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7
귀환 마교관
367화
‘매설란 전 국주…!’
남운평이 굳은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래도 한때 감찰국주였던 그녀를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다.
그러자 여태껏 가만히 사태를 지켜보던 심지황이 넌지시 나섰다.
“아무래도 이번 일을 그냥 넘어갔다간 세간에서 온갖 헛소문을 만들어내어 무한이 시끄러워질 거요. 게다가 사파 무인들이 관련되어 있으니 사람들이 많은 관심을 가지겠지. 어쩌면 악의적인 소문이 떠돌지도 모를 일 아니겠소?”
“그래서 심 장로께서는 묘안이라도 있으신 건지요?”
매설란이 차가운 어조로 묻자, 심지황이 어딘지 음흉한 미소를 그리며 답했다.
“이번 일은 무인들 사이에서 벌어진 것. 그러니 시시비비도 무인답게 비무를 통해서 결정하는 게 어떻겠소?”
“비무를 통해서 말입니까?”
남운평이 되묻자, 심지황이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강호인들 사이에서는 시시비비를 가리기 위해 비무를 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어찌 보면 굉장히 단순한 방법이었지만, 가장 무인다운 방법이기도 했다.
무림에서는 강자가 곧 정의가 되기 일쑤이니.
남운평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나쁘지 않겠군요. 어쨌든 후환을 없애기 위해서 오늘 이 자리에서 확실하게 결론을 내는 게 좋겠지요.”
그러자 남위성이 호기롭게 나섰다.
“아버지, 제가 연아를 대신해 비무에 임하겠습니다!”
하지만 심지황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미 이번 일은 자네들만의 문제를 넘어섰네. 이는 신월문과 멸마관의 문제가 된 상황일세.”
“하면…”
“응당 두 조직의 수장이 서로 비무를 겨루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심지황의 말에 남운평이 내심 조소를 지었다.
‘과연 그런 처사였구나.’
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매설란을 바라보았다.
매설란이 감찰국주의 위치에 있긴 했으나, 무공으로만 따지면 결코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실제로 그는 강호에서도 ‘신월패검(新月覇劍)’이라는 별호로 명성이 자자한 고수였다.
반면 매설란으로서는 부담감이 막중했다.
사비강을 만난 후 무공 실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한 것은 맞지만, 신월패검 남운평을 이길 만큼 대단하지는 않다는 것을 본인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심지황은 바로 이런 상황을 노린 것이었다.
잘만 하면 이번 사건을 계기로 무한에서 멸마관의 입지를 확 좁혀 놓을 수가 있었다.
‘일이 생각보다 수월해졌군.’
신월문주에게 처참하게 깨진 매설란 전 국주.
이런 소문이 퍼지기라도 한다면 누가 멸마관에 입관을 희망하겠는가?
지원자가 생기더라도 어중이떠중이들이 전부이리라.
그럼 자연히 멸마관은 세력을 키울 수도 없으리라.
심지황이 남운평을 돌아보며 물었다.
“어떻소? 두 분이서 비무를 겨루게 된다면 후배들에게도 좋은 가르침이 될 것 같은데.”
남운평으로서도 손해 볼 건 없었다.
오히려 자신의 명성을 드높이는 일이 될 수도 있었다.
그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좋습니다! 장로님의 뜻에 따라 제가 직접 나서도록 하겠습니다!”
남운평이 성큼성큼 나서자 모여든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오오, 신월패검이 감찰총국주와 비무를 한다!”
“이런 구경을 할 수 있을 줄이야!”
“멸마관이 오자마자 볼거리가 생기는구먼!”
사람들이 들뜬 목소리로 웅성거렸다.
매설란은 입술을 가만히 깨물고는 분위기를 살폈다.
남운평이 부담되긴 하지만 이대로 물러나는 것도 모양새가 좋진 않다.
결국 어쩔 수 없이 입을 열려는데,
“호오, 그것 참 좋은 방법입니다. 하지만 확실히 하셔야 할 겁니다. 비무에서 패한 사람은 그 결과를 군말 없이 받아들이기로.”
느닷없이 울린 목소리!
이번에도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돌아갔다.
노인과 추량 옆에 선 사비강이 팔짱을 낀 채 히죽 입매를 치켜 올렸다.
심지황의 눈매가 파르르 떨렸다.
“사, 사비…강?”
그가 당황한 표정으로 남운평을 돌아보았다.
남운평이 말하길 분명 사비강은 현재 매설란에게 전권을 위임하고 어디론가 떠났다고 하지 않았던가?
한데 왜 이런 곳에…!
사비강이 저벅저벅 걸어오며 말했다.
“참고로 멸마관주는 매설란 전 국주가 아니라 접니다.”
그가 히죽 웃자, 남운평이 미간을 슬쩍 구겼다.
‘이자가 그 사비강인가?’
말은 많이 들었다.
