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4
귀환 마교관
354화
혼천당주(混天堂主) 이효(李孝)는 두 눈을 부릅뜬 채 격동하는 눈동자로 추희룡을 노려보았다.
그는 자신의 단전을 찌르고 있는 검신을 다시 한 번 내려다보다가 그 검을 쥔 추희룡의 손을 덥석 잡았다.
어찌나 세게 힘을 주었는지 손등으로 불거져 나온 핏줄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았다.
“추… 당주! 당신이 어째서…!”
“미안하게 됐소. 사적인 감정은 없소.”
추희룡이 처연한 표정으로 대답하자, 이효는 입가에 핏기를 머금고는 소리쳤다.
“추 당주! 어째서 본련을 배신한 거요! 당신이 어째서엇!”
추희룡이 눈살을 슬쩍 구겼다.
“배신이라…”
그러더니 추희룡이 힘을 주어 상대의 단전에 박힌 검을 쑤욱 뽑아냈다.
“크아아악!”
이효가 비명을 내지르며 그 자리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추희룡이 피 묻은 검신을 이효의 정수리에 슥슥 문지르며 닦아냈다.
“내가 하는 것은 배신이 아니라 쇄신(刷新)이오.”
추희룡은 반짝이는 검신을 확인하고는 다시 검집에 갈무리했다.
울컥!
이효가 피를 한 움큼 토해내더니 그 자리에서 고꾸라지고 말았다.
단전이 부서진 그는 이제 살아남는다고 해도 무공을 사용할 수 없는 몸이 되었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이효는 마지막으로 추희룡을 죽일 듯 노려본 다음, 스스로 모든 혈맥을 끊어 자결하고 말았다.
추희룡이 고개를 돌려 먼발치를 살폈다.
마침 저만치에서 쓰러져 가는 녹면인이 보였다.
그는 천멸대의 합격술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는 중이었다.
‘저들이 사비강 교관이 정도맹에서 키웠던 조직인가? 녹면을 생포할 생각인가 보군.’
천멸대는 생각보다 훨씬 강한 조직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며 추희룡은 눈앞의 혼천당 무인들을 훑어보았다.
이효를 따르던 그들이 저마다 움찔거리며 물러났다.
추희룡이 손가락으로 서화평원을 가리켰다.
“너희들도 눈이 있다면 보일 것이다. 저 죽음의 순간이. 이미 본련은 이번 전쟁에서 패망했다. 련주라도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이 되었지. 이제 너희들은 결정해라. 이곳에서 쇄신의 거름으로 썩어 갈 것인지, 아니면 지금부터 새롭게 싹을 틔울 것인지.”
말을 마친 추희룡이 성큼 걸음을 내딛자, 무인들이 우르르 뒷걸음질을 쳤다.
마침내 그들 중 한 명이 검을 놓았다.
뎅그렁.
그가 손을 들었다.
“당, 당주님을 따르겠습니다.”
추희룡이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너는 이제 나와 함께 다시 태어난다.”
그러자 너도나도 도검을 놓고 항복 선언을 이어 갔다.
순식간에 수십 명의 무인들이 항복을 선언하자, 추희룡이 기분 좋게 웃으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한데…
“헉!”
갑자기 그들이 사색이 되어서는 물러서는 것이 아닌가?
추희룡이 좋은 말로 달랬다.
“걱정 마라. 본좌는 항복한 자를 상대로 살수를 쓰지 않는….”
말을 꺼내던 추희룡은 그제야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의 시선이 자신을 지나쳐 뒤쪽의 무언가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추희룡이 슬쩍 돌아보자, 그곳에 사비강이 뚜벅뚜벅 걸어오고 있었다.
“오, 사비강 교관!”
추희룡이 반색하며 사비강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사비강은 추희룡을 보자마자 다짜고짜 차갑게 일렀다.
“련주는 어디에 있나?”
‘반말을…?’
추희룡이 이맛살을 슬쩍 찌푸렸다.
하지만 그런 걸 따지기에는 사비강의 눈빛이 지나치게 살기등등했다.
사람이라기보다는 굶주린 맹수의 눈빛을 닮아 있었다.
추희룡이 감히 따지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눈치 없는 수하 한 명이 앞으로 성큼 나서며 소리쳤다.
“감히 당주님께 무례하오! 예를 갖추…!”
퍼억!
“커억!”
쿠당탕탕!
사비강이 휘두른 주먹에 얻어맞은 수하가 저만치 날아가 거칠게 나뒹굴었다.
“끄음…!”
추희룡이 다소 불편한 심경으로 침음을 흘렸지만, 그 이상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쳇, 어차피 본련이 패한 마당이니 이젠 거리낄 게 없다는 건가?’
내심 기분이 상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혈사련을 배신한 그의 운명은 앞으로 사비강에게 달린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련주는?”
사비강이 다시 물었다.
표정에 짜증이 묻어나 있었다.
추희룡이 더 이상은 시간을 끌지 않고 답했다.
