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4
귀환 마교관
454화
드드드드드드…!
쿠쿠쿠쿠쿠쿠쿠쿠!
땅이 흔들렸다.
아니 흔들린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했다.
땅이 춤을 추는 것만 같다.
어느 곳은 진동으로, 어느 곳은 출렁임으로, 또 어느 곳은 마구 튀어 올랐다.
마침내 땅이 쩌적 갈라지는가 싶더니 거대한 줄기가 솟구쳐 올라왔다.
쿠드드드득!
“뭐, 뭐야? 갑자기 웬 식물이…!”
“우악! 이게 무슨 일이야?”
집채만 한 굵기의 줄기 식물이 뱀처럼 꿈틀거리며 빠른 속도로 자라나기 시작했다.
꾸드드드드드!
그 기괴한 모습에 사람들은 일순간 공포에 휩싸였다.
마치 웅장하고도 거대한 자연이 분노로 몸부림치는 듯했다.
쿠콰콰콰콰아앙!
쿠드드드드드드득!
굵은 줄기들은 마구 뒤엉키면서 하늘로 뻗쳐 나갔다.
무인들이 우왕좌왕 거리자, 마물들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거세게 몰아쳐 왔다.
“크아아악!”
“아악!”
사비강은 끊임없이 자라나는 거대한 줄기를 보면서 가만히 중얼거렸다.
“시작됐군. 칠죄종(七罪宗)…!”
본격적인 테라포밍이 시작되면 칠죄종은 막을 수 없는 절차로 봐야 한다.
인간의 영역을 초월한 절차.
그 중에서 첫 번째로 겪는 절차는 바로…
“나태의 악.”
**
포로로롱!
맑은 소리와 함께 거대한 줄기 끝에서 커다란 꽃이 활짝 피어났다.
순간 향기로운 꽃 내음과 함께 연둣빛 포자가 사방으로 훅 퍼져 나갔다.
이를 악물고 싸우던 무인들이 순간 멍한 표정이 되면서 넋을 놓았다.
마병의 머리를 흑패도로 쪼개 버리던 염자량 역시 일순 흠칫거리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갑자기 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면서 모든 게 귀찮아진 탓이다.
‘대체 여긴 어디일까? 중원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마왕이라는 인간은 정말 강림하는 걸까? 아니지, 마왕은 악마의 왕이니 인간이라고 볼 수 없겠지.’
온갖 잡다한 생각이 머릿속을 들쑤셨다.
때마침 거대한 줄기 뒤에서 그림자 하나가 스윽 나타났다.
흑패도를 들고 달려들던 염자량이 우뚝 멈췄다.
“엇… 아버지?”
놀랍게도 그곳에 숨을 헐떡이며 선 남자는 아버지 염파(廉破)였다.
염파 역시 염자량을 확인하고는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량아! 정말 내 아들 량아가 맞구나!”
“아버지가 어떻게 여기에…?”
“우리 천화상단도 정사연맹 토벌대에 지원해서 물자 수송을 위해 참여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강림지에서 갑자기 이런 곳으로 옮겨지는 바람에….”
그때였다.
갑자기 줄기 뒤편에서 시커먼 그림자가 휙 날아오더니 염파의 등을 덮치는 게 아닌가?
“비키세요!”
염자량이 얼른 염파의 어깨를 밀치고는 달려드는 마병의 머리를 수직으로 쪼개 버렸다.
수카앙!
그대로 좌우가 절반으로 갈라진 마병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쓰러졌다.
“괜찮으세요?”
“나는… 괜찮다. 그보다 몸은 좀 어떠냐?”
염파가 떨리는 손으로 염자량의 뺨을 어루만졌다.
순간 염자량은 울컥 눈물이 치솟았다.
언제나 망나니 같은 아들로 낙인 찍혔던 자신이 아니었던가?
한데 뜻하지 않은 곳에서 이렇게 아버지가 따뜻한 눈길로 바라보니 괜히 눈시울이 붉어졌다.
“전 괜찮습니다. 그보다 여긴 위험하니 일단 방벽 쪽으로 가시죠.”
“어느새 네가 이렇게 큰 건지 모르겠구나.”
염파가 염자량을 힘껏 안았다.
염자량은 조금 멋쩍으면서도 아버지의 품이 싫지만은 않았다.
아버지의 품이 이렇게 넓었던가?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드는 생각.
‘근데 물자 수송을 하시면서 왜… 강림지에 들어오셨던 걸까?’
곧이어,
“멍청아! 정신 차려라!”
날카로운 소리가 고막을 찔렀다.
순간 염자량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아버지를 보았다. 아니, 자신을 안고 있는 그것은 더 이상 아버지가 아니었다.
돼지머리를 한 마물.
