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5
귀환 마교관
445화
사사삭! 사삭!
어둠 속에서 그림자들이 미끄러지듯 신속하게 움직였다.
일렁이는 횃불들이 곳곳에서 춤을 추었다.
그리고 거기에 따라 그림자들도 흔들흔들 박자를 맞추었다.
그렇게 그림자들이 일순 부는 바람에 흐트러지는 순간,
사사사사삭!
어딘지 이질적인 바람 소리가 전각 사이로 빠르게 흐르듯 지나갔다.
바람과 함께 움직인다.
잠입술의 기본 원칙이다.
때문에 가장 어려운 잠입은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곳을 공략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듯 장원을 잠입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바람만 잘 타면 된다.
새가 높이 날기 위해서는 바람을 잘 타야 하고, 배가 멀리 나아가기 위해서는 강류를 잘 타야 한다.
지금 살막의 살수들은 새였고, 바람이었다.
칠흑보다 검은 바람.
쉬이이잇. 샤샥!
사비강과 막주 악천괴, 그리고 일살부터 이십살까지.
그야말로 살막에서도 최정예만 잠입했다.
그들은 전각 사이의 골목을 굽이굽이 따라 달리며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
오히려 이럴 땐 지붕 위보다 골목 사이가 더 안전하다.
곳곳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잘 이용한다면, 사각지대가 제법 나타나기 때문이다.
살막에서 가장 발이 빠르면서 반응 속도도 빠른 자는 삼살이었다.
무공 수위는 일살과 이살보다 떨어지지만, 그의 임기응변과 반응 속도는 누구보다도 빨랐다.
때문에 살수들 앞에서 길잡이를 하는 역할은 어김없이 삼살의 몫이었다.
오늘도 마찬가지.
스스스슷!
그가 미끄러지듯 달려 나가더니 골목 모퉁이를 돌아섰다.
그는 재빨리 기감을 펼쳐 주변에서 번을 서는 무인이 없는지 확인했고, 직접 눈으로도 한 차례 살폈다.
거리가 깨끗하다는 확신이 들자, 얼른 수신호를 보내 사비강과 살수들을 불러들였다.
스스스스스슷!
그들이 바람을 타고 삼살이 있던 곳까지 달려왔다.
그럼 삼살은 이미 다음 목적지를 향해 떠난 뒤였다.
마침 그가 모퉁이를 막 돌아서려고 할 때였다.
‘둘!’
순찰을 도는 마령교도 두 명이 모퉁이 너머에서 기척을 보였다.
모퉁이 끝에 등을 바짝 기댄 채 서 있던 그가 일순 돌아서며 비수를 적에게 박아 넣었다.
푹! 푹!
그야말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나란히 걸어오던 두 사람은 자신들의 목에 어째서 날카로운 비수가 파고 든 것인지 알지도 못한 채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크어…!”
“끄으…!”
목을 쥐고 버둥거리는 무인들은 이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곧 십이살과 십삼살이 달려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시체 위에 마구 뿌렸다.
그러자 시체들이 흐느적거리면서 녹아 버리더니 이내 맑은 물이 되어 그 자리에 스며드는 것이 아닌가?
그들이 사용한 것은 ‘부시혼쇄산(腐屍魂碎散)’이라는 것으로, 오래전 살막이 화골산을 개량해서 만든 것이었다.
화골산을 뿌리게 되면 지독한 냄새가 나지만, 부시혼쇄산을 뿌리면 무색무취로 시체를 흔적도 없이 녹여 버릴 수가 있다.
세 사람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삼살이 수신호를 보내자, 사비강을 비롯한 살막의 살수들이 다시 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한편, 사비강은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수 집단의 전설이나 다름없는 살막이 암신대보다 잠입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은 사실이다.
당장 이들은 마음만 먹는다면 이 자리에서 귀신처럼 흔적을 지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차원을 떠나 쉬워도 너무 쉬운 게 아닌가?
이 정도 난이도에 암신대가 전멸했다?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둘 중 하나이리라.
암신대가 전멸한 게 아니거나…
‘하지만 그럴 리는 없겠지.’
보고를 한 수하는 군사의 직속 부대에 속한 무인이었다.
‘그럼 암신대 만큼 심혈을 기울이며 막지 않는다는 뜻.’
그렇다면 왜일까?
암신대는 전부 몰살했는데, 살막은 왜 가만히 두는 거지?
