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4
귀환 마교관
444화
구윤이 깜짝 놀라서 되묻자, 수하는 고개를 깊이 숙이며 침통한 표정으로 보고를 이어 갔다.
“암신대 중에서 생존자가 없는 것으로 파악됩니다.”
“그런…!”
구윤이 비틀거리자, 능운파가 성큼 나서서 물었다.
“그게 사실인가?”
“예, 확실한 정보입니다.”
“어찌 그런…!”
“예상보다 놈들의 경계가 훨씬 삼엄한 것 같습니다.”
“암신대가 뚫지 못할 정도라니…! 그럼 정녕 그들을 구할 방법이 없단 말인가?”
능운파가 침통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암신대는 정도맹에서도 잠입 능력 하나만큼은 최정예로 인정받는 조직이었다.
한데 그런 암신대가 실패했다면 과연 누가 무사히 잠입할 수 있단 말인가?
그냥 덮어 놓고 기습을 한다고 모든 게 해결되는 게 아니다.
그랬다간 숭마각에 갇힌 부상자들이 모두 죽을 수가 있다.
그렇게 되면 기습에 성공한다고 해도 향후 무림은 정도맹의 무리한 전투를 나무라고 탓할 것이다.
그땐 정도맹의 입지도 흔들리게 될 것이고, 사파에 대한 장악력에도 문제가 생긴다.
정치적인 타격이 큰 셈이다.
즉, 마령교를 제거하는데 어찌어찌 성공해도 상처가 너무 깊게 남는다.
어쨌거나 그걸 떠나서라도 능운파는 어떻게든 부상자들을 구하고 싶었다.
그가 수뇌 인사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혹시 암신대를 대신해서 숭마각까지 잠입할 조직이 있겠소?”
“…….”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질문.
암신대가 실패한 마당에 누가 사지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겠는가?
게다가 납치당한 부상자들은 대부분 정파의 무인들이었다.
그러니 사파의 무인들이 나설 이유도 딱히 없었다.
능운파가 심호흡을 하고는 말했다.
“만약 이 임무를 성공적으로 해낸다면, 본맹은 그 공을 크게 치하하고 넉넉한 포상을 내릴 거요.”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이건 능운파의 자존심이 걸린 일이었고, 정도맹의 존립과 정치적인 입지가 모두 걸린 문제였다.
누구라도 용감하게 나선다면 그에게 후한 포상을 내릴 용의가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포상을 받더라도 살아 있어야 의미가 있는 것 아니겠나?
정도맹 무인들은 서로 눈치만 살피고 나서지 않았다.
능운파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리도 인재가 없단 말인가!’
설백 장로를 제거하면서 인적 쇄신을 단행했다고 생각했건만, 아직도 정도맹은 정신을 못 차린 것이다.
사람이 모여 집단을 이룬 곳은 으레 시간이 지나면 고여서 썩기 마련이라지만, 정말이지 너무하단 생각이 들었다.
결국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던 능운파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내, 직접 가지.”
구윤은 물론 다른 무인들조차 화들짝 놀라서 맹주를 보았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직접 가시다니요?”
능운파가 구윤과 무인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아무도 나설 자신이 없다고 하니, 내 직접 호신위들과 승룡대를 이끌고 숭마각까지 잠입하겠소. 내가 신호를 보내면 그때 기습을 실행하시오.”
“안 될 말씀입니다!”
“맹주라는 자리는 그리 가벼운 자리가 아닙니다! 어찌 이리 함부로 움직이려고 하십니까?”
“그렇습니다. 혹여 맹주님께 문제라도 생기면 무인들의 사기가 크게 떨어질 겁니다. 그러니 다른 방법을….”
“도대체 무슨 방법이 있단 말이오! 누구도 나서지 못하겠다고 발을 빼고 있으니 나라도 나서야 하지 않겠소? 그게 아니면 숭마각에 사로잡힌 부상자들이 모두 죽도록 지켜보자는 거요? 그럼 맹주라는 자리가 좀 더 무거워지겠소?”
마지막 말 속에는 뼈가 있었다.
그들 모두가 죽었을 때는 그 모든 것을 역시 맹주 탓으로 돌리지 않을 거냐는.
그렇게 맹주라는 자리를 놓고 너희들끼리 또 물고 뜯으며 싸움질을 시작할 것 아니냐는.
정도맹이 서로 갈등을 겪자, 악천괴는 옆에 물러나서 그 모습을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았다.
