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0
귀환 마교관
430화
어두컴컴한 공간에 나신의 유정이 홀로 서 있었다.
자운룡이 유정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정아… 괜찮으냐?”
자운룡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분명 그의 목소리를 들었을 것임에도 유정은 여전히 넋이 나간 표정으로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정아…? 나다. 나를 알아보겠느냐?”
유정이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아…?”
“정아?”
“아아…! 아헤…!”
유정은 마치 혼을 잃은 아이처럼 입을 헤 벌린 채 의미 없는 소리만 흘려내고 있었다.
그녀의 입가에서 걸쭉한 침이 흘러내렸다.
‘도대체 이것들이 너에게 무슨 짓을…!’
자운룡이 입술을 쿡 씹는데, 마침 뒤쪽에서 백면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완성체가 아니기 때문에 조금 부족한 부분이 없지 않아 있소. 이해해 주시오.”
‘이해…? 감히 정아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 이해를 바란다…?’
자운룡이 이를 빠드득 갈았다.
당장이라도 돌아가 백면인의 멱살을 쥐고 죽도록 패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둠 속에 홀로 서 있는 유정의 전신은 온통 상처투성이였다.
곳곳에 멍과 자상이 있었다.
어디 하나 성한 곳이 없었다.
울컥 울분이 치밀어 올랐다.
인내의 대가가 이거냐고 따지고 싶었다.
자신을 존경하고 흠모한다며 당차게 밝히며 해맑게 웃던 유정은 이곳에 없었다.
자운룡은 천천히 다가가 유정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쉬르르르. 쉬르르르.
유정의 피부 안에서 뭔가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마치 수백 마리의 벌레들이 얇은 피부 안쪽을 제멋대로 기어 다니는 듯했다.
분명 엽기적인 모습이었다.
하지만 자운룡은 놀라거나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소중한 듯 유정의 어깨와 팔을 쓰다듬었다.
“많이 아팠느냐?”
“어아…?”
“미안하구나. 나는 네가 이렇게….”
그렇게 자운룡의 손이 유정의 뺨을 쓰다듬을 때였다.
츠팟! 키리릭! 키리리리릭!
유정의 등이 찢어지더니 곧이어 지네를 닮은 절지곤충이 끝없이 자라나며 허공을 가득 메우는 것이 아닌가?
수백 마리의 절지곤충이 어두운 공간을 꽉 채운 채 흐느적거리는 모습은 그야말로 엽기적이면서도 공포감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자운룡이 눈을 부릅뜬 채 입을 딱 벌렸다.
키리릭. 키릭.
“이… 이건… 대체?”
“킥킥. 히히히! 깔깔깔!”
유정이 느닷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한참이나 웃던 그녀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더니 웃음을 뚝 멈췄다.
곧이어 싸늘하게 식은 표정으로 자운룡을 노려보더니,
“죽어 버려.”
찰나,
키리리리리리릭!
허공에서 꿈틀대던 수백 마리의 절지곤충들이 빳빳하게 굳으며 일시에 은면인의 몸을 꿰뚫었다.
촤촤촤촤촤아악!
순식간에 자운룡의 몸이 고슴도치처럼 변하고 말았다.
**
“헉!”
유정은 두 눈을 번쩍 떴다.
굉장히 기분 나쁜 꿈을 꾼 것 같았지만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녀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천천히 일어났다.
“정신이 좀 들었나?”
움찔.
유정이 멈칫하고는 돌아보자, 낯선 사내가 정자 한쪽 구석에 서 있었다.
사비강이었다.
유정은 미간을 슬쩍 찌푸리고는 천천히 일어났다.
여전히 넋이 나간 것처럼 멍한 표정이었지만, 어딘지 경계를 하는 모습이었다.
“섣불리 움직이는 건….”
사비강이 말을 꺼내며 다가오자, 유정이 얼른 물러나며 본능적으로 절지곤충을 쏘아냈다.
키리리리리리릭!
전신을 찢으며 자라난 절지곤충이 매섭게 뻗어나가는데,
“쿠웨에엑!”
갑자기 치미는 구토증을 참지 못한 유정이 그대로 고꾸라지면서 피를 한 움큼 토해냈다.
동시에 그녀의 몸에서 뻗어 나오던 절지곤충들 역시 흐느적거리며 늘어지더니, 이내 진녹색의 진득한 액체를 흘리면서 녹아내렸다.
“아아…?”
유정이 입을 벌린 채 의아한 표정을 짓자, 사비강이 가볍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어쩔 수 없었다. 너를 제압하기 위해 독을 좀 썼다. 그러니 거칠게 움직이면 독이 더 빨리 퍼질 거다. 얌전히 있는 게 좋을 거야.”
“아아…!”
“내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다.”
사비강이 빤히 바라보며 말하자, 유정은 어딘지 주눅이 든 것처럼 시선을 피해 버렸다.
사비강은 정자 난간으로 걸어가 언덕 아래를 훑어보았다.