암신대를 몰살할 정도면 살막에도 상당한 피해를 줄 수 있을 텐데?
아니다.
마음만 먹으면 적진 깊이 들어온 살막도 아예 몰살할 수도 있지 않을까?
‘설마… 우리가 지금쯤 나타나서 설칠 거라는 걸 알고도 눈감아 준단 말인가? 어째서? 왜?’
사비강이 미간을 잔뜩 구기고는 생각을 이어 갔다.
그러는 사이에도 점점 숭마각은 가까워지고 있었다.
**
“이거 차라리 식은 죽을 먹는 게 쉽겠군.”
악천괴가 입매를 비틀며 중얼거렸다.
그는 지금 눈앞에 우뚝 솟아 있는 숭마각을 보고 있었다.
마귀를 숭배하는 곳답게 다른 전각에 비해서도 매우 높게 지어진 건물이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아찔한 순간도 몇 번 있었다.
하마터면 살막을 발견한 적이 호각을 불 뻔까지 했다.
물론, 그 순간 가장 먼저 날아가 일격을 날린 자는 사비강이었다.
녀석은 입에 호각을 문 채로 목이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요란하게 해치우는 바람에 주변으로 피가 가득 튀었다.
잠입을 하는 입장에서는 결코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사비강이 제때 나서지 않았더라면 더 큰 문제가 발생했을 것이기에 악천괴는 아무런 불평도 내지 않았다.
대신 더 서둘러야 했다.
시체야 부시혼쇄산으로 녹여 버리면 그만이겠지만, 이미 사방에 튀어버린 핏자국은 어쩔 수가 없으니.
이 혈흔을 수상하게 보고 수색을 시작한다면 사비강과 살막은 그야말로 독 안에 든 쥐가 된다.
한데 무슨 이유인지 사비강은 그 후로도 거침없이 행동했다.
그 때문에 매우 위험한 순간이 여러 번 있었다.
그런데 그때마다 사비강은 적을 일격에 해치우고는 성큼성큼 길을 걸어갔다.
뒤에서 보면 도저히 장원에 잠입한 사람 같지가 않았다.
그냥 무턱대고 찾아와서 난동을 부리는 무뢰배가 따로 없었다.
보다 못한 일살이 사비강에게 달려가서 따지려는 걸 악천괴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놔 둬라.”
“하지만…!”
“지켜보자꾸나.”
“…알겠습니다.”
일살이 마지못해 대답하는 사이, 악천괴는 사비강을 물끄러미 보기만 하면서 뒤를 따랐다.
사비강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종자이긴 하지만, 아무 대책 없이 움직일 자가 아니라는 걸 그는 잘 안다.
오히려 그 누구보다도 철저하고 계획적으로 움직이는 자가 바로 사비강이다.
자신을 세간에서 죽은 자로 만들었던 그날도 그러지 않았던가?
그는 우연한 기회로 그 협곡으로 특목반을 이끌고 왔다지만, 그게 우연일 리가 없지 않나?
처음부터 그 길목을 지나갈 것을 알고 노린 것이다.
‘하지만 내가 거길 지나갈 걸 어찌 알았을까?’
갑자기 옛 상념에 빠진 악천괴가 곧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적진 복판에서 저렇게 무턱대고 검부터 휘둘러대며 전진하는 녀석을 따라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급선무다.
한편, 사비강은 이제 굳이 은신술을 펼치지 않았다.
그렇다고 기를 확 드러내지도 않았지만, 그냥 편안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그의 존재를 눈치 채고도 달려오지 않는 무인들도 있었다.
너무나 태연한 기운이었기에 설마하니 잠입한 적이라고는 생각지 못한 것이다.
다만, 우연히 사비강과 마주친 자들은 어김없이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반응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그들이 뭔가를 시도하기도 전에 사비강의 베르타스가 허공을 가르며 목을 날렸다.
그렇게 숭마각까지 이른 것이다.
그야말로 누워서 떡 먹기, 식은 죽 먹기였다.
사비강은 눈을 가늘게 뜨고는 숭마각을 올려다보았다.
‘그랬군. 날 기다린 건가?’
암신대는 전멸했다.
한데 살막은 옷깃에 칼자국도 나지 않았다.
이 정도면…
‘그냥 놔 둔 거다. 지켜봤다는 거지.’
왜?
처음에는 살막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적은 자신이 나타나길 기다린 것이다.
이유는 모른다.
다만 그런 생각이 든다.
