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0
귀환 마교관
390화
할짝할짝.
“끄응…!”
뭔가가 뺨을 핥아대고 있었다.
추량이 무심결에 손을 휘저었다.
하지만 뺨을 핥아대는 혀는 여전히 까끌까끌하게 달라붙었다.
“끄으음… 따가워…!”
가까스로 의식을 차리며 중얼거렸다.
천천히 눈을 뜨자,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는 반묘가 보였다.
녀석이 입을 쩌억 벌리더니 가냘픈 울음을 터뜨렸다.
- 니야앙.
잠시 상황을 인지하지 못한 추량이 두 눈을 멀뚱멀뚱 뜨고는 반묘를 한참이나 보았다.
뒤늦게 그는 의식을 잃기 직전의 상황이 떠올라 비명을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우악! 어, 어떻게 된 거지?”
그가 얼른 몸을 더듬어 보았다.
전신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지만 천만다행히도 다친 곳은 없었다.
“산, 산 건가?”
동면인의 공격을 정면으로 받아내면서 벼랑 끝으로 날아올랐을 때, 그는 틀림없이 죽을 거라고 생각했다.
“흑귀! 그 녀석은…?”
추량이 얼른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만약 흑귀가 죽었다면 살아 갈 면목이 없었다.
마침 바로 옆에 졸졸 흐르는 개울물이 보였다.
“이해할 수가 없군. 개울물이 이렇게 얕은 곳인데 살 수 있었단 말인가? 아니면 그만큼 멀리 떠내려 왔단 말일까?”
그렇게 혼자 중얼거리는데, 마침 귀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천운이 따랐다.”
휙 돌아보니 흑귀가 걸어오면서 바짝 마른 상의를 걸쳐 입고 있었다.
혈색이라고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새하얀 피부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탄탄한 근육질이었다.
“너… 살았구나.”
“뭔가 아쉬운 표정이군.”
흑귀가 싸늘하게 대꾸하자, 내심 걱정했던 추량이 발끈해서 소리쳤다.
“그래! 이놈아. 아쉬워 죽겠다. 콱 죽어 버리지 그랬냐?”
“너보다 먼저 죽을 수는 없지.”
“흥! 어째서?”
“내가 더 강하니까.”
“무슨 근거로 그딴 소리를? 이제 보니 네가 선배 알기를 아주 우습게 여기는군?”
“누가 선배지?”
“당연히 나지. 내가 먼저 사부님의 정식 호위무사가 되었으니까.”
추량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흑귀가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어 버렸다.
그러자 추량 역시 김이 새어 버렸는지 쓴 웃음을 짓고는 중얼거렸다.
“다행이다. 살아서.”
“그야말로 천운이었다. 여긴 평소에는 얕은 계곡이지만, 갑자기 쏟아진 소나기 때문에 물이 급격하게 불어 구사일생으로 산 거다.”
“아…!”
추량이 그제야 납득을 한 듯 입을 딱 벌리고는 개울물을 바라보았다.
과연 물가를 보니 조금 전까지만 해도 상당 수준의 높이로 물이 차올랐던 흔적이 보였다.
만약 물의 깊이가 지금과 같은 수준이었다면, 계곡에 빠졌다고 한들 죽음을 면치 못했으리라.
‘마침 소나기가 내린 게 다행이었군.’
그때 문득 추량의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아… 어쩌면…!”
그가 얼른 품을 뒤적이다가 부적 한 장을 꺼냈다.
바로 무랑도사가 적어 준 부적이었다.
흑귀가 이맛살을 구기고 물었다.
“뭐지?”
“무랑도사가 적어 준 부적이야. 그런데… 글씨가 희미해졌다.”
추량의 말대로 부적 중 하나의 글씨가 희미해져 있었다.
“틀림없어. 부적을 지니고 있는 바람에 살 수 있었던 걸 거야.”
만약 이대로라면 앞으로 한 번이나 두 번 정도는 부적의 효력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다가 글씨가 완전히 지워지면 부적의 효능은 다 한 셈이 되리라.
막상 실제로 부적의 효력을 실감하자 더 없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그는 부적을 품에 잘 갈무리 한 다음 주변을 훑어보았다.
“그나저나 난감하게 됐군. 다시 돌아가려면 한참은 걸릴 것 같고. 만에 하나 마인들이 숨어 있다면 또 위험할 텐데….”
“그래도 다른 방법이 없다.”
