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2
귀환 마교관
422화
사비강은 걷고 또 걸었다.
온통 하얀색만 가득한 공간.
그림자도 없었다.
때문에 그는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알 수 없었다.
시공이 완전히 차단된 영역에서 홀로 움직인다는 것은 굉장히 기묘한 경험이었다.
방향조차 가늠할 수 없는 곳.
어쩌면 커다란 원을 그리면서 걷고 있는 중인지도 몰랐다.
끝없이 새하얀 공간을 걸어 다니던 사비강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벌러덩 드러눕고 말았다.
‘제길. 정말 미아가 됐군.’
사비강은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이 상황에 함몰되어서 감정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
답답함과 조급함을 느끼게 되는 순간, 모든 상황이 위험해지리라.
이런 곳에서는 육체보다 정신이 먼저 파괴된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생각을 완전히 비운 채 한참을 누워 있던 사비강이 어느 순간 벌떡 일어나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이렇게 시간을 흘려버리는 것보다는 어떻게든 채우기로 했다.
변화가 없는 공간이라면, 스스로 변화하면서 주변이 변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도 방법이리라.
사비강은 내공을 일주천해 보았다.
아직은 초절정의 경지에 이른 수준이었다.
바깥세상에서 천해경의 경지에 이르렀으니 당분간 경지를 회복하는 것에 집중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물론, 여기에는 한 가지 의도하는 바도 있었다.
무랑의 말에 의하면 천해경의 경지는 일반인들이 알지 못하는 영역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정류광 역시 천해경의 경지를 보지도 듣지도 못했으리라.
한데 정류광의 무의식 속에 들어온 자신이 천해경의 경지에 이르러 마구 설쳐댄다면?
그렇다면 이 무미건조한 무의식 세계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날 수도 있지 않을까?
태어나서 한 번도 자각하지 못한 어떤 현상이 무의식 속에서 설쳐대는 모순!
거기에서 어쩌면 미묘한 빈틈이 발생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해서 사비강은 곧바로 내공심법을 운용하면서 경지를 회복하는 것에 집중했다.
내공을 일주천할 때마다 전신의 감각이 꿈틀대며 되살아나는 것만 같았다.
구오오오오오…!
시간이 흐를수록 사비강의 전신에서 강맹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출렁!
순간 사비강은 느꼈다.
무의식 세계에 묘한 변화가 발생하고 있다는 것을.
영원불변으로 지속될 것 같던 이 공간에 묘한 파장이 일어난 것이다.
그건 분명 사비강의 몸에서 우러나오는 기운과 연관성이 있을 터였다.
‘아직 조금 더 남았다.’
상당 부분 적응이 되었지만 아직 천해경의 경지에 완전히 올라선 것은 아니었다.
하나 여기까지만 해도 정류광의 의식 세계에서는 생소한 경지였던 것이리라.
‘그런 마당에 천해경의 경지까지 되찾는다면….’
분명 정류광의 무의식은 요동을 치리라.
바로 그때 기회는 생기기 마련일 테고.
‘좋아, 끝까지 간다.’
구오오오오오오!
사비강은 계속해서 내공심법을 연마했다.
이미 한 번 도달했던 경지이기 때문인지, 심신의 변화는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오랫동안 내공을 운기했을까?
휘오오오오오오오!
사비강의 주변으로 퍼져 있던 자줏빛 기운이 소용돌이치듯 휘돌더니 사비강의 몸에 흡수되었다.
‘됐다!’
사비강이 눈을 번쩍 떴다.
동시에 그는 벌떡 일어나 베르타스를 뽑아 들고 날렸다.
쒸에에에에엑!
베르타스가 날카로운 파공성을 터뜨리며 허공을 갈랐다.
사비강의 의지대로 베르타스는 여기저기 들쑤시며 어지럽게 날아다녔다.
그야말로 신기에 가까운 능력이었다.
마지막으로 바닥을 차고 날아오른 사비강이 베르타스를 낚아채는 것과 동시에 수직으로 내려찍었다.
쓔아아아아악!
쩌엉!
베르타스가 새하얀 바닥에 꽂히자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세상이 떨려 왔다.
떨림은 한참 동안 이어졌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그 느낌이 변하고 있었다.
드드드드드드드…!
‘뭔가 온다!’
사비강은 진원지가 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려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먼발치에서 황색 기운이 태풍처럼 휘몰아쳐 오고 있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것은 황색 기운이 아니라, 모래폭풍이었다.
후아아아아아앙!