자신을 부르는 자가 이곳 어딘가에 있다고.
운명의 이끌림 같은 것이었다.
사비강이 악천괴를 돌아보고는 명했다.
“들어가서 부상자들 신병을 확보하고 신호를 보내도록.”
“알겠네.”
악천괴가 대답과 동시에 수신호를 보내자, 살막의 살수들이 재빨리 숭마각으로 들어섰다.
물론 숭마각 입구와 지붕 위에서 번을 서는 무인들은 자신들이 왜 죽어가는 건지도 모른 채 푹푹 고꾸라지고 말았다.
그야말로 귀신같은 움직임이었다.
그렇게 바깥을 정리한 살막은 마치 건물에 흡수되듯이 안으로 스며들어 갔다.
잠시 후,
쉬잇!
어두운 하늘을 가르며 뭔가가 저 먼 곳을 향해 날아갔다.
숭마각 창문에서 쏘아 보낸 신호탄이었다.
저 신호탄은 정도맹에서 특수 제작한 것으로 일정한 거리에 다다를 때까지 어떠한 빛도, 소리도 뿜어내지 않는다.
대신 적당한 거리에 이르면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빛이 터져 나온다.
신호탄을 쏘아 보낸 위치가 발각되지 않도록 만들어진 것이었다.
마침내,
퍼엉!
저 멀리 북동쪽 하늘에서 신호탄이 터지면서 불꽃이 일어났다.
동시에,
와아아아아아!
아스라이 함성이 들려왔다.
오천여 명이 내지르는 함성은 꽤 먼 곳에서 울리는 것인데도 꽤나 무겁게 다가왔다.
사비강은 숭마각을 빤히 바라보다가 저벅저벅 걸어 들어갔다.
‘확실히 뭔가 있군. 뭐가 됐든 다 부숴 주마.’
**
강림지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의 나무 꼭대기.
한 소녀가 팔짱을 낀 채 꼿꼿하게 서 있었다.
그녀는 바로 지금까지 마령교를 이끈 존야였다.
“이상하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럴 테지.”
소녀는 언제나처럼 자문자답을 했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다른 인격을 가진 한 몸이었다.
두 번째 인격이 말을 이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 이상하다고 생각할 테지.”
“괜찮을까요?”
“상관없다. 안다고 어찌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닐 테니.”
“그것도 그렇군요.”
“이제 대업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다. 너와 내가 만난 것은 오늘을 위한 운명이었다.”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내 육신과 명예를 되찾는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한 너에게 가장 큰 지위와 상을 내리겠다. 물론, 마왕께도 너의 공로를 상세히 전하겠노라.”
“감사합니다.”
소녀는 두 번째 인격이 내뱉은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잘 알 수 있었다.
그들은 한 몸이었기 때문이다.
어떤 생각을 하든 그 생각은 소녀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적어도 지금만큼은 두 번째 인격이 진심으로 말하고 있었다.
실제로 그는 그 어느 때보다도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문득 두 번째 인격이 물었다.
“아까운가?”
“무슨 뜻인지요?”
“저들을 버리는 것이 아까운가?”
“전혀 그렇지 않다면 거짓이겠지요.”
“흐음.”
“제가 반로환동하고 이 자리에 있도록 도운 자들입니다. 방황하는 저를 이 자리에 올려 두었지요.”
“그것은 너의 운명이었다. 한낱 도구에 미련을 갖지 마라.”
“알겠습니다.”
“도구는 도구일 뿐이다. 너의 의지가 중요하다.”
소녀가 쓴웃음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늦은 나이에 제가 잠시 철없는 소리를 했습니다.”
“늦은 나이라… 고작 천 년도 살지 못하는 인간에게 늦은 나이란 없다.”
“새겨듣겠습니다.”
“그럼 슬슬 의식을 거행하지.”
“그러지요.”
소녀가 자문자답을 마치더니 손바닥을 펼쳐 들었다.
그 위로 새하얀 빛 무리가 떠올랐다.
그녀가 하늘 위로 그것을 던져 올리자, 하얀 빛이 수직으로 솟구치면서 밤하늘을 밝게 비추었다.
동시에,
쿠쿠쿠쿠쿠쿠쿠쿠콰아앙!
강림지를 둘러싼 언덕 중턱이 지진처럼 떨리더니 이내 온갖 마물들이 땅바닥을 파헤치며 쏟아지듯 튀어나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