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7
귀환 마교관
327화
복도가 어지럽게 휘돌았다.
‘뭐지…? 내 몸이 왜 이렇게 가볍지? 나는 지금 경공을 펼치는 것인가?’
인조흠의 머릿속에서 찰나지간에 스쳐간 생각이다.
그런데 그는 끔찍한 모습을 보았다.
목을 잃은 자신의 몸이 복도 한 가운데에 우두커니 서 있는 것을.
절단된 목의 단면에서 핏줄기가 분수처럼 솟구쳐 오르고 있다는 것을.
그것이 그가 살아생전 마지막으로 본 장면이었다.
툭, 데굴데굴…
인조흠의 머리가 이내 바닥을 굴렀다.
“헉, 헉, 헉…!”
사비강은 벽에 몸을 기댄 채 심호흡을 했다.
“제기랄!”
콱 말아 쥔 주먹을 천천히 펴보니 거무죽죽하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중독 증상이다.
제아무리 무공 고수라도 독에 대한 내성이 없는 한 당할 수밖에 없다.
혹시 몰라서 라겔의 주머니에서 안티 포이즌을 꺼내 복용하기도 했지만, 역시나 별 소용이 없었다.
“니미럴…!”
사비강은 다시 쇄골에 박힌 크라니온을 뜯어내기 위해 손톱으로 후벼 팠다.
하지만 단순히 살과 엉겨 붙은 것 이상으로 크라니온은 그의 몸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하필 저주받은 크라니온이었을 줄이야!
행운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이제는 목숨까지 위협할 악운이 되어 버리지 않았나?
마계에 있을 때 저주 받은 크라니온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었지만, 실제로 본 것은 처음이었다.
‘마법을 아예 쓸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군.’
하긴 이제 와서 큐어 포이즌 마법을 쓸 수 있다 해도 정체불명의 수만 가지 독을 손쉽게 치료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포션도 마찬가지다.
이미 큐어 포이즌 포션을 복용했지만 진행 속도를 조금 늦추는 정도에 불과하리라.
“쿨럭, 쿠웨엑!”
거칠게 구토를 하고 나니 한 움큼의 핏덩이가 토해져 나왔다.
“빌어먹을!”
소매로 입가를 훔치고는 주변을 다시 한 번 둘러보았다.
그야말로 참혹한 광경.
발 디딜 곳이 마땅치 않을 만큼 시체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시체들을 아무렇게나 밟아 가며 한쪽 구석으로 어기적거리며 다가갔다.
사비강은 시체 더미 위에 떨어진 인조흠의 머리를 주워들었다.
인조흠은 아직도 자신의 죽음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그러게 너무 방안에만 갇혀서 생활하면 건강에 안 좋다니까. 사람이 햇볕도 쐬고 해야지. 이게 뭐야?”
사비강이 중얼거리면서 그 자리에 쓰러지듯 쪼그려 앉았다.
엉덩이에 시체 두 구가 깔렸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다.
어떻게든 이곳을 빠져나갈 생각만 해야 한다.
피독주의 효력도 떨어졌고, 포션도 무용지물이 아닌가?
그나마 다행이라면 바깥에서는 지금 명리각 내부에서 벌어진 이 참극을 전혀 모른다는 점이다.
사비강은 철저히 마나와 체술만을 이용해서 싸웠다.
검기나 검강 대신 마나를 이용한 오러만을 사용했고, 마법을 썼다.
물론 그마저도 크라니온 때문에 오래 사용하진 못했다.
때문에 탐기신주에 그의 공력은 한 줌도 감지되지 않은 것이다.
명리각을 설계한 자가 자신이 고안한 장치에 대해 지나친 확신을 가진 것이 화근이 된 셈이다.
하긴, 보통의 경우 내공을 사용하지 못하는 자가 이곳에 잠입하기란 애초에 불가능하다.
게다가 그런 자가 발각되었을 경우에는 굳이 비상종을 울릴 필요도 없이 처리할 수 있으리라.
즉, 보통의 경우라면 탐기신주 하나만으로도 차고 넘칠 만큼 훌륭한 보안 체계였을 테지만, 지금 사비강에게는 그것이 커다란 틈인 셈이었다.
게다가 명리각 무인들이 출입을 자주 하지 않는다는 것이 오히려 지금 도움이 된 셈이다.
며칠 동안 단 한 번도 외출을 하지 않을 정도니, 사람이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고 해서 이상하게 여기진 않을 터다.
우습게도 처음엔 굉장히 까다롭게 여겨지던 조건들이 이렇게 일을 저지르고 나니 오히려 사비강에게 유리한 환경을 만들어 주고 있었다.
‘뭐 그래봐야 중독당한 상태에서 살아남기도 급급하게 됐지만….’
사비강이 쓴 웃음을 짓고는 품에서 단검을 꺼내 인조흠의 얼굴 가죽을 벗기기 시작했다.
