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1
귀환 마교관
411화
차재강이 입매를 비틀었다.
‘연로…? 흥! 날 마치 노망난 노인네 취급하겠다는 건가? 가소롭구나. 그런 도발이 노부에게 통할 것 같으냐?’
그가 싸늘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누구기에 노부에게 말을 건네는 겐가? 나는 그쪽을 본 적이 없네만.”
물론 충분히 짐작하고 있었다.
바로 이 눈앞의 젊은 사내가 그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멸마관의 관주이며, 사비강이라는 사실을.
게다가 관리사가 그를 보고 ‘관주님’이라고 부르는 소리까지 들었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하나 도발을 당하고만 있을 차재강이 아니었다.
마침 사비강 곁에 있던 단리정이 미간을 슬쩍 좁히고는 한 걸음 나섰다.
“이분은 멸마관주님이십니다. 예를 갖춰 주십시오.”
“아아. 멸마관주셨군. 만나서 반갑소. 천도문주 차재강이오.”
차재강이 그제야 알았다는 듯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포권을 취했다.
그 속이 훤히 보였음에도 사비강은 씨익 웃으며 답했다.
“천도문의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천도문주님을 몰라 뵈었군요.”
“허허, 노부는 그저 뒷방 늙은이일 뿐이오. 문도들이 알아서 잘 해주니 한 것도 없이 존경만 받는구려.”
그야말로 교묘하게 자신을 치켜세우는 말투였다.
물론, 그런 표현이 통할 상대가 아니었다는 게 문제지만.
사비강이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
“하긴. 요즘 사람들은 그저 겉치레만 보고 존경을 낭비하기도 하지요. 뭐, 따지고 보면 그게 어디 진심어린 존경이겠습니까? 다 처세술이고 아부 아니겠습니까? 참 요즘 사람들 문제 많지요.”
“허허… 허…”
차재강은 멋쩍은 웃음을 흘리면서 눈살을 슬쩍 구겼다.
‘뭐지? 날 도발하는 건지… 개념이 없는 건지 모르겠군.’
사비강이 표정을 굳히고 다시 사무적인 어조로 물었다.
“한데 천도문주께서는 여기서 뭐하고 계십니까?”
“보다시피 소환지를 공략하러 왔소.”
“이곳은 출입이 불가한 곳입니다.”
“그렇소? 그래서 다들 이렇게 서 있는 모양이구먼. 그런데 어쩌지… 본문은 사실 방금 허가를 받았는데.”
차재강이 승자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번에는 꽤나 노골적인 도발이었다.
사비강이 피식 웃으며 답했다.
“아무래도 착오가 있었나 보군요. 이곳은 지금부터 본관이 직접 관리하게 될 것 같소.”
“흐음. 그건 좀 곤란할 것 같은데. 이미 우리가 먼저 출입 허가를 받아서 말이오.”
“그래도 안 됩니다.”
“난 들어가야겠소.”
차재강이 뜻을 굽히지 않자, 사비강이 그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상황이 묘하게 흘러가자, 주변에 모여 있던 무인들이 술렁거리면서 소환지 입구 주변으로 다가왔다.
마침 단리정이 다시 한 걸음 나섰다.
“천도문주께서는 규율을 지켜 주십시오.”
“그 말은 내가 하고 싶군. 엄연히 규율이라는 게 있건만, 뒤늦게 나타나 규율을 마음대로 뒤집는 건 지금 멸마관이 아니오?”
그러더니 차재강은 주변의 모두가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말했다.
“멸마관의 직속 조직이 소환지를 독점했다고 해서 이렇게 막무가내로 주장만 펼치는 것은 경우가 아니지 않소? 이래서야 강호에서는 멸마관이 값비싼 전리품을 독차지하기 위해 권한을 남용한다는 오해를 품을 수밖에 없을 거요!”
이쯤 되자 동요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확실히 차재강의 노회함이 묻어나는 순간이었다.
그는 말 한 마디로 이곳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을 중립 아니, 천도문의 편으로 끌어들인 셈이다.
이쯤 되자 지켜보다 못한 곡보옥이 콧김을 훅 뿜으며 성큼 나섰다.
“거참, 말을 너무…!”
하지만 곡보옥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사비강이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사비강이 차재강을 빤히 바라보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뭐, 좋습니다. 정 원한다면 들어가십시다.”
“가십시다…?”
“본관도 함께 들어간다는 뜻이오.”
“함께?”
차재강이 눈살을 슬쩍 찌푸리고는 생각에 잠겨 있는데, 마침 뒤에 선 장기탁이 전음을 흘려보내 왔다.
[문주님, 그래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본문의 실력을 제대로 보여준다면 저들의 신뢰를 얻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혹시라도 상급 소환지에 대해 본문만은 예외로 지정해 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과연 일리 있는 말이었다.
만약 그렇게만 된다면, 상급에서 나오는 전리품은 모두 천도문의 차지가 될 것이다.
차재강이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
“좋소. 다만 조건이 있소.”
“뭐요?”
“전리품은 철저하게 기여도에 따라서 나누도록 하고, 본문이 먼저 도착했으니 본문이 앞장서도록 하겠소.”
