 단계를 겪고 나서 본격적으로 소환된 마물들과 사력을 다해 싸우며 도망쳤다.

마왕과 맞설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계속해서 싸우는 것은 자살이나 다름없었다.

그나마 나타스의 군대가 마물들과 싸워 준 덕분에 생존자들이 이만큼은 된 것이다.

하지만 마물들은 끈질겼다.

녀석들은 악착같이 추격해 왔다.

마치 연맹의 무인들을 한 명도 남김없이 말살해 버리겠다는 듯.

그러다 보니 이동 속도는 더딜 수밖에 없었고, 사람들의 신경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날카로워졌다.

“그렇다고 망가져서는 안 되지.”

사비강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마족은 인간의 나약한 점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만약 이렇게 반목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마족들은 그 틈을 어김없이 파고들 것이다.

물론, 아무리 방비해도 그걸 막기는 어려우리라.

게다가 칠죄종의 단계.

강림지에 있었던 모든 인간들은 칠죄종의 단계를 겪었고, 그때 어떤 식으로든 상처를 입었다.

내상이나 외상을 말하는 게 아니다.

칠죄종의 단계를 거친 인간은 육신이 멀쩡하다고 해도 보이지 않는 심상(心傷)을 입게 된다.

한 마디로 본질적인 욕망 어딘가가 이지러지게 된다.

그래서 신경이 더욱 날카로워지고, 예민해지는 것이다.

평소라면 그냥 넘어갈 일도 불필요할 정도로 깊게 따지고 드는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보는 앞에서는 망가지도록 방치하지 않는다. 운기조식은 해주고 있지?”

“예, 사부님이 말씀하신대로 마음을 안정화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운기를 하다 보니 확실히 제 마음 상태가 어떤지 알게 되더군요. 왠지 모르게 우울하달까요?”

“그런 일을 겪었으니 무리도 아니지.”

사비강은 추량뿐만 아니라, 연맹의 모든 무인들에게 틈틈이 운기를 하면서 마음을 다스리라고 일러두었다.

칠죄종의 영향으로 심상을 입었을 테니, 최대한 내공 운기를 해서라도 마음을 다스리도록 하려는 의도였다.

해가 저물고 있었다.

언덕 위에 오른 사비강은 저 멀리서 피어오르는 불빛을 보았다.

추량이 다가와 혀를 내둘렀다.

“정말이지 저놈들은 인간 같군요. 볼 때마다 놀랍습니다. 불도 피우고, 옷도 입고, 병장기까지 사용하는 걸 보면요. 도대체 언제까지 우릴 쫓아올까요?”

“저것들은 인간보다 강하고, 인간보다 단순하다. 본능적으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면 언제까지든 쫓아올 거야.”

“그 말은… 결국 저것들이 우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단 말이군요.”

“전멸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

“오싹한대요?”

농담처럼 말했지만, 추량은 진심으로 소름이 돋았다.

도마뱀처럼 생긴 마물, 돼지처럼 생긴 마물, 늑대처럼 생긴 마물 등.

그야말로 보기만 해도 흉측한 마물들이 군단을 이루어서 추격해 오고 있었다.

그들은 확실히 인간처럼 서로 의사소통을 하고 있었다.

추량은 잊을 수가 없었다.

고블린 세 마리가 동시에 자신을 공격하면서 나누던 대화를.

물론 알아듣지도 못하는 언어였지만, 그저 짐승처럼 본능만 있을 거라 생각했던 마물들이 인간처럼 대화하는 모습은 상상 이상으로 소름이 돋았다.

녀석들이 자신을 가운데에 두고 숙덕이던 그 소리가 귀에 아직도 쟁쟁 울리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환청 아닌 환청이 점점 심해질수록 사비강과 추량은 침묵에 빠져들었다.

한편, 그런 두 사람을 조금 떨어진 곳에서 가만히 보는 사람이 있었으니….

“사비강 관주는 참 알 수 없는 사람이군.”

정도맹주 능운파가 쓴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결국 그가 다했다.

