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 마교관-363화 (363/670)

# 363

귀환 마교관

363화

‘총군사라…’

추희룡의 표정에 그늘이 졌다.

‘류 군사… 당신이 아직 살아 있다면 지금 상황이 조금 바뀌었을까?’

적어도 총군사를 지목하는 일에 시간을 허비할 일은 없었으리라.

추희룡의 머릿속에 류여중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랐다.

**

혈향이 자욱한 서화평원을 가로질러 남동쪽 언덕에 다다랐을 때, 추희룡은 처량한 모습으로 서 있는 류여중의 뒷모습을 볼 수 있었다.

“류 군사!”

추희룡의 부름에 류여중이 처연한 표정으로 돌아섰다.

후우우우웅!

때마침 차가운 겨울바람이 그를 뒤에서 떠밀 듯 불었다.

류여중이 희미한 웃음을 머금은 채 물었다.

“뜻대로 되셨습니까?”

추희룡이 흠칫거리고는 류여중의 시선을 슬쩍 피했다.

“미안하게 됐소. 하나 쇄신을 위한 과정이라 생각해 주시오.”

“쇄신이라… 당신이 권력을 잡는 것이 쇄신입니까?”

따진다고 하기에는 그 목소리가 너무나 조곤조곤했기에 추희룡도 담담히 대답했다.

“변명할 생각은 없소. 하나 나는 다를 것이오. 믿어 주시오. 군사가 내 힘이 되어 준다면 분명 본련은 더 나아지고 발전할 거요.”

후우우웅!

또 한 차례 바람이 불었다.

류여중은 한참이나 추희룡을 보았다.

마치 눈빛으로 나무라는 것 같기도 했고, 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추희룡도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한참 후에야 류여중이 웃음을 터뜨렸다.

추희룡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지만, 기분 나쁜 내색을 보이진 않았다.

한동안 웃음을 흘린 류여중이 추희룡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틀렸습니다. 당신은 저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못 됩니다.”

“그럴 지도 모르지. 하지만 좀 더….”

다음 순간, 류여중은 오른손에 비수를 들더니 자신의 목을 슥 그어 버렸다.

추희룡이 눈을 부릅떴다.

“군사!”

그가 얼른 달려가서 쓰러지는 류여중을 받쳐 들었다.

이미 목을 깊게 베인 상태였기에 소생은 불가능해 보였다.

추희룡이 안타까움에 소리쳤다.

“군사! 꼭 이래야만 했소!”

류여중의 입에서 가쁜 숨이 토해져 나왔다.

이따금씩 핏물이 울컥 튀어나오기도 했다.

점점 의식을 잃어 가는 그가 희미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그를 알지 못합니다.”

“그라니… 누굴 말이오?”

“그자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무서운 사람입니다.”

“대체 누굴…”

“사비…강…”

**

그때까지만 해도 류여중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정확히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확실히 알았다.

자신의 몸속에 심어져 있는 생명줄을 쥐고 있는 것이 바로 사비강이었으니까.

천천히 눈을 뜬 추희룡이 말했다.

“홍묘를 군사로 임명하겠소.”

“알겠습니다. 후 지망은 누굽니까?”

“뭐? 그건 또 왜 물어보시오!”

“그녀도 이미 지목한 곳이 있어서 말입니다.”

추희룡이 어금니를 뿌득 갈았다.

가슴 속에서 뭔가가 바글바글 끓었다.

그의 심정이 격동하는 것을 눈치 챈 것인지, 천장에서 한 인영이 사라락 떨어져 내렸다.

날카로운 비수처럼 기도가 잘 다듬어진 여인, 비령이었다.

그녀를 보자 두 가지 감정이 일어났다.

첫째는 더욱 울분이 치솟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맥이 탁 풀리는 상실감이었다.

자신이 누군가?

이제 곧 혈사련주가 될 몸이다.

한데 한낱 호위 무사의 날선 시선을 받아야 하다니.

“후 지망. 말씀하시죠.”

구윤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마음을 다스린 추희룡이 겨우 입을 열었다.

“그것도… 생각해 보겠소.”

**

“이게 뭐요?”

적무린이 손에 든 두 개의 두루마리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의 곁에 선 홍묘의 손에도 두 개의 두루마리가 들려 있었다.

하나는 적색 두루마리, 하나는 흑색 두루마리였다.

두 사람 앞에 서 있는 구윤이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

“임명장입니다.”

“임명장? 무슨 임명장이 두 개씩이나 된단 말이오?”

적무린의 질문에 구윤이 희미하게 웃으며 답했다.

“우선 한 번 보시지요.”

적무린이 먼저 검은색 두루마리를 펼쳐들었다.

