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7
귀환 마교관
457화
사비강의 사자후를 들은 무인들이 희망의 끈을 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오 할 정도의 무인들이 죽어 버린 데다 삼 할 정도의 무인들은 욕망의 사슬에 얽매여 타락한 상황.
그나마 심후한 공력을 바탕으로 칠종죄를 버텨낸 무인들만이 온전한 이성을 유지한 채 탈출을 시도할 수 있었다.
“맹주님! 후퇴해야 합니다! 사비강 관주의 말대로 장벽이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음… 그래. 그러지.”
잠시 넋을 놓고 있던 능운파가 가까스로 대답했다.
승룡대주는 눈살을 슬쩍 찌푸리고 맹주를 보았다.
어딘지 기운이 빠져나간 듯한 모습에 슬쩍 걱정이 된 탓이다.
“괜찮으십니까, 맹주님.”
“아… 괜찮네. 그나저나 사비강 관주는 정말이지 무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겠군.”
“정말 대단했습니다. 그가 아니었다면 아마 연맹의 무인들이 이곳에서 전멸을 당했을 수도….”
말을 이어 가던 승룡대주는 맹주의 낯빛이 썩 밝지 않은 것을 깨닫고는 말끝을 흐렸다.
능운파가 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괜찮네. 사실일세. 나의 부족함을 탓해야지. 아직도 나는 수양이 부족한 모양일세.”
“아닙니다, 맹주님! 맹주님이 안 계셨다면 누가 저희들을 이끌었겠습니까?”
“괜한 공치사는 접어 두게. 자, 돌아가세. 그들의 의식을 막는 건 확실히 실패한 것 같군.”
능운파가 고개를 돌려 저만치 우뚝 솟은 성을 바라보았다.
구름을 뚫을 듯 솟아오른 높다란 흑성(黑城).
무인들 대부분은 무너진 방벽 쪽으로 정신없이 달아나면서도 배후에 나타난 흑성이 언제부터 생긴 것인지 인지하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분명 진녹색의 거대 줄기였던 것이 어느 순간 성장을 멈추고는 점점 잿빛으로 변했고, 허물을 벗듯 껍질이 벗겨지면서 단단한 금속으로 변해 있었다.
무인들 중에는 마지막까지 마물들을 향해 몸을 던지며 분풀이를 하는 자들도 있었다.
눈앞에서 동료와 수하들이 타락해 가면서 죽어 가는 모습을 목도한 이들 중에는 삶에 대한 집착보다는 적에 대한 분노가 더 큰 자도 있기 마련.
“이 쳐 죽일 놈들아! 다 덤벼라!”
창신단주(昌新團主) 이자준(李紫俊)은 그야말로 분노의 화신처럼 싸웠다.
일창에 마물의 목이 잘려 가고, 일권에 마병들의 몸이 터져 나갔다.
칠죄종의 단계가 끝나면서 더 이상 이성을 유지하기 위해 심력과 공력을 소모할 필요가 없어진 상황.
때문에 그는 그동안 봉인되었던 힘을 풀어 놓기라도 하듯 거친 맹수처럼 싸웠다.
“창신단주! 정신 차리고 이제 그만 후퇴하게! 더 이상은 위험하네!”
마침 무너진 장벽으로 달려가던 욱청풍이 이자준을 진정시켰다.
수하의 만류에도 창귀처럼 싸워대던 그였지만 장로회주의 말에는 어쩔 수 없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크읍!”
이자준이 입술을 질끈 씹으며 울분을 삼키자 욱청풍이 그의 등을 다독였다.
“분한 심정은 이해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어쩔 수 없네. 그만 돌아가세. 후일을 도모해야 하지 않겠나?”
“알겠습니다.”
굳은 표정으로 대답한 이자준이 주변을 향해 사자후를 터뜨렸다.
“창신단 전원 후퇴한다! 한 명도 빠짐없이 살아남아라!”
“존명!”
곳곳에서 대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자준 역시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억지로 돌렸다.
그를 보낸 욱청풍은 뒤를 돌아보았다.
거대한 흑성이 괴물처럼 버티고 있었다.
‘진짜로… 강림하다니….’
사실 그동안 사비강의 말을 반신반의했다.
하루에도 수십 번 생각이 왔다갔다 갈피를 잡지 못했다.
분명 사비강이 정도맹을 쇄신한 것이 사실이었으나, 그가 내세우는 말들은 너무나 허무맹랑했기에.
마령교가 마물들을 소환해냈다지만, 그건 어떠한 실험으로 만들어낸 영물이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
마왕이라니.
너무나 터무니없는 이야기가 아니던가?
어쩌면 오랜 세월 살아오면서 그가 겪은 것들이 그저 아집으로만 자리 잡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그는 사비강의 말을 믿는 척만 했을 뿐, 사실상 믿지 않았다.
