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5
귀환 마교관
315화
‘나의 분신에게.’
비수 한 자루에 새겨진 깨알 같은 글귀.
적무린은 가만히 그 비수의 표면을 손으로 쓸어 보았다.
오돌토돌 만져지는 것이 나쁘지 않은 감촉이었다.
그는 혼자 있을 때면 습관처럼 이렇게 비수에 새겨진 글귀를 만져보곤 했다.
마침 눈송이 하나가 비수 위로 떨어져 내리더니 이내 사르르 녹아 없어졌다.
적무린이 고개를 들고 눈송이를 따라 하늘로 시선을 옮겼다.
그의 눈동자에는 모종의 그리움이 깃들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처음 뵌 게 오래도 됐군.’
대략 십 년 전이다.
조직에서 나이에 비해 뛰어난 실력을 인정받고 무척 이른 시기에 조장의 자리에 올랐다.
승급하는 순간 처음으로 혈사련주를 직접 대면했다.
적무린으로서는 이보다 더 큰 영광이 없었기에 아침부터 떨리는 가슴을 안고 행사에 참여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온통 혈사련주에 대한 동경어린 마음으로 가슴이 뛰었다.
물론, 당시의 혈사련은 강호에 공개되지 않은 조직이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제각각 흩어져서 활동하는 사파의 무리들을 하나둘 규합하고, 조금씩 세력을 키워 나가는 혈사련주는 그에게 있어서 그저 동경의 대상이었으니까.
그런데 행사에 참여해서 그를 대면한 순간, 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다른 것으로 가득 차 버렸다.
련주의 곁에서 차가운 눈빛으로 얌전히 서 있던 여인.
뇌쇄적인 눈빛에 도발적인 옷차림이었지만, 어딘지 모를 기품과 도도함이 그녀의 전신에서 우러나오고 있었다.
그녀를 처음 본 순간, 적무린은 허무극을 실제로 만나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말았다.
그토록 동경하던 련주를 직접 대면하는 자리였음에도, 그의 시야에는 온통 그 여인으로 가득 찼다.
련주는 그녀를 ‘홍묘’라고 불렀다.
‘홍묘…’
적무린이 그 별호를 속으로 뇌까리며 고개를 들었다.
차가운 눈발이 날아와 그의 얼굴에 닿았다.
어쩐지 이 시간, 홍묘는 자신과 비슷한 환경에서 뭔가를 그리워할 것만 같다.
그녀는 무척 차갑게 행동하는 여인이었지만, 마음에 담아 둔 무언가를 대할 때면 소녀와도 같은 심성을 보이곤 했다.
단지 흑요석이 예쁘다는 이유로 후원의 자갈을 전부 흑요석으로 바꿔 놓고 흡족해하던 여인이었으니까.
지금쯤 첫눈을 보며 소녀의 감성으로 또 무언가를 떠올릴 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게 나는 아닐 테지.’
적무린이 어딘지 씁쓸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직위로 따진다면 홍묘는 감히 자신이 함부로 마주할 수 없을 만큼 높은 위치였다.
그녀는 혈사련의 당주급 지위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적무린은 잠시 그녀의 호신위를 지낸 적이 있었다.
기간은 길지 않았다.
그가 무신대주로 발탁되기 직전의 일이었으니까.
대략 일 년 남짓한 기간이었다.
그 기간 적무린이 알 수 있었던 것은 홍묘가 외로움을 잘 타는 성격이라는 것이다.
겉으로는 차갑고 무정한 여인의 모습을 보이지만, 내면의 외로움이 무척 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홍묘는 자신에게 친구처럼 대하라고 일렀다.
실제로 나이는 적무린이 홍묘보다 조금 더 많았다.
하지만 위계 서열이 명백한 만큼 적무린은 그녀에게 말을 놓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녀의 집요한 요구를 이기지 못해 ‘하오체’를 쓰며 반 존대를 해왔다.
그러다가 대략 일 년 후 적무린은 무신대주로 발탁되었고, 그녀의 호위는 다른 사람이 맡게 됐다.
적무린은 단언할 수 있었다.
자신의 인생을 통 틀어서 그 일 년 남짓한 시간이 가장 행복했던 때임을.
한 번은 야밤에 홍묘와 산책을 할 때였다.
폭포수가 떨어져 내리는 개울가에 다다랐는데, 홍묘가 느닷없이 옷을 훌렁훌렁 벗어던진 것이다.
적무린이 당황해서 고개를 휙 돌리자, 홍묘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호신위가 눈을 돌리면 어쩌자는 거야? 끝까지 내 목숨을 책임지려면 두 눈 부릅뜨고 지켜봐야지.”