이대로 밖으로 나가면 번을 서는 무인들이 기겁을 하고 달려들 게 뻔하니, 부각주의 신분으로 위장해서 태연하게 나갈 속셈이었다.
마법을 사용할 수 없으니 인피면구라도 만들 수밖에.
사아악…!
단검은 아주 예리하게 인조흠의 얼굴 가죽을 베어 갔다.
이 역겨운 작업은 무척 섬세하고 면밀해야만 한다.
면피의 두께가 너무 얇으면 자칫 덮어쓸 때 찢어지기가 쉽고, 너무 두꺼우면 근육의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워진다.
적당하고 알맞은 두께…
사비강은 오래 전, 당이협에게 들었던 조언을 떠올리며 신중하게 작업을 해갔다.
다만 신경 쓰이는 게 있다면, 혹시나 이러는 중에 밖에서 누군가 들어오려고 할 경우였다.
만약 그렇게 되면 상대는 절차대로 밖에서 신호를 보내올 것이고, 안에서는 즉각 문을 열어 주며 반응해야할 것이다.
만약 반응이 없다면 무슨 일이 생겼으리라 짐작하고 무인들로 명리각을 포위할 지도 모른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불과 한 시진 전까지만 해도 드나드는 사람이 없어서 불만이었는데, 이제는 누구도 드나들지 않길 바라는 입장이라니.
유불리가 완전히 정반대로 뒤집어졌다.
“뭐, 그게 인생이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의외성.”
사비강이 해쓱해진 얼굴로 중얼거리다가 마침내 완전히 벗겨낸 인피면구를 들어올렸다.
‘이만하면 그럭저럭 괜찮겠어.’
물론 당이협이 만든 것에 비하면 어린아이 수준이라고 볼 수 있었지만, 한 번 정도 적을 속이기에는 문제가 없을 듯했다.
사비강은 아무 방이나 들어가 아교처럼 끈적거리는 접착제를 찾았다.
각종 실험과 연구를 하는 장소인 만큼 그런 물건들은 쉽게 구할 수 있었다.
그렇게 인피면구를 덮어쓰고 옷을 갈아입은 사비강이 동경에 대충 얼굴을 비춰 보았다.
‘나쁘지 않군.’
사비강이 심호흡을 하고는 출입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그동안 명리각을 방문한 사람은 없었다.
이쯤 되자 도대체 명리각주는 언제 이곳을 찾아오는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칠주야가 훌쩍 넘도록 한 번을 찾아오지 않다니.
‘그러고도 돈을 받나? 거참, 꿀 보직이란 말이야.’
사비강은 비척거리면서 출입문 앞에 멈춰 섰다.
“이제… 이놈을 어떻게든 작동시킬 차례군.”
그가 여전히 굳게 닫힌 철문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
자박자박…
어둑한 동혈에 발걸음 소리가 울렸다.
마침내 벽에 박힌 야명주가 희미한 빛을 뿜어내는 공간으로 한 인영이 들어섰다.
허리가 구부정한 노파, 황면인이었다.
그녀는 안쪽에 바위를 깎아 만든 침상을 힐끔 보더니 한옆으로 걸어가 들고 온 바구니와 붓을 내려두었다.
바위 침상에는 온몸을 하얀 천으로 둘둘 감은 남자가 시체처럼 누워있었다.
그녀가 무심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정도맹에서는 이미 청풍당주가 당양에 도착했다고 하더구나. 물론, 혈사련주는 직접 왔고. 아직 당양에 도착하진 않았지만, 내일이면 도착할 것 같다.”
“…….”
“몸은… 좀 어떠냐?”
“…….”
하얀 천을 감은 사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황면인 역시 애초에 대답을 기대한 건 아니라는 듯, 무신경하게 바구니에 든 붉은색 가루에 물을 넣고 젓기 시작했다.
경면주사(鏡面朱砂)에 물을 타서 간 것처럼 온통 피처럼 붉은 색을 띄고 있었다.
한참이나 걸쭉한 농도의 액체를 만들던 황면인이 바위 침대로 다가왔다.
“혈사련주는 이 기회에 제대로 정도맹을 눌러 버리겠다는 심산일 거다. 하나, 본교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게지. 본교는 이번 기회에 태동(胎動)할 생각이다. 운이 좋으면 한 번에 거사에 성공하겠지. 하나, 존야께서는 굳이 서둘지 말라고 하셨다. 그래도 한 가지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정도맹주와 혈사련주. 둘 중 하나는 이번에 반드시 무너질 게다.”
황면인의 말에 천을 두른 남자가 피식 실소를 머금었다.
황면인이 눈살을 슬쩍 찌푸렸다.
“뭐가 웃기는 거냐?”
“언제부터 그리 수다스러워지셨소?”
“그저… 진행 상황을 말해 주는 게다.”
“됐소. 이번 일은 내가 맡겠소.”
“무리할 필요 없다. 녹면이 직접 맡기로 했다.”
