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1
귀환 마교관
341화
타다닷!
일단의 무리가 숲속을 가로지르며 빠르게 내달렸다.
쉬잇. 쉬이이잇!
그리고 그 뒤를 바짝 쫓는 무인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먼저 달려간 무리 중 세 명의 무인들이 돌아서며 소리쳤다.
“당주님! 먼저 가십시오! 저지하겠습니다!”
청풍당주 은휘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는 그들을 돌아보았다.
‘미안하구나!’
마음 같아서는 당장 저들과 함께 싸우고 싶었지만, 지금은 이성적으로 판단할 때였다.
그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콱 깨물었다.
많은 것들이 틀어졌다.
혈사련의 배신을 예상하고도 참패를 당했다.
‘어째서…! 어째서 오지 않은 거지?’
전령의 말대로라면 지금쯤 의파 지단과 낙성 지단이 도착하고도 남았어야 할 시간이다.
물론, 그들이 도착한다고 해도 마령교의 마병들 때문에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처참하게 무너지진 않았으리라.
‘의파 지단과 낙성 지단에 문제가 생긴 건 분명하다. 생각보다 이들의 암계가 깊었어!’
방심했다.
방심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은연중에 자신도 혈사련과 마령교를 무시한 것이리라.
‘맹주님을 어찌 볼꼬….’
한숨이 절로 나왔다.
정도맹 무인들을 대다수 잃었으니, 살아남아도 고개를 들 낯이 없다.
그때, 앞서 달려가던 수하가 소리쳤다.
“당주님, 이쪽입니다!”
무리 중에서 경공이 가장 뛰어난 자였다.
청풍당에서 정찰 임무를 맡는 투신대(透迅隊)의 대주, 소비광(小飛光).
은휘는 그의 뒤를 따르면서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이대로는 벗어나기 어렵다.’
적을 막아서겠다면서 남았던 세 명은 벌써 명을 달리한 것인지 추격하는 적들이 더욱 가까워졌다.
그가 결심을 굳히고는 소비광의 등을 보며 말했다.
“저지하겠다. 반드시 살아서 맹주님께 모든 사실을 고하라.”
“당주님!”
앞서 달리던 소비광이 깜짝 놀라서 돌아보았다.
하지만 은휘는 이미 각오를 완전히 다진 상황이었다.
“멈추지 말고 곧장 나아가라!”
“당주님, 안 됩니다! 차라리 제가…!”
“자네는 막지 못해!”
“……!”
소비광은 더 이상 말해 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 은휘는 완전히 결심을 굳힌 표정이었기에.
자신의 주인은 한 번 결정한 일을 결코 번복한 적이 없었다.
“명… 받들겠습니다.”
소비광이 어렵게 대답하자, 은휘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바닥에 미끄러지듯 멈춰 섰다.
“이놈들! 노부가 상대해 주마!”
그가 사자후를 터뜨리자 숲이 쩌렁쩌렁 울리면서 어디선가 새들이 푸드덕 날아올랐다.
소비광은 경공을 멈추지 않은 채 내달렸다.
‘반드시 무사하셔야 합니다!’
한편 은휘는 뒤를 바짝 추격하던 무인 셋을 향해 몸을 던졌다.
쉬이이이잇! 쉬잇!
섬광이 번쩍이면서 그의 특기인 선풍폭검이 시전되었다.
퍼퍼퍼펑!
“크아악!”
“아악!”
혈사련 소속으로 보이는 무인들이 몸을 뒤집으며 쓰러져 나갔다.
하지만 문제는…
‘저놈들이군.’
바로 뒤를 이어 달려오는 무리들.
웬만한 성인의 두 배 정도 되는 덩치에 어딘가에 홀린 것처럼 초점 없는 눈동자.
바로 마령교에서 투입한 마병들이었다.
슉! 슈슈슈슉! 슉!
곧 마병들이 은휘를 둘러싸며 완전히 포위했다.
녀석들은 은휘가 평범한 무인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한 것인지 진득한 마기에 살기를 잔뜩 섞어서 뿜어냈다.
은휘가 가늘게 눈을 뜨고는 서서히 내공을 끌어올렸다.
구오오오오!
공기가 떨리면서 은휘의 장삼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마병들이 뿜어대는 마기와 달리 어딘지 맑고 선선한 기풍이 사방으로 뻗쳐 나갔다.
그러다 보니 마기 역시 자연히 희석되었다.
다음 순간,
“쿠와아아아!”
“크어어어!”
마병들이 일제히 포효를 터뜨리며 은휘를 향해 몸을 던져 왔다.
동시에 은휘가 몸을 회전하며 바닥을 차고 솟구쳐 올랐다.
“뒈져라! 잡것들!”