잠시 후 그가 조금은 놀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혈사련의 호위대주?”

“혈사련에서 당신을 호위대주로 임명했습니다.”

“그럼 이건…”

적무린이 이번엔 붉은색 두루마리를 펼쳐들었다.

적무린의 표정이 흔들렸다.

“대체 이 기관은 정체가….”

“사비강 대협이 관주로 있을 곳입니다. 절대지존최강… 하아…”

말을 꺼내던 구윤이 화끈거리는 얼굴을 식히며 잠시 뜸을 들이다가 다시 이어 갔다.

“어쨌든 편의상 우리는 ‘멸마관’으로 부릅니다. 물론, 사비강 대협에게는 비밀이지만.”

적무린이 알만 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구윤이 계속 말을 이었다.

“그 멸마관은 앞으로 일어날 재앙에 대비하기 위해 만들어진 신생 조직입니다. 당장은 대외적으로 마령교에 대항할 무공을 가르치는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무튼 그곳의 교관으로 당신을 지목한 것입니다. 홍묘님도 마찬가지고요.”

구윤의 시선이 홍묘에게 향했다.

홍묘가 가진 흑색 두루마리는 혈사련의 총군사 직을, 적색 두루마리는 멸마관의 교관 직을 임명하는 내용이었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두 사람의 자유입니다.”

“지금 바로 결정해야 하오?”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보름의 기한이 있습니다. 두 분이 결정을 내리고 각 기관에 통보를 하게 되면, 자연히 제 귀에 들어올 겁니다. 만약 보름이 지나도 결정을 내리지 않는다면 어떤 선택도 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할 겁니다.”

“그럼 우린 자유다?”

“그렇습니다.”

구윤이 두 사람을 찬찬히 둘러보며 말했다.

“홍묘님은 그간 본맹에 갇혀서 많은 고생을 겪으셨지요. 사실 혈사련이 완전히 본맹에 복속된 이상, 홍묘님을 본단에 머물게 할 필요는 없어진 셈입니다. 오히려 본맹으로서는 부담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지요. 그리고 적 대협은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본맹을 위기에서 구하셨으니 그에 대한 소소한 답례라 보시면 되겠습니다.”

“흐음.”

적무린이 가만히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대충 정도맹을 떠날 수 있게 될 거라는 짐작은 했지만, 이런 임명장을 두 개나 받을 줄은 몰랐다.

한참 후에 그가 답했다.

“알겠소. 그럼 우린 이만 떠나보도록 하지.”

“두 분이 가시는 길에 정의가 있길.”

구윤이 부드러운 어조로 작별 인사를 건넸다.

**

“이렇게 나오니까 기분이 이상하네.”

서래향이 정도맹 본단 정문을 나서면서 숨을 한껏 들이마셨다.

물론, 본단을 나선 게 처음은 아니었다.

얼마 전에도 서화평원으로 달려가기 위해 본단을 벗어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정신이 없었다.

지금은 다르다.

온전한 자유의 몸으로 정도맹 본단을 나서게 된 것이다.

왠지 코끝을 스치는 공기마저 다르다고 느끼는 것은 기분 탓일까?

그녀가 적무린을 돌아보며 짐짓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흠… 홍묘님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적무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크게 고민할 가치가 없는 결정이다.

한낱 학관의 교관과 혈사련의 총군사 직을 놓고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나?

누구라도 망설임 없이 총군사가 되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서래향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흘러나왔다.

“아니. 이번에는 네가 먼저 결정해. 언제나 네가 날 따라와 주었으니까. 이번에는 내가 널 따라갈게.”

“홍묘님…”

적무린이 잠시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서래향이 그 시선을 피하며 먼산을 바라보았다.

“그, 그렇게 보면 왠지 이상하잖아.”

“아, 죄송합니다.”

적무린이 얼른 시선을 거두자, 서래향이 피식 웃어 버렸다.

적무린이 그런 서래향을 힐끔거리고는 물었다.

“만약 제 결정이 홍묘님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요?”

“그럼 때려서라도 바꿔야지.”

어딘지 진지한 표정으로 대꾸하는 서래향을 보며 이번에는 적무린이 피식 웃어 버리고 말았다.

적무린은 두루마리 두 개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까만색은 이제 질려서 이쪽이 더 마음에 드는군요. 왠지 그 괴짜 협객과 함께 있을 때면 흥미로운 일들이 많이 생겨서 말입니다.”

“그렇구나. 무린은 그렇게 결정했구나.”

“아, 혹시 마음에 안 드시면 제가 맞기 전에 바꾸….”

“마음에 쏙 들었어. 가자.”

