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6
귀환 마교관
346화
“뭐라고 했느냐?”
황면인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아이를 보았다.
목검을 휘두르던 아이는 수줍은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리며 웃어넘겼다.
“헤헤…”
아이가 뒤통수를 긁적였다.
이제 다섯 살이 된 아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단단한 굳은살이 그 작은 손에 박혀 있었다.
황면인이 미간을 좁히고는 버럭 소리쳤다.
“뭐라고 했는지 묻지 않느냐!”
아이가 겁을 먹은 표정으로 황면인을 보았다.
“어… 엄마…라고…”
“누가 네 어미란 말이냐?”
“죄, 죄송해요….”
쉬이이이잇, 짜악!
황면인이 휘두른 목검이 사정없이 날아가 아이의 등짝을 후려쳤다.
“아아악!”
아이가 비명을 지르며 개구리처럼 파닥거렸다.
등이 찢어져서 터진 것만 같았다.
고통에 겨워하는 아이를 차갑게 바라보던 황면인이 냉엄한 표정으로 일렀다.
“주둥이를 함부로 놀리지 마라. 너는 내 자식이 아니다.”
말을 마친 황면인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날 밤, 그녀는 홀로 나뭇가지 위에 걸터앉아 별을 보았다.
가슴에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는 기분이었다.
공교로운 날이다.
아이의 조부모가 병을 얻어 죽었다는 소식을 오늘 들었는데….
‘나더러 엄마라니….’
코웃음이 나왔다.
눈물도 흘렀다.
오늘이야말로 완벽한 심판이 이루어진 날인데, 어째서 자신의 가슴은 이리도 찢어진단 말인가?
오늘 자신을 엄마라고 부르던 아이의 모습에서 오래 전 잃어버린 아이의 얼굴이 겹쳤다.
‘멍청한 놈! 제 부모를 죽인 년을 어미라 부르다니!’
콰득!
황면인이 앉아 있던 자리를 힘주어 움켜잡자, 나뭇가지가 산산이 부서졌다.
바닥으로 떨어진 그녀가 사뿐히 착지하고서는 아이가 머무는 방으로 걸어갔다.
침상에는 아이가 엎어져서 자고 있었다.
창틈으로 스며든 달빛이 아이의 등에 새겨진 상처를 비추었다.
황면인이 메마른 음성을 툭 내뱉었다.
“일어나라.”
아이는 말없이 일어나 앉았다.
잠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아직도 울고 있느냐?”
“…….”
“못난 놈.”
“왜 화가 난 건지 모르겠어요.”
황면인이 흠칫 떨고는 아이를 보았다.
아이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슬퍼보였다.
황면인이 심호흡을 하고는 나직이 일렀다.
“나는 네 어미가 아니다.”
“그럼요? 누구예요?”
“네가 어렸을 때의 일이라 기억을 못하는 모양이구나.”
“…….”
“나는 네 부모를 죽인 원수다. 그러니 다시는 나를 그리 부르지 마라.”
“…거짓말이잖아요.”
“뭐라고?”
“그런 사람이 왜 나를 키워 주겠어요? 왜 나한테 밥 많이 먹으라고 하겠어요? 왜 내가 다치면 걱정하는 거예요?”
“맹랑한…”
“엄마라고 부르는 게 싫으면 안 불러요. 하지만 그 말도 믿지 않을래요.”
“너는 정말 멍청하고 못난 놈이구나. 네 마음대로 해라. 하지만 그건 진실이다. 언젠간 너도 알게 될 테지.”
말을 마친 황면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는 방을 나가 버렸다.
**
“너는… 그날 내 말을 믿었을까? 아니면… 애써 믿지 않았을까?”
휘이이잉.
봉분에 기댄 황면인에게 또 다시 차가운 겨울바람이 불어 왔다.
한 가지는 분명했다.
그날 이후로 아이는 입이 무거워졌다.
속내를 이야기하는 일이 훨씬 줄어들었고, 언제부턴가 자신을 대하는 행동이 시종 쌀쌀해졌다.
황면인이 툴툴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품에서 술병을 꺼내 들고는 봉분 위에 콸콸 부었다.
“못난 놈. 이런 식으로 나를 심판할 줄은 몰랐다. 그래, 이건 복수가 아니라 네놈의 심판이었구나.”
주름진 그녀의 눈가에 굵은 눈물 줄기가 흘러내렸다.
술병을 모두 비운 그녀가 돌아섰다.
“심판을 받았으니, 이제 내가 복수를 할 차례구나.”
후우우우웅!
그녀의 주위로 그 어느 때보다도 매섭고 시린 바람이 휘몰아쳤다.
**
푸콰악!
길이가 무려 십여 장은 될 법한 굵은 대나무가 땅바닥 깊숙이 처박혔다.