한데 생각보다 훨씬 젊다.
하지만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도가 예사롭지 않다는 것은 진즉 느꼈다.
상황이 예상 밖으로 꼬이자 심지황이 남운평에게 은밀히 전음을 흘렸다.
[아무래도 이번 일은 여기서 마무리 짓는 것이 좋겠소. 저자는 만만하지 않소.]
얼핏 자존심이 상할 만한 충고였지만, 남운평은 신중한 자였다.
그 역시 사비강과 직접 비무를 할 정도로 무모하진 않았다.
그가 짐짓 활짝 웃음을 지으며 나섰다.
“아무래도 다시 생각해 보니 여러모로 서로간의 오해가….”
그때, 눈치도 없는 남화연이 불쑥 나서며 소리치는 게 아닌가?
“아버지! 본때를 보여주세요! 누가 정의인지 확실하게 보여주세요!”
그러자 주변에 몰려든 사람들이 잔뜩 기대에 찬 표정으로 술렁거렸다.
“오오! 그 유명한 사비강 대협과 신월패검이 비무를 펼친다!”
“세상에! 이런 비무를 직접 보게 될 줄이야!”
이쯤 되자 신월문의 무인들도 눈을 빛내며 남운평을 바라보았다.
“문주님의 무공을 직접 견식하는 날이 올 줄이야.”
“흔한 기회가 아니니 확실히 보고 배우자!”
“사비강 대협이 대단하다지만, 문주님이 패할 리가 없지.”
“암! 그렇고말고!”
이제 분위기는 비무를 펼치지 않고서는 어쩔 수가 없는 상황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심지황은 사태가 더 심각해지기 전에 수습하기 위해 슬쩍 나섰다.
“아무래도 이번 비무는 자칫 유흥거리로 전락할 수 있으니, 두 분은 추후에….”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곧 웅성거림에 묻혀 버렸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남위성의 고함소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여러분! 오늘 저 더러운 사파 무리들에게 정의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게 될 것입니다! 지금껏 무한을 지켜온 본문은 이번에도 의와 협의 이름으로 정의를 바로 세우겠습니다!”
“우오오오오! 좋은 기세다!”
사람들이 열광했다.
남운평은 철없는 아들의 설레발에 식은땀이 흐를 지경이었다.
“평아, 이제 됐다. 그만….”
“이 더러운 사파 무리들아! 우리 아버지가 누구인줄 아느냐? 우리 아버지로 말할 것 같으면 전설의 신월천기검(新月天氣劍)을 대성하신 분이다! 무한 일대는 물론, 호북 전역에서 아버지를 상대할 자가 없다! 그런 분에게 감히 도전장을 내밀다니!”
호쾌하게 소리친 남위성이 ‘저 잘했죠?’ 하는 표정으로 남운평을 돌아보았다.
마침 듣고만 있던 사비강이 남위성을 노려보면서 말했다.
“나보고 지금 사파 무리라고 한 거냐?”
싸늘한 목소리와 살기를 느낀 남위성이 움찔거리고는 사비강을 보았다.
“그, 그쪽에게 한 말은 아니오. 그저 내 누이를 욕보인 사파 놈들에게 한 말이오.”
“그렇게 말하니 내가 꼭 사파의 대표가 된 기분이군.”
“딱, 딱히 그런 뜻은 아니었소!”
남운평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생각 같아서는 자꾸 나불거려대는 아들의 면상에 주먹을 꽂아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우선 최대한 이 난감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는 분위기를 바꿔야 하리라.
남운평이 심호흡을 하고는 말했다.
“아무래도 서로간의 오해가 있는 것 같소. 이 자리에서 비무를 하는 것은 별로 좋은 결정이….”
그때,
“오오! 저기다! 저기야!”
“진짜잖아! 진짜 신월패검이다! 지금 신월패검이 사비강 대협에게 도발하는 모양이야!”
“하긴 그 자존심 강한 신월패검이 설마 꽁무니 말고 도망치겠어?”
“이거 대단한 볼거리군!”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오는 것이 아닌가?
이윽고 남화연과 백공보 사이에서 일어난 소소한 다툼은 이제 무한 전체의 구경거리로 번지고 말았다.
구경하려고 몰려든 사람들 중에는 만검세가 쪽 무인들도 여럿 포함되어 있었다.
“과연 신월패검이 나섰군.”
“만검세가주님도 인정한 신월패검이니 절대 물러나지 않겠지.”
“당연하지. 성격이 대쪽 같다고 들었다. 이대로 물러나면 신월패검이 아닐 테지.”
이제 남운평은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폭포수처럼 흐르기 시작했다.
한편 구경꾼들이 늘어나자, 신월문 무인들은 괜스레 어깨가 으쓱해져서 소리쳤다.
“문주님! 진정한 정의를 보여주십시오!”
“문주님을 믿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문주님을 응원하기 위해 몰려왔습니다!”