“저 언덕 위에 있소.”
그의 손가락이 남동쪽 언덕을 가리켰다.
서화평원이 시작되는 곳이었다.
사비강이 고개를 끄덕이자, 추희룡이 말을 덧붙였다.
“난 이제부터 류 군사를 찾아갈 생각이오. 그래도 그의 능력만큼은 높이 사기에 그를 중용해 볼 생각….”
추희룡은 말을 마저 잇지도 못했다.
이미 사비강은 그를 지나쳐 저만치 걸어가고 있었기에.
**
미명이 밝아 오고 있었다.
언덕 위에서 전황을 바라보는 련주의 그림자가 앞으로 길게 드리워졌다.
그의 눈빛은 착 가라앉아 있었다.
밤새 일어난 전쟁이 마치 꿈처럼 느껴졌다.
마령교에서 바올드를 끌고 나왔을 때만 해도 승리를 확신했다.
그리고 이후 마령교를 상대하려면 골치 꽤나 아프겠다고 생각했다.
한데 결과는 정반대가 되고 말았다.
정체 모를 마물들은 사비강이 소환한 망자들에 의해 전부 쓰러져 버렸고, 남은 병력들은 정도맹 무인들이 다시 휩쓸고 올라오면서 패배의 기색이 짙어졌다.
게다가…
“추 당주…”
추희룡이 배신을 했다.
그의 행동으로 보아서는 즉흥적인 건 아니다.
오래 전부터 계획을 세워 온 것이리라.
어디부터 어긋난 것이었을까?
‘저건… 사비강?’
마침 저만치 이곳을 향해 걸어오는 남자가 보였다.
사비강이었다.
그래, 어쩌면 그를 혈사련으로 불렀을 때부터 모든 것이 삐걱거리기 시작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옹기승의 몸에 깃든 선천마령지기를 뽑아 내려고 했을 때도 그가 흑운성에 있지 않았던가?
왜 그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선천마령지기를 확보하지 못한 건 마령의 기운 때문이 아니라, 사비강 때문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아니, 오늘 그의 믿을 수 없는 행보를 보건데, 분명 사비강의 영향을 받은 것이리라.
‘천외천이라더니…’
허무극의 입에서 희미한 탄식이 흘러나왔다.
추희룡의 반응으로 보아서는 이미 사비강과 뜻을 같이 한 것이리라.
“련주님… 자리를 옮기시는 것이….”
어느새 나타난 흑효가 나직이 일러왔다.
하지만 허무극은 고개를 저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뎌 가며 다가오는 사비강의 존재는 압도적이었다.
그는 알 수 있었다.
이제 와서 달아난다고 한들 사비강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수많은 무인들이 사비강 앞을 막아서고 있었지만, 그들은 일초지적도 되지 못했다.
사비강이 손을 한 번 휘저으면 그를 막아섰던 수하들은 추풍낙엽처럼 날아가 뒹굴었다.
‘여기까지인가…?’
야욕을 품고 강호를 호령하겠노라 마음먹은 게 엊그제 같은데.
돌이켜보면 참으로 짧고 허무하지 않은가?
무엇을 위해서 여기까지 달려왔던가?
그렇다고 후회하진 않는다.
그저 이루지 못한 꿈이 못내 아쉬울 뿐이다.
여기서 살아남는다고 한들, 이만큼 세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또 얼마나 많은 시일이 걸리겠는가?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이대로 이곳에서 죽진 않을 것이다.
자신에게는 비장의 한 수가 있으니.
어떻게든 살아남으리라.
긴 숨을 내쉬는데, 저만치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또 다른 사람들이 보였다.
한 명은 남자였고, 다른 한 명은 여자였다.
바로 추량과…
‘홍묘…?’
눈살을 슬쩍 찌푸린 허무극이 안력을 돋우어서 다시 한 번 주시했다.
홍묘가 확실했다.
‘과연 살아 있었군.’
반가움과 허탈감이 동시에 밀려들었다.
허무극은 마지막으로 고개를 돌려 남쪽 언덕 위를 보았다.
류여중이 있는 곳이었다.
이 모든 계획을 세운 인물.
그래도 혈사련이 이만큼 온 것은 모두 그의 덕이라고 할 수 있었다.
마침 류여중은 자리에서 일어나 허무극을 향해 절을 올리고 있었다.
패배에 대한 석고대죄의 의미다.
하나 허무극은 알고 있었다.
총군사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오늘 일어난 전쟁의 과정과 결과는 희대의 천재라는 구윤 조차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짐작이나마 했던 자라면…
‘사비강, 저자뿐이겠군.’
이제 사비강은 언덕 바로 아래까지 다다라 있었다.
여전히 일백이 넘는 무인들이 그 앞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사비강의 목소리가 울려 왔다.
[이제 그만 직접 나서는 게 어떤가?]
어기전성.
전음이 목소리를 기에 실어 전달하는 것이라면, 어기전성은 기 자체를 진동시켜 소리를 전달하는 수법이었다.