자신은 그저 앞장서서 큰 소리만 쳤을 뿐.

납치당한 부상자들을 구출하기는커녕 전력의 팔 할 이상을 잃었다.

아마 맹의 본단으로 돌아가면 온갖 이야기가 나올 것이 분명하다.

일단 피해가 막대하니 책임질 사람이 필요하다.

정도맹주의 자리는 그 책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아니, 누구보다 책임을 져야 하는 자리다.

어쩌면 사비강을 맹주로 추대하는 자들이 생길 수도 있다.

아무렴 어떤가?

직접 보지 않았나?

그가 얼마나 강한지.

다만 분한 것은 자신의 무기력함이다.

그래도 한때 강호를 이끌겠다는 포부를 안고 맹주의 자리에 오를 때가 있었다.

그 후로 음모에 빠져 잠시 힘을 잃었지만, 이제야 맹주로서 제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한데…

“사는 게 녹록치가 않군.”

인생이란 게 원래 계획대로 되지 않는 법이라지만, 어쩜 이렇게도 어긋나는 게 많을까?

이제 와서 누굴 탓하랴.

우물 안 개구리처럼 지낸 자신을 탓해야지.

마침 욱청풍이 그에게 다가왔다.

“오늘 밤은 저 녀석들도 추격을 멈출 것 같군요. 한숨 돌릴 수 있겠습니다.”

“그럼 좋겠지만. 저 녀석들은 오히려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를 노릴 거요. 한시도 긴장을 늦춰서는 안 될 테지.”

“옳은 말씀입니다. 그나저나 어쩌다가 기련산까지 오게 된 건지 모르겠습니다. 분명 우리가 강림지라고 친 곳은 전혀 다른 지역이었는데….”

“사비강 관주가 말하지 않았소? 순간이동 같은 대법이라 보면 된다고….”

“허어, 직접 겪고도 쉬이 믿어지지가 않는군요.”

“어떠시오? 아직도 사비강 관주가 탐탁지 않으시오?”

능운파의 물음에 욱청풍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저만치 서 있는 사비강을 보았다.

그가 능운파를 돌아보았다.

“사실 많이 혼란스럽습니다. 다만… 그에 대한 편견은 상당히 무너졌습니다.”

“그렇소?”

능운파가 의외라는 듯 물어보자, 욱청풍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밖에 없지요. 강림지에서 실제로 마족이 강림하는 걸 두 눈으로 목격했으니. 게다가 그 칠죄종의 단계는….”

욱청풍이 말을 마저 잇지 못했다.

분을 삼키는 것 같기도 했고, 두려움에 마음을 진정시키는 것 같기도 했다.

오랜 인생을 살았지만 그때만큼 끔찍한 기억도 없으리라.

이 지경이 되어서도 사비강을 미치광이로 치부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살아남은 사람이 없을지도 모르지요.”

“하긴…”

능운파가 씁쓸한 표정으로 수긍하자, 욱청풍이 얼른 손사래를 쳤다.

“아, 오해는 마십시오. 본맹의 무인들은 맹주님 덕분에 큰 용기를….”

“허허, 그렇게까지 말하지 않아도 됩니다. 나 또한 잘 알고 있소. 내 한계를.”

능운파의 시선이 저 언덕에 선 사비강을 향했다.

마침 추량이 사비강에게 뭔가를 묻는 듯했다.

그의 질문은 다음과 같았다.

“그런데… 흑귀는 정말 총군사님을 호위하는 거죠? 그쪽은… 무사하겠죠?”

**

부스럭…!

돌무더기가 가득 쌓여 있는 협곡 아래.

콰아앙!

느닷없는 폭음이 들리면서 돌무더기가 튕겨 날아갔다.

그리고 그 사이로 불쑥 솟아오른 손!

“크으으으…!”

짐승 같은 소리를 내며 바위틈을 비집고 올라온 자는 다름 아닌 흑귀였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그가 비척거리며 일어났다.

“헉, 헉, 헉…!”

숨 가쁜 호흡을 몰아쉬며 그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천천히 걸음을 옮겨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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