한데…
‘정말이었어. 진짜로 강림하다니… 진짜로….’
그는 같은 말을 중얼거리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번 전투가 그에게 어떤 의미로든 큰 충격을 준 건 사실이었다.
그때였다.
드드드드드드드… 쿠웅!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땅이 떨리더니 강림지 여기저기에 커다란 봉분이 솟아올랐다.
“저건 뭐지?”
욱청풍이 눈살을 슬쩍 구기는데,
“죽인다! 인간들!”
“쳐라!”
알아듣기 힘든 언어를 쏟아내면서 달려드는 마물들!
놀랍게도 그들은 지금까지 나타났던 마물들과 다르게 투구와 갑옷, 신발과 장갑까지 착용하고 있었다.
게다가 커다란 지팡이를 든 녀석의 통솔 하에 체계적으로 움직이는 게 아닌가?
“신형 마물인가…!”
마계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욱청풍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이 전장에서 사비강만이 유일하게 그들의 존재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었다.
“고블린이 나왔군.”
사비강은 재빨리 달려가며 마주쳐 오는 고블린의 목을 베어냈다.
촤아아악!
“카아악!”
“감히 죽고 싶은 놈은 내게 덤벼라!”
순간 사비강이 사자후를 쩌렁쩌렁 울리자, 그에게 달려들던 고블린들이 움찔거리면서 위축됐다.
확실히 고블린은 이성이 결여된 마물들과는 다른 성질을 지니고 있었다.
생각을 할 줄 알고,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사비강이 히죽 입매를 치켜 올리면서 말했다.
“뭐, 덤비지 않아도 다 죽여 버릴 거였지만.”
찰나,
사비강이 훌쩍 물러나면서 손을 뻗고는 소리쳤다.
“헬 파이어!”
휘아아아아아아아앙!
순간 염화지옥이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강렬한 열기가 전방을 휩쓸어 가니, 주춤거리던 고블린 떼들이 일시에 잿더미로 변하면서 소멸되어 갔다.
이를 본 무인들이 저마다 환호성을 지르며 장벽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고블린이 덮쳐 오는 범위는 매우 넓었고, 사비강 혼자 그 많은 녀석들을 칼 한 자루로 막아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결국 지금처럼 넓은 지역에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을 구사해야 하는데, 적아가 혼재된 상황이니 함부로 남발을 할 수도 없는 상황.
그때,
쉬이이잉! 쉬이이잉! 쉬이이잉!
강림지 곳곳에 빛 무리가 생기더니 이번에는 제법 커다란 덩치의 그림자가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제길, 오우거인가?”
사비강이 미간을 팍 구겼다.
본격적인 강림이 시작되면서 마왕성 일대에 서식하는 몬스터들이 차례대로 소환되는 게 분명했다.
그 중에서도 소환 등급이 낮은 것들부터 차례로 옮겨지는 것이리라.
지금 소환되는 것들은 마왕성 일대에 서식하면서 마족들에게 충성하는 몬스터들이었다.
오우거의 경우에는 고블린처럼 지능이 높은 건 아니지만, 전투력에 있어서는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기에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오우거들은 강림지로 소환되자마자 미친 듯이 포효를 내지르며 사람들에게 스톤해머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퍽!
“크아악!”
퍼억! 퍽!
오우거가 휘두른 스톤해머에 머리가 박살나면서 즉사한 무인들, 어깨나 허리가 완전히 부서져 전투 불능이 된 무인들이 속출했다.
몇몇 무인들은 달아나는 와중에도 용감하게 맞서 싸웠지만, 끝없이 몰려드는 고블린 떼까지 합해지니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때 마침 사비강 곁으로 추량과 악천괴가 달려왔다.
두 사람은 근처에서 마물들과 맞서 싸우던 중 사비강이 마법을 사용한 것을 보고는 이리로 달려온 것이었다.
“사부님!”
추량이 반갑게 소리치자, 사비강이 미간을 좁히고는 물었다.
“넌 왜 아직도 여기에 머물러 있는 거냐? 언덕 위로 달아나라고 했을 텐데.”
“낙오자들이 너무 많아서요. 그래도 최대한 구할 수 있는 만큼 구해야죠.”
“카악, 퉤! 니미럴! 구할 수 있는 만큼은 무슨. 당장 마법인지 뭔지 사용해서 저것들 다 태워 죽이란 말이야!”
악천괴가 불쑥 나서며 소리쳤다.
전신이 피에 젖은 그의 모습은 마치 혈귀를 보는 것만 같았다.
그러는 와중에도 세 사람은 자신들에게 달려드는 고블린과 오우거를 찌르고 베며 난투를 벌였다.
이제 막 고블린의 목을 베어 버린 추량이 악천괴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그건 안 됩니다! 지금 여기서 광범위 마법을 사용했다간 적아를 막론하고 모두 태워 죽일 수도 있습니다!”
