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2
귀환 마교관
322화
“하앗!”
서래향이 앙칼진 기합성을 터뜨리면서 빠르게 쇄도했다.
까라라랑!
얇은 검이 적무린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퍼부어졌다.
적무린은 침착하게 방어하면서 뒷걸음질을 쳤다.
‘대단하다. 이렇게까지 강해지실 줄이야…!’
과연 아수대환단이다.
서래향은 아수대환단을 복용하고 나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
적무린이 어금니를 꾹 깨물고는 디딤 발의 위치를 바꿨다.
반격의 신호였다.
타앗!
쉬이이잇!
그의 검이 쏜살같이 날아가면서 서래향의 단전으로 향했다.
하지만 서래향은 방어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희미한 미소를 머금더니 오히려 검을 치켜들면서 그대로 단전을 노출하는 것이 아닌가?
그 대범함에 오히려 적무린이 놀라서 검을 거둘 뻔했다.
하지만 그는 내심 고개를 저었다.
지금 누가 누구를 봐준단 말인가?
원래부터 서래향은 자신보다 고수였다.
최선을 다해도 그녀의 옷깃을 스칠까 말까다.
한데 검을 거둬?
그야말로 어리석은 짓이다.
마침내 검봉이 그녀의 단전에 닿을 때쯤이었다.
쩌엉!
둔탁한 충격과 함께 마찰음이 터지면서 적무린이 튕겨 나갔다.
‘호신강기!’
일절 방어조차 하지 않은 상태에서 호신강기로만 정면으로 날아든 검봉을 막아내다니!
이거야말로 어른과 아이 정도의 수준 차가 아닌가?
쉬이이잇!
그러는 사이에 허공을 가르며 서래향의 검이 떨어졌다.
척!
차디찬 검신이 적무린의 목덜미에 닿았다.
“움직이면 베어 버린다.”
농을 섞은 한 마디에 적무린이 피식 웃어 버렸다.
그가 자세를 고쳐 잡고는 포권했다.
“도저히 제가 당해낼 수가 없군요.”
“포기가 너무 빠른 건 아냐?”
“그럴 리가요. 더 이상 검을 섞어 봐야 의미가 없습니다.”
“확실히 달라진 걸 나도 느껴.”
서래향이 검을 거두고는 중얼거렸다.
그녀의 표정은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그럴 수밖에.
무인이라면 누구나 꿈을 꾼다.
그 중에서도 생사현관을 타통하는 것은 숙원과도 같은 것이다.
물론 생사현관을 타통한다고 해서 모든 무인이 궁극의 경지에 단숨에 오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수대환단의 영향까지 받은 서래향은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강해졌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 얼마나 기쁘겠나?
얼굴에 드러나지 않으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것이다.
그녀가 기뻐하는 모습을 적무린은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저렇게 아이처럼 좋아하는 모습을 언제 보았던가?
아마도 천상궁에서 그녀가 지낼 적에 후원에다가 흑요석을 잔뜩 깔아 두던 날 이후로 처음일 것이다.
“한 번 더 하자.”
서래향이 검을 내밀었다.
적무린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실소를 머금었다.
“너무하신 것 아닙니까?”
“어째서?”
“지금까지 한 손만 사용하시고도 절 이만큼 기죽이셨으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눈치 채고 있었어?”
“그 정도로 둔하지는 않습니다.”
서래향이 피식 웃고는 답했다.
“하지만 계속해서 이 힘을 사용해 보고 싶어.”
“제 입장은 생각도 하지 않는군요.”
그러자 서래향이 잠시 고민을 하는 눈치를 보이더니 검을 휙 집어던졌다.
허공을 가르며 날아간 검이 병장기를 걸어 두는 장식대에 척 걸렸다.
“이번에는 맨손으로. 물론 한 손으로 하겠어.”
“절 더 비참하게 만드시겠다는 말이군요.”
적무린이 농을 섞어 말하자, 서래향이 싱긋 웃으며 답했다.
“대신 내가 지면 맛있는 국밥을 쏠게. 외원에 맛있는 집을 하나 알고 있거든.”
큰 의미를 두지 않고 던진 한 마디였지만, 적무린은 왠지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안쓰러운 감정이 일어났다.
‘어느새 맛집을 꿰고 있을 만큼 여기에 머무신 건가?’
적무린이 씁쓸하게 웃고는 자세를 바로 잡았다.
