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7
귀환 마교관
347화
서화평원의 지평선 끝까지 지옥도가 펼쳐졌다.
비명과 고함소리, 혈향과 살기, 분노와 증오, 절망과 오열이 어지럽게 뒤섞였다.
그 광활하고도 참혹한 공간에서 검을 쥐고 휘두르는 자들은 하나 같이 살기를 드러내며 분노를 쏟아냈고, 상처를 입은 채 죽어 가는 자들은 오열하며 절망했다.
광활한 서화평원은 지금 살아 있음을 가장 실감할 수 있는 공간인 동시에 점점 죽음의 늪으로 변해 가는 대지이기도 했다.
사마연맹과 정도맹의 사활을 건 전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치열했다.
생에 대한 집착과 살육에 대한 광기가 혼재하면서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처음에는 정도맹의 기세가 대단했다.
사마연맹은 은휘가 이끌던 무인들을 격파하고 나서 사기가 오른 상태였다.
하지만 그들의 사기보다 정도맹의 분노가 더욱 컸다.
때문에 그들은 죽음을 불사하고 거침없는 기세로 몰아쳐 갔다.
정의를 실현하겠다는 그 일념이 정도맹 전체의 분위기를 한껏 끌어올리고 있었다.
분노에 찬 정의는 매서운 칼바람을 불러왔다.
치솟을 대로 치솟았던 사마연맹의 사기도 수천 명에 이르는 정도맹 무인들의 의협심 앞에서는 소용이 없었다.
사마연맹에서 사상자가 속출하기 시작했고, 전세(戰勢)는 정도맹의 승리로 기우는가 싶었다.
사실, 전세가 이러한 형국이 된 데에는 백호당주 추희룡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는 것도 한몫했다.
허무극의 몰락을 바라는 그로서는 이 전투에서 사활을 걸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아니, 그는 다른 의미에서 사활을 걸고 있었다.
하지만 두 시진이 지났을 때, 전세에 변화가 찾아왔다.
혈사련에서 후방으로 빠져 있던 독고진이 살혼단(殺魂團)을 이끌고 전방으로 치고 나온 것이다.
살혼단은 오늘 같은 날을 대비해서 혈사련이 별도로 훈련시켜 두었던 조직이었다.
천상궁을 비롯해 분타 등에서 대규모 전투에 적합한 인재들을 끌어 모아 구성한 조직으로, 모두 일천 명이나 됐다.
그들이 기세를 끌어올리면서 휘몰아치기 시작하니 혈사련 무인들의 사기가 급격히 치솟았다.
한편, 정도맹에서는 이번 전쟁을 대비해서 무인들을 모두 다섯 개의 조직으로 분류했는데, 그 중 정협단(正俠團)과 의협단(義俠團)이 최선봉을 맞고 있었다.
혈사련에서 기세를 끌어올려 무시무시한 살공을 펼쳐오자, 정협단과 의협단이 가장 먼저 당황하기 시작했다.
온통 시커먼 옷으로 두른 살혼단은 그야말로 저승사자 같았다.
분위기가 조금씩 반전되자, 마령교에서도 마병들을 새로 투입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섬마병(閃魔兵)’이라 불렸는데, 기존의 마병들과는 그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명칭만큼이나 굉장히 빠른 것이 특징이었는데, 그 움직임이 얼마나 신속한지 잔상이 남을 정도였다.
상황이 불리해지자 정도맹주 능운파가 달려드는 섬마병의 무리 속에 뛰어들었다.
그는 섬마병들을 훑어보고는 눈을 가늘게 떴다.
“흥! 잔수를 쓰는구나!”
그가 노호성을 터뜨리더니 그대로 검을 휘둘렀다.
쉭! 쉭! 쉭!
매우 단순한 행동이었다.
어찌 보면 그저 검 자루를 들고 무의미하게 휘둘러댄 것처럼 보일 정도로.
하지만 그 순간 능운파의 눈앞에 펼쳐진 세상은 검로를 따라 절단되었다.
산과 하늘이 갈라졌고, 땅과 바람이 절단됐다.
마치 공간에 빗금이 생기더니 쩍 갈라지는 것처럼.
곧이어 그를 향해 달려들던 섬마병들이 일제히 몸이 절단되면서 피를 뿌리며 쓰러져 갔다.
능운파가 소리쳤다.
“놈들의 속임수에 속지 마라! 이 녀석들은 실제로 빠른 것이 아니라 그렇게 보일 뿐이다!”
능운파의 말은 정확했다.
섬마병은 실제로 빠른 것이 아니었다.
다만 그들의 독특한 보법 때문에 잔상이 남았고, 그 때문에 유달리 빨라 보이는 것일 뿐이었다.
맹주의 기세에 힘을 얻은 정도맹 무인들이 다시 사기를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마령교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이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던 녹면인은 비릿한 웃음을 짓더니 옆에 있는 수하에게 명했다.
