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0
귀환 마교관
320화
“갑자기 무슨 야외 수련을 한다고….”
백공보가 투덜거리면서 산을 올랐다.
천상궁에서 조금 떨어진 지역에 자리 잡은 호문산(虎紋山).
사비강은 야외 수련을 이유로 신생조를 이곳까지 부른 것이다.
뜬금없이 진행된 야외 수련이었지만, 신생조원들은 그러려니 생각할 뿐이었다.
워낙 정해진 규율도 없이 마음대로 수업을 진행하는 교관이었으니까.
“또 이상한 걸 시키는 건 아니겠지?”
“이상한 거라면?”
백공보의 뒤를 따라가던 방각이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그는 개인적인 수련을 위해서 발목에 모래주머니를 두둑이 채워 넣고 있었다.
백공보가 머리를 이리저리 굴리다가 대꾸했다.
“뭐… 예를 들면… 호문산을 샅샅이 뒤져서 영약을 찾아내서 캐내어 오라든지….”
“하하하! 그게 뭐야? 설마 그런 걸 시키려고….”
방각이 웃어넘겼지만, 어쩐지 사비강이라면 그런 일을 시킬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괜히 등골이 오싹했다.
“에이… 설마…”
그가 괜히 한 번 더 중얼거리면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백공보도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 설마하니 그럴 리가… 영감은 뭐라도 짐작하는 것 없어?”
“시끄러. 숨차니까 닥치고 따라오기나 해.”
앞서가던 맹가숙이 날카롭게 쏘아붙이고는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호문산은 바위가 많고 산세가 험해서 평범한 사람이 오르기에 쉬운 곳은 아니었다.
게다가 나무도 울창하니 길을 잃기도 쉬웠다.
산 중턱 쯤 오르자 호문산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인 호랑이 바위가 나타났다.
바위의 모습이 마치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도약하려는 호랑이를 닮았다고 해서 붙은 별명이었다.
호랑이 바위를 지나서도 가파른 경사와 울창한 숲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시간이 흐르면서 백공보도 점점 말이 없어지기 시작했다.
턱 끝에 맺힌 땀이 뚝뚝 떨어졌다.
“쳇, 이제 와서 기초체력 훈련이라니. 차라리 화끈하게 싸우는 게 낫지. 안 그래, 영감?”
하지만 앞서가던 맹가숙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영감? 벌써 숨넘어가서 뒈진 건 아니지? 사람이 말을 걸면 뭐라고 대답이라도…?”
숨을 헐떡이며 고개를 들던 백공보가 저도 모르게 그 자리에 우뚝 멈춰서고 말았다.
“뭐야? 어디 간 거야?”
분명히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앞에서 묵묵히 산을 오르던 맹가숙이 보이지 않았다.
그저 어두컴컴한 산길만 길게 이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벌써 보이지도 않을 만큼 올라가 버린 건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어이, 맹 영감이 보이질…?”
말을 꺼내던 백공보가 이번에는 퉁방울처럼 눈이 커졌다.
“어이! 다들 어디 간 거야?”
이번엔 바로 뒤에 따라오던 방각이 보이지 않았다.
그 뒤에 줄을 잇던 유송령과 석탄강, 도비천 등도 보이지 않았다.
“니미럴, 대체 어떻게 된 거야?”
그가 이맛살을 잔뜩 구기고는 주변을 둘러보는데,
슈슈슈슉!
갑자기 검은 그림자들이 비처럼 떨어져 내리는 것이 아닌가?
처처척!
복면을 쓴 무인들이 일제히 백공보를 포위하면서 검신을 들이밀었다.
그 일련의 동작이 워낙 깔끔하고 군더더기가 없었기에 백공보는 미처 대응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웬 놈들…!”
스윽!
백공보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치려는데, 시퍼런 검신이 더욱 목 줄기에 바짝 다가섰다.
마음먹고 검기라도 발했다간 그 자리에서 검을 휘두르지 않아도 목이 잘려 나갈 판이었다.
꿀꺽…!
마른 침을 삼키자 차가운 검신이 목 줄기에 닿는 게 느껴졌다.
‘이것들…! 도대체 어디서 나타난 것들이지? 선공을 해? 아니면 좀 더 지켜봐?’
머릿속에서 속셈이 복잡하게 일어났다.
하지만 그는 더 길게 생각하진 못했다.
퍼억!
“컥!”
포위한 무인 중 한 명이 검의 손잡이를 들어 백공보의 뒷목을 강하게 찍어 눌렀다.
공력이 담긴 공격이었기에 무방비로 있던 백공보는 그 자리에서 의식을 잃고 말았다.
**
철썩!
“…끄음…”
철썩! 철썩!
