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7
귀환 마교관
417화
복잡하고도 오묘한 문양이 그려진 바닥 위에 세 사람이 모여 앉아 있었다.
삼각 꼭지를 이룬 채 서로 마주보고 앉은 사람은 바로 사비강과 무랑, 정류광이었다.
무랑이 두 사람을 둘러보며 말했다.
“일전에 옹기승의 기억이 조작된 것을 깬 적이 있을 걸세. 하나 그건 사파의 사술이고, 지금 우리가 상대할 것은 마교의 대법일세. 엄연히 다른 술법이지. 그 견고함으로 따지자면 마교의 대법을 사술이 따라갈 수가 없네.”
“그만큼 위험하다는 뜻이오?”
사비강의 말에 무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이 잘 되면 우리가 원하는 것을 찾을 것이나, 잘못되면 모두가 죽을 수도 있네. 셋 중 하나나 둘이 죽을 수도 있을 테고.”
내 뱉는 말의 무게와 달리 그의 표정은 시종 담담했다.
정류광이 다부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각오는 굳혔습니다. 저 때문에 중원이 이런 위기에 빠진 것이라니… 응당 책임을 져야겠지요.”
“그래. 네가 비록 하오문에 몸을 담고 있으나, 네 정신만큼은 저열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럼 이제 시작하지.”
무랑이 말을 마치자 정류광이 반듯하게 누웠다.
그를 사이에 두고는 무랑과 사비강이 가부좌를 튼 채로 마주 앉았다.
두 사람이 앉은 자리에도 묘한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무랑은 작은 종 두 개를 또 다른 문양 위에 올려 두고는 말했다.
“술법이 진행되는 동안 별다른 고통은 없을 테니 마음 편히 가져라. 이제부턴 수년 전의 기억 속으로 거슬러 올라갈 것이다.”
“예, 사부님.”
정류광이 대답하며 눈을 감았다.
무랑은 그의 이마와 단전 등에 부적 몇 장을 붙이고는 합장을 한 채로 주문을 읊기 시작했다.
마치 중원의 언어가 아닌 것처럼이나 괴이한 주문이었는데, 사비강은 단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했다.
그렇게 얼마나 긴 주문이 이어졌을까?
무랑의 주문이 점점 빨라지더니 이내 혀가 굴러가는 것처럼 이어졌다.
마침내 바닥에 그려진 문양에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선을 따라 빛이 우러나오기 시작했는데, 그 빛이 점점 강렬해지면서 바닥을 가득 채우는 것이 아닌가?
마침내,
파아아앙!
바닥에서 빛 무리가 터져 나오면서 세 사람을 일시에 집어삼켰다.
동시에 무랑의 주문이 멈췄다.
빛 무리는 한참이 지나서야 완전히 사라졌는데, 그땐 이미 세 사람이 그대로 바닥에 드러누운 상태였다.
사비강과 무랑 그리고 정류광은 그렇게 누운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다만 정류광의 이마에 붙은 부적만이 새빨갛게 빛나고 있었다.
**
중원 어딘가의 분주한 저잣거리.
제법 큰 도시인지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이 무척 많았다.
장사치들은 거리까지 달려 나와 오가는 사람들을 붙잡으려고 애를 썼고, 나그네들은 목적지를 향해 부지런히 발길을 놀렸다.
그리고 그 복잡한 거리 한가운데에 멍하니 서 있는 한 사람.
바로 사비강이었다.
그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다가 자신의 몸을 더듬어 보았다.
“어디지…?”
사비강이 눈썹을 찌푸리고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분명 무한은 아니다.
그러고 보니 자신은 왜 여기에 서 있단 말인가?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이 낯선 장소에 우두커니 서 있는 게 아닌가?
그때 누군가 등 뒤에서 사납게 소리쳤다.
“거 좀 비킵시다! 고기 썩겄소!”
사비강이 슬쩍 돌아보자, 돼지고기를 등에 맨 백정이 눈을 부라리며 서 있었다.
무인을 보고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보니 보통의 상식이 통하지 않는 자인 듯했다.
그도 아니면, 그 역시 무공을 좀 익혔거나.
어쨌든 딱히 시비를 걸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에 사비강은 순순히 옆으로 물러나 주었다.
백정이 사비강을 툭 치듯이 지나갔다.
사비강은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 기억을 더듬으며 걸음을 옮겨 갔다.
일단 조용한 곳에서 생각을 하고 싶었다.
자신이 왜 이런 곳에 서 있는 것인지, 무엇을 하던 중이었는지 기억을 더듬어 볼 생각이었다.
그렇게 인적이 드문 곳을 따라 걷다보니 산으로 이어지는 길이 나타났다.
‘우선 숲으로 가서 생각 좀 정리하자. 도통 뭐가 뭔지 모르겠군.’
사비강이 막 걸음을 내디디려고 할 때였다.
턱!
