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5
귀환 마교관
455화
능운파의 눈동자가 격하게 떨렸다.
“어찌… 이럴 수가…! 어쩌다 이렇게까지…!”
그는 자신에게 달려드는 수십 가닥의 촉수를 초회선풍검(初回旋風劍)으로 잘라내 버리고는 어금니를 빠득 갈았다.
차마 두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이것이 진정한 타락이란 말인가…?’
돼지머리 마물에게 살점이 뜯긴 인간은 탐식의 욕망에 지배라도 받는 것인지, 동료 무인들의 살점을 뜯어먹으려고 미친 듯이 달려들고 있었다.
동료가 동료의 인육을 뜯어먹는 모습을 보면서 낭창하게 웃음을 터뜨리는 여인도 있었고, 그런 여인을 겁간하는 남자도 있었다.
그야말로 욕망의 덩어리가 되어 서로 뒤엉킨 인간들이 벌레 떼처럼 바글거리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마왕의 강림을 막아 보겠다며 정의와 투지를 내세우던 무인들 같지 않았다.
“어찌… 어찌… 이런…!”
주르르륵.
능운파의 입가에서 선혈이 흘러내렸다.
너무 세게 입술을 깨문 탓이다.
나름 내공이 심후한 대주급 이상의 무인들이 목청이 찢어져라 소리쳐대며 주의를 환기시켰지만, 인간의 타락은 마치 전염병처럼 번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저만치 강림지 복판의 땅이 불룩 솟구치는가 싶더니, 순간 시커먼 그림자가 불쑥 튀어나오면서 하늘로 솟구치는 게 아닌가?
쿠아아아아아!
동시에 천지가 격동하면서 불기둥이 솟구쳐 올랐다.
“크아악!”
“우아악!”
강림지 복판에서 사투를 벌이던 무인들이 일제히 튕겨 나가면서 비명을 내질렀다.
밤하늘로 솟아오른 것은 놀랍게도 거대한 짐승이었다.
능운파가 눈살을 구기고는 커다란 날개를 펼치며 날아오르는 짐승을 보았다.
“저것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촤아아악!
맹주 곁에서 달려들던 마병의 머리를 베어 버린 승룡대주가 고개를 들고는 답했다.
“마치 거대한 도마뱀 같이 생겼군요. 날개가 달려 있습니다.”
“언젠가 사비강 관주가 얘기하던 드래곤이라는 생물 같습니다!”
마침 근처에서 싸우던 부대주가 소리쳐 말했다.
그의 짐작은 정확한 것이었다.
전체적으로 붉은 피부를 가진 녀석은 바로 타락한 레드 드래곤이었다.
후웅! 후우웅! 후우웅!
레드 드래곤이 거대한 날개를 휘저으며 강림지 하늘 위를 맴돌더니 이내 급강하하면서 불을 내뿜기 시작했다.
콰라라라라라라라라!
“헉! 도, 도망…! 크아아악!”
“흐아아악! 뜨, 뜨거워어억!”
절대적인 존재 앞에서 무인들은 한낱 개미떼만큼이나 나약했다.
그들 대다수는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화염을 피하지 못한 채 그대로 타들어 가며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이러한 광경은 정사연맹 무인들 모두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능운파 역시 전신을 가늘게 떨며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열락과 고통의 비명, 거기에 염화지옥까지.
더 이상 이곳은 중원이라고 할 수 없었다.
인간의 이성이 상실되고, 본능과 욕망만이 살아 숨 쉬는 지옥이었다.
장벽을 만든 골렘들 머리 위로는 보이지 않는 막이 반원을 그리며 펼쳐져 있어서 탈출은 아예 불가능했다.
챙그랑!
능운파는 검을 놓았다.
곁에 있던 승룡대주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맹주님?”
“이길 수가 없군… 도저히… 모든 게 내 과오다.”
“맹주님! 아직 포기하시면 안 됩니다!”
승룡대주가 눈시울을 붉히며 소리쳤다.
능운파는 자조 섞인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대주의 눈에는 이 참혹한 광경이 들어오지 않는가? 사파의 무인들은 물론, 본맹의 무인들조차도 이성을 잃고 타락의 나락으로 떨어졌네. 거기에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존재가 나타났어. 이건 더 이상 인간이 어찌 해볼 영역이 아닌 걸세.”
“하지만 아직…!”
“이 전쟁은 나의 패배… 아니, 인류의 패배일….”
그때였다.
멍하니 서 있던 능운파가 두 눈을 부릅떴다.
그는 순간 헛것을 보는 게 아닌지 의심했다.
그런데 분명히 보였다.
먼발치에서 그림자 하나가 쏜살 같이 솟구쳐 오르는 모습을.
빠른 속도로 허공답보를 펼치며 하늘을 배회하는 드래곤에게 날아가는 자는 다름 아닌 사비강이었다.
옆에 있던 승룡대주 역시 그를 확인한 것인지 반색하며 소리쳤다.
“맹주님! 저기 사비강 관주가…!”
“틀림없이 그군.”