엄청난 파공성을 일으키며 날아드는 모래폭풍은 한 사람의 얼굴 형상을 하고 있었는데, 바로 정류광의 온갖 표정을 나타내고 있었다.
어느 순간에는 고통에 찬 표정으로, 어느 순간에는 환희에 찬 표정으로, 또 어느 순간에는 절망과 괴로움을 담은 표정을 지으며 휘몰아쳐 왔다.
순식간에 날아든 모래폭풍은 커다란 입을 벌리더니 그대로 사비강을 꿀꺽 집어 삼켰다.
사비강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어딘지 모를 절벽 위에 서 있었다.
‘이곳 역시 정류광의 심연 어디쯤인가?’
절벽 아래를 굽어보니 까마득한 곳에 계곡이 흐르고 있었는데, 그곳에는 수백 년 묵었을 것 같은 구렁이들이 바글거리며 헤엄치고 있었다.
그 기이한 모습을 넋 놓고 보던 중 문득 기척을 느끼고는 고개를 들어보니, 저만치 아래에서 웬 물고기 한 마리가 헤엄치듯 솟아오르고 있었다.
물도 없는 허공을 헤엄치듯 솟아오르는 게 보통 신기한 일이 아니었지만, 이곳이 무의식 세계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그리 놀랄 일은 아니었다.
어쨌거나 위협적으로 솟구쳐 오른 거대한 잉어는 그대로 사비강을 향해 돌진해 왔다.
- 구우우우웅.
묘한 울음과 함께 거대한 잉어가 그대로 사비강을 덮칠 듯했다.
사비강이 얼른 바닥을 차고 물러나자, 잉어는 그대로 절벽까지 부수며 씹어 먹는 것이 아닌가?
쿠콰콰쾅!
가드득! 가드득!
잉어가 야금야금 절벽을 씹어 오자, 사비강은 얼른 경신법을 펼쳐 달아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거대한 잉어는 그의 생각보다 훨씬 빨랐다.
순식간에 배후까지 다가온 잉어가 아가리를 크게 벌리더니 사비강을 덥석 삼켜 버린 것이다.
순식간에 칠흑 같은 어둠에 휩싸인 사비강이 안력을 돋우어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저만치 빛이 스며드는 것이 보였다.
그때,
“그어어어!”
“우우우우!”
갑자기 벽면에서 손과 머리가 튀어나오더니 사비강을 부여잡으려고 허우적거리는 것이 아닌가?
그 얼굴은 모두 정류광이었다.
수많은 정류광이 동굴 벽면에서 튀어나와 팔을 허우적거리며 사비강을 잡으려고 했다.
게다가 동굴은 점점 비좁아지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낀 사비강은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도중에 정류광의 손이 팔다리를 붙들었지만, 그때마다 베르타스를 휘둘러 가차 없이 베어내곤 했다.
그렇게 겨우 동혈 밖으로 튀어나오니, 산새가 지저귀는 숲속에 다다랐다.
마침 커다란 나무 아래에 어린 소년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앉아 있었다.
무의식 세계에 들어와서 처음 보는 사람이었기에 사비강은 절로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그가 가까이 다가가자, 기척을 느낀 소년이 고개를 꺾어 들고 보았다.
순간 소년의 표정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아저씨는 누구야?”
동시에 소년의 눈동자가 온통 시커멓게 물들었다.
“아저씨는 누구지? 여기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인데?”
‘정류광의 어린 시절인가…?’
이맛살을 슬쩍 구기고 생각하는데, 소년이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아저씨는 누구냐니까!”
찰나, 소년이 뱀처럼 변하더니 사비강을 빠르게 휘감아 오는 것이 아닌가?
뿐만 아니라 주변의 나뭇가지들이 전부 뱀으로 변해 버리면서 사비강에게 뻗어 왔다.
뱀 대가리는 틀림없이 정류광이었다.
사비강은 베르타스를 휘두르며 자신을 휘감아 오는 뱀들을 마구 쳐냈다.
하지만 사비강에게 달려드는 뱀은 끝이 없었다.
결국 경신법을 펼치면서 숲을 벗어나기 위해 또 내달렸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순간 숲이 사라지면서 사방이 사막으로 변해 버렸다.
곧이어,
쉬르르르르.
바닥의 모래들이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내며 솟구쳐 올랐다.
수십여 명의 정류광이었다.
그들이 동시에 소리쳤다.
“존재해서는 안 될 것이 존재한다. 지워라!”
모래인형처럼 만들어진 정류광이 일시에 사비강을 향해 달려들었다.
쉬펑! 퍼캉! 서컹!
사비강은 다시 베르타스를 휘둘렀다.
