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0
귀환 마교관
370화
객잔 이 층 창가에 앉은 등부형은 무한의 저잣거리를 내려다보며 기분 좋게 미소 지었다.
조금 전 어깨를 부딪친 일 따위는 그의 머릿속에서 금세 지워진 후였다.
‘과연 도시가 크니 아름다운 여인들도 많구나.’
실제로 저잣거리를 오가는 사람들 중에는 상당한 수준의 미모를 자랑하는 여인들이 꽤나 있었다.
조용한 용천관에서만 지내다가 이렇게 대도시로 나오니 모든 게 새로워보였다.
그런데 그때였다.
갑자기 저만치 먼 곳에서 누군가 불쑥 외치는 소리가 귀를 때렸다.
“앗! 거기 서라!”
워낙 다급한 목소리였기에 등부형은 물론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돌아갔다.
마침 누군가가 뒤를 돌아보며 빠르게 달려가는 것이 보였고, 그 뒤를 쫓아 헐레벌떡 뛰는 한 남자가 보였다.
정황상 앞서 달리는 자가 뒤쫓는 자의 물건을 훔친 모양이었다.
마침 그 추측을 증명이라도 하듯 뒤쫓는 남자가 소리쳤다.
“누가 좀 도와주시오! 저놈이 내 돈을 훔쳐갔소! 이 나쁜 놈! 거기 서지 못할까!”
하지만 앞서 달리는 자가 경공이 뛰어난 것인지 좀처럼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소매치기는 등부형이 있는 객잔 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등부형이 혀를 끌끌 찼다.
“어딜 가나 쓰레기 같은 놈들이 있군.”
말을 마친 그가 순간 창틀을 밟고는 훌쩍 뛰어내렸다.
휘리리릭, 탁!
갑자기 하늘에서 등부형이 뚝 떨어져 내리자, 앞서 달리던 소매치기가 급하게 멈춰 서면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으익! 웬 놈이냐?”
소매치기가 버럭 소리치자, 등부형이 뒷짐을 진 채로 혀를 끌끌 찼다.
“한 번뿐인 인생, 제대로 좀 살 것이지. 왜 그렇게 인생을 낭비하는가?”
“이, 이건 또 뭐야?”
소매치기가 눈살을 찌푸리더니 등부형의 허리에 패용된 검을 힐끔 쳐다보았다.
“무인이라고 설치나본데… 우리가 누군지도 모르는 모양이군!”
그러더니 손가락을 입에 넣고는 ‘삐익!’ 휘파람을 부는 게 아닌가?
등부형이 눈살을 슬쩍 구기고 서 있는데, 마침 거지처럼 보이는 자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윽고 열 명에 달하는 자들이 저마다 살기까지 일으키며 등부형을 에워쌌다.
그 바람에 소매치기를 뒤쫓아 오던 청년 역시 움찔거리고는 멈춰 서서 눈치만 살폈다.
등부형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주변을 훑어보았다.
과연 열 명의 사내들이 풍겨내는 기도는 일반적이진 않았다.
하지만…
‘대수로울 것도 없군.’
실력을 대략이나마 가늠한 등부형이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무림인이라는 것을 알고도 이렇게 나오는 걸 보면… 네놈들은 하오문 종자들인가?”
그러자 수장으로 보이는 사내가 피식 웃었다.
“보아하니 무한에 처음 굴러들어온 개 뼈따귀구나. 무한은 우리가 있어 하오문 종자들이 발도 못 붙인다.”
“호오?”
“네놈의 뼈다귀까지 싹싹 발라 주마! 쳐라!”
순간 거지들이 일제히 등부형을 향해 몸을 날려 왔다.
등부형은 몸을 팽이처럼 회전하면서 우아한 움직임으로 검을 뽑아 들었다.
샤아아아악!
예리한 검기가 주변을 휩쓸었다.
동시에 검기에서 풍겨 나오는 자줏빛 연무가 근처를 자욱하게 물들였다.
연무자령검의 효과였다.
등부형은 신명에 빠진 듯 검을 휘둘러 갔다.
폐관수련하면서 갈고 닦은 검법이었다.
거기에 연무자령검의 신묘함이 더해지니 마치 구름 위를 거니는 듯한 기분이었다.
소매치기 일당들이 어지럽게 치고 들어왔지만, 등부형은 일절 동요하지 않았다.
마치 인간과 신선의 어울림 같다고나 할까?
무리들이 아무리 버둥거려도 등부형의 옷깃조차 스치지 못했다.
마침내 마지막 수장의 허벅지까지 깊게 베어낸 등부형은 긴 장검을 뻗어 목을 겨누었다.
