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4
귀환 마교관
314화
사락사락.
첫눈이 내린다.
하얗게 눈 덮인 지붕 위로 소복소복 첫눈이 쌓여 간다.
세상의 모든 소리를 집어삼킨 듯 주변은 고요하고 적막하기만 하다.
처마 끝에 걸터앉은 서래향은 고개를 들고 자신의 얼굴에 달라붙는 눈송이의 촉감을 느꼈다.
차갑다.
하지만 첫눈은 언제나 맘 한편을 설레게 한다.
‘그때도 첫눈이 내리던 날이었지.’
허무극을 처음 보았던 날이다.
부모님과 함께 산을 넘어가다가 도적 떼를 만났다.
그 자리에서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자신을 지키려다가 목숨을 잃었다.
도적들은 자신을 유린한 다음 노예로 팔아치우자고 했다.
거칠게 저항했지만 어른들의 억센 손길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치욕을 당하려는 순간, 그가 나타났다.
하얀 눈을 밟으면서 조용하고 냉엄한 표정으로 도적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긴 말은 필요 없었다.
칼을 들고 위협하던 도적들은 그의 일수에 모두 목을 잃고 싸늘한 주검이 되고 말았다.
허무극은 벌레를 죽인 것처럼이나 무심한 표정으로 자신의 앞을 지나쳐 갔다.
그를 붙들었다.
허무극은 차가운 눈동자로 자신을 돌아보았다.
이대로 산속에 버려지면 동상이 걸려 죽거나, 굶어죽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따라가고 싶다고 말했다.
허무극은 한참이나 자신을 보다가 예의 그 무심한 표정으로 말을 뱉었다.
“나를 따르면 혈로를 걷게 될 것이다.”
상관없다고 했다.
어차피 더 이상 희망은 없었다.
단지 그 순간 자신이 느낀 것은 이 남자를 따라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 후로 많은 일이 있었지.’
첫눈 때문일까?
그간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허무극으로부터 악착같이 무공을 익히던 나날들.
그리고 그의 야망을 이루기 위해 다짐했던 순간, 그와 함께 대업을 도모하기 위해서 애썼던 시간들, 그와 함께 적을 베며 활약했던 날들.
그리고… 그의 품에 처음으로 안겼던 날까지.
수많은 날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하지만 지금… 당신은 내 옆에 없군요.’
서래향이 조금은 쓸쓸한 눈으로 옆자리에 소복이 쌓인 눈을 손으로 쓸어 만졌다.
잠시 후 그녀가 품에서 새까만 흑요석을 꺼내 보았다.
천상궁에 머물던 시절.
자신의 거처 후원에 잔뜩 깔아놓았던 것이 바로 이 흑요석이었다.
그리고 이건 얼마 전 천신교를 토벌하고 돌아온 매설란이 전해 준 것이었다.
‘아마도 무린이겠지.’
피식 웃음이 나왔다.
가끔 보면 그는 성격과 어울리지 않게 섬세할 때가 있다.
기분이 조금 좋아진 그녀가 벌떡 일어났다.
‘모처럼 첫눈이니까 보고도 할 겸 련주님께 전서라도 보낼까?’
그녀가 훌쩍 뛰어내려 눈길을 걷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서신을 적을 생각을 하니 괜히 맘이 설레었다.
**
“첫눈이군.”
허무극이 창밖을 응시하며 가만히 중얼거렸다.
그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옹기승과 구강룡.
그 두 사람이 하필이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비강과 함께 있다.
어떻게든 이 껄끄러운 상황에 종지부를 찍어야만 하리라.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앉은 류여중이 조용히 웃음을 머금었다.
“첫눈에 얽힌 사연이라도 있습니까?”
“그런 것 따위 있을 리가.”
“모처럼 감상에 젖으신 것 같아서 여쭤 보았습니다.”
“그랬나? 과연 군사의 눈은 속이기 힘들군.”
“일부러 감추려 하지 않으시는 거겠지요.”
류여중의 대답에 허무극이 툴툴 웃으며 찻잔을 들었다.
따뜻한 차가 목 줄기를 타고 부드럽게 넘어갔다.
“그 아이를 처음 만났을 때, 첫눈이 내렸네.”
“그랬군요.”
류여중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 아이가 누군지 묻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었기에.
허무극이 이렇게 친근하게 표현할 수 있는 상대는 많지 않았다.
반면 허무극은 류여중의 반응을 물끄러미 보면서 피식 웃었다.
“과연 군사는 냉철하군.”
“왜 그리 생각하십니까?”
