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2
귀환 마교관
312화
레드 드래곤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옹기승의 몸에서 솟아 나온 악마를 보았다.
- 뭔가? 이 하찮은 악의 종자는?
“글쎄. 뭐 일단은 저 녀석의 몸에 기생하는 놈이랄까?”
사비강이 베르타스를 들어 옹기승을 가리키며 대꾸했다.
옹기승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의식을 잃은 사람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한편 옹기승의 몸에서 솟아 오른 미지의 존재는 기가 찰 노릇이었다.
운이 좋아 인간의 몸에 빙의할 기회가 생겼는데, 어찌 된 것이 눈앞에 드래곤이 흐느적거리고 있다니!
게다가 저 재수 없게 생긴 녀석과 함께 노닥거리면서 자신에게 이런 치욕을 안겨주다니!
- 기생이라니… 감히 하찮은 인간 주제에 그딴 막말을…!
후우우웅!
순간 레드 드래곤이 지하 천장을 가득 채울 듯 솟구쳐 오르면서 날갯짓을 했다.
그러자 사방으로 뜨거운 바람이 강하게 불어 나갔다.
그 기세에 눌린 미지의 존재가 여섯 개의 눈알을 부릅뜨며 레드 드래곤을 노려보았다.
레드 드래곤은 여전히 나른한 표정으로 물었다.
- 하면 너는 무엇인가?
광오한 표정으로 질문을 던져 오는 레드 드래곤을 보면서 미지의 존재는 희미한 침음을 흘렸다.
레드 드래곤의 위압감이 상당했지만 이대로 기가 죽을 수는 없는 일.
미지의 존재가 더욱 기세를 키우며 당당하게 대답했다.
-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어둠으로 하늘을 다스리고, 피로 바다를 다스리며, 오욕으로 인간을 다스리고, 흉포함으로 만물을 다스리는 흑치신마(黑治神魔)라고 하노…!
덥석!
어느새 날아오른 레드 드래곤이 커다란 입으로 흑치신마의 머리통을 씹어 삼켰다.
그 바람에 연기처럼 흐느적거리던 흑치신마의 머리 세 개가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다시 사비강의 배후로 돌아온 레드 드래곤이 입맛을 다시며 무심한 듯 중얼거렸다.
- 수다스러운 녀석이군.
“어쨌든 흑치신마라는군. 알고 있는 자인가?”
사비강의 물음에 레드 드래곤이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 모른다. 그깟 하찮은 악의 종자 따위는.
그러는 사이 머리를 잃었던 흑치신마는 다시 뭉게뭉게 목덜미 부분부터 피어오르더니 세 개의 머리가 형성됐다.
흑치신마가 분노 가득 찬 음성으로 소리쳤다.
- 노옴! 이게 뭐하는 짓이냐!
영혼을 울리는 그 고함소리가 어찌나 큰지 구강룡은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을 뻔했다.
하지만 레드 드래곤의 가호를 받고 있는 사비강으로서는 그저 조금 큰 목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레드 드래곤이 눈을 가늘게 뜨자 살기 서린 광풍이 휘몰아쳤다.
휘이이이잉!
그 위압감에 큰소리를 쳤던 흑치신마도 움찔거리면서 말을 더듬었다.
- 무, 무슨 짓을 하려고…!
- 신이 되지 못해 타락한 악마 따위에게 무슨 짓을 하겠는가? 그저 하찮은 종자의 도발에 코웃음이 나올 뿐이다.
- 흥! 그대야말로 신이 되지 못한 용족이 아닌가?
- 웃기는 소리. 드래곤은 그 자체로 완전체. 감히 신도 함부로 대하지 않는 우리 일족을 멸시한다면 더는 참지 않겠노라.
레드 드래곤의 말끝에 다시 한 번 강한 기풍이 후웅, 불어 닥쳤다.
흑치신마가 어금니를 빠득 가는데, 마침 사비강이 저벅저벅 걸음을 옮기더니 옹기승의 뒤로 돌아갔다.
- 노옴, 무슨 짓을 하려고…!
흑치신마가 사비강을 향해 내려가려는 순간,
- ……!
흑치신마는 전신이 사슬에 묶이기라도 한 것처럼 꿈쩍도 할 수 없었다.
세 개의 머리 중 하나가 돌아보니, 레드 드래곤의 전신에서 쏟아져 나오는 의념이 그를 사슬처럼 옭아매고 있었던 것.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도 존재 자체를 지워 버리겠다는 강렬한 의지가 레드 드래곤의 두 눈에서부터 느껴졌다.