척!
“흐익! 살, 살려 주십시오!”
그제야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은 수장이 엉거주춤 물러나며 빌었다.
등부형은 벅차오르는 가슴을 억누르며 짐짓 근엄한 척 말했다.
“마음 같아서는 네놈들에게 한 줌의 자비도 베풀고 싶지 않다만, 오늘 같은 날 살생을 하고 싶지 않구나. 꺼져라.”
“감, 감사합니다!”
소매치기들이 연신 굽실거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등부형이 그들에게 낭랑한 목소리로 일렀다.
“한 번만 더 이런 짓을 했다간, 정의의 이름으로 널 용서하지 않겠다!”
마침내 소매치기들이 앓는 소리를 내며 달아났다.
주변에 모여들어 구경하던 사람들이 저마다 박수를 치며 등부형에게 찬사를 보냈다.
소매치기에게 돈주머니를 빼앗겼던 청년이 굽실거리며 다가왔다.
“정말 감사합니다! 대협께서 나서 주시지 않았더라면 정말 곤란한 상황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괜히 어깨가 으쓱해진 등부형이 헛기침을 하고는 근엄하게 말했다.
“다음에는 조심하시오. 요즘 세상이 워낙 험하니.”
“명심하겠습니다. 아, 저는 봉양(鳳陽)의 철신문(鐵身門)에서 온 자운룡(紫雲龍)이라고 합니다. 선배님의 무공에 진심으로 감탄했습니다! 게다가 정의의 이름으로 널 용서하지 않겠다니… 크으. 저도 그렇게 멋진 말을 할 수 있는 날이 언젠가는 올까요?”
등부형이 씨익 웃으며 자운룡의 차림새를 힐끔 살폈다.
“그랬군. 그쪽도 무인이었군. 만나서 반갑소. 나는 용천관에서 온 등부형이라고 하오.”
“오오, 용천관! 용천관이라면 맹의 산하기관으로 명문정파의 후기지수들이 득실거린다는 그곳 아닙니까?”
“뭐, 그렇소.”
“설마 그곳의 교관님을 보게 될 줄이야! 정말 영광입니다.”
“허허, 영광까지야.”
등부형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내심 기분이 좋아 어쩔 줄을 몰랐다.
그가 자운룡이 허리춤에 패용한 검을 보며 말했다.
“그쪽도 검법을 익힌 모양이군.”
“아, 네. 정말 부끄럽습니다. 사실 제가 비무를 하거나 대련할 때는 실력이 나쁘지 않은데, 실전에서는 좀….”
“뭐가 문제요?”
“막 가슴이 두근거리고 호흡이 가빠져서 손발이 금방 어지러워진다고나 할까요? 아까처럼 갑자기 소매치기를 당하기라도 하면 지나치게 당황해서 머릿속이 까맣게… 하하….”
자운룡이 멋쩍게 웃으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등부형이 피식 웃었다.
‘전형적인 대비무인이군.’
대비무인이란 요즘 강호에서 유행하는 말로, 실전에서는 약하지만 대련과 비무에만 능한 무인을 일컫는 표현이었다.
자운룡이 쑥스럽게 웃다가 물었다.
“한데 등 선배님께서는 어쩐 일로 무한까지 오셨습니까? 용천관이면 이곳에서도 한참은 떨어진 곳일 텐데.”
“이번에 관주께서 나를 멸마관에 추천하셨소.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오오, 추천서까지!”
“글쎄, 나는 관심이 없다는데도 자꾸만 나 같은 인재가 이곳으로 가야 한다나…?”
“역시… 대단하시군요! 저는 이곳에 올 때 사부님이 괜히 문파 망신시키지 말고 얌전히 있으라고 했지만, 몰래 달아나다시피 온 것입니다.”
“음…? 하면 그쪽도?”
“예, 저도 멸마관에 입관하려고 합니다.”
“아… 하긴. 비무를 통해서 생도들을 뽑는다고 하니 어쩌면 가능할 수도 있겠군. 비무에는 나름 자신 있다고 하지 않았소?”
“맞습니다. 하지만 제가 지원하려는 건 생도가 아니라 교관이어서요. 하하….”
자운룡이 다시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뒤통수를 긁었다.
“교관으로?”
등부형이 놀라서 되물으면서도 내심 조소했다.
‘이젠 개나 소나 교관을 하겠다고 설쳐대는군. 이런 마당에 내가 직접 멸마관을 찾아가면 관주는 내게 읍소라도 해야겠어.’
하지만 그는 속생각을 숨기고는 자운룡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하하하! 포부가 큰 건 좋은 거지. 암!”
