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9
귀환 마교관
409화
“고획조는 전설 속 환수가 아니었소?”
사비강의 말에 무랑이 피식 웃었다.
“직접 두 눈으로 보고도 그리 묻는 겐가?”
“흐음.”
“오히려 마왕 보다는 믿기 쉬운 이야기일 것 같네만.”
“그도 그렇군.”
사비강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
마왕이 강림할 판에 전설 속의 환수가 실존한다는 걸 못 믿을 이유가 없다.
게다가 두 눈으로 직접 보았으니 반박의 여지도 없고.
“하면 마령교는 소환 의식을 통해서 이곳 환수들을 해제시켰다는 거요?”
“그랬을 가능성이 높네. 그러니 그만한 난이도의 소환지가 나타난 것이겠지. 자네 말에 의하면 어지간한 돈…”
“던전이오.”
“그래, 그 던전 보다도 훨씬 공략하기 어려웠다고 하지 않았나?”
“그랬소.”
“그러니 마령교는 꽤 효율적인 방법을 찾은 게지. 석실의 진짜 주인을 불러올 만큼 준비가 되지 않았지만, 그들은 그것을 대체할 존재를 찾은 걸세. 그리고 거기에 마계의 기운을 접목시켜서 재탄생하도록 만든 게지.”
“대체 그런 걸 마령교가 어떻게 할 수 있다는 거요? 마령교의 누군가가 마계에 직접 가보지 않고서는….”
“그 반대일 수도 있지 않겠나?”
“반대라면? 설마… 마계의 누군가가 여기로…?”
“그렇네.”
“그건 말이 안 되오.”
사비강이 단호하게 말하자, 무랑도 반박하지는 않았다.
그 역시 지능 높은 마족이 벌써 중원으로 넘어왔다는 것이 납득되지 않았으니까.
차원 이동의 시기가 많이 빨라졌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는 마물 정도가 나타나는 정도다.
마족이 넘어오려면 적어도 현지화 가정을 거쳐야 한다.
바로 사비강이 말하는 테라포밍이 그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테라포밍이 이루어진 것 같진 않다.
‘대체 그놈들이 어떻게….’
사비강이 생각에 잠겨 있는데, 무랑이 불쑥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광아를 다시 불러야겠네.”
“광아?”
“류광 말일세. 내 제자 정류광.”
“아…”
“그 녀석이 마령교에게 넘겨주었다는 물건. 그 물건이 무엇인지 알아야겠네.”
“하지만 본인도 기억하지 못하는 걸 어찌…?”
“자네는 내가 중원 제일의 술법가라는 걸 잊은 모양이군.”
“아…”
사비강이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고는 피식 웃었다.
그때, 단리정이 사비강을 찾아왔다.
“관주님. 치옹산으로 갈 토벌대 구성이 끝났습니다. 바로 출발하시면 됩니다.”
“알겠다. 곧 가지.”
단리정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돌아가자, 사비강이 무랑을 돌아보았다.
“다녀오겠소. 그 사이에….”
“정류광, 그 녀석의 기억을 어찌 되찾을지 궁리해 보겠네.”
사비강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돌아섰다.
**
치옹산 언저리에 위치한 ‘우성촌’이라는 마을은 원래 사람들이 잘 찾지도 않는 외진 곳이었다.
한데 지금 이곳은 때 아닌 호황기를 누리고 있었다.
마을에서 하나밖에 없는 객잔에는 손님들이 넘쳐났고, 주루나 다루에도 수많은 무인들로 붐볐다.
처음 치옹산에 소환지가 나타났을 때만 해도 마을 주민들은 공포와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무인들이 하나둘 찾기 시작하면서는 더욱 몸을 사렸다.
하지만 머지않아 그들은 이게 또 다른 기회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치옹산에 공략하기 어려운 소환지가 나타났다는 게 공공연하게 알려지면서 수많은 무인들이 마을을 찾기 시작한 것이다.
소환지로부터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마을이었기에 자연히 유동인구가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허구한 날 파리만 쫓던 마을 객잔은 모처럼 호황기를 맞아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고, 각종 병장기를 파는 장사치는 평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한 수익을 올렸다.
게다가 소환지 공략이 어려워지면서 무인들이 마을에 머무는 기간은 점점 길어지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우성촌은 하루도 잠잠할 날이 없었다.
장사치들은 외지에서 소문을 듣고 찾아온 보부상들에게 텃세를 부리느라 시끄러웠고, 정사를 가리지 않고 모여든 무인들은 은근히 서로를 견제하면서 날을 세우고 있었다.