휘리리리리리릭!
청풍검법의 초식 중에서도 가장 많은 내공을 소모하게 되는 절초, 선풍열살검(旋風裂殺劍)이었다.
새하얀 빛줄기가 돌풍처럼 회오리치며 솟구쳐 오르자, 팔방에서 동시에 달려들던 마병들이 비명을 터뜨리며 온몸이 찢어져 나갔다.
촤촤촤촤촤아악!
섬뜩한 파육음에 이어 혈육이 비산했다.
휘리릭, 탁!
몸을 회전하며 바닥에 착지한 은휘는 잠깐 휘청거렸지만, 곧 중심을 잡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대략 스무 명 정도 되는 마병들이 온몸이 갈가리 찢어진 채 고깃덩이가 되어 널브러져 있었다.
“스으읍, 후우우!”
은휘는 깊게 심호흡을 했다.
이번 일격으로 내공을 크게 소진했지만, 소비광이 달아나는데 꽤나 시간을 번 셈이었다.
그때,
짝짝짝.
느닷없이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은휘가 미간을 좁히고는 고개를 들자, 나뭇가지 위에 한 남자가 도도한 자태로 서 있었다.
‘어느 틈에…?’
초절정의 영역에 오른 은휘였다.
정도맹에서는 맹주 다음으로 막강한 무공을 자랑하는 그였다.
한데 이렇게 가까이 다가올 동안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다니.
나뭇가지 위에 있던 상대는 허공답보를 펼치며 천천히 아래로 내려왔다.
마치 허공에 계단이라도 보이는 것처럼.
그 광경만으로도 상대의 내공이 얼마나 심후한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누구신가?”
은휘가 최대한 호흡을 정리하며 물었다.
상대가 주변을 휘 둘러보고는 대꾸했다.
“혈사련주 허무극이오.”
“청풍당주 은휘요.”
“흐음. 놀라지 않는군.”
“그만한 기도를 보이는 자라면 허 련주가 아닐까 짐작했소.”
“그리 말해 주니 영광이오.”
“어째서 본맹을 배신한 거요?”
“어째서라…”
허무극이 턱을 매만지더니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말했다.
“이유가 있을까? 혈사련이 정도맹을 치는데… 이유가 있는 쪽이 더 이상하지 않겠소?”
은휘가 피식 웃어 버렸다.
“하긴. 애초에 사파 나부랭이들과 연합이라니. 말이 안 되긴 했지.”
“말이 별로 아름답지가 않소.”
“이미 아름다운 말을 주고받을 상황은 아닌 것 같소만.”
“그도 그렇군. 이왕 이리 된 것 너무 원망은 마시오.”
“주절주절 말이 너무 많군!”
타앗!
은휘가 먼저 바닥을 찼다.
기력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굳이 상대에게 선공을 양보할 필요는 없었다.
선풍폭검 초식을 펼치자, 광풍과도 같은 바람이 허무극을 향해 몰아쳤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허무극은 여유가 넘쳤다.
그는 가늘게 눈을 뜨고는 슬쩍 보법을 밟으며 피하고는 읊조렸다.
“거칠군. 역시 내력을 많이 소모한 모양이오.”
“시끄럽다!”
쉬이이잇!
이번에는 은휘가 그대로 검을 횡으로 그으며 빠른 속도로 날아들었다.
쉭쉭쉭쉭!
회풍참검(回風斬劍).
빠르게 회전하면서 상대의 급소를 베어 버리는 절초였다.
하지만 이미 기력이 쇠한 탓인지, 은휘의 검격이 이전만큼 예리하지는 못했다.
초절정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싸움은 숨결 하나에도 승패가 갈릴 만큼 예민하기 마련이다.
한데 이만큼의 차이가 나니, 허무극으로서는 그야말로 차려진 밥상이나 다름없었다.
“쉽긴 한데… 아쉽군. 내가 좀 더 일찍 도착했어야 했어.”
어느새 은휘의 등 뒤로 다가온 허무극이 탁한 음성을 흘리더니 손을 불쑥 내질렀다.
순간, 그의 손가락이 송곳처럼 날카롭게 변하더니 은휘의 등을 깊이 파고들었다.
푸욱!
“크아아아악!”
은휘가 등을 활처럼 휘며 비명을 터뜨렸다.
그는 부들부들 떨며 눈을 부릅떴다.
“이, 이건… 무슨…!”
“잘 먹겠소.”
다음 순간 허무극의 손등과 팔목에 힘줄이 불거져 나왔다.
동시에 은휘의 전신에 강력한 뇌전이 흘렀다.
파지지지직! 치지직!
“끄아아아악!”
긴 비명을 터뜨리던 은휘는 이내 시커먼 시체가 되어 축 늘어지고 말았다.