누군가 그의 어깨를 잡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가까이에 누군가 다가올 때까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때문에 사비강은 내심 놀라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어딜 그리 가는 겐가?”
허연 수염을 늘어뜨린 노인이 사비강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허옇게 덮인 눈썹 때문에 보고 있기나 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쨌거나 사비강은 그가 누군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무랑도사!”
“하마터면 한 발 늦을 뻔했군. 뭐, 술법을 시작하기 전에 미리 말해 준다고 해도 어차피 다 지워질 기억이니 말을 하지 않았네만.”
무랑이 알 수 없는 소리를 주절거리더니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사비강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왜 이곳에 계시는 거요? 아니, 그보다 내가 여기에 있는 이유를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 같은데?”
“말 보다 이게 빠를 걸세.”
무랑이 대답과 동시에 손에 든 것을 사비강의 이마에 척 붙였다.
그것은 부적이었다.
순간 부적에서 금빛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가 싶더니 이내 사라졌다.
대신 사비강의 눈동자가 일순 커졌다.
“아…!”
이제 모든 것이 기억났다.
자신은 무랑과 함께 술법을 진행 중이었다.
“그럼 여기가…?”
사비강의 말에 무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광아의 의식 속일세.”
‘광아’란 정류광을 말하는 것이었다.
사비강이 그제야 상황을 파악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술법에 성공한 거요?”
“일단은 녀석의 수년 전 기억 속으로 들어오긴 했네.”
“정말이지 현실과 구분이 안 되는군.”
“그럴 수밖에. 자네도 꿈을 꾸지 않는가?”
“가끔씩.”
“그때 꿈이라는 걸 아는가?”
“보통은 현실이라고 생각하오.”
“마찬가지일세. 우리는 광아의 기억 속으로 들어왔네. ‘몽계(夢界)’라고 부르는 곳이지. 꿈속과 다를 바가 없다는 뜻일세. 다만, 그 무대가 자네의 머릿속이 아니라, 광아의 머릿속이라는 거지.”
“하면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은 뭐요?”
“일단 그 전에 주의해야 할 점이 있네.”
“무엇이오?”
무랑의 시선이 사비강 뒤편으로 향했다.
사비강이 막 들어가려던 숲이었다.
“이 몽계는 광아의 의식 속에서 만들어진 것일세. 때문에 어디까지나 한계가 존재할 수밖에 없지.”
“한계라면…?”
“몽계는 통상적으로 오감(五感)에 의해 만들어지네. 그리고 오감을 벗어난 ‘육감(六感)’이라는 것이 있지. 그 또한 몽계의 일부분이네. 하지만 그 이상을 벗어나서는 이 세계가 형성되어 있지 않네.”
“좀 더 이해하기 쉽게.”
“딱 잘라 말하자면 광아의 의식 범위를 벗어나면 안 된다는 것일세. 자네 방금 저 숲으로 들어가려고 했지?”
“그랬소.”
“만약 저 숲이 광아의 오감에 닿지 않는 곳이라면? 저 숲 속은 어떤 모습일 거라고 생각하나?”
“모르겠소.”
“오감이 닿지 않아도 육감에 의해 묘한 방식으로 존재할 수는 있지. 하나 그마저 넘어서 버리면….”
“넘어서 버리면?”
“완전한 무의식에 자네가 갇히게 되는 것일세.”
“무의식에 갇힌다?”
“자네는 영원히 광아의 무의식에 갇혀서 깨어 나올 수가 없게 된단 말일세. 한 마디로 광아의 무의식 세계에서 미아가 된다는 말이지.”
“그런 문제가 있었군. 한데 이 몽계가 오감에 의해 만들어졌다면, 육감은 뭘 만드는 거요?”
“그건 설명하기가 어렵군. 앞으로 자연히 알게 될 걸세. 어쨌거나 중요한 건 무턱대고 돌아다녀서는 안 된다는 것이야. 물론 몽계의 세상은 꽤나 넓지. 하나, 범위를 벗어나면 무의식의 차원에서 영원히 길을 잃고 헤매게 될 것이야. 예전에 초절정의 극에 달했던 무인 한 명도 이 술법을 이용하다가 결국 무의식에 갇히면서 영영 깨어나지 못하는 식물인간이 되고 말았지. 자네가 아무리 천해경의 경지에 올랐더라도 무의식에 갇히면 어떻게 될지 나 또한 장담할 수 없네. 그러니 조심하고 또 조심하게.”
“알겠소.”
“그럼 이걸 받게.”
무랑이 내민 것은 조그마한 종이었다.
술법을 시작하기 전, 그가 바닥에 그린 문양 위에 올려 두었던 그 종이었다.
“이게 뭐요?”
사비강이 받아들고 흔들어보았지만 신기하게도 종이 울리지 않았다.
“계명종(界鳴鐘)이라는 걸세. 그 종이 울린다면 의식의 경계에 다가갔다는 뜻일세. 경계에 가까워질수록 종은 더욱 빠르게 울릴 것일세. 그럴 일은 없겠지만, 경계를 넘어서게 되면 종은 영원히 울리지 않네.”