“아얏!”
백공보가 비명을 지르며 눈을 부릅떴다.
양 뺨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끼고는 얼른 주변을 둘러보자, 횃불이 이글거리는 동혈 안이었다.
‘여긴…?’
몸이 꿈쩍도 하지 않는다.
얼른 고개를 숙여 보니, 쇠사슬에 꽁꽁 묶여 있는 것도 모자라서 점혈까지 당해 몸이 마비된 듯했다.
마침 발걸음 소리가 저벅저벅 울리더니, 곧 두 명의 복면인이 백공보 앞에 멈춰 섰다.
백공보가 눈을 부라리며 이를 갈았다.
“이런 개새끼들! 웬 놈들이냐? 당장 이걸 풀지….”
짜악!
복면인 하나가 다가서더니 다짜고짜 뺨을 올려붙이는 게 아닌가?
백공보는 묶인 상태에서 몸이 휘청거릴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손찌검을 하면서 공력도 실은 것인지 뼈가 아릴 정도로 뺨이 얼얼했다.
“이 개색…!”
짜악!
“커억!”
이번에는 비명과 함께 피가 튀었다.
입안의 살점이 찢어진 것이다.
몇 대 더 맞으면 이도 부러져 나갈 것 같았다.
제아무리 성질이 불같은 백공보일지라도 지금 적을 도발해 봐야 얻을 게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대신 잡아먹을 듯 사나운 눈초리로 복면인들을 노려보았다.
복면인이 다시 손찌검을 하려는 순간, 옆에 있던 또 다른 복면인이 손을 들어 올리고는 제지했다.
백공보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하자, 그가 가까이 다가와 차가운 음성으로 물었다.
“두 번 묻지 않는다. 대답이 없거나 다른 소리를 할 때마다 손목과 어깨, 발목과 무릎이 차례대로 절단될 거다.”
“퉷!”
백공보가 침을 뱉었다.
옆에 선 복면인이 성큼 나서려는데, 다시 손을 들어 제지시킨 복면인이 몸을 숙이고 백공보의 턱을 손으로 들었다.
“아무래도 네 녀석은 모가지부터 날려야겠구나.”
순간 백공보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상대에게서 분명한 살기를 읽은 것이다.
‘도대체 어떤 놈이기에…?’
하지만 그런 의문도 길게 이어지진 않았다.
복면인은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겠다는 듯 곧바로 질문을 던져 왔다.
“옹기승 어디에 있나?”
‘옹기승?’
백공보가 눈살을 찌푸렸다.
분명 신생조와 함께 호문산을 올랐다.
그런데 어느 순간 길을 잃었고, 옹기승도 보이지 않았다.
‘이 녀석들… 옹기승을 찾는 것인가?’
그렇다면 얼마 전, 흑운성에서 있었던 일의 연장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렇군! 이 새끼들 마령교였어!’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들이 아직까지 옹기승을 발견하진 못한 모양이었다.
백공보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좆 까.”
복면인의 눈이 휘었다.
분노로 일그러진 것이 아니라, 마치 그런 반응을 이미 짐작했다는 듯한 비웃음이었다.
그가 턱짓을 하자, 옆에 선 수하 복면인이 다가오더니 그대로 검을 휘둘렀다.
쉬컥!
“……!”
백공보가 눈을 부릅떴다.
고통보다 먼저 찾아든 것은 놀라움이었다.
‘이 새끼들… 정말로 내 손목을…!’
뒤이어 아찔한 고통이 머릿속을 들쑤셨다.
“끄아아아악!”
잘려 나간 손목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젠자아앙! 개새끼들, 죽여 버리겠다악!”
“그건 할 수 있을 때 다시 이야기하자고.”
복면인이 싸늘하게 읊조리더니 백공보의 뺨을 찰싹찰싹 때렸다.
“자자, 정신 차리고. 다시 묻는다. 옹기승, 어디에 있나?”
“모른다, 이 개잡것아! 알아도 대답할까보냐!”
“쯧쯧. 꼭 무식한 것들이 고집만 세지.”
복면인이 다시 턱짓을 하자, 수하가 성큼 다가섰다.
“뭐, 뭐야? 이 씨벌놈들! 그만두지 못… 크아아아아악!”
한 줄기 섬광이 스쳐 지나갔고, 끔찍한 고통과 함께 오른팔이 썩둑 잘려 나갔다.
복면인은 친절하게도 혈을 점해서 지혈까지 해주었다.
백공보가 식은땀을 흘리며 이를 빠드득 갈았다.
“차라리 죽여 이 개새끼야! 너희 같은 마교 나부랭이들한테 동료를 팔아넘길 것 같으냐!”
“마교? 아… 마령교를 말하는 건가?”
