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8
귀환 마교관
328화
그나마 다행인 것은 사비강이 현재 인피면구를 쓰고 있었기에 장안문이 단박에 눈치 채지는 못했다는 점이다.
잠깐 움찔거렸던 장안문이 곧 상대가 인조흠임을 알아보고는 말을 건네 왔다.
“마침 자네가 나오는군. 별 일은 없었나?”
이토록 폐쇄적인 명리각에서 별 일이야 있겠냐마는 으레 형식적으로 던진 질문이었다.
사비강은 곧바로 답하지 않고 고개만 슬쩍 끄덕였다.
카피 보이스도 사용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괜히 입을 열어 대꾸했다간 목소리가 들킬 수 있기 때문이다.
장안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들어섰다.
사비강 역시 아무렇지도 않은 척 그의 곁을 지나치며 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이 서로를 스쳐 지나가는 순간이 억겁처럼 길게만 느껴졌다.
명리각 복도로 완전히 들어선 장안문의 이맛살이 슬쩍 일그러졌다.
‘이상한데…’
뭔가 다르다.
느낌이 다르다.
어둑하긴 했지만, 얼굴은 분명 인조흠이었다.
한데 이 묘한 위화감은 무엇일까?
피… 냄새?
실로 여기까지 생각하는 데에는 촌각에도 지나지 않을 만큼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마침내 장안문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는 찰나,
쉬이이잇!
순간 그의 눈이 부릅떠졌다.
사비강이 귀신같은 움직임으로 돌아서면서 그대로 장안문의 목을 찌른 것이었다.
푹!
“컥!”
푹, 푹! 푹푹!
사비강은 목에 박힌 단검을 뽑아내는 것과 동시에 심장, 명치, 단전을 차례로 찔러 갔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
“끄억…!”
순식간에 치명상을 입은 장안문이 울컥 피를 토해내면서 그대로 털썩 무릎을 꿇었다.
사비강이 얼른 장안문을 떠받치면서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눕혔다.
이 일련의 과정이 무척 은밀하면서도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정말이지 중독당한 사람답지 않은 몸놀림이었다.
하지만 지금 사비강은 치밀어 오르는 구토를 억지로 눌러 참는 중이었다.
당장이라도 핏덩이를 토해내고 싶지만 꾹꾹 참았다.
한 번 토하기 시작하면 멈출 수가 없을 것 같기에.
사비강이 비척거리면서 일어나서는 몸을 돌리고 외문을 빠져나갔다.
외문 양쪽에는 번을 서는 무인들이 여전히 목석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가 완전히 나오자, 외문이 ‘그그긍!’ 소리를 내며 닫혔다.
한편, 정문을 지키던 무인 중 우측에 서 있던 자는 사비강이 나오면서 비릿한 혈향이 풍겨 오는 것을 느꼈다.
그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슬쩍 돌리고는 사비강을 보았다.
‘피…?’
사비강의 옷소매에 혈흔이 묻어 있었다.
흔적으로 보아서는 묻은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듯했다.
평소라면 그러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그는 오늘따라 왠지 암흑대주에게 말을 걸고 싶었다.
어딘지 부자연스러워 보이는 부각주의 움직임 때문인지도 몰랐다.
“괜찮으십니까?”
사비강이 슬쩍 손을 들어보였다.
역시 그 모습도 다소 이상했다.
그가 한 걸음 내딛는 찰나,
쉬이잇!
다시 사비강의 손이 바람처럼 날아왔다.
푹! 푹!
목과 가슴에 단검이 틀어박혔다.
“헛!”
왼쪽에 서 있던 무인이 헛바람을 삼키면서 곧장 검을 뽑아 들었다. 아니, 뽑아 들려고 했다.
그런데 어느새 돌아선 것인지 사비강은 허리춤에서 베르타스를 뽑아 들며 그대로 그의 목을 베어 왔다.
촤아아아악!
툭, 데굴데굴…!
그야말로 전광석화와 같은 발검술이었다.
베르타스가 뽑아지는 것과 동시에 좌측 무인의 머리는 바닥을 굴렀다.
“제길…!”
사비강이 퀭한 눈으로 주변을 슬쩍 둘러보았다.
조용히 나가긴 글렀다.
눈이 가물가물 감긴다.
저벅… 저벅…!
비틀거리면서 힘겹게 걸음을 옮겼다.
명리각 마당 복판을 지나갈 때쯤이었다.
슈슈슈슈슈슈슉!
사비강을 에워싸면서 번을 서는 절정 고수들이 소낙비처럼 떨어졌다.
처처처척!
그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고는 사비강을 겨누었다.
“지긋지긋하네.”
사비강이 침을 탁 뱉고는 베르타스를 움켜쥐었다.
다음 순간,
사비강이 베르타스를 세차게 집어던졌다.