그러는 사이 사비강이 옹기승의 등을 향해 양손을 뻗으며 공력을 전수하기 시작했다.
- 무슨 짓을 하려는…!
하지만 흑치신마는 말을 마무리 짓지 못했다.
옹기승이 울컥 피를 토하는 것과 동시에 눈을 허옇게 뒤집으면서 고개를 젖혀 들었다.
동시에 딱 벌어진 그의 입속으로 검푸른 기운의 흑치신마가 빨려 들어가듯 빠르게 흡수되는 것이 아닌가?
슈우우우욱!
팟!
마침내 흑치신마가 모습을 감추자 허공에 유유히 떠 있던 레드 드래곤 역시 사비강의 몸으로 스르르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구강룡은 이 모든 광경을 그저 넋을 놓은 채 바라볼 뿐이었다.
사비강과 옹기승은 여전히 나란히 선 채로 꿈쩍도 하지 않았다.
**
옹기승은 몸을 둥글게 말고 물속에 떠 있었다.
무척 편안한 꿈이었다.
태곳적 엄마의 뱃속에서 떠다닐 때와 같다고나 할까?
기억은 나지 않지만 분명 그때가 지금과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때 그의 귓가에 아스라이 목소리가 들렸다.
- 승아.
옹기승은 그 목소리를 무시했다.
지금 이 순간이 그 어느 때보다도 안온했기에.
하지만 목소리는 집요했다.
- 승아, 일어나라!
마지막으로 귓가를 때린 목소리는 무척 다급했다.
그동안의 평온이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갑작스러운 불길함이 밀려들면서 옹기승이 눈을 번쩍 떴다.
“승아! 정신이 드느냐?”
“어… 머니?”
“그래, 어서 이 창문으로 달아나도록 해라!”
“어머니… 무슨 일이에요?”
“그들이 널 찾으러 왔다. 명심해라. 절대로 넌 그곳으로 끌려가선 안 된다.”
“어머니!”
“어서 가라! 꼭 살아….”
콰당!
순간 거친 소리와 함께 문이 벌컥 열렸다.
그곳으로 복면을 쓴 무인들이 한 가득 몰려왔다.
복면인들은 어머니와 어린 구기승을 번갈아보더니 곧 눈을 빛내며 달려들었다.
“꺄악!”
순식간에 어머니가 목숨을 잃었다.
구기승의 멍한 얼굴 위로 어머니의 피가 튀었다.
그리고…
‘기억이 나지 않는다.’
구기승이 다시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을 때는 자신의 양손이 피로 물들어 있었다.
사방에 피투성이가 된 시신이 널브러져 있었다.
마침내 문이 벌컥 열리면서 아버지가 달려왔다.
“부인! 승아!”
아버지는 바닥에 쓰러진 어머니를 보고는 얼른 안아 일으켰다.
곧이어 어린 구기승을 끌어안으며 소리쳐 물었다.
“괜찮으냐? 다친 곳은 없느냐?”
“없…습니다.”
구기승은 멍하니 대답했다.
이제 겨우 다섯 살이 된 아이였다.
아버지는 주변에 쓰러진 시체들을 당황한 표정으로 둘러보았다.
그리고 양손을 피로 물들인 구기승을 보았다.
‘그래… 이때부터였어. 아버지는 내게 어떠한 무공도 익히지 못하게 하셨지.’
신기하게도 과거를 다시 겪고 있으면서도 자아만큼은 성인이 된 옹기승으로서 생각하고 있었다.
이날 아마도 처음으로 마령혼이 나타난 순간이리라.
다섯 살짜리 꼬마가 맨손으로 마교의 잔당들을 쓸어버렸다고 한다면 그 누구도 믿지 못하리라.
‘마령혼… 대체 어떤 녀석일까?’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는데 갑자기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 궁금하다면 직접 만나보아라.”
고개를 들어 보니 아버지가 우뚝 일어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아버지의 얼굴은 점점 묘하게 일그러지면서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다.
‘교관…님?’
분명 자신을 빤히 마주보는 자는 사비강이었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자신도 성인이 된 옹기승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수면신공으로 자아를 억누르고 자연의 흐름을 따라 심마를 멀리하는 것은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회피할 수만은 없는 것이 너의 운명. 이제는 직접 부딪치고 꺾어야 할 때다. 그렇지 않으면 네 몸에 잠든 마령혼은 언제까지나 너를 괴롭힐 거다.”