허무극은 은휘를 아무렇게나 던져두고는 손바닥을 폈다가 쥐었다.
“별로 건진 것도 없군. 그러게 마병을 너무 많이 보냈어.”
그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주변에 널브러진 마병들의 시체를 보며 중얼거렸다.
**
꽤 큰 마을에 다다른 소비광은 방갓을 눌러쓰고 고개를 푹 숙인 채 거리를 걸었다.
‘일단은 여기까지 왔다!’
자신을 빼내기 위해서 당주님이 직접 남았다.
‘당주님… 무사하실까?’
그는 착잡한 심정으로 대로를 따라 걸어갔다.
차라리 사람이 북적북적한 곳을 정면으로 돌파하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한 탓이다.
그렇게 복판쯤 다다랐을 때였다.
“비켯!”
“저 녀석 낯짝 확인해!”
등 뒤에서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심코 돌아보니 혈사련 소속으로 보이는 무인들이 지나가는 행인들을 살펴보는 것이 아닌가?
‘저 녀석들! 벌써 여기까지 쫓아왔어!’
지독한 놈들이다.
단 한 명도 살려서 보내지 않겠다는 속셈일까?
소비광은 두려움에 떨면서도 정신을 바짝 차리기 위해 애쓰며 걸음을 서둘렀다.
그는 얼른 좁은 골목길로 꺾어 들어갔다.
그렇게 얼마나 정신없이 걸음을 옮겼을까?
툭.
마침 누군가와 어깨를 부딪쳤다.
소비광이 슬쩍 고개를 숙이고는 지나가려는데,
“잠깐.”
묵직한 음성과 함께 커다란 손이 소비광의 어깨를 잡는 것이 아닌가?
무심결에 돌아본 소비광은 그 자리에서 온몸이 굳어 버리는 줄 알았다.
‘이자는… 혈사련 백호당주!’
하필 싸워서 이길 가망도 없는 자와 마주치다니!
그의 눈동자에 두려움이 가득 차오르는데,
“하나 묻지.”
뜻밖에도 추희룡이 말을 건네 오는 것이 아닌가?
“무, 무슨…?”
“사비강 교관이 정도맹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실인가?”
‘역시 내가 정도맹 소속 무인이라는 걸 알고 있구나!’
하긴 대주급 신분이니 혈사련에서 놓칠 리가 없을 터다.
그런데 왜 이런 질문을 하는 걸까?
게다가 왜 자신을 잡아가지 않고 여기서 질문을 던지는 거지?
이런 묘한 위화감 속에서 소비광은 모종의 희망을 엿보았다.
“사, 사실이오.”
그가 대답하자, 추희룡의 눈빛에 이채가 서렸다.
“확실한가? 그는 무사한가?”
소비광은 잠깐 당황했다.
사실 거기까지는 아는 바가 없다.
다만 생명이 위태로울 정도로 위험한 상태라는 것만 알 뿐.
그런데 추희룡의 반응으로부터 소비광은 묘한 바람 같은 것을 읽었다.
‘이자… 사비강 전 국주가 무사하길 바라는 건가?’
투신대주인 그는 누구보다도 눈치가 빠른 자였다.
남몰래 정찰 업무를 하려면 남다른 눈치 역시 필요한 자질이었으니까.
소비광이 짐짓 태연한 척 거짓말을 했다.
“무사하오. 한데 그건 왜 물어보시오? 날 잡아갈 생각이오?”
오히려 당당하게 나서니 추희룡이 조금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는 피식 웃어 버렸다.
“그렇단 말이지….”
그러고 나서 추희룡은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뭔가 굉장히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 전인 것처럼 심각하게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실제로 추희룡은 그랬다.
‘갈림길이다.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내 인생이 달라지리라.’
하지만 이미 마음의 결정은 내려진 상태였다.
이대로 혈사련이 거사에 성공하면 자신의 입지는 좁아진다.
그렇다면 이젠 모험을 걸 때다.
“가라. 나는 널 본 적이 없고, 너는 내가 누군지 모른다.”
“……!”
“뭐하나?”
“고… 고맙소!”
소비광은 어찌된 영문인지 알 수 없지만, 그야말로 천운이 따랐다고 생각하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막 모퉁이를 돌아섰을 때였다.
마침 수하들이 추희룡 쪽으로 달려왔다.
“이쪽은 이미 살펴봤다. 다른 곳을 뒤져라.”
“존명!”
수하들이 대답과 함께 흩어져 갔다.
추희룡이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내가 뭐 하는 짓인지….’
적어도 이 결정을 후회하지 않도록 만들어 줄 사람은 단 한 명이리라.
‘사비강 교관. 내 운명을 당신에게 걸어 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