“하, 하지만… 홍묘님의 몸이…”
“그럼 적 대주는 내가 옷을 벗고 있을 땐 지켜 줄 수 없겠군.”
“그, 그렇진 않습니다!”
그때, 홍묘가 다가오더니 적무린의 뺨을 양손으로 잡고는 자신에게 돌렸다.
적무린은 눈을 크게 뜬 채로 꿈쩍도 할 수 없었다.
별빛에 비친 그녀의 나신은 정말이지 숨이 멎을 만큼 아름다웠다.
보석처럼 영롱하게 빛나는 그녀의 두 눈동자는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담아낼 수 있을 것처럼 맑았다.
그녀가 말했다.
“잘 봐. 나를. 지켜야지. 언제라도.”
“알겠…습니다.”
“그냥 편하게 말하래도.”
“괜찮습니다.”
홍묘는 피식 웃어 버리더니 적무린의 손에 뭔가를 쥐어 주었다.
적무린이 보니 비수였다.
“날 노리는 놈이 나타나면 가차 없이 이걸 날려 버리라고. 호신위라면 내 분신이나 다름없으니까.”
“알겠습니다.”
홍묘가 몸을 돌리고는 물속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몸짓 하나하나가 무척이나 황홀했다.
그날 적무린은 그녀가 물 밖으로 나올 때까지 잠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아니, 뗄 수 없었다.
그녀는 아름다웠다.
마치 별빛을 타고 내려온 선녀처럼.
‘참 오래도 지난 것 같군.’
잠시 회상에 잠겨 있던 적무린이 쓴 웃음을 지으며 다시 비수를 매만졌다.
그때였다.
갑자기 등 뒤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울리는 게 아닌가?
“그건 뭐지?”
흠칫 놀란 적무린이 얼른 몸을 일으키고는 돌아섰다.
그런데 바로 앞에 사비강이 서 있는 게 아닌가?
“엇?”
“줘 봐.”
사비강이 자연스럽게 손을 쑥 뻗더니 적무린의 손에 들린 것을 낚아챘다.
‘이렇게 간단히?’
확실히 사비강은 알면 알수록 놀라운 자다.
아무리 자신이 방심한 상황이라고는 하지만, 이렇게 쉽게 손에 든 비수를 빼앗길 줄이야.
사비강이 성큼 물러나서는 비수를 들고 이리저리 살폈다.
“호오, 반짝반짝 빛나는 비수로군. 비수가 이렇게 예쁘게 반짝여서야 쓸모가 없잖아. 자고로 비수란 칙칙하고 어두워서 눈에 잘 띄지 않아야 제 역할을 하는 법이라고. 뭐, 그런 사실을 적 조교가 모를 리는 없을 테고. 이건 그러니까 뭐 그렇고 그런 건가?”
“그렇고 그런 게 뭡니까?”
사비강을 따라온 추량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묻자, 사비강이 눈매를 휘며 말했다.
“왜 그런 것 있잖냐? 뭐, 가슴에 품고 있던 여인에게 선물을 받았다던가…?”
“오오! 무뚝뚝한 적 조교에게 그런 여인이 있단 말씀입니까?”
“그야 나도 모를 일이지. 본인에게 물어봐야지. 게다가 이거….”
사비강이 비수 한쪽 면을 찬찬히 살피면서 말했다.
“‘나의 분신에게’라니… 풋, 이거 너무 유치한 것 아니냐?”
사비강이 호들갑을 떨자, 적무린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저벅저벅 다가왔다.
“다 봤으면 가져가겠습니다.”
그가 신경질적으로 비수를 낚아채려는데, 사비강이 약 올리듯 훌쩍 물러났다.
“에이, 우리 사이에 뭘 부끄러워하고 그러나? 사람의 감정이라는 것은 숭고한 것이다. 그리 정색하면서 감추려고 하지 않아도 되느니라.”
“그만 돌려주시지요.”
“허참. 글쎄 내가 더 보고 주겠다니까.”
“뭐, 그럼 질릴 만큼 보고나서 주시죠. 전 먼저 가보겠습니다.”
적무린이 차갑게 웃어 버리고는 돌아섰다.
그런데 막 걸음을 옮기려던 그의 발끝에 뭔가 바스락거리면서 밟혔다.
“음…?”
적무린이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바닥을 보자, 종이 한 장이 보였다.
방금 사비강이 물러나는 것과 동시에 품에서 떨어진 모양이었다.
적무린이 무심코 종이를 펼쳐 들고는 중얼거리며 읽어 내려갔다.
