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3
귀환 마교관
443화
장내의 분위기는 참으로 오묘했다.
정도맹주가 주관하는 회의였지만, 그곳에는 혈사련에서 보낸 혈파단주(血波團主), 묵검단주(墨劍團主), 암천대주(暗天隊主), 천귀대주(天鬼隊主) 혈오대주(血汚隊主) 등 쟁쟁한 사파의 고수들이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한때 죽었던 것으로 알려진 악천괴마저 살막의 수장이 되어 나타났으니, 분위기가 어딘지 뒤숭숭한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한 마디로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된 셈이었지만, 정사지간에는 여전히 완전히 풀리지 않은 감정의 응어리가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참으로 웃긴 일이군. 한때 마령교와 손을 잡은 사파가 이젠 본맹의 지시에 따라 마령교의 뒤통수를 치겠다니.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지.”
차가운 어조로 말을 뱉은 사람은 다름 아닌 장로회주인 욱청풍이었다.
자연히 혈사련에서 파견된 무인들의 심기가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눈을 부라리자, 사태가 더 악화되기 전에 구윤이 나섰다.
“이번 작전은 천강곡에서 납치당한 동지들을 구하고 강림지로 의심되는 곳을 토벌해서 마령교의 잔당을 제거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천강곡은 정사를 가리지 않고 소환지 토벌에서 다친 모든 무인들을 치료해 주는 곳이었습니다. 이에 정사가 연합하여 천강곡 부상자들을 구출하고 마령교의 씨를 말리려는 것인만큼 더 이상 서로를 자극하는 언행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구윤의 시선이 분명하게 욱청풍에게 향했다.
확실히 큰 전투를 앞둔 상황이어서 그런지 구윤은 평소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욱청풍이 조금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더는 따지지 않았다.
구윤은 앞에 펼쳐진 지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우선 본맹이 파악한 정보에 의하면 천강곡의 부상자들은 현재 이곳 강림지 중심에 억류된 상황입니다. ‘숭마각(崇魔閣)’으로 불리는 곳인데, 이곳 안마당에 설치된 제단이 바로 제물을 바치는 곳으로 보입니다.”
“사람을 제물로 쓰다니! 천하에 둘도 없을 쓰레기 같은 놈들!”
“악질 중에서도 악질입니다! 당장 놈들을 요절냅시다!”
흥분한 정파 무인들이 목청을 높이며 떠들어댔다.
반면 사파 무인들은 가만히 구윤의 이야기를 듣기만 했다.
잠시의 소란이 가라앉자 구윤이 말을 이었다.
“우선 가장 중요한 것은 부상자들을 구출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경계가 삼엄하고, 우리가 한꺼번에 강림지로 쳐들어간다면, 그들은 부상자들을 인질로 삼거나, 아예 죽여 버릴 가능성도 존재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누군가 묻자, 구윤이 미간을 슬쩍 좁히고는 답했다.
“우선 본맹에서 잠입에 능한 암신대(暗神隊)를 투입할 생각입니다. 이들이 숭마각에 이르러 부상자들의 신변을 확보하게 되면 곧바로 신호를 보낼 것입니다.”
“그럼 그때 한꺼번에 친다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암신대가 숭마각까지 잠입하는 건 어떻게 해볼 수 있겠지만, 부상자들을 이끌고 몰래 빠져나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지요.”
“그래서 총공세를 펼치면서 난리가 일어난 통에 부상자들을 구출하겠다는 거군요?”
“맞습니다. 암신대의 역할은 오로지 부상자들을 구출하는 겁니다.”
그러자 잠자코 듣고만 있던 혈사련의 혈오대주가 불쑥 나섰다.
“하지만 강림지 사방에서 급습을 한다고 해도, 녀석들이 우리의 움직임을 미리 파악해 버린다면 그 효과가 떨어질 거요.”
구윤이 그 말이 나올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래서 본 연맹은 마령교에게 최대한 들키지 않고 접근할 방법을 찾았습니다.”
“어떤…?”
구윤이 모두를 돌아보며 눈을 빛냈다.
“수십 년 전, 정마대전을 기억하시는 분은 여기서 몇 안 되실 겁니다. 하지만 그때 본맹이 마교를 상대로 어떤 전술을 썼는지는 많은 분들이 기억하고 계시겠지요.”
“상시기습전.”
누군가의 대답에 구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당시 본맹은 중원 각지에 장원을 만들고, 그 장원에서 연결되는 지하 통로를 수십 갈래로 만들었지요. 그리고 주요 길목마다 출구를 만들어서 적들이 지나가는 순간 기습을 하고 그 지하 통로로 빠지는 전술을 사용했습니다.”
무인들이 저마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유명한 이야기였다.
때문에 과거 강호에는 한때 이런 말이 나돌 정도였다.
정도맹은 땅속에도 천라지망을 펼쳐놓고 있다.