“폭마병(爆魔兵)을 투입해라.”
“존명!”
수하가 대답과 동시에 어디론가 향했다.
녹면인이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전세를 살폈다.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
콰콰아앙! 쾅! 꽈앙!
여기저기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크아아악!”
“피, 피해랏! 아악!”
비명도 터져 나왔다.
이제 전세는 완벽하게 사마연맹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서화평원은 시산혈해를 이루었다.
쉬이잇! 서컥! 쉬이이잇! 퍽!
능운파는 그야말로 전신(戰神)처럼 싸웠다.
그의 검로가 스쳐 지나간 자리에는 어김없이 비명과 죽음이 남겨졌다.
깨끗했던 장삼은 이제 온통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의 검로는 언제나 단정하고 깔끔했다.
그의 곁에서 싸우는 자들은 능운파의 검무를 넋 놓고 보다가 화를 입을 정도였다.
과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는 검술.
흥분과 분노가 가득 찬 전장에서는 모든 것이 지나치기 마련인데, 그의 검은 절제를 담고 있었다.
심지어 그는 살의마저 절제하고 있었다.
눈빛이 분노로 이글거리면서도 살기는 과하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그의 검에는 ‘심판’이라는 성격이 강했다.
하지만 그 역시 전황이 심각하게 기울고 있다는 것은 진작 눈치 채고 있었다.
현재 정도맹의 정협단과 의협단은 거의 전멸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그리고 뒤를 받치고 있는 천협단(天俠團)과 지협단(地俠團), 인협단(人俠團) 역시 오 할 이상의 피해를 입은 상황.
이대로 변화가 생기지 않는다면 정도맹은 이번 전쟁에서 크게 패할 것이 분명했다.
‘난감하군.’
능운파가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죽어 가는 정도맹 무인들을 바라보았다.
마령교에서 투입한 폭마병.
그들을 막아낼 방법이 마땅히 없었다.
폭마병은 소위 자폭단이나 다름없었다.
녀석들은 무조건 적진 복판으로 달려들어 제 한 몸을 아끼지 않고 폭발했다.
한데 문제는 그 순간 마령교에서 펼치는 진법이 굉장히 난해하다는 점이었다.
얼핏 듣기로 ‘표접마환진’이라던가?
그 이름처럼이나 마령교도들은 무당벌레의 무늬 형상처럼 퍼졌다가, 다시 나비 떼처럼 날아들며 정도맹 무인들을 교란시키고 압박해 왔다.
그 진법에서 어지간히 벗어나기가 힘들어지니, 폭마병의 피해가 더욱 심각해진 것이다.
꽈아앙! 콰쾅!
“크아아악!”
“흐아악!”
마침 멀지 않은 곳에서 또 하나의 폭마병이 자폭을 하면서 비명이 솟구쳐 올라왔다.
물론 비명과 함께 죽음의 강을 건넌 사람은 정도맹 무인들이었다.
능운파가 입술을 꾹 씹고는 저만치 언덕 위를 바라보았다.
“아직인가? 군사…!”
저곳 언덕 위에서는 총군사 구윤이 이 전쟁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터였다.
만약 그가 표접마환진을 간파하고 그 대처법을 찾아냈다면 지금쯤 기별이 있었으리라.
하지만 아무런 소식이 없다.
희대의 천재라는 구윤조차도 파훼하지 못할 정도의 진법을 구사하다니.
도대체 마령교에는 어떤 인물이 있단 말인가?
복잡한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마침 폭마병 하나가 괴성을 지르면서 달려왔다.
“쿠와아아아!”
“어딜!”
능운파가 일갈하며 들고 있던 검을 횡으로 크게 휘둘렀다.
쒸아아아앙!
이번에는 앞서 보였던 검술과 달랐다.
섬마병을 상대할 때는 모든 것을 잘라내는 검술이었다면, 이번에 그가 보인 것은 광풍을 일으켜 모든 것을 날려버리는 검술이었다.
“쿠우우우욱!”
괴성과 함께 날아간 녀석은 그대로 적진 복판에 떨어지면서 온몸이 터져 나갔다.
꽈아앙!
“크아악!”
“아악!”
마령교도들의 비명이 솟구쳐 올라왔다.
그때,
삐이이이익!
언덕 위에서 신호탄이 솟구쳐 올라왔다.
‘드디어 해법을 찾은…!’
반색하며 돌아보던 능운파의 표정이 확 어두워졌다.
해법을 찾았다는 신호가 아니었다.
퇴각 신호.
‘설마 마물이…?’
능운파가 눈살을 찌푸리고는 서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순간 그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맙소사. 저건 대체…?”