어지간한 성인의 세 배쯤 되는 덩치에 돼지를 꼭 닮은 얼굴로 입을 쩌억 벌려 오는 것이 아닌가?
“헉!”
염자량이 얼른 몸을 빼내려고 했지만, 육중한 팔뚝에 끌어안긴 몸은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제길…!”
“왜 그러느냐? 아들아! 내 먹이가 되어라! 쿠아아아!”
커다란 입이 염자량의 목을 덥석 물어뜯으려는 그 순간,
촤아아악!
핏줄기가 튀어 오르면서 염자량의 얼굴을 흠뻑 적셨다.
털썩, 쿠웅!
무릎을 꿇고 그대로 쓰러진 돼지머리의 마물.
그제야 구속에서 풀려난 염자량이 훌쩍 물러나서는 숨을 토해냈다.
“헉, 헉, 헉…!”
“정신 안 차리고 뭐하는 거냐!”
다시금 고막이 따갑도록 소리 지른 사람은 바로 연우경이었다.
그가 청빙검을 한 차례 휙 저어 검신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염자량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곳곳에서 처절한 비명이 솟구치고 있었다.
놀랍게도 멍하니 서 있던 무인들 모두가 돼지머리를 한 마물의 품에 안긴 채 머리를 뜯어 먹히고 있는 게 아닌가?
바로 나태의 악에 이은 두 번째 단계, ‘탐식의 악’이었다.
“퀴이이이익!”
“크아아악! 살, 살려줘어억!”
“흐이익! 날 먹지 마!”
넋을 잃고 있다가 잡아먹히는 사람들의 비명이 강림지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쩝쩝! 우적우적!
돼지머리 마물들은 닥치는 대로 무인들을 먹어치웠다.
그야말로 탐식의 끝을 보여주겠다는 듯.
그러는 사이 세 번째 절차가 진행되고 있었다.
쿠드드드득!
카드드드드드득!
강림지를 가득 메운 거대한 줄기에서 가는 줄기들이 거미줄처럼 어지럽게 뻗어 나오는 것이 아닌가?
수백, 수천 가닥의 촉수들이 구렁이처럼 꿈틀거리면서 사람들을 휘감아 갔다.
“제기랄! 끝이 없군!”
연우경이 이를 빠득 갈고는 청빙검을 휘둘렀다.
끝없이 달려드는 줄기들이 청빙검에 의해 가차 없이 잘려 나갔다.
염자량 역시 흑패도를 마구 휘두르며 끝없이 달려드는 촉수들을 절단했다.
하지만 다른 곳으로 향하는 모든 촉수들을 상대할 수는 없었다.
몇몇 촉수들이 무인들을 휘감으며 몸을 타고 올랐다.
“하윽!”
녀석들의 껍질엔 뭔가가 발라져 있기라도 한 것인지, 촉수에 닿은 자들은 저마다 얼굴이 붉어지면서 몸이 후끈 달아올랐다.
이내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그대로 주저앉아 버리는 여인들도 있었고, 반대로 넘쳐나는 힘을 주체 못해 웃통을 찢어 버리면서 포효하는 남자들도 있었다.
두 단계를 무사히 넘은 무인들도 이번만큼은 참기 힘든 것인지 정신을 잃어 가고 있었다.
세 번째 단계인 ‘음욕의 악’이었다.
한편 전장 한쪽에서 정신없이 사슬낫을 휘두르며 촉수들을 잘라내던 석탄강은 입술을 쿡 씹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야말로 쾌락과 고통의 지옥이었다.
한쪽에서는 여전히 돼지머리 마물들에게 물어 뜯기는가 하면, 또 다른 한쪽에서는 신음하는 남자와 여자들이 서로 나신이 되어 뒤엉킨 채 육체를 탐하고 있었다.
몇몇 여성들은 뱀처럼 달려드는 촉수들에게 꽁꽁 묶인 채 전라가 되어 윤간당하고 있었다.
수많은 남녀들이 서로 뒤엉켜서 열락의 교성을 터뜨리니 언뜻 징그러운 벌레 떼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석탄강이 입술을 쿡 씹었다.
‘이게 다 뭐야…! 제길!’
찰나,
피츗!
촉수 하나가 석탄강의 목을 스치며 지나갔다.
재빨리 몸을 뒤틀었기에 망정이지 자칫하다간 목이 아예 절단될 뻔했다.
“젠장!”
석탄강이 신경질적으로 사슬낫을 휘둘러 날아들었던 촉수를 서컹 잘라냈다.
퍼득퍼득!
바닥에 떨어진 촉수가 마구 꿈틀거리자, 그가 거칠게 발로 밟아서 터뜨려 버렸다.
퍼억!
“쳇!”
혀를 차고 주위를 둘러보는데,
후끈!
석탄강은 자신의 몸이 달아오르는 것을 깨닫고는 적지 않게 당황했다.