“그 약속은 꼭 지키셔야 합니다.”
“물론이지. 선공은 양보하겠어.”
“그럼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타앗!
적무린이 바닥을 차며 튕기듯 날아갔다.
쉬이이잇! 쉭쉭쉭!
그의 검이 번쩍이며 날아들었다.
하지만 서래향은 마치 연못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마냥 유연하게 피해냈다.
하지만 맨손에다가 한 손으로만 상대하는 만큼 평소보다 긴장한 기색이었다.
그녀의 입에서 하얀 김이 폴폴 나왔다.
적무린은 문득 그 모습이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서래향은 빈틈이 보이자마자 빠르게 일장을 내질러 왔다.
‘제길! 방심을…!’
적무린이 얼른 내공을 끌어올려 명치를 보호했다.
퍼엉!
“컥!”
적무린이 신음을 터뜨리는 것과 동시에 보법을 밟으며 빠르게 물러났다.
서래향이 싱긋 웃었다.
“방금 적 대주는 죽었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련에서 독을 쓰는 건 반칙이죠.”
“마치 그걸 감안해서 일부러 빈틈을 보였다는 듯이 말하는군.”
“물론입니다. 실전이었다면 그런 빈틈, 보이지 않습니다.”
“이제 보니 적 대주가 사람 약 올리는 재주도 있었군?”
서래향이 미간을 곱게 찡그리며 말하자, 적무린은 피식 웃어 버렸다.
왠지 즐겁다.
뺨에 와 닿는 차가운 겨울바람도 기분 좋게 느껴진다.
오랜만에 과거로 돌아가 그녀를 호위할 때처럼 마음이 편안하다.
입 밖으로 뿜어지는 하얀 입김도 기분 좋다.
‘그래, 이걸로 충분하다.’
그녀를 이렇게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
그녀가 행복에 겨워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이렇게 서로 검을 맞대고 대련할 수 있다면 된 것 아닌가?
서로의 눈을 보고, 서로의 호흡을 읽을 수 있다는 것으로 만족한다.
“갑니다!”
타앗!
다음 순간, 적무린이 빠르게 달려 나갔다.
**
문이 열리면서 류여중이 들어섰다.
그의 눈빛이 전에 없이 날카로웠다.
“마침내 정도맹에서 답신이 왔습니다.”
“그래?”
창가에 서 있던 허무극이 천천히 돌아서며 류여중을 보았다.
류여중이 서신을 든 채로 허무극에게 다가갔다.
“협조를 하겠다고 합니다.”
“과연 류 군사의 예측대로군.”
“우리 쪽에서는 일부러 사람을 보냈으니까요. 게다가 적 조교를 통해 보낸 예물이 상당한 가치를 지니기도 했지요.”
“하지만 맹주가 직접 나서지는 않을 테지?”
“물론입니다. 그들로서는 승자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맹주가 직접 토벌에 참여하지는 않을 겁니다.”
“하면 누가 참여할 것 같은가?”
“현재 정도맹의 두 번째 실권자라면 청풍당주(淸風堂主) 은휘(恩揮)입니다. 아마도 그가 참여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규모는 얼마나 될 것 같은가?”
“좀 더 지켜봐야 알겠습니다만, 정도맹 본단 무력의 삼 할은 될 것으로 추측합니다.”
“삼 할이라… 물론, 그건 최소치겠지?”
“그렇습니다. 최소 삼 할입니다.”
그 말은 더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뜻이다.
허무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다.
그 정도의 인원을 정도맹 본단에서 끌어낼 수 있다면….
‘해볼 만하겠군.’
눈을 가늘게 뜨고 생각에 잠겨 있던 허무극이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이젠 결단을 내려야 할 때다.
가만히 침묵을 지키고 있던 류여중이 넌지시 입을 열었다.
“련주님. 내키지 않으시다면 굳이 무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허무극이 나직이 웃음을 흘렸다.
“자네는 참으로 영악하군.”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정말이지 당해낼 수가 없어.”
“…….”
“진행하게.”
“…괜찮으시겠습니까?”
“더 묻지 말게. 그럼 결례가 되니.”
류여중이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여 보였다.
여기서 련주의 심기를 더 건드렸다간 큰 실수가 되리라는 걸 직감했기 때문이다.
“명심하겠습니다.”
“마령교의 상태는?”