그리고 과거 정도맹은 실제로 이것을 ‘지라지망(地羅地網)’이라고 불렀다.
구윤이 섭선을 들어 지도 위의 한 곳을 가리켰다.
“여기에서 이십 리 정도 떨어진 장원입니다. 이곳에 바로 지하 통로가 연결되어 있지요.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지만, 아직 지하 통로는 건재합니다.”
“이곳을 이용해서 강림지에 접근하자는 말이오?”
“그렇습니다.”
구윤이 굳은 표정으로 대꾸하자, 혈사련에서 파견된 무인들은 물론, 정도맹의 수뇌 인사들도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사실 작전 자체가 나쁠 건 없었다.
지라지망은 정도맹을 제외한 누구도 그 출구나 통로를 알 수 없으니까.
지라지망을 이용해서 수천 명에 달하는 무인들이 강림지 코앞까지 다가간다고 해도 마령교는 결코 눈치 챌 수 없으리라.
하지만 그래서 문제가 된다.
이곳은 아직까지 정도맹을 제외한 누구도 알지 못하는 곳이기에!
그런 곳을 지금 사파 무인들과 함께 쓰자는 말 아닌가?
정도맹이 가진 비장의 한수를 아무 조건 없이 공개하겠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자연히 반발이 일어났다.
“아무리 그래도 지라지망을 사파 무리와 공유할 수는 없소!”
욱청풍이 단호한 목소리로 외쳤다.
이미 예상된 반응이었기에 구윤은 가만히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곧이어 다른 장로와 수뇌 인사들이 목청을 높이며 소리쳤다.
“회주님의 의견에 동의하는 바입니다! 아무리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고는 하나, 언제 뒤통수를 칠지도 모를 사파 놈들과 지라지망을 공유하자니! 지라지망은 본맹의 자산이자, 무기입니다!”
“맞습니다! 차라리 사파를 제외하고 본맹의 무인들만 지라지망을 이용해서 이동하는 게 어떻습니까?”
반면 사파 무인들은 그런 정파 무인들을 팔짱 끼고 구경만 하는 형국이었다.
사실 그들은 내심 비웃고 있었다.
사태가 이 지경이 되었음에도 지라지망을 공유하는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줄이야.
‘왜 정파 무인들을 보고 탁상공론만 하는 멍청이라고 하는지 알 만 하군.’
‘땅굴 하나 공유하자는 걸로 이렇게까지 말이 많다니.’
하지만 그들의 이런 생각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것이었다.
실제로 정도맹의 지라지망은 특급 기밀에 속했다.
지라지망은 매우 정교하고 복잡하게 만들어져 있어서 지하에 들어가서도 길을 잃기 쉬웠는데,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특별히 지라지망의 기관진식을 이해하고 있어야 했다.
한데 지라지망 대부분이 비슷한 형식으로 만들어졌기에, 한 곳의 구조가 밝혀지면 다른 곳들도 금방 파악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정도맹으로서는 지라지망을 공유하는 것에 큰 부담을 가질 수밖에.
하지만 사안이 급한 것도 사실.
지켜만 보던 사비강이 불쑥 나섰다.
“지금 사파의 눈치를 보는 건 바보 같은 짓이오. 당장 강림지에 마왕이 강림하게 되면 정사를 막론하고 모두 전멸할 수 있소. 이 상황에서는 무조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 할 거요.”
이제는 정도맹에서 사비강의 입지가 굳건한 상태.
멸마관주가 직접 나서서 이렇게까지 말하니, 반론을 제기하는 자들의 목소리가 한층 누그러들었다.
마지막으로 맹주 능운파가 방점을 찍었다.
“나 역시 총군사의 뜻에 동의하는 바요. 지라지망이 본맹의 큰 기밀인 건 사실이지만, 굳이 지라지망이 아니어도 본맹은 얼마든지 강한 힘을 보유하고 있소. 혹시 모를 배신을 의식할 바엔 차라리 이를 공유하고 눈앞의 적들에게 맞서는 것이 옳다고 보오.”
맹주까지 나서자 더 이상은 반론이 흘러나오지 않았다.
구윤이 말을 이었다.
“그럼 계속해서 작전을 설명하겠습니다. 이곳 장원에서 지라지망을 이용하게 되면 이 지점에서 모두 모일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각 방향으로 흩어져 여기와 여기. 그리고 이쪽의 여러 출구로 나올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대략적으로 강림지를 에워싸는 형국이 되지요. 여기까지는 절대 들키지 않고 이동이 가능합니다.”
정사연맹의 무인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했다.
과연 마령교의 턱밑까지 은밀하게 접근할 수 있는 최고의 수단인 듯했다.
그때 욱청풍이 그럴싸한 문제를 제기했다.
“하지만 우리가 갑자기 사라지면, 마령교에서는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챌 수 있을 거요.”