서래향이 어깨너머로 흑색 두루마리를 집어던지고는 성큼성큼 앞장섰다.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적무린이 곧 환한 미소를 머금고는 뒤따랐다.

**

“흐음…!”

사비강이 미간을 팍 구기고는 앞에 앉아 있는 노인을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하얀 눈썹이 두 눈을 덮고 있었기에, 노인이 자신을 보는 것인지 바닥을 보는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눈썹을 들어 올리고 그 눈동자를 직접 보고 싶었다.

그렇게 서로를 얼마나 오랫동안 응시했을까?

먼저 입을 연 쪽은 노인이었다.

“자네 몸속에는 이 땅의 것이 아닌 게 들어있군.”

사비강이 흠칫거리더니 곧 입매를 치켜 올렸다.

“호오, 역시 보통이 아니군.”

“한 번 볼 수 있겠나?”

“보여주고 싶지만 그게 쉽게 볼 수 있는 건 아니라서 말이야.”

“그건 내가 알아서 하겠네.”

“뭘 알아서 하겠다는 거지? 그리고 보면 놀랄 텐데?”

하지만 노인은 앉은 채로 지팡이를 앞으로 쭉 내밀더니 양손바닥을 마주했다.

곧이어 지팡이를 중심으로 모종의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고오오오오오오.

찰나,

“하아아앗!”

노인이 눈을 부릅뜨며 기합성을 내질렀다.

그 소리가 어찌나 큰지 옆에 앉아 있던 추량은 그대로 자빠질 뻔했다.

다음 순간,

쿠와아아아아아아아!

사비강의 전신에서 기가 폭발하듯 일어나더니 검붉은 기운이 넘실거리면서 천장까지 부수며 나타났다.

허공에서 유유히 넘실거리는 것은 분명 레드 드래곤의 형상이었다.

“으헉!”

뜻밖에도 지팡이를 내밀고 기합성을 터뜨린 노인이 그대로 뒤로 넘어가면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레드 드래곤의 형상을 등에 업은 사비강이 씨익 웃었다.

“말했잖아. 보면 놀랄 거라고.”

한편 허공에서 넘실거리는 레드 드래곤의 웅장한 목소리가 울렸다.

머릿속으로 바로 울려오는 소리였다.

- 뭔가? 하찮은 이 존재가 설마 나를 불러낸 것인가?

“…라는군.”

사비강이 씩 웃으며 말하자, 노인이 엉거주춤 일어나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크흠, 이제 됐소.”

아무렇지도 않은 척 말했지만, 노인의 손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 흥, 미천한 주제에 재주는 쓸 만하구나.

말을 마친 레드 드래곤이 순식간에 사비강의 몸으로 갈무리 되듯 사라졌다.

사비강이 씩 웃었다.

“영감이 마음에 든 모양이군. 이 정도만 투덜거리고 사라지는 걸 보면.”

“흐음.”

노인이 진중한 표정으로 침음을 흘리자, 사비강이 웃으며 말했다.

“어때? 이제 진지하게 이야기를 들어 볼 마음이 생겼나? 아무래도 설명을 하려면 내 전생부터….”

그러자 노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잘 알겠네. 마왕의 침공이라니….”

“응? 난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잠깐, 여긴…?”

사비강이 말을 꺼내다가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은 다시 마을 어귀가 아닌가?

옆에는 커다란 바위에 ‘도향’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저만치 멀쩡한 마을이 보였다.

“사부님 왜 그러세요?”

옆에 있던 추량이 물었다.

“그 노인은?”

“저기 가시잖아요.”

사비강이 돌아보니 이미 노인이 저만치 앞서 걷고 있었다.

사비강이 귓속말로 추량에게 물었다.

“어떻게 된 거냐?”

“어떻게 되긴요? 말씀드렸잖아요. 제가 반묘를 따라서 마을로 내려갔다가 저 도사님을 모셔왔지요. 기가 막히게도 반묘가 저분을 찾아내더라고요. 한데 더 놀라운 건 저분이 이미 사정을 다 알고 계셨다는 거지만.”

“내가 볼케이노 마법을 써서 저 마을을 다 날려 버린 건?”

“예? 사부님이 마을을 날려 버렸다고요? 무슨 말도 안 되는 농담을. 아무리 사부님이 악질… 아니, 그러니까 제 말은… 아무튼 사부님은 여기 도착하고 나서 줄곧 제가 돌아오길 기다리셨잖아요?”

사비강이 멍한 표정으로 노인을 돌아보았다.

그것 또한 술법이었단 말인가?

이쯤 되니 대체 어디까지가 술법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인지 구분조차 되지 않을 지경이었다.

사비강이 이맛살을 팍 구기고는 투덜거렸다.

“확실히… 마음에 안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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