사비강의 말에 옹기승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물었다.
“마령혼은 초절정 고수였던 련주조차도 두려워한 존재입니다. 한데 제가 그런 마령혼을 상대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이지.”
너무나 간단한 대답에 옹기승은 오히려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옹기승이 물었다.
“어째서…?”
“내가 있으니까.”
“예?”
“내가 널 가르치는 한, 넌 무적이다.”
그야말로 광오한 대답.
하지만 그래서인지 더욱 안심이 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옹기승이 마음을 굳히고 물었다.
“제가… 어떻게 하면 그 녀석을 상대할 수 있습니까? 그 마령혼이라는 녀석을!”
“그걸로 됐다.”
“무슨…?”
“네 마음이 녀석을 진심으로 마주하겠다고 생각했다면, 놈은 곧 나타날 것이다.”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 겁니까?”
“글쎄. 이곳은 너의 심연이다. 심마가 자리 잡기에 가장 좋은 곳이기도 하지. 그런 만큼 그 녀석은 아마도 네가 가장 원망하는 존재의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겠느냐?”
“그렇다면 역시… 련…”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짝이 거칠게 부서지면서 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옹기승!”
안광을 빛내며 나타난 자는 다름 아닌 련주였다.
“역시!”
옹기승이 검을 콱 움켜쥔 채로 허무극을 빤히 노려보았다.
허무극이 차갑게 조소했다.
“애송이 주제에 날 상대하려는가?”
“더 이상 네놈을 피하지만은 않겠다!”
파앗!
쒸이이잇!
그야말로 전광석화와 같은 몸놀림.
옹기승은 스스로 몸을 날려 가면서도 놀라고 있었다.
‘내가 이렇게 빨랐나?’
아니다.
어렴풋하지만 알 수 있다.
이건 온전히 자신의 힘이 아니라는 것을.
그렇다.
사비강이 도움을 주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심연에서 좀 더 수월하게 싸울 수 있도록 공력을 주입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이 정도의 지원이 있다면 련주가 아닌, 그 무엇이라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피츗!
허무극이 간발의 차이로 몸을 비틀면서 검을 피해냈다.
그의 옆구리에서 피가 터졌지만, 치명상은 아니었다.
하지만 흐름이 나쁘지 않았다.
옹기승은 그대로 여세를 몰아가면서 허무극의 목을 베어갔다.
“헉!”
허무극이 깜짝 놀라면서 허리를 젖혔다.
그 순간, 옹기승은 그대로 검의 손잡이를 거꾸로 쥐더니 수직으로 내리꽂았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정교한 움직임이었다.
푸욱!
섬뜩한 파육음과 함께 검신이 그대로 허무극의 심장을 짓쳐들면서 꿰뚫었다.
“크억!”
허무극이 입을 딱 벌리면서 비명을 터뜨렸다.
그의 가슴에서 검붉은 피가 배어 나오면서 서서히 번져 나갔다.
‘이렇게나 간단히…!’
옹기승은 스스로도 놀랄 정도였다.
허무극은 그대로 바닥에 드러누웠다.
그가 옹기승을 올려다보며 힘겹게 말을 꺼냈다.
“과연… 대단하군. 하지만… 너는 여전히 스스로를 속이는구나.”
“무슨 말이지?”
“네놈이 가장 원망하는 존재… 과연 나였더냐? 쿠쿠쿡. 쿡쿡. 크하하하하!”
허무극이 느닷없이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다음 순간, 검에 꿰뚫렸던 허무극이 타고 남은 재처럼 흩어지면서 스르르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곧이어,
쉬이이이잇!
옹기승의 등 뒤에서부터 매서운 바람이 불어 닥쳤다.
위기감을 느낀 옹기승이 황급히 돌아보았지만, 이미 상대의 검이 그의 복부를 내찌르고 있었다.
푹!
“커헉! 어… 머니?”
“크하하하!”
어머니의 입에서 여인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걸걸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마령혼의 것이었다.
옹기승의 눈동자가 격하게 떨려 왔다.
‘내가 가장 원망한 존재…! 그랬던가? 난 스스로를 끝까지 속이고 있었던가?’
어머니의 얼굴이 세 갈래로 갈라지면서 흑치신마의 얼굴이 겹쳐졌다.
어머니가 손을 뻗어 왔다.
“이제 그만 얌전히 내 먹이가 되어라.”
성별을 구분하기 힘든 목소리가 심연의 공간에 가득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