쉬에에엑!
“……!”
포위한 무인들이 흠칫거리고는 베르타스가 날아간 방향을 보았다.
명리각 지붕 위였다.
그곳에서는 무인 하나가 품에서 신호탄을 꺼내 막 하늘로 던져 올리려던 참이었다.
푸욱!
“커억!”
결국 그는 신호탄을 던지지 못한 채 그대로 고꾸라지면서 지붕 아래로 떨어졌다.
쿠웅!
“이런 지독한…!”
무인들 중 수장으로 보이는 자가 눈살을 찌푸리고는 사비강을 노려보았다.
그가 살기를 피워 올리는 순간,
슈슈슈슈슈슉…!
이번에는 바닥에서 솟아나는 것처럼 검은 그림자들이 무인들의 등 뒤에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마치 저승사자처럼 소리 없이 나타난 그들의 무복에는 검은 글귀로 ‘살’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맞은편 부하의 뒤편에 나타난 적을 본 수장의 몸이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살막…! 어째서 이들이 여기에…?’
그것이 그의 마지막 생각이었다.
촤촤촤촤악!
귀신처럼 나타난 살수들이 일제히 칼을 휘둘러 포위한 무인들의 목을 날려 버린 것이다.
그 바람에 사비강 주변으로 수십 명의 머리가 후드득 떨어지는 광경이 펼쳐졌다.
사비강이 그제야 피식 웃으면서 털썩 주저앉았다.
“절경…이군…”
“니미…! 도대체 이게 무슨 꼴이야?”
살막주 악천괴가 얼른 달려와 사비강을 부축했다.
“재수가 없었어.”
“정신 좀 차리라고! 제길, 이거 심각한데?”
악천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사비강의 중독 상태가 생각보다 훨씬 위중했다.
“쿨럭! 쿠웨엑!”
기침을 내뱉던 사비강이 피를 다시 한 움큼 토해냈다.
“젠장! 도대체 무슨 독에 당한 거야?”
사비강이 피식 웃었다.
“미안하게 됐어. 아무래도 나 죽을 것 같군.”
“씨부럴! 누구 마음대로? 이대로 죽게 놔둘까 봐!”
“누가 보면 날 엄청 좋아하는 줄 알겠어.”
“미친…! 이 상황에서 그런 농이 나오는 거야?”
“죽을 지경인데 울기까지 하면 체면이 안서잖아.”
“기가 막혀서 말도 안 나오는군. 누구 만독제귀단(萬毒制鬼團) 가진 녀석 없느냐?”
악천괴가 카랑카랑 소리치자, 살수 중 하나가 황급히 달려 나와 품에서 만독제귀단을 꺼내 주었다.
“우선 이것부터 복용해 보라고. 효과가 별로 없을지 모르지만 시간은 끌어 줄 테니.”
“눈물겹네.”
“거참, 남의 일 말하듯 하지 말고! 좀!”
악천괴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사비강이 툴툴 웃으며 만독제귀단을 복용했다.
만독제귀단은 다양한 종류의 독을 치유하는 해독제였는데, 어디까지나 응급처치에 지나지 않았다.
한편, 악천괴는 조바심이 났다.
‘제기랄! 당신이 죽으면 나도 죽는단 말이야!’
사비강이 자신과 살막의 무인들에게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저주를 걸어 놓지 않았던가?
때문에 사비강이 죽으면 악천괴는 물론, 다른 살수들 역시 온몸이 터져 죽게 생겼으니 안절부절 못할 수밖에.
사비강이 겨우 정신을 차리고는 말했다.
“날… 정도맹 본단의 당 대주에게… 데려가도록.”
“알겠으니까 뒈지면 가만 안 둘 줄 알아.”
“영감… 말조심 해야지. 자꾸 이렇게 나오면 콱 죽어 버린다?”
“쳇, 알게 뭐야? 어차피 다 같이 뒈질지도 모르는 판에!”
“그리고 이거. 지금 당장 당 대주에게 전하도록.”
사비강이 품에서 작은 목곽상자를 꺼내 주었다.
그건 명리각 재료실에서 발견한 것 중 가장 의심스러운 것을 따로 담아 보관한 것이었다.
“알겠으니까 이제 그만 지껄여. 독이 더 퍼지니까.”
신경질적으로 말을 마친 그는 살막에서 가장 경공이 빠른 자 세 명을 불렀다.
“너는 당장 가장 빠른 전서응(傳書鷹)을 이용해서 이걸 암영대주 당이협에게 보내도록 하고, 너희 둘은 지금 나와 함께 사 교관을 정도맹 본단으로 옮긴다!”
“존명!”
악천괴가 사비강에게 말했다.
“사흘. 사흘만 버티라고. 어떻게든 그때까지 본단으로 옮겨 줄 테니.”