마을에서 하나 밖에 없는 객잔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자리가 부족하다 보니 끼니를 해결하려고 찾아왔던 무인들도 헛걸음하기 일쑤였다.
그러다 보니 종종 주인장이나 점소이와 실랑이가 벌어지곤 했는데, 천도문이 이곳을 찾았을 때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아이고, 죄송합니다요. 지금 저희 객잔에 손님이 가득 차서 더 이상 받을 수가 없습니다요. 이해 좀 해주십시오.”
점소이는 이런 상황이 하루 이틀이 아니라는 듯 익숙한 태도로 굽실거렸다.
하지만 천도문의 비도대주(飛刀隊主) 장기탁(長基卓)은 이런 상황이 낯설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가 눈썹을 험악하게 구부러뜨리며 눈을 치떴다.
“자리가 없다면 만들면 될 게 아닌가?”
“아아… 저희들도 지금 최선을 다 한 겁니다요. 탁자를 늘려서 자리를 만들었습니다만, 이젠 보다시피 한계에 다다라서… 헤헤.”
점소이가 뒤통수를 긁적이며 속없는 웃음을 흘렸다.
그의 말대로 객잔은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빼곡했다.
더 이상 탁자를 놓을 공간도 없어 보였다.
하지만 천도문은 이런 상황에서 문전박대를 당하는 것에 전혀 익숙하지 않았다.
자신들이 누군가?
어딜 가더라도 환영 대접을 받던 귀한 몸이 아닌가?
만약 이곳에 이름 난 문파라도 있었더라면 아니, 보잘 것 없는 문파라도 있었더라면 엄청난 환대를 받았을 것이다.
한데 그런 곳도 없는 촌구석이라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자신들을 몰라보다니.
한편 점소이는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치옹산에서 소환지가 발견되지만 않았어도 평생 무인을 구경하기도 힘들었을 그는, 최근 며칠간 무인들을 직접 대면하면서 그들이 대체로 어떤 성품인지 대략 알게 되었다.
선풍도골의 풍채를 자랑하며 사람 좋은 미소를 그리는 모습은 그야말로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일.
지금껏 점소이가 만난 무인들은 정사를 막론하고, 논리적으로 해결이 안 되면 칼부터 꺼내 드는 자들이었다.
‘특히 이렇게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자들이라면 더욱 그랬지….’
아니나 다를까, 장기탁은 눈을 부릅뜨고 은근한 살기까지 드러냈다.
겁을 줘서라도 어떻게든 자리를 만들게 하려는 목적이었다.
한데, 그의 뒤에서 죽립을 푹 눌러 쓴 노인이 나직하게 말했다.
“애꿎은 점소이를 쪼아봐야 뭣 하겠나? 자네가 직접 자리 좀 만들게.”
“알겠습니다, 문주님.”
장기탁이 깍듯하게 허리를 숙여 보이더니 장내를 휘 둘러보았다.
마침 창가의 좋은 자리에 모여 앉은 사내들이 보였는데, 그릇도 대충 비어 있었다.
“엇? 잠시만… 소란은…”
점소이의 말을 더 듣지도 않고, 장기탁이 창가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음? 뭐요?”
턱수염이 덥수룩한 사내가 장기탁을 힐끔 올려다보고는 쏘아붙이듯 물었다.
“자리가 좁다. 다 먹었으면 다른 사람을 배려해서 그만 일어나지.”
장기탁이 다짜고짜 반말을 내뱉자, 턱수염 사내의 표정이 일순 굳어지더니 이내 손을 내저으며 무시했다.
“별 미친놈을 다 보겠군.”
“그만 일어나라.”
“거참… 돌아가시오. 썩 꺼지란 말이오.”
턱수염 사내가 다시 한 번 말했다.
이번에는 그와 함께 앉아 있던 다른 세 명의 사내도 불쾌한 시선을 던져왔다.
한 번만 더 시비를 걸면 가만히 안 있겠다는 눈치였다.
장기탁이 차갑게 웃었다.
“꼴에 무인이라고 허세를 부리는 건가?”
“뭐?”
턱수염 사내도 더는 못 참겠다는 듯 이맛살을 구기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전신에서 투기가 우러나왔다.
장기탁이 입매를 비틀었다.
“과연. 사파 잡종답구나.”
그랬다.
턱수염 사내는 사파 무인이었다.
애초에 장기탁이 그에게 걸어온 이유도 사실 그 때문이었다.