‘젠장…!’
어지간한 미약에 당한 것보다 훨씬 강렬한 충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후끈후끈!
석탄강은 아랫입술이 피가 나도록 질끈 깨물었다.
“왜 그래? 강아!”
바로 곁에서 검을 휘두르며 싸우는 유송령이 소리쳤다.
‘제기랄!’
석탄강이 속으로 욕지거리를 뱉어냈다.
이 순간만큼은 모든 상황이 느릿하게 흐르는 것처럼 보였다.
기합성을 터뜨리느라 살짝 벌어진 유송령의 입술, 쇄골 사이로 흐르는 땀, 잘록한 허리를 지나 부드럽게 솟아 오른 둔부, 탄탄하고 미끈한 허벅지, 날씬한 종아리.
그 모든 것이 그의 눈을 어지럽혔고, 나아가 호흡마저 다스리지 못하게 만들었다.
찰나,
짜아악!
어찌나 세게 맞았는지 석탄강의 몸이 허공을 휘리릭 돌아서 바닥에 넘어졌다.
검의 옆면으로 석탄강의 뺨을 후려친 유송령이 멱살을 잡으며 소리쳤다.
“정신 차려! 이 고자 새끼야!”
“고, 고자라니… 너무하잖아. 나 고자 아냐!”
“그럼 증명해. 진짜 남자라는 걸. 진짜 남자라면 이럴 때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야지!”
“……!”
불쑥 말해 놓고도 유송령은 괜히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스스로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한 것을 뒤늦게 눈치 챈 것이다.
석탄강이 피식 웃으며 몸을 털고 일어났다.
“고마워. 덕분에 완전히 정신이 들었어.”
“다행이네.”
“언젠간 증명할 거다. 내가 고자가 아니라는 걸.”
석탄강이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돌아보며 말하자, 유송령이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소리쳤다.
“이 바보. 그런 말을 이런 상황에서 하지 말라고. 도대체 무슨 생각인…!”
그때,
츠츠츠츠츳…!
어느 샌가 땅속에서 튀어나온 촉수 하나가 유송령의 종아리와 허벅지를 감아 오르면서 불쑥 솟구치는 게 아닌가?
“꺄아악!”
비명과 함께 유송령이 거꾸로 매달린 채 허공으로 치솟았다.
치르르르릇! 치르르르릇!
순간 땅속에서 마구 자라난 촉수 수십 가닥이 그대로 유송령을 덮쳐 갔다.
촤악! 촤아악!
녀석들은 순식간에 유송령의 옷깃을 찢어 버렸다.
찰나지간 속곳까지 드러난 유송령이 눈을 질끈 감자,
츠르르릇!
촉수들이 미끄러지듯이 그녀의 몸을 옭아매며 중요 부위를 파고들었다.
“하으윽…!”
마침내 굵은 줄기 하나가 그녀의 입 안 가득 들어오는 순간,
“으읍…!”
석탄강의 눈이 귀신처럼 찢어지며 일갈이 터져 나왔다.
“이 더러운 개잡것들아아아!”
찰나,
쒸에엑! 쒸에에에에에엑!
두 자루의 사슬낫이 시퍼런 강기를 머금은 채 쏜살 같이 솟구쳐 올랐다.
쉬커엉! 쉬커커커컥!
사슬낫 두 자루가 마치 허공에서 춤을 추듯 이리저리 날아다니면서 어지럽게 섬광을 그렸다.
촤르르르르륵, 탁!
마침내 사슬낫이 그의 손에 돌아왔을 때,
후드득, 후드드드드드득!
하늘에서 잘려나간 촉수 파편이 무더기로 떨어져 내렸다.
휘리리릭, 탁!
유송령이 공중제비를 돌면서 바닥에 사뿐히 착지하자, 석탄강이 얼른 장삼을 벗어 그녀의 몸에 둘러 주었다.
“고마워.”
“뭘.”
석탄강이 멋쩍게 대답하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전히 지옥이 펼쳐져 있었다.
비명과 교성이 마구 뒤섞여서 강림지 곳곳에 울려 퍼졌다.
인육이 되어 먹히는 사람들, 나신이 되어 뒤엉켜 신음하는 자들.
방벽을 기어올라서 탈출하려다가 도륙당하는 자들.
그야말로 악마의 강림을 실감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때 두 사람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하늘에서 쩌렁쩌렁 울렸다.
“들어라! 지금은 이곳에서 벗어날 수 없다! 칠 단계의 절차가 모두 끝날 때까지 이곳에서 살아남는 것을 최우선으로 한다! 이제 삼 단계다. 무조건 살아남아라!”
사비강의 사자후였다.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살아남자.”
“그래!”
이제 삼 단계를 거쳤다.
앞으로 사 단계만 버티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