“흐음. 한 마디로 이 종이 울리면 더 이상은 나아가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군.”
“그렇지.”
“또 주의해야 할 건?”
“우리가 광아의 눈에 띄어서는 안 되네. 이곳 몽계의 주인은 광아일세. 한데 녀석이 이질감을 느끼는 순간 술법이 깨질 수밖에 없네.”
“한 마디로 자각몽을 꾸게 하면 안 된다는 거군.”
“비슷한 말일세. 그 경우 우리 의식이 미아가 될 일은 없지만 술법은 유지되지 않네.”
사비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그럼 이제부터 어떻게 할 생각이오?”
“지금쯤이면 광아가 그들을 만나기 직전이거나, 직후일 걸세. 우선은 광아를 찾아야겠지.”
“좋소. 그럼 정류광부터 찾아갑시다.”
사비강은 종을 허리춤에 매달고는 걸음을 옮겼다.
사비강이 저잣거리로 들어서면서 말했다.
“한데 이상한 것이 있소.”
“뭔가?”
“백정 하나가 날 보더니 겁도 없이 소리치더군. 전혀 무인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았지. 혹시 몽계에서는 기본 상식이 통하지 않는 거요?”
“그럴 리가. 몽계라고는 하지만 이곳은 어디까지나 광아의 기억에 의존한 공간일세. 다만….”
“다만?”
“지금 자네가 별로 강하게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문제지.”
“이유는?”
“자네. 조금 전에 내가 바로 뒤에서 어깨를 두드릴 때까지만 해도 모르지 않았나?”
“아, 분명히 그랬지.”
“바로 그걸세. 아직 자네가 몽계에 적응하지 못한 것이야. 예를 들면 이런 거지. 혹시 꿈속에서 경공을 펼쳐야 할 순간인데, 다리가 천근만근 무거워지면서 달려도, 달려도 제자리일 때가 있지 않았나?”
“음. 비슷한 꿈을 꾼 적이 있는 것 같소. 무슨 뜻인지 알겠군.”
“자네가 이 몽계에 적응해야 하네. 그 전까지는 자네의 온전한 실력이 나오지 않을 것이야.”
“그런 이유였군.”
사비강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내공을 슬쩍 일주천해 보았다.
과연 어딘지 어색하고 불편한 감이 있었다.
이제 두 사람은 저잣거리의 중심부로 들어서고 있었다.
무랑이 말했다.
“광아 녀석이 말하길, 굉장히 번잡한 거리에서 만났다고 했네. 그러니 이 근처에 있을 것 같군.”
“벌써 만나고 떠난 후라면?”
“그럼 뭐 우리가 한 발 늦은 게지. 술법을 깨고 나갔다가 다시 해야겠지.”
“그럴 수도 있소?”
“있지. 하지만 일 년 후에 해야 하네. 그 전엔 광아의 의식에 내성이 생겨서 술법이 통하지 않아.”
“그런 소리를 참 속 편하게도 하시는군.”
“뭐, 조급하게 군다고 달라질 것도 없지 않나?”
“아무리 그래도….”
“쉿. 찾은 것 같군.”
무랑이 문득 검지를 입에 대며 말했다.
사비강이 그의 시선을 따라 가니 과연 저만치 저잣거리 복판에서 좌판을 깔아 두고 앉아 있는 정류광이 보였다.
별 볼 일 없는 물건들을 내놓고 있어서인지, 그를 의식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수많은 인파 속에 파묻혀서 그는 조용히 숨만 쉬는 중인 것 같았다.
“다행히 일이 벌어지기 전에 도착한 것 같군.”
“그런 것 같네.”
“일단 난 저 지붕 위쪽에서 감시하겠소.”
말을 마친 사비강이 얼른 몸을 날렸다.
그런데…
콰당탕!
그대로 달려 나간 사비강이 건물 벽에 부딪치면서 바닥에 나동그라지는 게 아닌가?
지나다니는 행인들이 사비강을 힐끔거리고는 혀를 찼다.
“대낮부터 별 미친놈을 다 보겠네.”
“멀쩡하게 생겨서는 왜 벽에 이마를 박아대는 거지? 쯧쯧…”
“젊은 사람이 참 안 됐구먼.”
한편 사비강은 벽에 부딪친 이마를 어루만지면서 엉거주춤 일어났다.
“아그그…”
무랑이 혀를 차며 다가왔다.
“그새 잊은 겐가? 자네는 아직 적응기야. 갑자기 경공을 펼친다고 해서 몸이 마음대로 따라가질 않는다니까.”
“진작 좀 말리시지 그러셨소!”
“말리기도 전에 달려 나가지 않았나? 하긴, 뭐든 직접 겪는 게 더 와 닿는 법이기도 하고. 자, 따라오게. 걸어서 접근하세나.”
말을 마친 무랑도사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