사람들의 응원과 함성은 점점 더 높아져만 갔다.
반면 만검세가 쪽 사람들은 뭔가 미적거리는 남운평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저래? 안 싸우고 뭐하는 거지?”
“설마 쫄아 버린 건가?”
“하긴 사비강 대협의 명성도 대단하니….”
그러자 신월문 무인들이 발끈해서 소리쳤다.
“어디서 망발이냐! 우리 문주님은 그 어느 때보다도 평온하시다!”
“그렇다! 문주님은 지금 상대의 약점을 간파하고 계실 뿐이다!”
이쯤 되자 남운평은 비무를 피할 수 없는 상황임을 직감했다.
‘그래, 차라리 대충 시늉이라도 보이는 게 나으리라.’
사비강의 명성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한들, 자신이 혼심을 다한다면 백초는 버티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수십 합을 겨룬 다음, 자연스럽게 상대의 무공을 인정하면서 검을 거두는 것도 방법이 되리라.
생각을 굳힌 남운평이 천천히 기수식을 취했다.
사비강이 씩 웃었다.
“이제야 맘을 굳히신 모양이군.”
“한 수 부탁드리겠소.”
남운평이 딱딱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비강이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뭐… 이걸 배울 수나 있을지 모르겠네.”
남운평의 미간이 확 좁혀졌다.
‘건방진…!’
하지만 상대방이 저리 방심하고 있다는 건 오히려 기회다.
남운평은 상대의 방심을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대신 언제나처럼 그 방심의 틈을 비집고 파고들기로 했다.
“그럼!”
타앗!
나이로 따지면 자신이 훨씬 많겠지만 선공 따위는 양보하지 않았다.
이길 수만 있다면 딱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게 바로 그만의 싸움 방식이기도 했다.
그는 분명히 보았다.
자신이 달려가는 와중에도 팔짱을 낀 채 태만한 자세로 서 있는 사비강을.
‘훗! 허울뿐인 명성이었구나! 받아랏!’
쒸에에에엑!
신월천기검의 제 일초식, 신월참공(新月斬空)!
완만하게 굽은 검이 아름다운 호선을 그리며 사비강의 머리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찰나, 사비강이 왼손을 불쑥 뻗더니 시큰둥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플레임 캐논(Flame Cannon).”
다음 순간 그의 손바닥에서 시뻘건 화염광선이 쏘아지더니 그대로 떨어져 내리는 남운평을 날려 버리는 게 아닌가?
화르르르르륵! 퍼엉!
“크아아아악!”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검을 휘두르며 달려들던 남운평은 전신이 시커멓게 그을린 채로 저만치 길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나마 내공이 심후한 덕분에 즉사를 면했지만, 꽤나 심각한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당황한 그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비척거리며 일어나다가 다시 넘어져 버렸다.
순간 주변이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그들은 지금 일어난 이 현상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특히 신월문 무인들은 입을 딱 벌린 채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이렇게 간단하고도 허무하게 비무가 끝나리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기에.
“방, 방금 저게 뭐지?”
“글, 글쎄… 극양의 신공인가?”
사람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하자, 사비강이 입을 열었다.
“이걸로 시시비비는 가려진 것 같소.”
말을 마친 그가 부유 마법을 이용해서 지붕 위로 훌쩍 날아올랐다.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저 신묘한 허공답보로 보일 뿐이었다.
사비강이 사람들을 휘이 둘러보고는 입을 열었다.
“이참에 한 가지 알리겠소. 본관은 마령교가 소환하는 마물이나 갖가지 대법에 대항하기 위해 조직된 학관이오.”
공력이 담긴 목소리가 사람들의 귀에 또렷하게 박혀들었다.
“누구든 본관에 입관하길 원한다면 능력이 되는 한, 출신과 성별을 따지지 않고 뽑을 예정이니 많은 관심 부탁드리겠소.”
말을 마친 사비강이 천멸대와 신생조원들을 둘러보더니 툭 뱉듯이 말했다.
“일 끝났으면 가자, 얘들아.”
“옛!”
천멸대와 신생조가 우렁차게 대답하며 그 뒤를 따랐다.
사비강이 떠나고 난 뒤, 한참이 지나서야 사람들의 웅성임이 들려왔다.
“대, 대단하군!”
“멸마관이 있다면 정말로 마령교 따위도 문제없겠다!”
“난 멸마관에 지원하겠어!”
“나도!”
무인들이 저마다 들떠서 소리쳤다.
한편 인파 사이에 섞인 채 조용히 서 있던 무랑이 투덜거리듯 말했다.
“저자는… 날 여기에 두고 혼자 가면 어쩌자는 거지?”
옆에 선 추량이 송구한 표정으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사부님께서 자아도취에 빠지신 것 같습니다. 종종 있는 일인지라… 제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가시지요.”
결국 무랑이 혀를 끌끌 차며 추량의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