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3
귀환 마교관
423화
하마터면 그대로 숨이 막혀 질식할 뻔했다.
안도의 숨을 내쉬고 고개를 들어보니 무랑이 서 있었다.
무랑 역시 초췌한 안색이었다.
“자네, 괜찮은가?”
“어떻게 된 거요?”
사비강이 묻자 무랑이 대답했다.
“정말이지 큰일 날 뻔했네. 천운이 따랐어.”
“여기에서 계속 날 기다린 거요?”
사비강이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이곳은 자신이 상자를 막 낚아채기 직전의 장소였다.
딸랑딸랑딸랑딸랑!
사비강과 무랑의 허리춤에 찬 계명종이 연신 시끄러운 소리를 울려대고 있었다.
무랑이 사비강을 이끌었다.
“일단 경계에서 물러나세. 이곳에 오래 있어 봐야 좋을 건 없으니.”
두 사람은 다시 장원이 있던 장소 가까이로 돌아왔다.
시체가 널브러져 있거나, 여전히 경계가 삼엄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장원 근처는 고요하기만 했다.
“조용하군.”
“그럴 수밖에. 자네가 돌아온 게 딱 보름 만이니까.”
“보름씩이나?”
“그렇네. 나도 포기하고 돌아가려던 참이었네. 더 이상 머물면 나 역시 위험해질 수 있으니까.”
사비강은 내심 놀랐다.
시간이 조금 흘렀을 수는 있다고 생각했지만, 보름이나 지났다니!
무랑이 말을 이었다.
“그나마 자네가 돌아올 수 있었던 것도 천해경의 경지에 이르렀으니 가능했던 것일세. 보통 사람이라면 내가 가진 계명종 소리를 절대 듣지 못했을 게야.”
“9서클의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소.”
“9서클? 그게 뭔가?”
“흠… 말하자면 천해경도 뛰어넘을 만큼의 무위를 발휘할 수도 있었단 뜻이오.”
“하지만 어떠한 깨달음도 없었을 테지?”
“그렇소.”
“몽계니까 가능한 것일세. 간혹 그 자아도취에 취해 버려서 현실로 돌아가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생기지. 그럼 역시나 현실에서는 죽을 때까지 식물인간으로 살아야 하는 게야.”
“그렇군.”
“광아가 녀석들에게 넘긴 물건은 찾았는가?”
사비강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품에서 상자를 꺼내 보여주었다.
상자 덮개를 열어 보니 검붉은 빛 구슬이 담겨 있었다.
“이리 줘 보게.”
구슬을 넘겨받은 무랑은 붓을 꺼내들더니 구슬 표면에 ‘환(喚)’이라는 글자를 적었다.
그가 구슬을 내려 두고는 한 걸음 물러났다.
잠시 후 무랑은 합장을 하고는 주문을 읊기 시작했다.
한참이 지났을 때,
쏴아아아아악!
구슬에서 환한 빛이 터져 나오더니 주변의 풍경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처처처처처처처척!
갑자기 없던 벽이 생겨나면서 장원 밖의 공간은 실내로 변해 버렸다.
사비강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실내 한가운데에 정류광이 앉아 있었고, 정면의 주렴 너머에는 그림자가 다소곳하게 앉아 있었다.
앳된 소녀처럼 보였다.
다만 상자를 들고 달아나던 여인과는 다른 인물임이 분명했다.
훨씬 작고 아담한 체구였으니까.
실내 분위기는 어딘지 경직되어 있었는데, 무랑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을 뱉어냈다.
“기억의 소환일세. 어차피 이들은 우리를 볼 수 없네. 몽계 안에서도 지금은 술법을 이용해 기억 일부를 소환한 것이기 때문일세. 지금은 몽계의 몽계라고 볼 수 있지.”
사비강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주렴 너머로 걸어갔다.
하지만 주렴에 비친 그림자의 실체는 어디에도 없었다.
옆으로 다가온 무랑이 말했다.
“주렴에 비친 그림자는 광아가 직접 본 것이지만, 그 실체는 보지 못한 것일세. 그러니 주렴 뒤로 돌아와도 그림자의 실체를 확인할 수가 없는 게야.”
‘그렇다면 확실히 아까 상자를 들고 달아나던 여자가 아니란 말이군.’
그러는 사이, 주렴에 비친 그림자가 말했다.
“이 구슬을 사겠다.”
놀랍게도 그림자는 목소리조차 앳되어 보였다.
정류광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얼마에 사시겠습니까?”
“그대의 목숨 값이면 충분하겠지.”
“예?”
“앞으로 그대가 수집할 물건에 관심이 많으니 목숨을 살려 주겠네.”
정류광이 잠시 황망한 표정을 짓더니 코웃음을 치며 일어났다.
