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8
귀환 마교관
428화
사비강이 착 가라앉은 눈빛으로 여인을 보았다.
“아…?”
여인은 쓰러진 금면인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는 유일한 명령권자가 죽었음에도 어떠한 감정의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사비강이 베르타스를 한 차례 휘저어 묻은 피를 털어냈다.
그가 저벅저벅 걸음을 옮기자,
키리리리리릭!
여인의 전신에서 다시 절지곤충이 뻗어 나오며 사비강에게 매섭게 날아들었다.
찰나, 사비강이 눈앞에서 번쩍 사라지더니 여인의 눈앞으로 이동했다.
갑자기 가까워진 탓인지 여인이 잔뜩 커진 눈망울로 사비강을 보았다.
동시에 전신에서 뻗어 나갔던 절지곤충들이 방향을 꺾으며 사비강에게 날아들었다.
키리리리리릭!
마침내 절지곤충이 사비강의 온몸을 뚫으며 파고들려는 순간,
스윽.
사비강이 손을 뻗어 여인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 순간 마치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절지곤충들이 그대로 움직임을 멈추었다.
여인조차도 이유를 몰랐다.
왜 사비강을 공격하지 않았는지.
어쩌면 본능인지도 몰랐다.
공격해 봐야 소용이 없다는.
피부가 닿는 순간, 절대 이길 수 없는 상대라는 걸 무의식중에 인정하는 건지도 몰랐다.
그도 아니면 다른 무언가 때문에.
어쨌거나 여인의 몸에서 뻗어 나온 절지곤충들은 사비강의 몸을 꿰뚫기 직전 거짓말같이 멈추었다.
사비강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그만. 나와 같이 가지.”
“아…?”
여인이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사비강의 손가락이 빠르게 움직였다.
탁탁탁.
마혈과 혼혈이 짚인 여인이 그대로 쓰러지며 사비강의 품에 안겼다.
치르르르르륵.
자라났던 절지곤충들이 방향을 잃은 벌레처럼 마구 꿈틀대더니 이내 스르르 줄어들기 시작했다.
**
‘분명 뭔가가 있다! 음침한 놈!’
등부형은 담벼락 아래에 몸을 숨긴 채 고개만 살짝 내밀고는 저만치 걸어가는 위검종을 보았다.
‘자 교관이 저놈 침대 아래에서 뭔가를 보았다고 했지. 내가 오늘은 반드시 네놈의 가면은 벗기고 말겠다!’
마침내 위검종이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멀어졌을 때, 등부형은 날렵하게 담벼락을 타넘었다.
그리고 경공을 펼쳐서 바람처럼 날아가 위검종의 숙소로 잠입했다.
‘어디보자…’
방 내부를 빠르게 훑어본 등부형은 제일 먼저 침상 아래를 살펴보았다.
‘뭐야? 없잖아?’
엄청난 사실을 자신의 힘으로 밝혀낼 거라는 기대에 가슴이 잔뜩 부풀어 있던 그는 금세 실망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그가 다시 일어서려는데,
‘인기척!’
누군가가 숙소로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설마 위검종 그 녀석이 벌써 돌아오는 건가?’
분명 발걸음 소리는 이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게다가 느껴지는 기도로 볼 때 위검종이 틀림없었다.
당황한 그가 주변을 둘러보다가 마땅히 숨을 곳이 없자, 얼른 침대 아래로 몸을 밀어 넣었다.
끼이이익…!
마침내 문이 열리면서 위검종이 들어왔다.
등부형은 호흡마저 멈춘 채 기도를 완전히 숨겼다.
옷을 갈아입은 위검종이 방안을 한 차례 둘러보더니 다시 나갔다.
그제야 맥이 탁 풀린 등부형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엇? 이건…!’
침상 아래에 누워서 보니, 상판 사이에 서신이 끼어 있는 게 아닌가?
위검종이 얼른 그것을 낚아채고는 침상 아래에서 기어 나왔다.
‘그럼 그렇지! 이놈, 확실히 증거를 잡았다!’
등부형은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생각조차 잊은 채 그 자리에서 서신을 펼쳐 내용을 확인했다.
‘이건…!’
놀랍게도 서신에는 멸마관의 행적에 대해 무척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특히 사비강 관주에 대한 움직임을 매우 상세하게 적어 두었는데, 아무리 보아도 범상치가 않았다.
‘역시 이 녀석이 간자였어!’
등부형은 침상 아래에서 기어 나와 본격적으로 서신을 읽어 보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는 눈을 찢을 듯 부릅떴다.
“이건…!”
등부형은 두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다.
놀랍게도 서신에는 멸마관을 급습할 계획까지 적혀 있었다.
게다가 마령교라니!
등부형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제야 위검종의 진짜 실체를 밝힌 것이다.