“그곳에도 하얀 눈이 소복소복 내리는지 모르겠소. 여기는 눈이 내린다오. 온 세상이 하얗게 물들었다오. 마치 새하얀 화선지 같은 세상 위로 당신의 모습이 절로 그려지는구려. 끼니는 잘 챙기는지 모르겠소. 눈이 내려서일까? 오늘따라 왠지 당신 생각이 나서 붓을 들었소. 그러다 보니 당신이 이곳에 없는 게 더욱 실감나는구려. 이렇게 눈이 내릴 때면 당신의 그 풍만한 가슴에 얼굴을 묻고…”
쉬이이이잇!
순간 허공을 가르며 비수 한 자루가 날아들었다.
적무린이 얼른 몸을 젖히는 것과 동시에 손을 뻗으며 비수를 낚아챘다.
탁!
그가 사비강을 노려보며 싸늘하게 말했다.
“뭐하는 짓입니까?”
“뭐하는 짓이긴. 달라고 해서 줬을 뿐이야.”
“그렇군요. 그럼.”
적무린이 그대로 돌아서자, 사비강이 손을 뻗으며 소리쳤다.
“동작 그만.”
“또 뭡니까?”
“그건 놓고 가라.”
“이거 말입니까? 교관께서 쓰신 거요?”
“하하하하! 내가 썼을 리가!”
“하긴. 이런 유치한 연서를 교관께서 썼을 리가 없겠지요.”
“당, 당연하지! 그런 유치한 글을 내가 썼을 리가 없지!”
“한데 괜찮겠소?”
“뭐가 말이냐?”
“여기 적혀 있기에는 ‘내 사랑, 설란에게’라고…”
“닥쳐라악!”
쉬이이이잇!
깡!
순간 금속성과 함께 적무린과 사비강이 튕기면서 멀어졌다.
촤아아악!
두 사람이 반원을 그리며 가까스로 중심을 잡자 정자의 지붕 위에서 눈보라가 펄펄 일어났다.
추량이 얼른 두 사람을 피해 몸을 아래로 던졌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니 마치 정자 위에 하얀 꽃이 피어 있는 것만 같았다.
적무린이 싸늘하게 웃으며 물었다.
“갑자기 왜 이러는 겁니까?”
“몰라서 묻냐? 네놈이 자꾸 그 연서를 읽어대니 그런 것 아니냐?”
적무린이 이맛살을 구기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해가 안 되는군. 이건 교관께서 쓴 연서가 아니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물, 물론이지. 내가 그렇게 유치한 걸 쓸 리가 없지.”
“그런데 왜 이렇게 난리를….”
“나는 닭살 돋는 이야기를 들으면 흥분하는 병이 있다. 그러니 그걸 내 앞에서 읽지 마라.”
“뭐, 알겠습니다. 그런데 정말 괜찮습니까?”
적무린이 묻자 사비강이 눈살을 구겼다.
“뭐가 말이냐?”
“이 내용대로라면… 누군가 매설란 국주에게 연서를 보낸 것인데….”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지.”
“하긴. 그럼 이건 돌려드리겠소.”
“그래, 고맙… 아니, 애초에 내 것이 아닌데 뭘 돌려준다는 거냐?”
“그랬지. 그럼 버리지요.”
적무린이 피식 웃고는 종이를 던지자, 사비강이 냉큼 보법을 밟더니 정자 아래로 뛰어내려 종이를 낚아챘다.
그러고는 쫙쫙 찢어발기더니 입안에 넣고 우적우적 씹어 삼키는 것이 아닌가?
그 모습을 추량이 멍하니 지켜보았고, 적무린은 헛웃음을 짓고는 어디론가 걸음을 옮겼다.
사비강이 괜히 추량을 향해 버럭 소리쳤다.
“난 이런 유치한 글을 보면 찢어서 삼키지 않으면 속이 안 시원해서 말이다.”
“헐. 사부님. 저한테는 솔직하셔도 돼요.”
“젠장.”
사비강이 이내 풀 죽은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적무린을 놀려보려다가 오히려 된통 당한 게 아닌가?
추량이 마른 침을 삼키고는 물었다.
“설마… 적 조교가 읽은 내용이 전부 사실입니까? 정말 그렇게 쓰신 겁니까?”
사비강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다만.”
“그럼… 안 보내는 게 역시 더 낫겠군요.”
“지금 내 문장력을 무시하는 거냐?”
사비강이 도끼눈을 하자 추량이 입술을 씹으며 웃음을 참았다.
‘그건 이미 문장력의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만.’
한편, 신생각에서 한참 멀어진 적무린에게는 또 다른 그림자가 다가왔다.
“적 조교.”
돌아보니 뜻밖에도 련주의 호신위인 흑효였다.
“무슨 일입니까?”
“련주께서 부르시오.”
“련주께서…?”
적무린이 미간을 찡그리고는 흑효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