“내 아무리 하오문도라지만 날 지나치게 우습게 여기는군. 제값을 지불하지 않겠다면 더 이상의 거래는 없소.”
“앉아라.”
그 말투에 거부하기 힘든 위압감이 실려 있었기에 정류광은 하마터면 그대로 주저앉을 뻔했다.
하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버티고 서더니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바닥에 놓인 상자를 집어 들었다.
구슬이 담긴 상자였다.
“일 없소이다.”
정류광이 상자를 챙기고 돌아서는데,
슉!
그의 뒤로 그림자 하나가 내려섰다.
무척 깔끔하고 부드러운 움직임.
얼굴을 온통 검게 칠한 흑면인이었다.
흑면인이 망설임 없이 손가락을 뻗어 혼혈을 점하자, 정류광이 힘없이 픽 쓰러졌다.
딸랑…!
마침 사비강과 무랑의 허리춤에 찬 계명종이 울렸다.
무랑이 입을 열었다.
“혼혈을 짚인 광아가 의식을 잃었네. 따라서 이제부터는 무의식의 경계로 들어가는 것일세. 그러니 여기에서 너무 오래 머물면 위험할 수 있네.”
딸랑…!
다시 한 번 종소리가 울렸다.
한편, 이제는 공간이 조금씩 이지러지면서 흑면인과 주렴 너머의 그림자가 찢어지듯 모습이 흐트러지곤 했다.
흑면인이 주렴 뒤로 돌아가 구슬이 든 상자를 그림자에게 건넸다.
두 사람의 대화 소리가 끊어지듯 잡음이 뒤섞이며 들려왔다.
“우리의… 대업… 마령교보다… 위대한… 강림…”
“명심… 존야… 받들…”
잠시 후 그림자가 스르르 몸을 일으켰다.
그러더니 주렴을 빠져나온 그림자는 발자국 소리만 남기며 한쪽 옆으로 이어진 방안으로 들어갔다.
“아무도… 지… 마라…”
문이 닫혔다.
사비강과 무랑은 그 문을 뚫고 들어갔다.
하지만 이곳 역시 정류광의 무의식이기 때문인지 정확한 광경을 볼 수 없었다.
특히 그림자의 모습은 아예 보이지도 않았고, 이지러진 공간에서 잡음이 잔뜩 섞인 목소리만 간헐적으로 들렸다.
“…리탄… 님… 화신… 십시오…!”
그러더니 굉장히 사이한 기운이 공간을 가득 메우는 것이 아닌가?
동시에,
딸랑! 딸랑! 딸랑! 딸랑…!
사비강과 무랑의 허리춤에 매인 계명종이 점점 빠르게 울리기 시작했다.
“슬슬 술법을 끝내야 하네.”
“조금만 더 지켜봅시다.”
딸랑! 딸랑! 딸랑…!
점점 빨라지는 종소리에 맞춰 섬뜩한 기운도 짙어져만 갔다.
그 기운에 질식이라도 해버릴 만큼 밀도가 높아졌을 때, 거짓말처럼 기운이 사라지더니 서늘한 소녀의 목소리가 꽤나 또렷하게 들려왔다.
“꽤나… 적절한 몸이다.”
“감사합니다.”
분명 목소리는 소녀의 것이었는데, 어딘지 다른 사람이 말을 뱉어낸 듯한.
딸랑딸랑딸랑딸랑딸랑딸랑…!
계명종이 이제 더 이상은 견딜 수 없다는 듯 울려댔다.
무랑이 사비강의 소매를 낚아채며 소리쳤다.
“더 이상은 안 돼! 가세!”
동시에 그가 한쪽 손을 세우고는 주문을 읊자 언제 그랬냐는 듯 주변이 연기처럼 사라지고, 다시 장원 근처로 돌아와 있었다.
딸랑…! 딸랑…!
계명종 소리는 확실히 느려졌다.
하지만 여전히 계명종이 울린다는 것은 한계 지점이 다가왔다는 뜻.
“이곳의 기억조차 점점 사라지고 있어.”
무랑은 근처의 나뭇가지 하나를 꺾더니 흙바닥에 복잡한 문양을 빠르게 새겨 나갔다.
처음 몽계로 들어오기 전 현실 세계에서 바닥에 새겼던 것과 거의 흡사한 문양이었다.
무랑은 그 중심으로 사비강과 함께 들어갔다.
“이제 돌아갈 시간이네. 현실로.”
곧이어 그가 합장을 한 순간,
슈아아아아아악!
바닥에서 눈부신 광채가 휘황하게 뿜어져 나와 두 사람을 삼켰다.
**
사비강은 눈을 뜨고는 천장을 보았다.
‘여긴… 돌아왔군.’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전히 무랑과 정류광이 정해진 자리에 드러누워 있었다.