인간의 뇌를 닮은 거대한 몸체가 허공에 떠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허공에 뜬 게 아니라, 몸체를 받치고 있는 수십 가닥의 촉수들 때문에 뜬 것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이는 일전에 마령교가 ‘천신교’라는 가명으로 활동할 때 소환했던 바올드였지만, 맹주인 능운파는 생전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렇군. 저것이 사비강 전 국주가 말한 마물인가…!’
보기만 해도 기가 질릴 정도로 징그럽고 추악한 마물이었다.
한데 문제는 한 마리가 아니라는 점이다.
대략 눈대중으로 보아도 스무 마리는 넘어 보였다.
“흐익! 저, 저게 뭐야?”
“우아악! 촉수다!”
그렇잖아도 사기가 꺾여 가던 정도맹 무인들은 눈앞에 나타난 바올드를 보고 기겁을 하며 물러갔다.
하지만 최전방에서 싸우던 정협단과 의협단 무인들 다수는 날아드는 촉수를 상대하지 못해 순식간에 당하기 일쑤였다.
어떤 이는 촉수에 휘어 감겨 바올드의 입 안으로 삼켜졌고, 또 어떤 이는 날카로운 촉수에 몸이 꿰뚫려 목숨을 잃었다.
그야말로 현실이라 자각하기에는 너무나 무시무시한 광경.
그러다 보니 정도맹 무인들이 느끼는 것은 분노도, 절망도 아닌 공포 그 자체였다.
능운파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는 커다란 주먹을 말아 쥐었다.
물론, 군사의 신호탄은 절대적인 명령이 아니다.
모든 명령은 정도맹주인 자신의 입에서 떨어지는 것이다.
단지 구윤은 제안을 할 뿐이다.
마물이 나타났으니 무리하지 말라고.
승산이 희박하니 더 큰 피해를 입기 전에 퇴각하는 것이 좋겠다고.
‘방법이 없는 것인가?’
당연한 말이겠지만, 지금 퇴각을 하게 된다면 정도맹은 사기가 급격히 꺾이고 말 것이다.
하지만 저 무시무시한 바올드와 적들의 무자비한 공격을 이대로 감당하기도 힘들다.
벌써 전력 손실이 상당했다.
게다가 바올드는 능운파가 보기에도 기가 질릴 정도로 강하고 무자비했다.
“크아아악!”
“흐익! 살, 살려줘엇!”
정의를 부르짖던 정도맹 무인들은 이제 삶에 대한 집착만 남아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마침 능운파의 호신위들이 곁에 떨어져 내리며 소리쳤다.
“맹주님! 피하셔야 합니다!”
“더 이상 승산이 없습니다! 이대로는 전멸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맹주님!”
능운파의 뺨이 파르르 떨렸다.
괘씸하고 분했다.
지금 눈앞에 절대적인 악이 설치고 있음에도 맞서 싸울 수 없다는 현실이 못내 분했다.
하지만 호신위들의 말이 맞았다.
더 이상은 의미 없는 싸움이리라.
이대로는 희생만 늘어날 뿐이다.
게다가 사비강이 말하지 않았던가?
처음 보는 마물이 나타나면 당장 퇴각령을 내리라고.
그때까지만 해도 실감하지 못했건만.
정말로 저런 것들이 나올 줄이야!
‘사비강, 자넨 대체 누군가?’
저 멀리 언덕을 올려다보던 맹주의 입이 마침내 열렸다.
“퇴각하라.”
전장에는 어울리지 않는 나직한 목소리.
하지만 공력이 담긴 그 목소리는 정도맹 무인들의 귀에 또렷하게 들렸다.
이윽고 단주와 대주들이 목청껏 외치기 시작했다.
“퇴각하라!”
“물러나라! 후퇴다!”
정도맹 무인들이 서둘러 몸을 빼내기 시작했다.
사실 그들로서는 기다렸던 명령이기도 했다.
이제야 유일한 생로를 찾은 것이니.
한데…
두두두두…!
달아나던 무인들이 멈칫거리고는 주변을 살폈다.
갑자기 땅이 흔들리면서 저만치 퇴로에 무언가가 불쑥 솟구쳐 오르는 게 아닌가?
“헛!”
“저, 저건… 마병!”
놀랍게도 땅을 뚫고 솟구친 것은 마병이었다.
손가락마다 칼날이 달린 녀석은 바로 땅을 파고 이동하는 특기를 가진 굴마병(掘魔兵)이었고, 그 뒤를 따라 올라온 녀석들은 앞서 달려들던 폭마병과 새로 나타난 거마병(巨魔兵)이었다.
거마병은 덩치가 집채만 했는데, 웬만한 어른의 세 배 정도 되는 키였다.
그렇게 땅속에서 솟구친 굴마병과 폭마병, 거마병들이 정도맹 무인들을 거침없이 덮쳐 갔다.
그야말로 진퇴양난!
겨우 생로를 찾았다고 생각한 정도맹 무인들이 속절없이 죽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