가짜 강림지 곳곳이 불타고 있었다.
뭔가 타들어가는 냄새와 함께 혈향이 바람에 묻어났다.
“아아아… 아아…!”
유정은 자신이 토해 버린 핏물을 손으로 철벅철벅 만지며 장난을 치고 있었다.
사비강이 그런 그녀를 내버려 둔 채 저 멀리에서 아직까지 마물과 싸우고 있는 능운파와 악천괴를 보았다.
잠시 후 그가 입을 열었다.
“이제 슬슬 끝나가는 것 같군. 돌아가자. 상처가 많을수록 살아갈 이유도 많아지지.”
유정에게 다가선 사비강이 손을 내밀었다.
**
상처가 너무 많다.
능소소는 점점 수세에 몰리는 것을 확실히 느꼈다.
재빨리 주변을 둘러보았다.
단리정은 왼쪽 어깨에 비수를 박고 있었고, 연우경은 복부를 깊이 베여 전투 불능 상태였다.
이미 죽은 자도 많았다.
그들 중에는 용천관 동기들도 있을 것이고, 신생조 출신의 조교들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무린!”
어디선가 찢어질 듯한 고함소리가 들렸다.
능소소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돌아갔다.
마침 적무린이 옥마단원의 합공을 받아 치명상을 입는 순간이었다.
“커억!”
적무린이 피를 토해내며 주춤 물러났다.
그의 가슴에는 장검이 꽂혀 있었다.
퍽! 퍼억!
어느새 날아든 서래향이 두 명의 옥마단원을 밀쳐내고는 얼른 적무린을 부축했다.
“괜찮아?”
“쿨럭…! 끝까지… 함께… 죄송…!”
“무린! 무린!”
서래향의 눈시울이 불거졌다.
적무린은 말을 마저 잇지 못했다.
그는 몸을 가늘게 떨더니 이내 축 늘어지고 말았다.
“안 돼! 무린!”
서래향이 비명처럼 소리쳤지만 적무린은 더 이상 반응이 없었다.
“이것들! 다 죽여 버리겠어!”
서래향이 눈물을 뿌리며 돌아섰다.
분노에 취한 그녀가 광기에 휩싸인 채 마구잡이로 검을 휘둘러 갔다.
쉭! 쒸에엑! 쉭쉭!
“크웃!”
“이런 미친 년!”
그 기세에 옥마단원들이 잠시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하지만 분풀이로 휘둘러대는 검이 제대로 통할 리가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손발이 어지러워지자 여실히 빈틈이 드러났다.
옥마단원들은 어김없이 그 틈을 노려 공격해왔다.
푹푹! 푸욱!
“아악!”
세 자루의 검이 정확히 그녀의 가슴과 복부, 허벅지를 관통했다.
“서 교관님!”
능소소가 바람처럼 달려가며 외쳤다.
찰나,
“어딜!”
옥마단주 여곤이 번개처럼 나타나더니 그대로 능소소의 등에 일장을 날렸다.
퍼억!
“아악!”
능소소가 튕기듯 날아가며 비명을 터뜨렸다.
다음 순간, 옥마단원들이 일제히 날아오르며 능소소에게 검을 휘둘렀다.
촤악! 촤촤촤촤악!
옷이 갈기갈기 찢겨나간 능소소가 피투성이가 된 채 추락했다.
방심했다.
아니, 방심이 아니라 감정을 다스리지 못해 집중력을 잃었다.
그 바람에 치명상을 입고 만 것이다.
‘이대로… 끝인가? 교관님…’
모든 것을 체념하자 전신을 난자당한 고통마저 사라지는 듯했다.
그런데…
휘리릭!
누군가가 날아와 능소소의 몸을 안으며 부드럽게 착지했다.
자운룡이었다.
그가 흔들리는 눈동자로 능소소를 내려다보았다.
“쿨럭!”
“능 조교님!”
“…….”
능소소가 게슴츠레 뜬 눈으로 자운룡을 보았다.
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목구멍에 핏물이 가득해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대신 힘겹게 손을 들어 올리던 그녀는 이내 눈을 감고 축 늘어졌다.
숨을 완전히 거둔 것이다.
자운룡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마침 여곤이 그를 보고는 툭 던지듯 말했다.
“이제 오셨소? 뭐, 좀 늦은 감이 있지만, 같이 마무리나 합시다.”
자운룡은 그의 말을 들은 척 만 척 하더니 능소소를 바닥에 눕히고는 장포를 벗어 덮어 주었다.
여곤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뭐하는 거요?”
자운룡이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고는 살기를 무럭무럭 피워 올렸다.
그 살기가 분명하게 자신을 향하고 있었기에 여곤의 표정이 자연스럽게 굳어졌다.
“지금 뭐하는…”
“더 이상 참지 않기로 했다.”
“뭐요?”
“인내 끝에 얻은 열매가 마냥 달지만은 않더군.”
“도대체…”
탓!