어느 순간 사비강은 허공에서 거짓말처럼 사라지더니, 순식간에 드래곤의 머리 위에서 나타나는 게 아닌가?
물론 지금까지 사비강의 거침없는 행보와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강렬한 무위는 수없이 보았다.
하지만 저런 거대하고 강맹한 존재에게 단숨에 날아가다니.
한편, 레드 드래곤의 머리 위로 블링크를 시전해서 나타난 사비강은 그대로 베르타스를 수직으로 내리쳤다.
“뒈져!”
쩌어어엉!
베르타스와 드래곤의 머리가 부딪치면서 어마어마한 금속성이 터져 나왔다.
그 기파로 인해 골렘 장벽이 떨리는 소리를 내지를 정도였다.
쿠아아아아아!
레드 드래곤이 잔뜩 화가 난 것인지 훌쩍 물러나면서 거칠게 포효했다.
다음 순간, 레드 드래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인간…?]
“왜? 또 하찮다는 둥 어떻다는 둥 떠벌릴 생각이냐? 드래곤으로 태어나고도 마족의 수족이나 된 하찮은 새끼가!”
[뭐, 뭣이…?]
“더 이상 너 같은 하급 드래곤과 노닥거릴 기분이 아니다! 이 개새끼야!”
단언컨대 드래곤을 개에 빗댄 것은 사비강이 처음이리라.
레드 드래곤은 순간 세 가지 감정을 동시에 느꼈다.
제일 먼저 그가 느낀 것은 분노였고, 두 번째는 놀라움이었으며, 세 번째는 절망이었다.
휘아아아아아아앙!
사비강의 배후로 나타난 것은 분명 드래곤의 기운.
그것도 레드 드래곤이 틀림없었다.
그 기운이 곧장 드래곤에게 날아가면서 격렬하게 부딪쳤다.
꽈자아아아아앙!
하늘이 쪼개질 듯한 소리가 났다.
그 일격으로 드래곤이 포탄처럼 날아가자, 사비강이 곧바로 블링크를 시전하면서 배후에 나타났다.
동시에 그가 다시 한 번 강기를 일으키며 베르타스를 수직으로 내리쳤다.
“끝이다!”
꽈아아앙!
슈우우우우웅!
속절없이 당한 드래곤이 혜성처럼 지상으로 추락했다.
꽈자아아아아앙!
어마어마한 소음과 함께 먼지구름을 일으키면서 추락한 드래곤은 다신 움직이지 못했다.
사비강이 드래곤의 사체를 보며 싸늘하게 중얼거렸다.
“드래곤 족보에도 끼지 못할 새끼가… 하트도 쓸모없는 쓰레기 같으니라고. 카악, 퉤!”
이걸로 분노의 악 단계를 넘었다.
갑자기 나타난 레드 드래곤은 죽었지만, 테라포밍의 영향을 받은 인간들의 심리에는 아마도 분노의 싹이 자라나고 있을 터.
‘시간을 끌수록 위험하다. 최대한 빨리 여길 벗어나야 한다.’
사비강이 베르타스를 콱 움켜쥐었다.
마음 같아서는 나타스라도 소환해서 대적하고 싶지만, 이처럼 테라포밍 중에는 소환 자체가 불가능하다.
나타스 역시 마계의 악령이기에 칠죄종 단계의 규율에 지배받기 때문이다.
‘이제 삼 단계 남았다.’
그리고 이 단계들은 한꺼번에 온다.
**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구윤은 몸을 가늘게 떨었다.
그는 눈앞에 펼쳐진 현상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가 긴 인생을 살아온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생경한 광경은 처음이었다.
절벽 위에 선 그가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나서며 천리경을 눈에 들이댔다.
자칫 한 걸음만 더 나아간다면 아래로 추락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는 까마득한 절벽 아래가 두려운 것이 아니었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이 모든 현상이 자신의 예측을 완전히 빗나가고 있었기에 두려웠다.
자고로 군사에게 있어서 최악의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예측 불가, 통제 불가, 상황 파악 불가!
제오벽이 생성된 후 강렬한 황금빛 기운이 터지는가 싶더니, 강림지 안에 있던 사람들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곳에는 꽁꽁 얼어붙은 호수가 자리 잡고 있었다.
원래 그곳이 호수 위였던 것인지, 마령교의 의식이 통하면서 호수로 변한 것인지 파악조차 되지 않았다.
분명한 것은 꽁꽁 얼어붙은 호수의 수면에 다른 곳으로 전송된 무인들의 모습이 고스란히 보인다는 점이었다.
처음에는 자신이 환술에 빠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환술이라면 어떠한 징후라도 있었을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구윤은 다시 한 번 몸을 가늘게 떨었다.
얼어붙은 호수의 수면을 통해서 보이는 강림지의 풍경은 그야말로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정신 줄을 놓고 웃어대는 사람, 돼지머리 마물에게 잡아먹히거나 동료를 잡아먹는 사람, 집단 윤간, 분노, 교만 등으로 심력이 어지러워져 폭주하거나 주화입마에 빠져든 사람,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그런 중에도 레드 드래곤을 상대하는 사비강의 모습은 감탄이 나올 정도로 대단하긴 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인간들이 자멸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거대한 줄기는 점점 돌처럼 단단해지면서 지상 위에 박혀 가며 성처럼 굳어 가고 있었다.