“젠장! 그 녀석들만 아니었어도 사부님을 곧 찾을 수 있었을 텐데.”
사실 추량은 사비강을 무리 없이 추적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사비강은 많은 흔적을 남겼다.
아마도 그가 폭주 상태였기에 더욱 그랬을 것이다.
만약 마인들과 조우하지만 않았더라면, 며칠 지나지 않아 사비강을 찾아냈을 지도 몰랐다.
“우선 목 좀 축이고 생각을 해보자.”
추량이 비척거리면서 일어나 물가로 다가갔다.
손으로 물을 떠 마시던 그가 무심코 수면을 바라보다가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으헉!”
달빛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묘하게 이지러진다 싶더니,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하는 게 아닌가?
순간 절벽에서 떨어지면서 머리를 다친 게 아닌가 싶어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떠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수면에 비친 그림자를 자세히 보니…
“도사…님?”
추량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데, 마침 수면에 비친 무랑도사가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 퍼질러 있을 겐가?”
“헉! 정, 정말 도사님이…?”
기겁을 한 추량과 달리 무랑도사는 시종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부터 내가 말해 주는 사람을 찾아가게.”
“그, 그게 누굽니까? 아니, 그전에 관주님은 어쩌고요?”
추량이 얼떨결에 대꾸하자, 수면에 비친 무랑의 입에서 뜻밖의 대답이 흘러나왔다.
“그자를 찾아가면 자연히 관주님도 뵐 수 있을 걸세.”
**
매설란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그녀는 환한 표정으로 무랑전 전주실로 들어갔다.
“관주님을 찾으셨다고요?”
마침 무랑도사는 생도들을 시켜 물이 담긴 커다란 대접을 모래 틀 안으로 옮기는 중이었다.
“그렇소.”
“관주님은 무사하신 거죠?”
“걱정 마시오.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에 계시니.”
“이번에는 정말로….”
“믿으셔도 좋소. 이미 추량과 흑귀에게 그곳으로 가라고 일러 두었소.”
무랑의 말에 매설란이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다행입니다. 정말 다행이에요.”
“다만 마령교에서도 관주님을 찾고 있는 것 같소.”
“마령교가!”
“그렇다고 해도 관주님이 지금 계신 곳이라면 크게 걱정할 건 없소.”
“대체 어디에 계신 거죠?”
“연이 닿은 것인지… 내 오랜 벗과 함께 있소.”
“그렇다면 더욱 안심이군요. 일단 한 고비를 넘겼네요.”
매설란이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실은 도사님께 또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무엇이오?”
“조만간 맹의 본단에서 파견한 감사단이 도착할 거예요. 천호당주 묵양제라는 자가 감사장인데, 관주님과는 다소 껄끄러운 사이죠. 그들은 이 상황을 최대한 이용해서 본관을 흔들려고 할 겁니다. 어떻게든 관주님이 복귀할 때까지 시간을 끌어 주실 수 없을까요?”
“흐음. 그건 쉽지 않은 일이오. 다만….”
“다만?”
“시간을 줄여 버릴 수는 있지.”
“그건… 무슨 뜻이지요?”
무랑이 대답 대신 고개를 들고 물었다.
“그들이 얼마나 머물다가 떠날 예정이오?”
“무기한이라고 합니다. 아주 작정을 한 거지요.”
“오히려 잘 됐소. 총관께서는 너무 걱정 마시오. 묵 당주는 언제 도착하오?”
“이틀 후에 도착할 예정이에요. 다만, 본관에 바로 오지 않고 신월문에 들러서 하룻밤 자고 올 것 같습니다.”
“신월문에?”
“네, 신월문에서 본관에 대한 정보를 수집할 것 같아요. 아무래도 우리에게 불리한 정보를 최대한 끌어 모은 다음에 오겠지요.”
“흐음. 이틀 후라. 잘 알겠소.”
무랑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우적우적… 와구와구… 쩝쩝…!”
사비강은 걸신이라도 들린 사람처럼 음식을 마구 입에 쑤셔넣었다.
마치 삼 년은 물도 안 먹고 굶은 사람 같았다.
먹고 먹다가 목이 막히면 대접에 담긴 물을 거침없이 들이켰는데, 절반은 입가로 흐르고, 절반만 삼키는 수준이었다.
식탁 맞은편에 앉은 노인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허어, 대체 얼마나 배가 고팠기에. 숨은 쉬면서 드시게.”