잠시 후,
“끄음…”
무랑이 희미한 신음을 흘리며 깨어났다.
그가 아직까지 의식을 찾지 못한 정류광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광아는 우리보다 조금 시간이 걸릴 걸세. 기억 속을 온통 헤집어 놨기 때문에 급히 깨어나면 혼란스러울 수 있거든.”
사비강이 고개를 끄덕이자, 무랑이 물끄러미 바라보며 물었다.
“뭘 좀 알아냈는가?”
“소울비드(Soul bead)였소.”
“음?”
“그 구슬 말이오. 소울비드라는 거였소.”
“그게 뭔가?”
“이미 말했다시피 차원이동을 할 때는 무생물부터 지능이 높은 생명체 순으로 넘어오게 되어 있소. 그 이동 간극을 좁히려면 이쪽에서도 소환술이나 강림술을 병행해야 하지만, 마계에서는 그 방법이 없었소.”
“한데?”
“살아 있는 생명체가 넘어올 수 없는 대신, 영혼을 구슬에 봉인해서 보낸 거요. 영혼이 봉인된 구슬. 그게 바로 소울비드요.”
“가만. 그렇다면 그 구슬이 스스로 의지를 가지고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건가?”
“그건 아니오. 누군가 그 가치를 알아보고 소울비드에 갇힌 영혼을 꺼내지 않는 이상 그저 보기 좋은 돌덩이에 지나지 않지.”
“하면 영혼이 평생 구슬에 갇혀서 나오지 못할 수도 있단 말이 아닌가?”
“그렇소.”
“누가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 모험을 한단 말인가?”
“그래서 마족들 중에서도 중죄를 지은 자들 중에 지원자를 선발했소. 그리고 그 소울비드에 들어간 영혼은 틀림없이… 바리탄 후작이었을 거요.”
“바리탄 후작?”
“반란을 일으킨 마족. 마왕은 그에게 속죄할 기회를 준 거지. 하지만 원래의 역사대로라면 그는 돌덩이에 갇힌 채로 영원히 잊혔지. 하지만 내가 회귀하면서 미래가 바뀐 거요.”
무랑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아주 작은 것 하나라도 틀어지면 미래는 매우 크게 변하는 법이니. 자네가 회귀하면서 미쳤을 미미한 영향이 지금은 꽤나 많은 사건을 만들어내 버린 것일 테지.”
“아마도 내가 회귀하지 않았더라면, 정사대전이 오랫동안 이어졌을 테고, 마령교도들 역시 설치지 않았을 지도 모르지. ‘존야’라 불리는 그 계집도 어디선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었을 지도 모르고.”
“그렇다고 상황이 이리 된 게 자네 탓은 아닐세.”
“당연하지. 어쨌거나 지금 중원이 믿을 건 나밖에 없을 테니까.”
어찌 들으면 몹시 광오한 말이었지만, 이번만큼은 무랑도 부정하지 않았다.
실제로 중원은 사비강에게 모든 걸 걸어야 했다.
막말로 사비강을 ‘구원자’라고 떠받들어 모신다고 해도 지나칠 게 없으리라.
사비강의 눈빛이 깊어졌다.
“다만 분명한 건 바뀐 역사에서는 소울비드가 그 존야의 손에 들어갔다는 거요. 그리고 존야가 소울비드를 깨웠소. 아마도 그 계집을 바리탄 후작이 화신으로 삼은 것 같소. 마령이었으니 궁합이 잘 맞았을 테지. 아주 적합한 그릇을 찾은 거요.”
“그렇게 된 거였군. 그래서 마령교가 이토록 많은 소환지를….”
사비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리탄 후작은 차원 간의 소환법을 익혔을 테니까. 제대로 줄탁동시가 이루어진 거요.”
“하면 앞으로 마족이 넘어올 시간은 더욱 빨라진단 말인가?”
“그렇소. 어쩌면 이미 마왕마저 이 땅에 강림시킬 준비가 끝났을 지도 모르겠소.”
“허어.”
무랑이 허연 수염을 쓸며 탄식을 흘렸다.
사비강은 착 가라앉은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왜 진작 생각하지 못했을까?
아마도 전생에서는 이 방법이 통하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그렇다고 신경을 썼다고 한들 방법이 있었을까?
전생에서도 바리탄의 소울비드가 어디에 떨어져 있는 것인지 끝내 찾아내지 못했다.
어쩌면 바리탄을 견제하는 마족 중 한 명이 소울비드를 제일 먼저 제거해 버렸을 지도 몰랐다.
어쨌거나 기록에 남은 것이 없으니, 사비강조차도 그 소울비드를 찾아낼 방법이 없었다.
뭐, 그전에 까맣게 잊고 있기도 했지만.
‘바리탄 후작이라… 이제야 이해가 되는군. 마령교가 어째서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인지.’
사비강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