한 번쯤 반박이 있을 거라고 예상했는데, 의외로 사비강은 순순히 받아들였다.
“뭐, 좋소. 위기에 처하면 우리가 돕겠소.”
차재강이 피식 웃었다.
“그럴 일은 없을 거요.”
돌아선 그가 마치 들으라는 듯 중얼거렸다.
“뭐, 걸리적거려서 방해만 되지 않는다면야 도와주는 거겠지.”
**
촤아아악!
한 줄기 섬광이 흩뿌려지는 것과 동시에 거대한 송충이 모양의 마물이 쿵!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치이이이익…!
녀석의 몸에서 흘러나온 녹색 액체가 바닥을 적시며 타들어 가는 소리를 냈다.
피가 독수나 다름없는 마물로 원래 이름은 ‘블러딘’이었지만, 중원에서는 ‘혈독충(血毒蟲)’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보통 십 척이 넘는 길이에 어른 몸통보다 두꺼운 녀석이었는데, 주로 독수를 입으로 뱉으면서 공격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큰 덩치에 몸을 구부렸다가 펴며 이동하는 동작과는 어울리지 않게 매우 빠른 것 또한 녀석들의 특징이다.
한데 천도문은 과연 그 명성답게 혈독충을 어렵지 않게 섬멸하고 있었다.
장기탁이 마지막 혈독충을 베어 내자, 주변은 다시 고요해졌고 무인들의 거친 숨소리만 들려왔다.
“흐음. 부상자는 없는가?”
차재강이 주변을 둘러보며 묻자, 장기탁의 대답이 들려왔다.
“부상자는 두 명입니다. 가벼운 부상이라 전투에 지장 없습니다.”
“좋아. 전리품 챙기고 계속 이동한다.”
천도문도들이 저마다 품에서 약병을 꺼내 혈독충의 독수를 조심스럽게 담기 시작했다.
차재강이 슬쩍 뒤에 선 사비강과 토벌대를 보았다.
사비강은 물론, 그가 데려온 토벌대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나서지 않았다.
그만큼 천도문은 지금까지 무리 없이 소환지를 공략하고 있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모두 다섯 군데의 공동을 지났다.
보통의 경우 공동이 나타날 때마다 까다로운 마물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이번 공동에서는 혈독충이 바로 그런 마물이었다.
하지만 천도문은 여기까지 오는 동안 단 두 명의 부상자를 제외하고는 어떠한 피해도 입지 않았다.
모두 서른 명임을 감안하면, 그야말로 훌륭한 전투력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당연 천도문도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게다가 멸마관의 목전에서 이런 활약을 보이고 있으니 절로 어깨에 힘이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대략의 전리품을 챙긴 천도문도들은 곧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중간 중간 하급 마물들이 나타났지만 사기가 오를 데로 오른 천도문도들에게는 그저 가소로울 뿐이었다.
[이대로라면 전리품은 전부 본문이 가지게 될 것 같습니다.]
[멸마관은 전혀 나설 기미가 보이지 않는군.]
[지금쯤이면 우리 능력을 인정한다는 뜻이겠지요.]
장기탁의 전음에 차재강이 피식 웃었다.
[어쩌면 완전히 얼어붙어 버린 건지도 모르지.]
그렇게 두 사람이 전음으로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 무리는 여섯 번째 공동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기감을 활짝 펼친 무인들이 주변을 잔뜩 경계하며 조심스럽게 공동 안으로 들어섰다.
마침 천도문도 중 한 명이 한쪽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엇! 저기 문이 있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한 곳으로 향했다.
과연 그곳에는 커다란 석문이 있었는데, 표면에는 알아보기 힘든 문양이 어지럽게 새겨져 있었다.
토벌대가 웅장한 석문 앞에 모였다.
“이곳이… 석실이군.”
“석실은 처음 보는군.”
무인들이 조금 긴장한 채 중얼거리자, 차재강이 차갑게 코웃음 쳤다.
“그래봐야 마물 따위가 머무는 곳이다. 지금까지 본문이 상대한 마물 중에 강한 녀석도, 약한 녀석도 있었다. 하지만 본문은 그 모든 녀석들을 제압하고 당당히 전리품을 취해 생환했다. 이번에도 그리 될 것이다.”
자신감이 넘치는 그의 목소리에 천도문도들은 다시 한 번 투지를 끌어올렸다.
차재강이 사비강을 슬쩍 돌아보았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철저한 기여도에 따라….”
“걱정 마시오. 걸리적거리지 않을 테니. 뭐, 본관의 생도들에게도 좋은 교본이 될 거고.”
‘교본…? 뭐, 직접 견식하는 것만큼 좋은 공부가 되는 것도 없겠지.’
생각을 마친 차재강이 육중한 석문을 밀었다.
그그그그그…긍!
마침내 석문이 활짝 열리면서 차재강을 비롯한 천도문도들이 앞장서서 들어갔다.
문도들의 눈앞에는 광활한 공동이 나타났는데, 저만치 절벽이라고 표현해도 될 만큼 높은 단상이 있었다.