‘사비강 관주가 없을 때 은마단을 이끌고 멸마관을 급습할 계획이라니…! 잠깐, 그럼 설마 지금!’
순간 온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그러고 보니 조금 전에 들어왔던 위검종은 좀 더 활동하기 좋은 무복을 갈아입고 검까지 챙겨서 나가지 않았던가?
‘이놈! 역시 내 짐작이 틀리지 않았구나! 이제 어쩐다?’
등부형은 얼른 서신을 품에 갈무리하고는 위검종의 숙소를 빠져나왔다.
그는 곧바로 걸음을 성큼성큼 옮겨 자운룡의 숙소로 찾아갔다.
마침 자운룡이 숙소에서 나서는 참이었다.
“선배님?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자 교관! 이것 좀 보시게!”
등부형이 얼른 다가가 위검종의 숙소에서 찾아낸 서신을 펼쳐 보였다.
글귀를 읽어 내려가는 동안 자운룡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더니 이내 동공이 흔들렸다.
“이건…! 이게 사실이면 정말 큰일이지 않습니까?”
“내 말이 바로 그걸세! 지금 관주가 멸마관을 떠난 상태이니, 필시 일이 벌어질 것일세!”
“그냥 넘길 문제가 아니군요.”
“이제 어떻게 하면 좋겠나?”
“어떡하긴요. 당장이라도 총관님께 보고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역시 그렇겠지? 이 문제를 우리끼리 해결하기에는 좀 무리겠지?”
이왕이면 단독으로 공을 세워 정도맹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등부형이었다.
하지만 자운룡의 반응은 단호했다.
“안 될 말입니다. 너무 위험합니다. 이 서신의 내용대로라면 당장 은마단이 멸마관을 친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지 않습니까? 선배님과 제가 모두 당해내기에는 위험부담이 너무 큽니다.”
“흐음. 역시 알릴 수밖에 없겠군.”
“당장이라도 알려야지요.”
등부형은 내심 기회를 놓치는 것 같아서 아쉬웠지만, 자운룡의 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결국 두 사람은 그 길로 서신을 들고는 관주전으로 향했다.
언덕에 오르자 마침 관주전 앞 정자에서 대화를 나누는 매설란과 무랑도사가 보였다.
“총관님께 급히 보고 드려야 할 사안이 있어서 왔습니다.”
자운룡이 예를 갖춰서 말하자, 매설란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급히 보고할 사안이라니. 뭐죠?”
그러자 이번엔 등부형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위검종 교관은 아주 간악한 간자입니다!”
등부형의 말에 매설란과 무랑이 서로 눈짓을 교환했다.
매설란이 눈썹을 살짝 일그러뜨리며 물었다.
“무슨 뜻이죠?”
“말씀 그대로입니다. 위검종 교관은 사실 마령교에서 온 간자입니다.”
그제야 매설란의 표정도 심각하게 일그러졌다.
“마령교의 간자라니. 대체 무슨 근거로….”
“근거라면 여기 있습니다. 당장 조치를 취해야만 합니다.”
등부형이 당당한 태도로 품에 갈무리했던 서신을 꺼내 보여주었다.
서신을 받아들고 읽어 보던 매설란의 눈동자가 어느 순간 커졌다.
그녀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이걸 어디서 발견한 겁니까?”
“위검종 교관의 숙소에서 발견했습니다. 침상 아래에 숨겨져 있던 서신을 제가 발견했습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최초 발견자는 자운룡이 되었어야 할 것이다.
등부형은 그의 말을 듣고 제대로 확인한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등부형은 그 과정을 생략했다.
자운룡도 거기에 대해서는 굳이 토를 달지 않았다.
곁에 있던 무랑도사가 한 걸음 다가서며 물었다.
“하면 위 교관의 숙소에 잠입해서 수색이라도 했다는 건가?”
“뭐… 그렇습니다만,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요. 당장 위검종을 잡아서 문초를 해야 합니다!”
매설란은 모든 서신을 꼼꼼하게 훑어보았다.
어떤 서신은 이곳에서 적은 것으로 보였고, 어떤 서신은 마령교로부터 받은 것 같았다.
마침내 매설란이 매서워진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한 증거군요. 위검종 교관은 지금 어디에 있죠?”
“알 수 없습니다. 무복을 갈아입고 병기를 챙겨 나가는 것을 마지막으로 보았습니다.”
매설란이 눈을 가늘게 뜨더니 입을 열었다.
“문탁.”
“예, 총관님.”
매설란 옆으로 조문탁이 귀신처럼 홀연히 나타났다.
은신과 경공이 뛰어난 그는 총관의 호위 임무와 조교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는 중이었다.
그를 본 등부형은 내심 놀랐다.