‘참, 정파 놈들은 이해가 안 되는 족속이라니깐.’
그가 보기에는 이런 소모적인 대화를 왜 하고 자빠졌는지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애초에 사로잡힌 부상자들을 왜 구한다고 설레발을 치는 건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
뭐, 자식이 잡힌 인간들이야 그렇다고 치자.
하지만 부상자와 아무런 연고도 없는 무인들이 그저 불쌍하다는 이유만으로 사지로 들어가는 조직이 어디에 있겠나?
아니, 이들 중에는 부상자와 혈연관계에 있는 자들도 있긴 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조차도 잠입에는 망설인다.
감정보다 이성이 앞서기 때문이리라.
아무리 명분도 좋다지만 제 목숨보다 귀할까?
‘쯧쯧. 그냥 그것들은 죽든 말든 하늘에 맡기고, 확 쳐들어가서 조져 버리면 될 것 아닌가?’
그때였다.
“내가 가지요.”
불쑥 들린 목소리.
모두의 시선이 그곳으로 돌아갔다.
사비강이었다.
능운파의 눈빛에 언뜻 희망이 떠올랐다.
“자네가 직접?”
“예, 가겠습니다.”
“하지만 그럼 멸마관의 토벌대는 누가….”
“당이협 교관이 이끌 겁니다. 아, 지금부턴 당이협 단주라고 불러야겠군요.”
멸마관에서 파견된 토벌대는 편의상 ‘척마단(斥魔團)’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본 연합전쟁 중에는 사비강이 척마단주의 지위였지만, 그 지위를 당이협 교관에게 물려주겠다는 뜻이다.
사비강이 말을 이었다.
“그는 내가 믿고 맡길 수 있는 몇 안 되는 수하입니다. 척마단을 잘 이끌 겁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구윤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사 관주님의 무위는 의심할 것도 없습니다. 분명 강한 분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몰래 잠입하는 것과 무턱대고 부수는 것은 다르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혼자 잠입하는 건 너무나 위험합니다. 설사 숭마각까지 무사히 접근해도 혼자서는 그 많은 부상자들을 모두 보호할 수가 없을 겁니다.”
옳은 지적이었다.
사비강은 분명 무공이 강했다.
무공 수위가 강한 만큼 남들보다 잠입 능력도 뛰어날 것이다.
하지만 은신과 잠입 기술만 평생 갈고 닦은 무인들에 비할 바는 아니다.
그러니 초절정의 단계에 들어선 절대 고수들도 살수만은 두려워하는 것이다.
“게다가 혼자라니.”
사비강이 입매를 틀어 올리며 말했다.
“물론 혼자 잠입할 생각은 없소.”
“예? 하면…?”
“나와 함께 갈 조직이 있소.”
“어떤 조직…”
“악 막주. 나오시오.”
그러자 악천괴가 뜨악한 표정으로 사비강을 바라보았다.
그가 검지로 자신을 가리키며 ‘나?’ 하고 되묻는 표정을 지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내심 부상자들을 구하는 일을 한껏 비웃지 않았던가?
한데 자신이 살수들을 이끌고 숭마각까지 잠입한다고?
악천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사비강이 말을 이었다.
“살막이라면 암신대 못지않은 능력을 가지고 있소. 아니, 어쩌면 암신대보다 더 뛰어난 잠입 능력을 가지고 있을 거요.”
“과연! 그렇겠군요.”
이제야 알겠다는 듯 구윤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사실 조금 전까지는 너무 당황해서 살막의 존재조차 떠올리지 못했다.
어쩔 수 없다.
제아무리 천재로 소문난 그라지만, 평생 정도맹에 몸담으면서 살막을 작전에 이용하겠다는 생각을 몇 번이나 해봤을까?
열 번? 세 번? 아니, 단 한 번도 떠올려 본 적이 없다.
그러다 보니 이번에도 암신대가 실패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살막의 ‘살’ 자도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도통 악천괴가 살막주라는 사실을 안 것도 얼마 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마침 악천괴가 손바닥을 쭉 내밀며 소리쳤다.
“잠, 잠까안!”
“뭐지?”
사비강이 돌아보자, 악천괴가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대체 누구 맘대로 그런 결정을 내리겠다는 거야? 우리더러 부상자들을 구출하고 지키라는 거야?”
“뭐, 다행히 졸지 않고 있었나 보군.”