그 위에 새하얀 깃털의 마물이 엎드려 있었는데, 잠이 든 것인지 조용했다.
집채만 한 덩치의 마물.
마물에게서 뿜어지는 기운이 생각보다 강해서 천도문도들이 저마다 마른 침을 삼켰다.
꿀꺽.
[확실히 저 녀석은 분위기부터 예사롭지 않군요.]
장기탁의 전음에 차재강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하나 위축될 건 없다. 어차피 그래봐야 하등한 마물이다. 제아무리 사나운 맹수라도 인간을 당할 수 없듯이.]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차재강이 수신호를 보내자, 천도문도들이 일제히 진을 펼치며 절벽 쪽으로 다가갔다.
천상벽력진(天上霹靂陳).
원래 사람을 상대로 개발한 진법이다.
하지만 차재강은 몇 차례 소환지를 공략하면서 이 진법이 마물을 상대하기에 더 없이 좋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여, 몇몇 장로들과 머리를 맞대어 마물을 사냥할 때 좀 더 유용하게 변형했다.
천도문도들이 완벽한 천상벽력진을 갖추었을 때,
- 구으으응…!
묘한 울음소리와 함께 새하얀 깃털을 가진 마물이 꿈틀 움직이면서 깨어났다.
다음 순간,
쑤우우우우웅!
육중한 덩치의 마물이 허공으로 도약했다.
차재강이 벼락처럼 소리쳤다.
“천중에 가둬라!”
‘천중’이란 천상벽력진을 활용할 때의 명칭으로, 진법 한가운데를 일컫는 것이었다.
오랫동안 훈련하고 실전을 겪은 무인들답게 천도문도들이 재빨리 움직이면서 진을 넓게 벌렸다.
마침내 그들 한가운데에 마물이 유성처럼 떨어져 내렸다.
쿠우웅!
땅이 격렬하게 떨리며 진동했다.
무인들 한가운데에 내려선 마물이 목을 길게 뽑아 들고는 울음을 터뜨렸다.
- 구으으으으응!
집채만 한 덩치, 양처럼 생긴 얼굴에 단단하게 돋은 뿔, 귀는 넷이었고, 꼬리가 아홉 개였다.
그리고 또 하나의 특이한 점이 있다면, 등에 커다란 두 눈이 박혀 있다는 점이었다.
녀석의 등에 난 커다란 두 눈이 끔뻑, 움직였다.
지금껏 담담했던 차재강조차도 그 기이한 모습에 압도된 듯 입을 꽉 다물었다.
‘세상이 어찌 되려고 이런 마물이…!’
하지만 사비강만큼은 녀석의 존재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박(駮)’이다.”
사비강 곁에 서 있던 단리정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물었다.
“‘박’이라는 건… 저 마물의 이름입니까?”
“그렇다. 원래 마계에 존재하던 녀석은 아니고, 고대 중원에 존재하던 녀석이다. 산해경에 나오는 환수지.”
“아…!”
사비강은 가만히 박을 보았다.
사실 박은 환수들 중에서도 전쟁을 막아 주는 길한 녀석이라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마령교의 대법으로 그 성질이나 형상마저 변형이 되었을 테니, 길흉을 따지는 건 무의미하리라.
오히려 그 의미가 변질되어서 전쟁을 부르는 환수가 되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거나 이걸로 무랑도사의 말이 틀림없는 사실로 확인된 셈이다.
지난 번 석실의 주인도 고획조, 이번에는 박이다.
고대의 환수들이 소환되면서 중하급 마물들의 우두머리가 된 것이다.
마령교의 소환 의식이 아무리 우수하더라도 마계의 상급, 최상급 몬스터들을 단기간 내에 소환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그 대신 고대의 환수들을 소환해서 변형시킨 것이리라.
‘영악하군.’
이런 것을 다 어찌 해냈을까?
마령교주는 대체 어떤 인물일까?
혹시 마령혼이 현신해서 그들을 돕는 것은 아닐까?
온갖 생각이 머릿속에서 복잡하게 얽혀들었다.
‘뭐, 조금이라도 빨리 마령교의 본거지를 찾는 수밖에.’
사비강은 생각을 거두고 눈앞의 박을 보았다.
‘확실히 고획조보다는 형편없이 약해빠졌군.’
천도문의 입장에서는 지금 이 눈앞의 박도 살이 덜덜 떨릴 정도로 공포스럽겠지만, 고획조를 상대했던 사비강에게는 그저 덩치만 큰 마물에 지나지 않았다.
소환지의 등급이 겨우 상급인 이유도 그 때문이다.
아직 제물이 넉넉하게 바쳐지지 않아서 그럴 수도 있지만, 아마도 박 자체가 마령교의 대법과 상성이 맞지 않아서 그럴 가능성이 크다.
고획조는 너무 잘 맞았던 거고.
어쨌거나 석실의 주인인 만큼 마냥 쉬운 상대는 아닐 터.
‘자, 이제 어떻게 상대할 거냐? 욕심 많은 늙은이.’
사비강의 입매가 희미하게 비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