“도대체 저기가 어디지? 저곳이 진짜 강림지란 말인가? 그렇다면 여긴? 제단 같은 곳이었나?”
답을 해 줄 사람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구윤은 그렇게 의미 없이 중얼거렸다.
다리에 힘이 풀릴 지경이었다.
부상자들을 구출하기는커녕 토벌에 참여했던 모든 무인들을 잃게 생기지 않았나?
비틀.
구윤이 휘청거리다가 가까스로 중심을 잡으며 섰다.
그때,
“보아라. 저것이 너희 인간의 추악한 본성이다. 약간의 유혹만 주어져도 저렇게 천박한 본능이 드러나지.”
무척이나 앳된 목소리가 등을 때렸다.
온몸에 소름이 돋아난 구윤이 화들짝 놀라며 휙 돌아섰다.
그곳에 낯선 소녀가 서 있었다.
하지만 사비강으로부터 전해들은 인상착의로 미루어볼 때 그녀가 바로 ‘존야’라는 사실을 직감할 수 있었다.
한데 이렇게 가까이 다가오는 동안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니.
귓가에 비령의 전음이 닿았다.
[조심하십시오!]
구윤이 마음속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신은…!”
“너희 인간들은 참으로 교만하지. 그리고 내가 아는 한 이 ‘중원’이라는 곳에서 무공을 익힌 강호인들이야말로 교만의 끝을 달린다. 하지만 어떤가? 결국 그렇게 광오한 자들도 저렇듯 본능의 노예가 되어 천박함을 드러내지 않는가?”
“당신은 대체 정체가 뭐요?”
구윤이 미간을 구기며 물었다.
하지만 존야는 대답 대신 자신의 말만 이어 갔다.
“저들이 저렇게 타락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느냐?”
“그야 당신이 행한 의식 때문에….”
구윤이 대답하는 도중 존야가 피식 웃었다.
그 조소가 너무나 차갑게 느껴졌기에 구윤은 말을 마저 맺지도 못했다.
존야는 앙상한 가지가 있는 나무 곁으로 걸어갔다.
바짝 메마른 고목은 금방이라도 부러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그녀가 손가락으로 모래알을 조금 집어 들더니 구윤을 돌아보았다.
“내가 행한 의식? 내가 저들에게 뭔가 대단한 자극이라도 준 줄 아느냐?”
“…….”
“나는 그저 단 요만큼. 불과 한 푼어치의 모래알을 던졌을 뿐이다.”
존야가 모래알을 떨어뜨리자 바짝 메말라 있던 앙상한 가지가 힘없이 톡 부러져 나갔다.
구윤을 바라보는 존야의 눈빛이 깊어졌다.
“너희들은 스스로 무너져 내리는 것이지. 그리고 모든 것이 환경 때문이라 여긴다. 결국 너희 인간은 적당한 변명거리만 존재하면 너무나 가볍게 무너져 내린다.”
구윤이 고개를 푹 숙였다.
차가운 바람이 절벽 위를 한 차례 휩쓸며 지나갔다.
잠시 후 구윤의 입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시끄럽네.”
“뭐?”
존야가 눈살을 슬쩍 구겼다.
구윤이 고개를 들고 그녀를 똑바로 마주보았다.
전에 없이 그의 두 눈에서 강렬한 투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거, 종알종알 시끄럽네.”
“뭐라?”
“내가 아는 그분이라면 분명 이렇게 말했을 것 같소. 그걸 누가 모르냐고.”
“무슨 말을 하는 거냐?”
“이미 인간의 간사함을 누구보다도 인간들이 잘 알고 있소. 그 나약함을 알기에 우리는 더 깨닫고 노력하는 거요. 무공을 갈고 닦는 것 역시 그런 깨달음을 깨우쳐 가는 것. 그래서 인간은 강하고, 또 강한 거요!”
구윤이 순간 눈을 번쩍 떴다.
그것이 신호라도 된 듯,
쉬이이이잇!
매서운 바람이 불어 나가는 것과 동시에 존야를 향해 살초가 펼쳐졌다.
구윤의 호신위인 비령이 기습을 펼친 것이다.
따앙!
놀랍게도 존야는 손바닥을 슬쩍 내미는 것만으로 비령의 검을 막아냈다.
순간 비령은 물론, 구윤도 놀라서 눈을 부릅떴다.
‘저렇게 간단히?’
존야가 눈살을 찌푸렸다.
“역시… 너희 인간들은 한심하군.”
퍽!
콰당탕탕!
“령!”
존야가 휘두른 손에 얻어맞은 비령이 십여 장이나 날아가면서 나무 기둥에 처박히고는 쓰러졌다.
존야가 목을 우두둑 꺾고는 착 가라앉은 시선으로 구윤을 응시했다.
“성가신 벌레는 빨리 죽이는 게 좋겠지.”
순간 존야의 두 눈에서 살기가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