천해경의 경지가 요동을 치자, 모래 인간들이 비명을 터뜨리며 속수무책으로 부서져 나갔다.
‘제길! 도대체 이 짓을 언제까지 해야 하는 거지?’
무아지경 속에서 베르타스를 휘둘러댔지만, 모래인간들은 끝없이 재생되고 있었다.
‘정녕 빠져나갈 방법이 없단 말인가?’
문득 절망적인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사비강은 곧 고개를 저었다.
이런 곳에서 생각이 많아진다는 것은 결국 좌절의 늪으로 걸어 들어가는 행위나 다름없다.
육체가 부서질지언정 정신이 망가지면 안 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천해경에 도달한 후, 신체 적응력은 훨씬 좋아졌다는 점이다.
오히려 이곳이 몽계라는 것을 자각하자, 무랑처럼 본신의 능력 이상을 끌어올릴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끊임없이 달려드는 모래 인간을 상대하던 사비강이 순간, 바닥을 차고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그가 양손을 들어 올린 후 마법을 캐스팅했다.
“메테오 스트라이크(Meteor Strike)!”
무려 9서클의 마법!
현실에서는 절대 쓸 수 없지만, 이곳은 몽계!
사비강 역시 마법을 캐스팅하면서도 반신반의했다.
과연 가능할 것인가?
결과는 놀라웠다.
쑤우우우우우우우우웅!
시커먼 그림자가 드리워지더니 하늘에 거대한 운석이 소환되면서 추락하는 것이 아닌가?
슈우우우우웅!
콰아아아아아앙!
그야말로 혼자 보기엔 아까운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세상이 무너졌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사막이 완전히 초토화됐다.
모래가 온통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그 모래폭풍에 휩쓸려 사비강은 어디론가 날아갔다.
9서클의 경지가 가능할지 시험 삼아 해본 것이었기에 후폭풍에 대해서는 미처 대비를 하지 못했다.
첨벙!
한참을 휩쓸리다 보니 어느 순간 물속에 가라앉아 버렸다.
물이 세상을 채운 것인지, 자신이 물에 빠진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번에는 사방에서 물고기들이 사비강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역시나 정류광의 얼굴을 한 인면어였다.
성인 몸처럼 큰 물고기였는데, 팔과 다리가 있었다.
사비강은 베르타스를 휘두르며 달려드는 물고기들을 쉼 없이 쳐냈다.
한데 아무리 위쪽으로 솟구쳐 올라도 수면이 나타나지 않았다.
숨이 점점 막혀 왔다.
‘젠장…! 이대로 죽을 수는 없는데!’
그때였다.
딸랑… 딸랑…
귓가를 스치는 미세한 종소리!
사비강이 흠칫거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방이 물로 가득한데도 계명종 소리만큼은 분명하게 어디선가 들려오고 있었다.
사비강은 얼른 달려드는 물고기의 몸통을 절반으로 갈라 버리고는 유영을 하며 소리를 쫓았다.
딸랑… 딸랑…!
조금씩 선명해지는 소리.
‘바닥인가!’
사비강은 더욱 깊이 잠수해 들어갔다.
인면어들이 더욱 사나운 속도로 달라붙었다.
그때마다 베르타스가 춤을 추며 달려드는 인면어를 두 동강 내버렸다.
마침내 바닥까지 다다른 사비강은 흙을 더듬었다.
딸랑! 딸랑! 딸랑!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계명종이 이곳 바닥 어딘가에서 울리고 있었다.
그 말은 다시 무의식이 아닌 몽계로 돌아갈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뜻!
딸랑딸랑딸랑딸랑딸랑!
종소리가 더욱 빠르게 울렸다.
한데 아무리 더듬어도 바닥에 특이점은 없었다.
손으로 두드리고, 주먹으로 치고, 베르타스를 꽂아도 아무런 변화가 없다.
‘제길…! 더 이상은 호흡하기가…!’
이만해도 물속에서 오래 버티긴 했다.
그때였다!
쑤욱!
바닥에서 솟구쳐 오른 손!
사비강은 망설임 없이 그 손을 덥석 잡았다.
그게 무엇인지 모르지만, 더 이상 물속에 머물고 있을 수도 없었기에.
찰나,
쑤우우우욱!
솟구쳐 오른 손이 사비강의 손을 맞잡자마자 빠른 속도로 끌어당기는 것이 아닌가?
사비강은 그대로 흙바닥에 파묻히듯 사라졌다.
조금 전까지 그가 있던 자리로 수십 마리의 인면어가 곤두박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