사마연맹의 진영 한쪽에 대나무를 박아 넣은 자는 바로 녹면인이었다.
어찌나 깊이 박힌 것인지 기다란 대나무는 바람에 따라 휘청거리면서도 한쪽으로 기울거나 쓰러지진 않았다.
파바밧!
녹면인이 경공을 펼치면서 대나무를 타고 솟구쳐 올랐다.
마침내 대나무 끝에 다다른 녹면인이 팔짱을 끼고는 꼿꼿하게 섰다.
휘청… 휘청…
대나무 위에 선 녹면인은 굵은 줄기와 일체된 것처럼 바람 따라 이리저리 흔들렸다.
“흐음…”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는 저만치 정도맹 쪽 진영을 바라보았다.
이곳은 재령산에서 북서쪽으로 이틀 정도 거리에 있는 서화(西花) 평원이었다.
아마 내일이면 이 넓고 고요한 평원에 시체들이 즐비하리라.
“과연 정도맹 세력은 만만치가 않군.”
녹면인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이미 정도맹에서 파견한 상당수의 무인들이 재령산에서 전멸당한 터였다.
정도맹의 이인자였던 은휘 역시 그 환란에 휩쓸려 목숨을 잃지 않았던가?
한데도 지금 저만치 눈에 보이는 적의 수는 만만치가 않았다.
어쩌면 일부러 세를 과시하기 위해서 더욱 많은 불을 피우고 있는지도 몰랐다.
어쨌거나 정도맹은 쉽게 생각할 수는 없다.
더구나 저곳에는 정도맹주가 직접 와 있으리라.
녹면인이 대나무 위에서 훌쩍 뛰어내리고는 막사로 돌아갔다.
마침 막사에는 황면인이 들어와 있었다.
잠깐 멈칫거렸던 녹면인이 피식 조소를 지으며 물었다.
“어찌 혼자 계시오?”
“적면이 죽었다.”
황면인의 말에 녹면인도 이번만큼은 놀랐는지 흠칫거렸다.
그가 침음을 흘리고는 한쪽에 마련된 의자로 걸어가 앉았다.
“적면이… 어쩌다가…?”
“사비강에게 당했다.”
“사비강이라….”
또 사비강인가?
도대체 그 사비강이라는 작자가 뭐기에!
정도맹에 몸을 담고 있는 동안, 사비강에 대한 정보는 많이 들었다.
하지만 그리 신경 쓰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가 신경 쓴 사람은 사비강을 중용한 총군사 구윤이었다.
칼자루는 무섭지 않다.
다만 그 칼자루를 쥐고 휘두르는 자가 무서울 뿐.
그런 이유로 녹면인도 구윤을 더욱 경계했다.
때문에 자신의 정체와 계획이 발각되지 않는 것에 모든 신경을 곤두세웠다.
한데 시간이 흐를수록 그에게 자꾸 들려오는 이름은 구윤이 아니라 사비강이다.
이쯤 되면 단순한 칼자루는 아니란 뜻인가?
녹면인의 표정이 차갑게 식었다.
“하면 마병들은? 설마 적마단과 마병 모두 전멸당한 건 아닐 테지.”
“모두 당했다.”
황면인이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녹면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런 말도 안 되는!”
그는 진심으로 화가 난 상태였다.
적면인을 애도하는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오히려 죽은 자를 살려내서라도 따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게 잘난 듯이 마무리를 맡기더니, 고작 선천마령지체 하나를 확보하지 못해서 마병들과 적마단이 전멸 당했다고? 어찌 이리 멍청할 수가!”
“입 조심해라.”
“흥! 만약 적면이 살아 있었더라면, 그 죄를 물어 죽여도 마땅할 거요!”
후우우우웅!
순간 막사 안에 숨막힐 듯한 마기가 폭발하듯 일어났다.
그제야 녹면인이 분을 가라앉히면서 황면인을 물끄러미 보았다.
황면인이 그 시선을 마주하며 말했다.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사비강을 직접 만나보았다.”
“그래서?”
“그는 강하다.”
“물론 강하겠지. 하지만 적면에게는 적마단과 마병들이….”
“그것들로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그에게 백초지적도 되지 않을 만큼.”
“……!”
이쯤 되자 녹면인도 더 이상 따지지는 못했다.
황면인은 자존심이 강한 자다.
절대로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 자다.
한데 그런 그녀가 자신이 당해낼 수 없다고 순순히 인정했다.
황면인이 상대의 기도를 파악하는 능력 하나는 알아줘야 한다.
그녀가 저렇게까지 말한다면 틀림없는 사실이리라.
황면인이 말을 끊지 않고 이어 갔다.
“만약 이 전투에서 이변이 일어나게 된다면 그건 모두 그자 때문일 것이다.”