“애송아! 그렇다고 이렇게 한 놈 한 놈 죽여서 언제 아군을 구한단 말이냐? 지금 이렇게 싸우는 중에도 당하는 놈들이 속출하고 있는데!”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 손으로 사람들을 희생시킬 수는 없지 않습니까?”
“에이, 씨팔! 그럼 어쩌라는 거야! 하나라도 더 살려야 할 것 아냐!”
파바밧!
악천괴는 버럭 소리를 내지르고는 오우거의 어깨 위로 날아올라 목을 다리로 휘감은 다음 손가락을 활짝 펼쳤다.
강기가 맺힌 손톱이 사정없이 오우거의 목을 움켜쥐며 긁어 버리자, 모가지가 툭 떨어져 나왔다.
쿠웅!
쓰러진 오우거를 밟고 선 악천괴가 추량에게 성큼성큼 다가가더니 멱살을 쥐고는 버럭 소리쳤다.
“본막의 애들이 얼마나 뒈졌는지 네놈이 알아?”
“살막만 죽었습니까? 연맹 무인들도 많이 희생당했습니다!”
“어디서 이 애송이가 버르장머리 없이 따박따박 말대꾸야! 확 그냥…!”
촤아아악!
순간 섬뜩한 파육음에 이어 핏줄기가 튀어 올라 두 사람을 흠뻑 적셨다.
그들을 덮치려던 오우거의 등을 대각선으로 베어 넘긴 사람은 바로 사비강이었다.
사비강이 착 가라앉은 시선으로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
“그만들 해라. 방법이 있으니.”
“무슨 방법….”
사비강은 대답 대신 허공을 향해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나타스!”
다음 순간, 그의 쇄골 사이에 박힌 크라니온에서 진녹색 빛이 강렬하게 뿜어져 나왔다.
쑤아아아아앙!
밤을 가로지르며 창공으로 솟아오른 광선은 다시 혜성처럼 커다란 호선을 그리며 떨어져 내렸다.
파하아아!
바로 옆 광선이 떨어진 자리에 진녹빛의 연무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면서 하나의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검은 넝마를 두른 해골 기사, 나타스였다.
여전히 비틀린 얼굴을 한 그가 사비강을 삐딱하게 돌아보았다.
- 죽음을 다스리는 악령, 나타스가 그대의 부름에 답했다.
역시나 사비강의 머릿속으로 바로 울려오는 음성!
“아…!”
추량은 나타스를 보고는 탄성을 터뜨렸다.
지난 정사대전에서 나타스를 본 적이 있었기에.
반면, 나타스를 처음 본 악천괴는 기겁을 하며 손톱 날을 세웠다.
“이런 빌어먹을! 또 별 괴상한 마물이 튀어나왔구나!”
그가 순간 바닥을 차고 달려가려는데,
두두둑…!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시체였던 무인 하나가 벌떡 일어나더니 악천괴의 멱살을 와락 움켜잡으며 치켜드는 것이 아닌가?
“큭! 이건 뭔…!”
악천괴가 놀란 표정으로 상대를 노려보았다.
한데 얼굴 반쪽이 완전히 무너져 내려앉은 시체가 아닌가?
“이게 뭐야? 젠장!”
퍽! 촤아악!
재빨리 가슴을 걷어차고 조공을 펼쳐 손목을 잘라냈다.
하지만 시체는 여전히 살아있는 것처럼 허우적거리며 움직였다.
결국 악천괴가 훌쩍 몸을 날려 시체의 머리를 쥐고는 터뜨려 버린 후에야 모든 움직임이 완전히 멈추었다.
악천괴가 놀라서 씨근거렸다.
적의 공격이 날카로워서 놀란 게 아니었다.
단지, 죽은 자가 일어나는 불가사의한 상황에 놀란 것이다.
그런데…
스르륵… 스륵… 스르륵…!
주변의 시체들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면서 악천괴를 둘러싸는 게 아닌가?
“도, 도대체 이게 뭔…?”
악천괴가 이맛살을 팍 구기는데, 나타스가 사비강을 돌아보며 물었다.
- 취해도 될 자인가?
그 말인즉슨, 죽여서 자신이 다루어도 되는 것인지 묻는 것.
사비강이 고개를 저었다.
“건드리지 마. 우리 편이다. 악 막주도 괜히 자극하지 말고.”
그제야 살기를 뿜으며 다가오던 시체들이 스르르 흩어져 갔다.
악천괴가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사비강이 고블린 하나를 베어 넘기고는 말했다.
“인간은 단 한 명도 건드리지 말고, 이 마물들 최대한 처리하도록.”
- 또 하등한 마계 생물들을 처리하라는 거군.
말을 마친 나타스가 죽음의 군단을 이끌고 마물들에게 거침없이 마주쳐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