‘용천관에 있을 때는 마냥 애송이 같더니… 조문탁이 저렇게 성장했구나.’
배알이 뒤틀리긴 했지만, 그의 무공이 이제는 자신을 훨씬 뛰어넘는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매설란의 입에서 단호한 명령이 떨어졌다.
“지금 당장 모든 교관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위검종 교관을 사로잡도록.”
“알겠습니다!”
조문탁이 깍듯하게 고개를 숙이고는 홀연히 종적을 감췄다.
**
일각 후, 위검종의 숙소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조교부장인 단리정이 정파 소속의 조교들을 이끌고 위검종의 숙소를 본격적으로 수색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겨우 정사가 서로 화합하는 중이었지만, 혹시 모를 일이었기에 매설란은 이번 일에 정파의 조교들만 나서도록 지시했다.
“이곳에 또 다른 서신이 있다!”
“여기에도 있어!”
놀랍게도 위검종의 숙소 곳곳에서 서신들이 발견되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등부형은 내심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걸로 나의 공은 확실해진 셈이군!’
반면 자운룡은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정말이지 믿을 수 없군요. 위검종 교관이 그럴 사람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는데….”
“원래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르는 법이지. 하지만 나의 예민한 촉이 그놈의 위선을 밝힌 것일세.”
“정말 선배님은 대단하십니다.”
“훗. 이 정도로 놀랄 것 없네. 자네도 강호 경험이 쌓이다 보면 자연히 사람 보는 눈이 생길 걸세.”
“예…”
자운룡이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단리정이 매설란에게 다가와 보고했다.
“총 일곱 개의 서신이 더 발견되었습니다. 모두 멸마관에 대한 상세 정보입니다.”
그때 교관부장인 당이협이 날아와 보고했다.
“아무래도 위검종이 관외로 나간 것 같습니다. 관내를 샅샅이 뒤졌지만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등부형이 불쑥 나서며 말했다.
“역시 그놈이 은마단을 이끌고 멸마관을 치려고 작정한 게 틀림없습니다! 당장 밖으로 나가서 위검종의 위치를 알아내야 합니다!”
매설란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지시를 내렸다.
“일단 생도들에게도 비상사태를 알리고, 위검종 교관을 잡아들이는 것에 집중하도록 해요.”
“알겠습니다!”
당이협과 단리정이 동시에 몸을 돌려 달려갔다.
자운룡이 등부형을 돌아보았다.
“선배님, 우리도 이대로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당연하지! 당장 그놈을 찾도록 하세!”
“알겠습니다. 그럼 저도 한 번 찾아보겠습니다.”
말을 마친 자운룡이 먼저 몸을 날렸다.
등부형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오늘이야말로 내게 주어진 기회다!’
**
멸마관 인근의 숲속 공터에서도 등부형과 같은 생각을 하는 자가 있었다.
‘오늘이야말로 내게 주어진 기회다!’
옥면인 여곤(呂滾)은 은빛 옥빛 무복을 갖춰 입은 옥마단원들을 차가운 눈길로 둘러보았다.
총 사백 명에 달하는 마인들이 저마다 진득한 마기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
만약 이곳에 일반인이 나타난다면 그 마기에 질식해 목숨을 잃어도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였다.
그는 옥마단원들을 보며 금면인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이번에 자네가 공을 세운다면… 은마단의 주인은 자네가 될 것이네. 자네도 알다시피 은면은 맘이 너무 여리단 말이지. 내 말 뜻 알겠는가?”
알고도 남았다.
애초에 금면과 은면은 은근한 갈등을 겪고 있었으니.
‘아마도 그 아이 때문일 테지.’
여곤은 금면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확실히 은면은 정이 너무 많았다.
‘그깟 계집 하나 때문에. 대업을 위해서라면 희생이 불가피한 것을.’
사실 멸마관도 진작 쳤어야 했다.
한데 은면은 줄곧 대기하라고만 지시했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다.
‘더 이상은 기다릴 수 없다. 이번 기회에 내가 공을 세우고 은마단을 차지한다.’
그때였다.
“아얏!”
어디선가 들린 목소리.
고개를 돌려 보니 가시덤불을 헤치고 나온 자운룡이 손가락을 붙잡고 후후 불었다.
자운룡이 고개를 들고는 여곤과 옥마단을 보았다.
한데 그는 한 치도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대신 전에 없이 차가운 눈동자로 말했다.
“누구 마음대로 전투 준비를 하는 거지?”
“더 이상은 기다릴 수가 없었소.”
여곤이 나직이 뇌까리자, 자운룡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자넨 항상 서두르는군.”
“신속할 뿐이오.”
자운룡이 잠깐 눈살을 찌푸리더니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좋아. 더 이상은 기다리지 않게 하지. 지금 멸마관을 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