“이런 염병할! 지금 그게 살수에게 할 말이야! 우린 사람을 죽이는 게 일이지, 살리는 게 일이 아니라고!”
악천괴가 버럭 소리 지르자, 사비강이 미간을 슬쩍 구기고는 말했다.
“별로 큰 소리 칠만큼 자랑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아무튼! 내게는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살막을 이리저리….”
“악 막주.”
“뭐, 뭐…요?”
사비강이 그윽한 시선으로 빤히 바라보자, 악천괴는 저도 모르게 움찔 거리고는 답했다.
지금 사비강의 눈빛은 거부할 수 없는 위압감을 맹렬하게 품고 있었다.
‘이런 니기미…! 대체 언제 또 이 정도 경지가 된 거야?’
언젠가는 기회를 봐서 사비강의 뒤통수를 치고 녀석을 죽여 버리기로 마음먹었었다.
하지만 사비강이 주문만 읊어 버리면 자신이 죽어 버리니 참으로 난감한 노릇이었다.
그러다가 생각난 방법이 사비강을 반 죽도록 팬 다음 혀를 뽑아 버리는 것이었다.
그럼 주문을 읊을 수가 없을 테니 자신은 명대로 살 수 있지 않겠나?
적어도 생각만으로는 그 요상한 사술을 부리지 못할 테니 말이다.
그리고 사비강은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둬 두고 목숨만 겨우 연명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 이런 망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너무 강해졌다.
사비강은 정말 강하다.
굳이 손을 섞어 보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보다 강한 자가 이제는 아무도 떠오르지 않는다.
모르긴 해도 이곳에서 왕 노릇을 하는 능운파 역시 사비강에게는 오초지적이 되지 않을 듯하다.
“시벌… 이래서야 혓바닥을 뽑기는커녕 옷깃도 스치지 못하겠군. 평생 저놈 종 놀이나 해야 하나?”
자기도 모르게 혼잣말이 흘러나오자, 사비강이 어느새 다가서서 얼굴을 불쑥 들이밀었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헛! 사, 사람이 말을 하고 끼어들던가!”
“악 막주. 이제 슬슬 사는 것도 지겨워진 건가? 뭐, 재미란 재미는 다 봤을 나이니 그럴 만도 하겠지.”
이번에는 사비강도 웃지 않았다.
사실 지금 그는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그의 전신에서는 은은한 살기마저 우러나왔다.
이 작전에 참여하게 된 것도 엄밀히 말하자면 그의 뜻이 아니었다.
오히려 모종의 불안감을 안고 참여했다.
한데 구윤이 세웠던 첫 번째 계획이 실패로 돌아갔다.
아무래도 조짐이 좋지 않았다.
그런데 악천괴가 때 아닌 반항을 해오니 본 성질이 드러난 것이다.
눈칫밥 꽤나 먹고 산 악천괴도 그걸 모를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도 성질이 있는 지라 투덜거림을 멈추지는 않았다.
“모양새가 좀 그렇지 않나? 그래도 본막이 살막인데. 잠입해서 사람을 죽이라면 또 몰라. 한데 사람을 구하고 지키라니. 나 원 참.”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당신은 혈사련의 주작이었지. 이젠 확실히 살막주가 다 됐군.”
“용꼬리 보단 뱀 대가리가 낫더군.”
악천괴는 혈사련 고수들이 지켜보고 있음에도 서슴없이 말했다.
사실 그에게는 그들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사자는 사슴 따위가 자신을 어찌 생각하는지 신경도 쓰지 않는 법.
비열하게 보든, 한심하게 보든.
그저 마음만 먹으면 허기를 채우거나 사냥 연습을 할 수 있는 먹잇감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사비강이 강한 어조로 논쟁의 막을 내렸다.
“계속 뱀 대가리가 되고 싶으면 내 말을 들어. 그럼 진짜로 뱀 대가리가 되도록 해줄 테니.”
악천괴가 눈살을 구겼다.
그게 무슨 말이냐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사비강이 전음을 흘렸다.
[당신에게 건 저주를 없애 주지. 내 속박에서 자유롭게 해주겠다는 거다.]
악천괴가 흠칫 떨고는 물었다.
[그게 정말인가?]
[물론.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악천괴가 입을 꾹 다물다가 마침내 대답했다.
“까짓 거, 좋소. 본막이 나서서 숭마각까지 잠입하지. 살막이 호위 임무를 맡게 되다니. 나 참….”
악천괴는 투덜거리면서도 사비강의 곁으로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