“현재 흑견이 물밑 작업을 진행 중입니다. 곧 마무리될 것으로 보입니다. 그쪽이 정리가 되면 정도맹과 본련이 당양현(當陽縣)에 집결하게 될 것입니다.”
“자네가 그린 그림… 이번에는 대작이 되길 바라네.”
“반드시 명화로 만들겠습니다.”
“그래야 할 걸세. 돌이킬 수 없는 희생을 감수하는 만큼.”
“그럼 조만간 출정 준비를 마치겠습니다.”
류여중이 차갑게 식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
일이 틀어졌다.
혈사련은 안팎으로 시끌시끌했다.
마령교를 토벌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모두들 의기투합했다.
게다가 정도맹과 연합 조직을 이루는 만큼 묘한 경쟁 심리도 동반되고 있었다.
하지만 수뇌 인사들을 비롯한 몇몇 이들은 그것이 허울 좋은 명분일 뿐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정도맹과 연합 조직을 만들어 마령교를 토벌하겠다는 명분의 이면에는 또 다른 음모가 도사리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 음모에 대해서 알게 된 또 한 사람.
“생각보다 훨씬 나쁜 놈이었군.”
사비강이었다.
그는 어둠 속에서 몸을 숨긴 채 명리각(命理閣)의 전경을 찬찬히 살피고 있었다.
인프러비젼(infravision) 마법을 이용했기 때문에 어둠 속에서도 명리각의 전경이 또렷하게 보이고 있었다.
‘귀찮게 됐어.’
사비강이 내심 혀를 차고는 손에 든 설계도를 보았다.
명리각의 구조를 상세하게 그려 둔 설계도였는데, 백호당주 추희룡으로부터 받은 것이었다.
‘꽤나 복잡한 기관 장치를 설치해 두었군.’
하긴 그럴 만도 하다.
명리각은 온갖 약재를 제조하고 독약도 만드는 곳이었다.
어찌 보면 희귀한 약재가 강호에서 가장 많이 모인 곳이 바로 명리각이리라.
그러다 보니 그 어디보다도 보안이 철저할 수밖에 없으리라.
추희룡은 명리각 설계도를 전해 주면서 잔뜩 구겨진 표정으로 말했다.
“일이 잘못됐소. 아무래도 련주는 마령교를 토벌할 생각이 없는 것 같소.”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사비강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련주까지 직접 나서서 뭐 하러 당양현까지 간단 말이오?”
“아무래도 련주는 마령교를 끌어들여 정도맹을 치려는 생각인 것 같소.”
“정도맹을?”
너무나 뜻밖이었기에 사비강으로서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마령교를 끌어들인다지만, 이는 바보스러울 만큼 무모한 계획이 아닌가?
현재의 정도맹은 적폐들을 제거하고 상당히 안정화가 진행된 상태다.
그만큼 그들을 무너뜨리는 건 쉬운 일이 아닐 터.
게다가 이번 토벌 작전에서 정도맹은 맹주가 직접 나서지 않는다.
아마도 두 번째 실권자인 청풍당주나, 장로회주가 참석하는 게 고작이리라.
한데 그들을 제거한다고 해서 정도맹이 무너질 것이라고 보는가?
그런 의문을 읽기라도 한 것인지 추희룡이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련주는 그들뿐만 아니라, 이 기회에 맹주도 죽일 생각이오.”
“맹주를? 무슨 수로? 맹주는 본단을 떠나지 않을….”
말을 꺼내던 사비강이 입을 다물고는 추희룡을 빤히 보았다.
추희룡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홍묘를 이용할 생각이오.”
“홍묘가 맹주를 상대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거요?”
“충분히 가능하오.”
사비강은 실소를 머금었다.
이들이 도대체 홍묘를 얼마나 믿는 건가?
추희룡이 말을 이었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적 대주가 홍묘에게 련주의 선물을 가지고 갔소.”
“들었소. 아수대환단. 하지만 이 갑자의 내공을 온전히 흡수한다고 해도 홍묘가 맹주의 적수가 될 거라는 건….”
“아수대환단이 정말 그걸로 전부일 것 같소?”
사비강이 눈살을 찌푸리고는 추희룡을 바라보았다.
추희룡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아수대환단에 수를 쓴 것 같소. 그러지 않고서야 련주 뿐만 아니라, 류 군사까지 이렇게 확신하진 않겠지.”
그제야 사비강의 표정도 심각하게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