“전혀 별개의 이야기로 듣고 있으니까. 보통 감정이란 것은 전염되기 마련인데, 자네는 지금 나와 전혀 다른 공간에 홀로 앉아 있는 것 같군.”
“그것이 군사의 자질이겠지요.”
언뜻 광오한 말처럼 보이겠지만, 류여중은 차분하게 대꾸했다.
그가 생각한 그대로였기에 굳이 숨길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허무극이 두 눈에 이채를 띄며 물었다.
“자네는 내가 지나치게 감상적이라고 생각하나?”
“대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그 아이를 생각할 때만은 감상적이다?”
“그렇습니다.”
류여중이 다시 빙그레 웃어보였다.
하지만 허무극은 잘 알고 있었다.
류여중이 누구보다 냉철한 인간이라는 것을.
지금 보이는 저 웃음의 이면에는 그저 자신의 주인에 대한 ‘예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어떠한 감정도 없이 얼굴의 주름을 만들어 짓고 있는, 의미라고는 전혀 없는 웃음이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나는 가끔 자네가 불편하네.”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래서 자네가 더욱 편하기도 하네.”
“감사합니다.”
“자네는 늘 한결 같거든.”
“…….”
“자네가 지난번에 제안했던 것… 충분히 생각해 보았네.”
류여중이 찻잔을 들다가 멈칫하고는 허무극을 바라보았다.
허무극은 여전히 시선을 창밖으로 두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길고 긴 침묵이 눈송이처럼 내려앉았다.
소복. 소복.
마침내 허무극의 무거운 목소리가 열렸다.
“며칠 전에 일이 있었네.”
“그렇습니까?”
“그랬지.”
허무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잘 되지 않았네. 자네에게는 특별히 말하지 않고 진행했던 일일세.”
“그런 것 같군요.”
“기분 나쁜 것은 아닐 테지?”
“그럴 리가요. 전 련주님의 판단에 이의를 제기하진 않습니다.”
허무극이 피식 웃어 버리고는 말을 이었다.
“어쨌거나 그 일을 성공한 뒤에 뭐라도 하고 싶었네만….”
“실패… 하셨습니까?”
허무극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찻잔을 들이켰다.
그가 다시 창밖을 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해서 이젠 자네 말을 잘 들으려고.”
농처럼 들리는 그 말에 류여중은 예의 그 형식적인 미소를 지어보였다.
“자네 말대로 그 아이에게….”
“…….”
“선물을… 보낼 걸세.”
류여중이 찻잔을 내려 두고는 다시 한 번 멈칫거렸다.
그가 고개를 들고 허무극을 보았다.
“진심이십니까?”
“그렇네. 난 언제나 그 아이를 대할 때면 진심이었네.”
“…옳은 결정이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고맙네.”
허무극이 고개를 돌려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하얀 눈이 소복소복 쌓여 갔다.
그때 그날처럼.
‘그 아이를 처음 본 날처럼.’
**
촤르르르륵!
사슬낫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갔다.
까라라랑!
옹기승의 검과 부딪치면서 불꽃이 마구 튀어 올랐다.
기다란 사살은 옹기승을 둘둘 감으면서 옭아맸다.
곧이어,
타앗!
사슬을 밟고 달려간 유송령이 빠른 속도로 달려갔다.
옹기승이 얼른 몸을 회전했다.
팽이처럼 돌아간 그가 마지막 순간 바닥을 툭 찍으며 솟아올랐다.
유송령 역시 그대로 사슬을 박차고는 창공으로 훌쩍 날아올랐다.
“하앗!”
“이엽!”
따당! 깡!
청명한 금속성과 함께 두 사람이 창공에서 어우러졌다.
불꽃이 터졌다.
하얀 눈이 떨어지고, 붉은 불꽃이 떨어졌다.
퍼엉!
두 사람이 동시에 일장을 주고받으면서 멀어졌다.
촤아아악!
눈보라를 일으키며 두 사람이 멀찍이 물러났다.
석탄강은 얼른 유송령의 등을 받쳐 그녀가 더 미끄러지지 않도록 보조했다.
옹기승이 감탄한 표정으로 말했다.
“대단하군. 두 사람의 합격술이 이 정도의 경지에 올랐을 줄은 몰랐어. 계속한다면 내가 밀렸겠군.”
빈말이 아니었다.
옹기승은 진심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흑치신마의 기운을 온전하게 흡수한 후로 그는 무공 실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하지만 석탄강과 유송령이 합격술을 펼치면 겨우 막아낼 수 있을 정도에 불과했다.