구윤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그래서 이곳에서 대기하는 동안, 본맹은 바로 여기. 이쯤 되는 곳에 막사를 치고 무인들을 주둔시킬 겁니다. 물론, 이때 주둔하는 무인들은 이류와 삼류 수준의 무인들입니다만, ‘상승기주(上乘氣珠)’라는 기물을 이용해서 본래의 무공보다 훨씬 강하게 보이도록 만들어 놓을 겁니다.”
‘상승기주’란 정도맹이 오래전부터 보유하고 있던 기물이었는데, 근처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본래의 무공보다 훨씬 강한 기도를 품은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효과가 있었다.
이렇듯 신묘한 기능과는 별개로 딱히 쓸모가 없는 것이 사실이었는데, 구윤은 그것을 가져와 허허실실(虛虛實實) 전략에 이용한 것이다.
“하면 마령교는 그곳을 본연맹의 본진이라고 생각하겠군.”
혈사련 혈파단주의 말에 구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마령교는 이곳을 정사연합의 본진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그들이 한때 가짜 강림지를 이용했듯이, 우리도 가짜 주둔지로 이목을 끄는 겁니다. 가짜 맹주와 총군사, 멸마관주도 여기에 둘 것입니다. 외모는 물론 행동 하나하나까지 꼭 닮은 자들로 뽑았으니 충분히 속일 수 있을 겁니다.”
“그러는 사이에 우리는 지라지망을 이용해서 녀석들 턱밑까지 이동하고, 그에 앞서 암신대가 숭마각에 갇힌 부상자들의 신병을 확보한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신호를 보내면 연맹이 급습을 하게 되고, 아수라장이 된 틈에 부상자들은 생환, 적을 토벌한다는 거군.”
“정확합니다.”
구윤이 고개를 끄덕이자, 작전에 대해 듣기만 하던 다른 무인들이 나직이 수군거렸다.
작전 자체는 크게 나무랄 게 없었다.
게다가 암신대는 정도맹에서도 잠입하는 능력 하나만큼은 최정예에 속했다.
“이의가 있으신 분은 말씀해 주십시오.”
구윤이 어떠한 의견도 달게 듣겠다는 듯 무인들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딱히 다른 뜻을 제기하는 자는 없었다.
혈파단주가 다시 물었다.
“작전은 언제부터 시작할 거요?”
“실은… 이미 시작됐습니다.”
“뭣이?”
“숭마각까지 잠입하는 것이 꽤나 시간이 걸릴 듯하여, 암신대를 먼저 보내 놓은 상황입니다.”
“허!”
혈파단주가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하지만 그는 내심 감탄하고 있었다.
‘생긴 것은 계집처럼 곱상하기만 한데, 이럴 땐 강단이 보통을 넘는군.’
아마도 이 작전을 수립할 때부터 반대하는 자가 없으리라 짐작한 것이리라.
아니, 반대한 자가 나타나더라도 묵살할 생각이었으리라.
그의 외모만 보고 쉽게 생각했다.
그래도 ‘정도맹’이라는 강호 최강의 집단을 이끄는 두뇌가 바로 그라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그럼 지금 바로 작전을 개시하겠습니다. 앞으로 한 시진 후, 이곳 지라지망의 중심부에 모이도록 하겠습니다.”
구윤이 가리킨 곳은 지도 위의 한 곳을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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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하군.”
“과연 정파 녀석들이 기를 쓰고 기밀로 유지할 만합니다.”
“정마대전이 얼마나 치열하고 치밀했는지 보여주는 단적인 예군요.”
혈사련에서 파견 온 고수들이 주변을 둘러보며 혀를 내둘렀다.
그들이 모인 지라지망의 중심지는 지하라는 사실을 잊게 만들 만큼 광활하고 넓은 공간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이어져 있는 수십 개의 통로!
지하 통로 위에는 바위에 새겨진 글자가 있었는데, 이것들이 어떤 기관 장치에 의해서 일정 시간이 되면 회전하면서 모양이 변했다.
때문에 뭣도 모르고 이런 곳에 들어섰다가는 영영 미아가 되기 딱 좋을 듯싶었다.
중심지에 모인 정사연합 무인은 모두 오천 여명.
그 많은 무인들이 한 공간에 있음에도 공동이 전혀 좁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야말로 지라지망은 지하에 만들어진 또 하나의 세상처럼 보였다.
한편, 구윤은 다소 긴장한 표정으로 공동 한쪽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지금쯤이면 암신대에서 기별이 있고도 남았을 상황.
계획대로라면 자정이 되기 전에 벌써 기습이 이루어졌어야 한다.
한데…
‘왜 연락이 없는 거지? 설마 암신대가 실패한 걸까?’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그때, 무인 하나가 빠르게 달려와 구윤 앞에 무릎을 꿇었다.
“총군사님께 보고 드립니다! 암신대가 잠입에 실패하여 전멸했습니다!”
“뭐, 뭣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