하지만 사비강은 노인의 염려를 듣는 척도 하지 않은 채 식탁에 차려진 음식들을 정신없이 해치웠다.
사비강이 그릇을 깨끗하게 비우고 나서야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지간히 다 먹은 것 같으니, 이제 치우겠네.”
노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주섬주섬 그릇을 정리해 갔다.
사비강이 경계의 눈빛으로 노인을 빤히 응시했다.
마침내 노인이 사비강을 등지고 돌아서자,
“크르르…!”
사비강이 짐승처럼 나직이 으르렁거리며 살기를 드러냈다.
노인이 쟁반을 들고 걸음을 옮기며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아서라. 괜히 힘 빼지 마시게. 몸에 해롭네.”
“크르르르…!”
“허참, 뭐가 그리 불안한 겐가?”
여전히 등을 진 채 말하던 노인이 돌아서는 순간이었다.
“쿠아아아!”
사비강이 붉은 기운을 폭발시키며 벌떡 일어나더니,
털썩!
느닷없이 의식을 잃고는 그 자리에서 쓰러지는 게 아닌가?
노인이 쓰러진 사비강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혀를 끌끌 찼다.
“그러게 몸에 해롭다고 하지 않았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노인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날 밤, 노인은 방 한쪽에 사비강의 잠자리를 마련해 주고는 침상에 드러누웠다.
그렇게 한참 시간이 흐르고 밤이 깊은 시각,
“크르르…”
거친 숨결과 함께 잠든 노인의 얼굴 위로 시커먼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사비강이었다.
그의 두 눈은 붉게 물든 채로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크르르…!”
가슴을 헐떡이던 사비강이 천천히 손을 들어올렸다.
그의 살기어린 눈빛에서 당장이라도 노인을 쳐 죽이겠다는 집념이 읽혔다.
마침 노인이 천천히 돌아눕더니 심드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왜 그리 잠을 설치는가? 밤이 깊었으니 그만 주무시게.”
찰나, 사비강의 미간이 팍 구겨지더니,
“쿠아아!”
있는 힘껏 주먹을 내리쳤다.
하지만 그 주먹이 노인에게 닿기도 전에 사비강은 또 다시 픽 쓰러지면서 기절해 버리고 말았다.
노인이 모로 누운 채로 혀를 끌끌 찼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면 몸에 해롭거늘. 쯧쯧.”
다음날 아침.
사비강은 침상 옆에 쓰러진 채로 입을 헤 벌린 채 잠들어 있었다.
그때 누군가 그의 뺨을 톡톡 쳤다.
“이보시게.”
“…쿠울.”
“이보게.”
찰싹찰싹!
따끔한 충격이 가해지자 그제야 사비강이 눈을 희번덕이며 벌떡 일어났다.
그는 노인을 보고는 튕기듯 물러나더니 베르타스를 앞으로 불쑥 내밀었다.
노인이 물끄러미 사비강을 응시했다.
“또 해보려고?”
“크으…”
“몸에 해로운 짓은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나?”
사비강이 움찔거리고는 노인을 가만히 노려보기만 했다.
노인이 뒷짐을 지며 돌아섰다.
“먹여 주고 재워 줬으니 이제 할 일을 해야 하지 않겠나? 따라오게.”
그는 사비강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더니 집밖으로 나가 버렸다.
사비강이 천천히 노인을 따라 나가자, 노인이 장작더미 하나를 손에 들어 보였다.
“자, 이 정도 크기의 땔감을 좀 구해 오면 좋겠군.”
“크르…!”
“자네가 일을 하는 동안 나는 앞으로 자네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생각 좀 해보겠네.”
사비강이 그 자리에 서서 가만히 있자, 노인이 이맛살을 슬쩍 찌푸리며 말했다.
“뭐하는가? 어서 다녀오지 않고. 참고로 어디 멀리 갈 생각은 말게. 여긴 자네가 어찌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니까.”
말을 마친 노인이 벽에 세워 둔 낚싯대 하나를 주워 들고는 호숫가로 휘적휘적 걸어갔다.
그는 곧 호숫가에 걸터앉아 바늘도 매달지 않은 낚싯대를 호수에 드리웠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촤아아.
수면에서 묘한 파동이 일어난다 싶더니, 이내 점점 봉긋하게 솟아오르는 게 아닌가?
마치 물이 생명을 가진 듯 신묘한 현상이 펼쳐지고 있음에도 노인은 한 치의 놀람도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