순간 자운룡이 바닥을 차더니 여곤을 향해 짓쳐들었다.
위기의식을 느낀 여곤이 얼른 검을 앞세웠다.
“이런 미친…!”
따앙!
휘청 튕겨 나간 여곤이 얼른 미끄러지며 중심을 잡았다.
“이익! 도대체 이게 뭔 병신 같은 짓…!”
“닥쳐!”
파바바밧!
따당! 깡! 깡!
자운룡은 그야말로 야차처럼 맹폭하게 검을 휘둘러 갔다.
“이런 씨벌!”
여곤이 욕지거리를 뱉으며 막아냈지만 혼심을 다하는 자운룡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 좆같은 새끼 좀 어떻게 해!”
여곤의 명에 옥마단원들이 일제히 기합성을 터뜨리며 자운룡에게 달려들었다.
쉬이이익! 쉬이익!
몇몇 옥마단원이 자운룡에게 자상을 남겼지만, 그는 혈귀처럼 싸움을 이어 갔다.
**
푹! 콱!
능운파의 검이 발루크의 목을 베어 버렸다.
거의 동시에 발루크의 가슴을 뚫고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
깡마른 손아귀에는 벌건 심장이 꿈틀거리며 뛰고 있었다.
츄아악!
발루크의 등에 매달려 있던 악천괴가 손을 뽑아내자, 가슴이 비어 버린 녀석이 쿵,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마지막 남은 발루크였다.
능운파와 악천괴가 서로 힐끔거리더니 동시에 말했다.
“내가 죽였소.”
“내가 죽였소.”
능운파가 미간을 팍 구기고는 말을 이었다.
“내 검이 조금 더 빨랐소.”
“흥! 손을 뽑아내는데 시간이 걸렸을 뿐, 내가 먼저 귀살조공으로 녀석의 심장을 움켜잡았소.”
“움켜쥔 것만으로 죽였다고 할 순 없지.”
“심장이 잡히고도 살 수 없지.”
두 사람이 서로를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능운파가 어깨를 으쓱였다.
“뭐, 하나쯤은 양보하지. 그래도 내가 세 마리를 더 처치한 셈이니.”
“흥! 애초에 죽을 뻔한 것을 누가 구해 줬더라?”
“죽을 뻔하긴! 그저 탐색전을 펼치고 있었을 뿐이오. 이런 마물은 생소했기에!”
“어련하시겠소? 역시 정파 무인을 상대로 말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다니까.”
악천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중얼거리자, 능운파가 이를 빠득 갈고는 노려보았다.
다시 두 사람 사이에서 팽팽한 눈싸움이 이어졌다.
악천괴가 뭐라고 한 마디 더 하려는 순간, 그곳으로 사비강이 뚝 떨어지듯 나타났다.
“대충 정리가 된 것 같으니 이만 돌아갑시다.”
“사비강 관주. 그 아이는 누군가?”
능운파의 시선이 사비강이 부축한 여인에게 향했다.
“절 죽이려던 아이였는데, 구면이기에 기회를 줄까 합니다.”
“구면…?”
“뭐, 그렇게 됐습니다.”
사비강이 씨익 웃으며 주위를 스윽 둘러보았다.
마령교도의 시체들과 함께 발루크의 잔해가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힘든 싸움이었겠군요.”
“뭐, 이 정도는 아직 거뜬하네. 한데 이자는 어찌 된 일인가?”
능운파의 탐탁찮은 시선이 악천괴에게 향했다.
비록 마물에 맞서서 함께 싸우긴 했지만, 한때 사파 무인으로 악명을 떨치던 악천괴가 아닌가?
게다가 세상 사람들은 그가 죽은 것으로 알고 있었다.
사비강이 부드럽게 웃으며 답했다.
“천천히 설명 드리겠습니다. 이만 돌아가시죠.”
그때, 능운파 곁으로 시커먼 그림자 하나가 뚝 떨어져 내렸다.
“맹주님, 보고 드립니다!”
사내의 목소리가 몹시 다급했기에 능운파의 이맛살이 절로 구겨졌다.
“무슨 일인가?”
“천강곡(天康谷)이 당했습니다!”
“천강곡이?”
능운파의 눈썹이 떨렸다.
사비강이 불쑥 나서며 물었다.
“자세히 말해 보시오.”
천강곡은 무림 최대 의원이라고 볼 수 있었는데, 총군사 구윤의 제안이 본회의에 통과되면서 신설된 곳이었다.
정사를 막론하고 소환지를 토벌하다가 부상을 당한 무인이라면 누구나 천강곡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때문에 멸마관의 초환당과도 왕래가 잦았다.
“마령교 놈들의 소행으로 보입니다. 병동에 있던 모든 환자들이 납치되거나 살해당했습니다.”
“흐음.”
사비강이 침음을 흘리고는 능운파를 돌아보았다.
“일단 수습을 해주십시오. 저도 이 일에 관련하여 알아보도록 지시해 두겠습니다.”
“알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