“그래, 이 썩을 놈들아!”
“뭔가 착각하는 것 같군. 뭐, 이쯤 되었으니 서로 좀 더 솔직해지도록 할까?”
“니미럴 개좆이다!”
“쯧쯧.”
복면인이 혀를 차더니 손을 들어 복면을 스윽 벗겨냈다.
다음 순간, 백공보는 눈을 크게 부릅떴다.
“이, 이게… 무슨…?”
“날 알아보겠나?”
상대의 입에서 준엄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백공보는 여전히 얼이 나간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련주님이 왜 여기에…?’
놀랍게도 복면을 썼던 자는 다름 아닌 혈사련주 허무극이었다.
허무극이 얕게 한숨을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자, 이제 자네가 솔직해질 차례일세. 옹기승은 어디에 있나?”
“련주님께서… 어째서 그 녀석을 찾는 겁니까?”
“그건 자네가 알 필요 없다.”
“…알아야겠습니다! 이렇게까지 하시는 이유가 무엇인지!”
“명령이다. 말하라.”
“그딴 명령 들을 수 없습니다!”
“쯧쯧, 왜 이렇게 고집을 부리는 거지? 지금 반역이라도 저지르겠다는 건가?”
백공보가 착 가라앉은 시선으로 련주를 응시했다.
련주가 옹기승을 찾는다.
한데 그 이유에 대해서 떳떳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한 마디로 정당한 이유가 아니라는 뜻.
마음을 굳힌 백공보가 딱딱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필요하다면… 반역을 해서라도 녀석과의 신의를 지켜야겠지요.”
“신의? 망나니 같이 행동하는 네깟 놈들이?”
백공보가 입매를 비틀었다.
“뭔가 잘 모르시나본데… 원래 우리 같은 망나니들이 더 제멋대로 반역도 저지르고 그러는 겁니다.”
허무극의 이맛살이 팍 일그러졌다.
“아무래도 이 녀석은 더 조져봐야 건질 것도 없겠군. 치우는 게 좋겠다.”
“존명.”
복면인이 깍듯하게 대답하더니 저벅저벅 걸어와서는 검을 치켜들었다.
백공보는 순간 죽음을 직감했다.
하지만 그는 두 눈을 부릅뜬 채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았다.
죽음이 두려워서 고집을 꺾는다면, 그야말로 자존심이 상할 일이 아닌가?
“먼저 가서 기다려라. 곧 옹기승도 보내주마.”
“흥! 당신 뜻대로만 되진 않을 것이오!”
그것이 백공보가 내지른 마지막 고함소리였다.
서컥!
한 줄기 빛이 그의 몸을 대각선으로 가르며 지나갔다.
몸이 천천히 기울었다.
‘이것이 죽음…인가?’
쿵!
그대로 옆으로 넘어간 백공보는 희미해지는 시야 너머로 자신을 바라보는 허무극과 복면인을 바라보았다.
분하고 억울했지만 후회는 없었다.
그런데…
‘뭐지…?’
허무극의 모습이 아지랑이처럼 이지러지더니 전혀 다른 얼굴이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음…? 저 얼굴은… 교관님…?’
그랬다.
틀림없는 사비강의 얼굴이었다.
‘어떻게 된 거지?’
바닥에 쓰러진 채로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으니, 사비강이 고개를 쑥 내밀고는 말했다.
“뭘 그리 오래 쓰러져 있냐? 덩치 값도 못하게. 그만 일어나라.”
“뭐라고요…?”
“그만 일어나라고. 시험은 끝났다.”
“시험이라니…? 대체 무슨 소리를…?”
백공보는 꿈이라도 꾸는 건가 싶었다.
그런데…
어라? 몸이 움직인다.
화들짝 놀라서 일어난 백공보는 자신의 몸을 마구 더듬었다.
‘맙소사!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잘려 나갔던 손도, 팔도 그대로 붙어 있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자신의 손목과 팔목을 자른 복면인은 보이지도 않았다.
뿐만 아니라, 정신을 차리고 보니 주변 환경도 바뀌어 있었다.
동혈이 아니라 사방이 바위로 둘러싸인 분지형 공간이었다.
“여긴 어딥니까? 혹시 저승입니까? 교관님도 련주에게 당한 겁니까?”
그러자 어디선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풋…!”
“크윽… 난 못 참겠다… 크큭.”
백공보가 돌아보니 한쪽 구석에 신생조원들이 모두 모여서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웃음을 참는 게 아닌가?
그제야 백공보는 자신이 죽은 게 아니라, 괴이한 술법에 당했다는 것을 깨닫고는 버럭 소리쳤다.
“아오, 젠장! 이게 뭡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