즉, 두 사람의 합격술은 초절정의 초입에 든 고수 정도는 거뜬히 상대할 정도로 숙달됐다는 뜻이다.
예전의 석탄강이었다면 아마 그러한 평가에 자존심이 상했을 지도 모른다.
그는 오롯이 자신의 힘만으로 옹기승과 겨루고 싶어 했으니까.
하지만 지금 그는 별로 기분 나쁘지 않았다.
이제는…
‘어딜 가도 너와 떨어질 생각은 없으니까.’
석탄강이 유송령의 어깨를 꽉 움켜잡았다.
“아얏, 뭐야? 왜 그래?”
유송령이 눈살을 구기며 따지자, 당황한 석탄강이 얼른 손을 뗐다.
“아, 미안.”
“어쨌든 호흡이 점점 맞는 것 같아서 다행이야.”
“그래.”
“이제 우리만의 특기를 만들어 볼까?”
“특기라면?”
“일종의 필살기 같은 것 말이야. 숨겨 둔 기술이라고나 할까?”
“흐음… 숨겨 둔 기술이라….”
“물론 이 필살의 기술은 매우 강해야겠지. 그런 만큼 쉴 틈 없이 수련해야 할 거야. 하루 종일 같이 붙어 있어야 할 거고.”
“좋다. 만들자.”
석탄강이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그 모습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자가 있었으니….
“녀석들. 좋오을 때다.”
바위에 걸터앉은 사비강이 푸념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런 그의 곁으로 등자경이 말없이 다가와 빙그레 웃었다.
“저 좋은 그림을 만든 게 바로 교관님 아니십니까?”
“내가?”
“저 두 사람에게 합격술을 권유하셨잖아요. 그리고 석탄강의 사슬낫도 교관님 덕분에 생긴 거고요.”
“뭐, 따지고 보면 그런 셈인가?”
“교관님이 오신 후로 많은 것이 바뀌었습니다.”
“바뀌어야지. 그러려고 온 거니까.”
“왜 그렇게 우리를 바꾸려고 하시는 겁니까?”
“앞으로 닥칠 일에 대비해서다.”
“앞으로라….”
찰나지간,
쉬이이잇!
등자경이 품에서 단검을 꺼내는 것과 동시에 사비강의 가슴을 찔러 갔다.
탁.
등자경의 눈이 퉁방울처럼 커졌다.
‘손, 손으로…?’
사비강이 손바닥을 내밀어 단검을 막은 것이 아닌가?
마치 나무젓가락을 손으로 막은 것처럼이나 태연한 동작이었다.
사비강이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등자경을 노려보았다.
“너 이 새끼…”
“하하… 하… 방심하신 것 같기에…”
사비강의 표정이 무섭게 꿈틀거렸다.
‘젠장, 화나신 건가?’
등자경의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마침내 사비강의 입이 열렸다.
“…누군데 날 암살하려는 것이냐?”
“…예?”
“네놈이 누구기에 날 죽이려고 하는 거냐? 분명히 살기를 읽었다. 발뺌할 생각은 마라.”
등자경이 멍하니 사비강을 보았다.
다음 순간 그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표정으로 외쳤다.
“정말 너무하십니다! 저 등자경이라고요!”
“등자경?”
“사부님은 모르시겠지만, 예전에 암살 계획도 세웠었고… 또 얼마 전엔 수업 중에 사부님께 질문도 했습니다! 너무 무관심한 것 아닙니까?”
“흐음.”
사비강이 단검을 뺏어 들더니 칼끝으로 뒤통수를 벅벅 긁으며 대꾸했다.
“기억 안나.”
“윽. 정말 너무하십니다!”
“뭐, 미안하다만 네 존재감을 더 키워 보도록 해라.”
“제길! 두고 보십시오! 사부님의 목을 따는 사람은 제가 될 테니까요!”
등자경이 연신 씨근거리면서 걸음을 돌렸다.
사비강이 어깨를 으쓱이고는 고개를 꺾어들었다.
하얀 눈이 내리고 있었다.
‘왠지 눈을 보니… 설란이 그립군.’
정도맹에도 이 눈이 내리고 있을까?
마침 하얀 눈 너머로 정자가 보였다.
그리고 정자의 처마 끝에 앉아 있는 사람도 보였다.
“저 녀석은…”
적무린이었다.
그가 어딘지 그리움을 담은 시선으로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작은 비수 한 자루가 들려 있었다.
마침 추량이 사비강 곁으로 다가왔다.
“뭐 하십니까, 사부님?”
“쉿. 따라와라.”
사비강의 표정에 짓궂은 미소가 감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