“흥, 그 잘난 연구를 하느라 바쁜 자가 웬 일이라오?”
“그리 비꼴 일은 아니지 않느냐?”
“됐고. 내가 맡을 거요. 나는 이대로 물러나지 않을 거요.”
“사비강 그자에 대한 원한 때문이냐?”
그러자 천을 두른 남자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황면인을 쏘아보았다.
“그렇소! 날 이 꼴로 만든 녀석을 내 그냥 두고 볼 것 같소?”
“개인적인 감정을 앞세우면 거사를 그르칠 수 있다.”
“하, 개인적인 감정? 벌써 잊은 거요? 사비강… 그자는 본교가 해오던 일을 사사건건 방해하던 자란 말이오! 그런 자를 그냥 유야무야 넘어가면 오히려 더 문제가 심각해질 거요.”
“흐음…”
황면인이 침음을 흘리더니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교주님께 건의를 해보마.”
“반드시 허락을 받아내시오.”
“노력하마.”
황면인이 주름진 손을 뻗어 사내의 얼굴에 둘둘 감긴 천을 벗기기 시작했다.
이제 어지간히 화상 자국이 아물었는지, 천이 눌러 붙지 않고 깔끔하게 떨어져 나왔다.
황면인의 눈빛에 복잡한 심경이 담겼다.
“혹… 나를 원망하느냐?”
그러자 붕대 사이로 드러난 사내의 눈빛에 비웃음이 스쳤다.
“지금 거사를 앞두고 사사로운 감정을 내세우는 거요?”
“…….”
“그딴 건 스스로도 잘 알지 않소?”
“그래도 좋다.”
“무슨 소리요?”
“그래서 네 분이 조금이나 풀린다면 상관하지 않으마.”
하지만 사내는 오히려 더욱 흥분한 표정으로 황면인을 노려보았다.
마침내 붕대가 완전히 풀리자 사내의 얼굴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온통 화상으로 그을려 흉측하게 일그러진 얼굴.
마치 불지옥에서 갓 탈출해 올라온 악귀 같은 모습이었다.
황면인은 차마 그 얼굴을 마주 보지 못하고는 고개를 돌려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에 작은 바가지와 붓이 들렸다.
바가지에는 붉은색 물감이 가득 들어 있었다.
그녀가 붓을 들어 붉은 물감을 찍은 후 사내의 얼굴에 바르려는데,
“치우시오.”
휙! 우당탕!
사내, 적면인이 손등으로 붓과 바가지를 쳐내 버렸다.
황면인이 미간을 찡그렸다.
“이게 무슨 짓이냐?”
적면인이 싸늘하게 웃으며 말했다.
“날 보시오. 누군지 알아보겠소?”
“……!”
“날 똑바로 보란 말이오! 내가 누군지 알아보겠소?”
황면인이 그제야 적면인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의 주름진 눈가가 촉촉하게 젖었다.
적면인이 차갑게 웃으며 말을 던졌다.
“이젠 분장할 필요가 없게 됐소.”
그가 휙 일어나더니 저벅저벅 걸음을 옮겨 방을 빠져나갔다.
홀로 남은 황면인의 긴 한숨소리가 공간을 가득 채웠다.
**
드디어…
“열렸다.”
사비강은 환희에 찬 표정으로 비스듬히 열리는 문을 보았다.
꼬박 두 시진이 흘렀다.
물론 지금까지 기다린 시간에 비하면 두 시진은 그리 길다고 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몸이 중독된 상태였기에 그 두 시진이 두 달처럼 길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사비강은 최대한 호흡을 조절하면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제길… 우선 독부터 치료해야 하는데….’
그보다 이렇게 무사히 나간다고 해도 문제다.
만약 아직까지 이곳에 나타나지도 않은 명리각주가 들어오게 되면 이 난리를 보고 곧바로 상부에 보고하지 않겠나?
‘역시 명리각주도 죽여 버려야 하나? 쳇, 일단 뒷정리는 나중에 생각하자. 지금은 치료가 우선이니까.’
당장이라도 이 빌어먹을 곳에서 벗어나 맑은 공기를 쐬고 싶었다.
내문을 열고 복도로 들어선 사비강은 외문의 벽을 짚었다.
다행히 외문은 쉽게 열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그저 움푹 들어간 곳에 손을 대고 누르면 열리는 형식이었다.
기이이잉…!
마침내 외문이 열렸다.
아침 햇살이 열린 틈으로 쏟아져 들어오면서 눈을 마구 찔렀다.
사비강이 눈살을 구기면서 손을 드는데, 하필 눈앞에 누군가 떡하니 버티고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이제 막 명리각에 도착해서 들어오려고 했던 것인지, 정문 옆의 줄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음?”
상대가 미간을 좁히고는 사비강을 보았다.
사비강 역시 뜻밖의 상황에 흠칫거리고는 상대를 보았다.
‘이런 젠장! 하필…!’
그는 바로 명리각주 장안문(蔣安文)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