하지만 사비강은 이미 의식을 잃은 것인지 답이 없었다.
악천괴는 능공섭물의 수법으로 베르타스를 낚아챈 후 얼른 천으로 감아 버렸다.
아무나 함부로 쥐어서는 안 되는 검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리고 가장 경공이 빠른 수하에게 사비강을 업도록 지시했다.
이윽고 그가 수하 두 명과 함께 몸을 날리면서 남은 살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나머지는 이곳 뒷정리를 하도록! 일살, 네가 책임지고 마무리해라! 차후 문제가 되지 않도록 녀석들로 위장해서 번을 서도록 해라!”
“존명!”
남은 살수들이 재빠르게 시체들을 처리하면서 인피면구를 만들어 가기 시작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대다수의 무인들이 당양으로 떠나고 천상궁이 거의 비어 있다는 점이었다.
**
혈사련이 당양에 도착한지 사흘 째.
“드디어 정도맹에서도 모든 무인들이 당양 지단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류여중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련주 허무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때가 된 것이다.
“마령교의 반응은 어떤가?”
“문제없습니다. 시행만 하면 될 듯합니다. 다만….”
“다만?”
“역시 사비강 교관이 지금까지 나타나지 않은 게 좀 신경이 쓰입니다.”
“흐음. 궁에서도 아무런 연락은 없었고?”
천상궁을 가리켜 묻는 것이었다.
류여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현재까지는 모든 일이 순조로운 상황입니다.”
“그럼, 실행하도록 하지.”
이미 마음을 굳힌 사항이었다.
사비강이야 원래 어디로 튈지 모르는 자가 아니던가?
조금 찝찝한 부분이 있지만, 이제 와서 사비강이 나타난다고 한들 뭐가 달라질 건가?
이는 허무극은 물론 류여중도 같은 생각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오늘 밤 자정을 지나 축시초(丑時初 : 새벽 1~2시)에 흑견을 불러 시작하겠습니다.”
“알겠네. 하면 정도맹의 청풍당주와 얘기해서 그때쯤 연합 세력을 재령산(載寧山) 기슭에 집결하도록 만드는 게 좋겠군.”
“그렇습니다. 마령교에도 연을 넣겠습니다.”
“그러도록.”
류여중이 허리를 숙여 보이고는 물러갔다.
홀로 남은 허무극의 눈빛에 차가운 한기가 감돌았다.
‘이제 끝이 보이는군. 그래, 이걸로 된 거다. 미련은 두지 않는다.’
**
“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이오!”
당이협은 전에 없이 크게 분노하며 소리쳤다.
악천괴가 눈을 부라리며 대꾸했다.
“왜 나한테 지랄을 하는 거야? 난 이 녀석을 어떻게든 살리려고 미친 듯이 달려온 죄밖에 없다고! 이 녀석이 죽으면 나도 곤란해진다!”
당이협도 더는 다그치지 않고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사비강의 상태를 살폈다.
사비강의 몸은 그야말로 만신창이였다.
얼굴의 혈색이 붉고 푸르고 희고 노랗다.
그야말로 사람의 낯빛이 이렇게 어지러울 수 있을까 싶을 정도다.
게다가 손등과 팔등, 다리 등에는 수포까지 생겼다.
“주군! 정신 차려 보십시오! 주군!”
그가 공력까지 주입하면서 깨우려고 했지만, 사비강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심각하다…!’
그가 얼른 수하를 돌아보며 외쳤다.
“당장 가서 만독방진단(萬毒防鎭團)을 가져와라!”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암영대원들이 몸을 날렸다.
당이협이 입술을 질끈 씹었다.
그의 눈치를 살피던 악천괴가 넌지시 물었다.
“어떤가? 치료가 가능…”
“어렵소.”
“뭐야? 너는 독에 있어서만큼은 따라잡을 자가 없다는 당가 출신이 아니더냐!”
“그런 단순한 문제가 아니오. 시기도 너무 늦었고… 아무튼 지금으로서는 치료를 장담하기 어렵소.”
“이런 미친…! 네놈이 그리 말하면 어쩌자는 거야? 어떻게든 살려내라고!”
악천괴가 길길이 날뛰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비강이 죽으면 자신도 죽을 목숨이 아니던가?
한편, 당이협은 사비강을 보며 참담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혹여 천운이 따라 치료가 된다고 하더라도 의식을 찾으려면 보름 이상이 걸릴 거요.”
“허어, 맙소사…”
악천괴가 입을 척 벌렸다.
그때쯤이면 이미 연합 세력과 마령교 간에 어떤 결판이 나고도 남았을 시간이 아닌가?
살막주가 된 이후 처음으로 그는 줄을 잘못 잡은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애초에 원해서 잡은 줄도 아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