“크음. 그자가 그렇게 대단한 존재라면 어떻게 막아야겠소? 방법은 있는 거요?”
물론 이쪽에서도 만반의 준비를 해두었다.
마령교가 생각하는 가장 좋은 결과는 이곳 서화평원 전투에서 혈사련과 정도맹이 모두 전멸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게 어렵다면 정도맹이라도 정리해야 한다.
자신들이 준비한 것들을 이용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황면인은 그조차도 장담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사비강이 그렇게 대단한 존재라는 건가?’
믿기 힘들었지만, 황면인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했다.
황면인의 입이 무겁게 열렸다.
“백면을 찾아갈 생각이다.”
녹면인이 잠깐 고개를 갸웃거렸다.
황면인의 말뜻을 잘 알아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잠시 후 그는 그 뜻을 눈치 채고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설마 그럼… 수라불괴….”
“그래. 나는 수라불괴가 되려고 한다.”
녹면인이 입을 척 벌리고 말을 잇지 못했다.
황면인 정도면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을 터.
입을 다물지 못하는 녹면인을 힐끔 본 황면인이 걸음을 돌리며 말했다.
“이것이 내가 가야 할 길이다. 녀석이 그 옛날 나를 바라보던 그 눈빛에 대한 대답이지.”
“대체 무슨 말을….”
“아무튼 그리 알아라. 그리고 존야께 아뢰어라. 나와 적면은 할 수 있는 걸 다 했노라고.”
황면인이 막사 밖으로 걸어 나갔다.
**
다음날.
동이 틀 무렵.
드넓은 서화평원은 쥐죽은 듯 고요했다.
하지만 그 고요함은 금방이라도 깨질 것처럼 팽팽한 긴장감을 품고 있었다.
정도맹을 상징하는 깃발이 북서쪽에 자리 잡았고, 혈사련과 마령교를 상징하는 깃발이 남동쪽에 자리 잡았다.
정사마의 기운이 평원의 허공에 뒤섞이면서 광풍으로 돌변했다.
휘이이이이잉!
투지와 살기, 분노와 공포가 복잡하게 뒤섞인 탁한 공기.
정도맹주 능운파 맞은편에 진을 친 사마연맹의 무인들을 바라보면서 가늘고 긴 숨을 내쉬었다.
그가 곁에 선 사비강에게 말했다.
“자네가 이번에도 나를 크게 돕는군.”
“제 부족함으로 많은 무인들을 잃었습니다.”
사비강이 그답지 않게 진중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하지만 능운파는 고개를 저었다.
“내 부족함일세. 내게 할 말은 그 외에는 없는가?”
“예. 하지만 그것만은 명심하셔야 합니다. 만약 맹주께서 지금껏 보지 못했던….”
“마물을 보게 되면 곧바로 퇴각령을 내리란 뜻이겠지?”
“그렇습니다.”
“어젯밤 날이 새도록 자네 이야기를 들었지만, 아직도 쉬이 믿어지지가 않는군.”
“이해합니다. 하지만 때가 되면 자연히 믿을 수밖에 없을 겁니다.”
능운파는 가만히 수염을 쓸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이번에도 자네에게 걸어 보지.”
사비강이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슬쩍 물러났다.
이번 싸움에서 그는 처음부터 나서지 않기로 했다.
정도맹 수뇌부 회의를 통해서 정한 사안이었다.
이런 시기에는 사비강보다 맹주의 활약이 중요하며, 그로 인해 정도맹 무인들의 사기를 끌어올릴 수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하지만 수뇌부의 진짜 속내는 사비강의 인지도가 점점 상승하는 것을 견제하려는 목적이었다.
‘뭐, 나로선 고마울 일이지.’
어차피 처음부터 나서봐야 좋을 것은 없다.
저들이 바올드를 소환하고 식태마까지 이용해서 마병을 만들 정도라면, 그보다 더한 마물도 소환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때까지는 최대한 힘을 아껴 두는 것이 좋으리라.
한편, 정도맹주는 진열 앞으로 저벅저벅 걸어 나가더니 정도맹 무인들을 돌아보았다.
잠깐의 침묵이 이어지는 동안 주변은 더욱 고요하게 잠겨 들었다.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긴 말은 하지 않겠다. 저들은 신의를 저버렸고, 정의를 짓밟았으며, 천륜과 인륜을 더럽힌 자들이다. 오늘은 저들을 심판하는 날이다.”
나직했지만 공력이 담긴 그 목소리는 무인들 한 명 한 명의 귀에 또렷이 박혀 들었다.
내력의 자극을 받은 정도맹 무인들은 저마다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이윽고 능운파가 그 어느 때보다 힘주어 일갈했다.
“본맹은 오늘 악을 처단한다!”
“우와아아아아!”
천지를 격동시킬 만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