즉, 기를 다스림에 있어서 훨씬 고차원적인 수법이라고 볼 수 있었다.
허무극이 피식 웃더니 흑효를 돌아보았다.
“흑효.”
“예, 련주님!”
흑효가 다부진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는 마지막까지 주군의 곁에서 목숨을 다해 싸우리라는 다짐을 하고 있었다.
그 뜻을 알아주기라도 한 듯 허무극이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자네의 충성심은 죽어도 잊지 않겠네.”
“그런 말씀은 마십… 컥!”
흑효는 말을 마저 잇지 못했다.
갑자기 전신에 강렬한 뇌전이 흘러 들어온 것이다.
그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온몸을 부르르 떨면서 경련을 일으켰다.
동시에 그의 몸이 거무죽죽하게 타들어가더니 점점 몸이 비틀리면서 피골이 상접해 갔다.
반대로 그의 어깨를 붙든 허무극의 손등은 핏대가 불거져 나와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았다.
흑효가 가진 내공을 모조리 빨아들이는 중이었다.
뇌전흡살공!
마지막 순간 믿었던 주인의 밥그릇 신세가 된 흑효는 두 눈을 부릅뜬 채로 마른 고목처럼 쓰러지고 말았다.
털썩!
“스으읍, 하아아!”
허무극이 체내에 흡수한 진기를 일주천하면서 완전히 체화했다.
한편, 이 과정을 지켜본 수하들이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련주를 위해 목숨을 걸었다지만 저런 식으로 이용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허무극이 양손을 활짝 펼쳐드는 순간,
“헉!”
“우아악!”
주변의 무인들이 자석에 달라붙는 쇳덩이처럼 허무극의 손으로 날아드는 것이 아닌가?
꽈지지직!
“크아악!”
파지짓!
“아악!”
무인들이 저마다 비명을 지르며 마른 고목이 되어 쓰러져 갔다.
허무극은 그렇게 거침없이 수하들의 진기를 흡수해 갔다.
마침내 근처에 있던 모든 수하들의 진기를 흡수한 허무극은 거뭇한 기운을 풀풀 풍기며 호흡을 골랐다.
“스으으읍, 하아아아!”
그의 전신에서 묘한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우러나왔다.
뇌전흡살공을 연이어 사용한 덕에 그의 상의는 이미 새카맣게 타들어가 버렸고, 대신 더욱 크고 탄탄해진 근육질 신체가 드러났다.
그때쯤 사비강도 십여 장을 남겨 두고 허무극 앞에 다다랐다.
사비강이 피식 웃었다.
“오늘은 어째 동족을 잡아먹는 괴물을 많이 보는군.”
“사비강… 본좌가 널 과소평가했구나.”
“그래서 이젠 조금 존경심이 들어?”
“여전히 실없는 소리를 해대는군.”
“그게 내 매력이거든.”
허무극은 피식 웃어 버리더니 천천히 검을 뽑아 들었다.
그의 전신이 시커멓게 변하는가 싶더니, 이내 몸이 크게 부풀면서 강렬한 기풍이 사방으로 불어 나갔다.
후우우우웅!
그 숨 막힐 듯한 기운 때문인지 겨울바람에도 버텼던 초목들이 시들시들 시들어 갔다.
허무극이 뽑아 든 검에 거뭇한 강기가 맺혀 갔다.
그가 하얀 입김을 날리며 말을 뱉었다.
“긴 싸움이 되겠군.”
“그건 네 생각이고.”
사비강은 검을 뽑지도 않은 채 어깨를 으쓱였다.
허무극은 도발당하지 않았다.
상대가 방심한 것이라면 굳이 주의를 줄 생각도 없었다.
그렇다고 두렵지도 않았다.
지금 그는 자신에게 가장 충성스러웠던 수하인 흑효의 기운까지 남김없이 빨아들인 상태였다.
어디 그뿐인가?
자신을 호위하던 무사들과 사비강을 막아섰던 수십 명의 무인들까지 모두 죽여 가며 그 기운을 흡수했다.
즉, 허무극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해진 상태였다.
“본좌의 검을 받아라!”
허무극이 일갈을 터뜨리며 바닥을 차고 나갔다.
선공을 양보할 이유는 없었다.
사비강에 대한 충분한 경계심이 있었기에.
그런데…
푸욱!
“컥…?”
허무극은 두 눈을 부릅뜬 채 사비강을 보았다.
믿을 수가 없었다.
언제 어떻게 당한 것인지도 파악되지 않았다.
분명 사비강을 향해 달려 나가면서 검을 내질렀는데….
자신의 검은 허공을 찌르고 있었고, 반대로 코앞에 나타난 사비강의 검은 자신의 명치를 깊숙이 파고들었다.
사비강의 입김이 닿았다.
“말했잖아. 그건 네 생각이라고. 겪어 보니 긴 싸움은 별로 재미없더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