“선배님께 많은 가르침 부탁드리겠습니다. 참, 저는 이제 스물여덟입니다. 한참 어리니 말씀 편하게 하십시오.”
“그런가? 하면 내 편하게 아우를 대하겠네.”
“감사합니다, 선배님. 이것도 인연인데 제가 선배님께 식사를 대접하겠습니다. 어차피 선배님이 아니었다면 다 잃었을 돈이니까요.”
“뭐, 그럼 아우에게 좀 얻어먹어 볼까?”
“가시죠, 선배님.”
두 사람은 곧 객잔으로 들어갔다.
한편 인파들 사이에서 그런 두 사람을 묵묵히 지켜보는 시선이 있었으니….
흑립을 깊게 눌러 쓴 남자가 어딘지 음산한 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용천관이라… 확실히 정도맹에서 작정을 한 모양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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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내가 정말 넓군요!”
자운룡이 연신 주변을 둘러보며 감탄을 터뜨렸다.
곁을 나란히 걷고 있는 등부형도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
“확실히 넓군.”
“용천관은 이보다 작나요?”
“작지.”
“그렇군요. 듣기로는 다양한 환경에서 수련하기 위해 특별한 전각들을 많이 만들었다고 하더라고요.”
“하긴. 마령교의 술법이 워낙 사악하고 종잡을 수 없으니.”
등부형이 순순히 수긍하며 걸음을 옮겼다.
자운룡이 기대에 가득 찬 눈으로 두 손을 모았다.
“아, 생각만 해도 설레는군요. 드디어 멸마관주님을 보게 되다니. 선배님도 정말 기대되지 않습니까?”
그러자 등부형이 피식 웃었다.
“사실 난 이곳 관주가 누군지도 모른다네.”
“예에? 그게 정말입니까?”
“무릇 무인이란 그 명성에 기대지 않는 법. 나는 오로지 마인을 멸하고 마물들을 없애는 것에 뜻을 두고 있을 뿐이지.”
“아… 정말 대단하십니다. 역시 그릇이 다르시군요!”
“뭐, 당연한 것을 두고.”
등부형이 므훗한 표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자운룡은 수다를 멈추지 않았다.
“그나저나 그 현판을 직접 두 눈으로 보게 될 줄이야. 무한에 도착한 후로 소문은 들었지만 사실일 줄은 몰랐습니다.”
“현판이라니?”
“현판 못 보셨습니까? 그 길고도 긴 관명이 적힌 멸마관의 현판 말입니다.”
“그래봐야 멸마관은 세 글자가 아닌가? 그리고 나는 앞서 말했다시피 명성에 기대지 않는 성격이라 굳이 현판을 볼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보지도 않았네.”
“역시 다르시군요. 하면 혹시 이곳 관명의 정식 명칭도 모르시는 겁니까?”
“정식 명칭이 따로 있었나?”
“예. 이곳의 정식 명칭은 그 유명한 절대지존최강무적사…”
그때 누군가 두 사람의 앞을 막아섰다.
“어떻게 오셨소?”
그는 바로 고적산이었다.
그를 알아보지 못한 등부형이 어깨를 펴고는 당당하게 말했다.
“교관 심사를 받으러 왔소. 여기 추천서요.”
하지만 고적산은 추천서 따위는 거들떠도 보지 않은 채 말했다.
“두 사람 모두 볼 거요?”
“그렇소.”
“따라오시오.”
고적산이 몸을 휙 돌리고 걸어가자, 등부형은 내심 빈정이 상했다.
‘굉장히 딱딱한 자군.’
추천서를 멋쩍은 표정으로 갈무리한 등부형이 고적산을 따라 어느 전각 안으로 들어섰다.
“두 분은 여기서 대기하시오.”
말을 마친 고적산이 두 사람을 외당에 남겨 두고는 내당으로 들어갔다.
자운룡이 연신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말했다.
“정말 기대됩니다. 멸마관주님을 직접 뵙게 되다니!”
“거참, 별 걸 다 기대하는군. 하긴, 나도 예전에 용천관에서 심사를 받을 때 그런 기분이었지.”
“아, 그렇습니까? 역시 은기륭 관주님도 대단하신 분이지요? 그분의 명성도 익히 들었습니다.”
“물론일세. 그분은 인자한 미소 속에 칼날 같은 내공을 감추고 계신 분이지.”
“과연 대단하군요.”
“그나저나 조금 전에 말한 멸마관의 정식 관명이 뭔가?”
“아, 그거요. 절대지존최강무적사…”
그때 다시 내당 문이 열리더니 고적산이 나타났다.
“두 분 들어오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