그릇이 비어 있었던 것은 단지 우연이었을 뿐.
평소 천도문 입장에서는 철천지원수처럼 여기는 사파 무인이 눈앞에 있으니 일부러 다가와 시비를 건 것이었다.
한편 졸지에 모욕을 받은 턱수염 사내가 발끈하며 말했다.
“이봐. 말 다 했어?”
“아직. 다 못했지. 사파 쓰레기 녀석들이 마령교와 손을 잡을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마물을 토벌하겠다고 이런 곳에 나타났지? 양심에 털이라도 났다면 이런 곳에는 코빼기도 보여선 안 되지.”
“니미, 난 마령교와 손잡은 적도 없다고. 알아?”
“그 나물에 그 밥 아니겠나?”
“뭐, 이런 꽉 막힌 새끼가 다 있어?”
결국 턱수염 사내뿐만 아니라, 탁자에 둘러 앉아 있던 사파 무인들이 모두 일어났다.
다른 곳에서 식사를 하던 사파 무인들도 장기탁의 도발이 신경 쓰였는지 슬그머니 투기를 끌어올리고 있었다.
그러자 다른 정파 무인들도 날을 세웠다.
졸지에 객잔의 분위기는 정파와 사파의 대결로 굳어지는 듯했다.
입구에서 그 모습을 가만히 보던 죽립의 노인이 가만히 입매를 비틀었다.
‘약은 녀석… 졸지에 정파와 사파의 대결로 확대시키다니.’
아무래도 상황이 이러면 사파의 입장에서는 먼저 칼을 뽑기가 부담스러워질 수밖에 없으리라.
같은 싸움이 벌어지더라도 정도맹의 판결에 따라 그들에게 더 가혹한 처벌이 내려질 것이 불 보듯 뻔했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미 지난 과오가 있으니.
그때 누군가 죽립 노인을 알아보고는 소리쳤다.
“엇? 저분은… 천도문주 차재강(且載强)이다!”
그러자 장내는 순식간에 술렁임으로 가득 찼다.
최근 혜성문과 더불어 강호에서 높은 인지도를 쌓고 있는 문파가 바로 천도문이었다.
혜성문이야 원래 명문 정파의 맥을 잇고 있었다지만, 천도문이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한데 소환지가 나타난 이후로 여러 곳을 공략하며 강호에 두각을 드러낸 문파였다.
상대가 천도문이라는 것을 알게 된 턱수염 사내와 일당들은 은근히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흥! 어차피 다 먹었으니 자리는 양보해 드리지. 하나 어디 가서 이런 식으로 무례하게 굴진 않는 게 좋을 거요. 가자!”
결국 턱수염 사내는 무리들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이 정도 선에서 마무리 짓는 것이 가장 현명한 판단이리라.
그렇게 차재강을 비롯한 천도문 무인들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자 점소이가 쭈뼛쭈뼛 다가왔다.
“뭐로 드시겠습니까?”
“뭐든 맛있는 걸로 내오게. 술은 가장 좋은 것으로.”
“알겠습니다요.”
그때 차재강이 점소이를 불러 세웠다.
“잠깐.”
“말씀하시지요.”
“치옹산의 소환지 등급이 상향 조정되었다고 하던데 사실인가?”
“그렇습니다요. 며칠 전에 조정이 됐지요.”
“그런데 왜 아직도 사람이 많은 거지?”
“아마 멸마관을 기다리는 걸 겁니다.”
“멸마관?”
“예, 소환지 등급이 상향되면서 멸마관이 곧 도착할 거라는 소식이 있거든요. 그 결과를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싶어서 기다리는 분들이 많습지요.”
“시답잖은 이유군.”
점소이가 굽실거리고는 돌아가자, 장기탁이 허리를 숙이고는 물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어떻게 하긴. 멸마관이 오기 전에 우리가 먹어야겠지.”
“하지만 상급 소환지라면….”
“본문은 중상급도 문제없이 해치웠네. 겨우 한 급 차이야. 오히려 잘 됐지. 더 좋은 것들을 획득할 기회니까.”
“만약 귀영단이 막는다면….”
“허락하게 될 걸세. 그리 만들어야지.”
노인이 다시 입매를 슬쩍 비틀었다.
장기탁 역시 희미한 웃음을 머금고 답했다.
“이곳을 공략하게 된다면 중원에서 첫 번째가 되겠군요. 확실히 본문의 명성을 알릴 수 있는 기회가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