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7
귀환 마교관
307화
저만치 언덕 위로 흑운성의 하단성문이 보였다.
벌써 한바탕 싸움이 일어난 것인지 흑운성에서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가 자욱하게 하늘을 덮고 있었다.
“쯧…!”
허무극이 혀를 차고는 걸음을 옮겼다.
생각보다 늦었다.
구강룡과 약속한 시간에 도착하려면 벌써 한 식경 전에는 왔어야 했다.
그런데…
‘백호당주…’
허무극은 눈살을 찌푸리고 백호당주 추희룡을 떠올렸다.
그가 막 천상궁을 벗어나려고 할 때, 백호당주와 적무린이 찾아온 것이다.
얼마 전 응천 분타에서 있었던 천신교 소탕 문제 등에 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데 지금 돌이켜보니 딱히 중요한 내용은 없지 않나?
‘괜히 시간을 낭비했어.’
그렇다고 해서 흑운성에 가야 한다는 사실을 그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구강룡과의 약속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비밀이었으니까.
‘아무에게나 보일 수는 없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자신만의 비전 절공.
그것은 바로 뇌전흡살공이었다.
그리고 지금 뇌전흡살공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히 필요한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저벅저벅.
허무극은 거침없이 발걸음을 옮겨갔다.
그는 이때까지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백호당주와 적무린이 갑자기 그를 찾아온 이유에 대해.
그것이 모두 사비강의 계략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저 흑운성 안에서 벌어진 일이 그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도.
**
“끄윽…!”
“아야야…!”
부상당한 신생조원들이 여기저기서 앓는 소리를 냈다.
“제길, 살살 좀 합시다. 이러다 죽겠소!”
백공보가 천을 둘둘 감아 주며 지혈하는 추량에게 버럭 소리 질렀다.
그러자 추량의 품에서 반묘가 훌쩍 튀어나오더니 털을 곤두세우며 가르릉 거리는 것이 아닌가?
“음…?”
백공보가 반묘를 보고는 눈썹을 팍 일그러뜨렸다.
“뭐야, 이 녀석은?”
“신경 쓸 것 없소. 내 애완동물이오. 그리고 애초에 당신들이 이렇게 멋대로 수업에 불참하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당하지 않았을 것 아니오?”
추량이 반묘를 쓰다듬으며 안아들자 백공보가 침을 탁 뱉고는 중얼거렸다.
“흥, 계집애처럼 애완동물이라니.”
추량이 내심 발끈했지만 곧 몸을 휙 돌리고는 다른 부상자에게 다가갔다.
그때였다.
“다들 여기서 뭐하는 건가?”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신생조원들은 물론 추량도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어느 틈에…!’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기척조차 없었는데, 어느새 혈사련주 허무극이 지척까지 다가와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게 아닌가?
조장 맹가숙이 엉거주춤 일어나 예를 갖추고는 대답했다.
“동료가 위험에 빠졌다는 소식에 달려왔습니다.”
허무극이 맹가숙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차갑게 웃으며 물었다.
“그래서 동료는 구한 건가?”
“한 명은 구했으나….”
맹가숙의 시선이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져 있는 석탄강에게 향했다가 다시 허무극을 돌아보았다.
“다른 한 명은 아직입니다.”
그때 눈치 빠른 등자경이 얼른 일어나며 소리쳤다.
“흑운성 상단에 옹기승이 잡혀 있습니다! 부디 련주님께서 그를 구해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옹기승을 구해 주십시오!”
맹가숙 역시 등자경의 의도를 눈치 채고는 얼른 고개를 숙이며 부탁했다.
다른 신생조원들 역시 그에게 한 목소리로 부탁했다.
이들이 이렇게 나오는 이유는 단 한 가지.
옹기승이 사로잡혀 있음에도 이곳에서 태연하게 부상이나 돌보고 있다는 위화감을 최소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자칫 이곳에 사비강이 미리 와 있다는 것이 들켜서는 안 되므로.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사비강은 자신이 이곳에 미리 와 있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말라고 했으니까.
그때까지만 해도 이런 곳을 찾아올 자가 누가 있기라도 하겠나, 하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거짓말처럼 련주 허무극이 나타난 것이다.
한편, 허무극은 신생조가 간곡히 부탁을 해오자 별다른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옹기승이 누구에게 잡혔다는 건가?”
“구강룡, 그 자식의 소행입니다!”
“그렇습니다! 구강룡이 자신을 따르는 자들을 이용해서 옹기승을 죽이려고 합니다!”
방각과 유송령이 이를 갈며 소리쳤다.
허무극은 두 사람을 잠시 바라보다가 물었다.
“한데 자네들이 이곳에 왔음에도 사비강 교관은 오지 않았다?”
“그자는 우리가 어떻게 되든 말든 상관하지도 않을 겁니다.”
“귀찮은 건 딱 질색이라고 생각하는 교관이지요!”
마지막으로 허무극의 시선을 받은 추량이 얼른 대답했다.
“사부님은 절 먼저 보내서 신생조를 돕게 하셨습니다. 다른 볼일이 있으셔서 후에 오신다고 했습니다.”
어찌 보면 추량만큼은 사비강을 대신해 변명을 하는 모양새였다.
때문에 허무극도 더 깊이 생각하는 대신 피식 웃어 버릴 뿐이었다.
“내 직접 가보지. 나 역시 구강룡을 달래기 위해 온 것이니. 자네들은 몸을 회복하는 대로 본련으로 복귀하라.”
“명 받들겠습니다!”
신생조원들이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게 허무극이 하단성의 성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본 신생조원들은 가까스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마침 도비천이 툴툴 웃음을 흘렸다.
“왜 웃냐?”
맹가숙이 고개 돌려 묻자 도비천이 저만치 하단성 성문을 보며 말했다.
“웃기지 않아? 우리는 지금 련주를 속이고 교관의 말을 따르고 있는 거라고. 뭐, 원래부터 우리가 혈사련에서는 눈 밖에 난 개망나니였지만… 언제 이렇게 교관을 위해 거짓말까지 하게 됐나 싶어서 말이야.”
그의 말에 모두 잊고 있었던 것을 상기한 듯 당혹감에 빠졌다.
그러고 보니 자신들은 지금 련주를 속이고 사비강의 말에 따른 것이 아닌가?
사실, 련주를 속인 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원래 자신들은 련주든 누구든 상부의 지시에 비협조적으로 나온 탓에 신생조로 미끄러진 자들이니까.
다만, 련주를 속인 이유가 사비강의 명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새삼스럽게 다가온 것이다.
백공보가 콧방귀를 뀌며 소리쳤다.
“흥! 누가 교관의 명이라서 따른 건가? 난 그저 이 상황이 재미있어서 좀 더 지켜보기로 한 것일 뿐이라고!”
“나, 나도! 난 절대 교관을 위해 련주를 속인 게 아니다. 그저 내가 재미있어서 그런 거지!”
“나도.”
“나도.”
뒤늦게 신생조원들이 공감을 나타냈지만, 그들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이미 깨닫고 있었다.
‘어느 틈엔가 그 교관의 말을 듣고 있었군.’
반면 이런 신생조의 변화가 반가운 사람도 있었다.
‘흐흐흐. 너희들은 이미 교관님의 마수에 걸려든 거라고.’
추량이 입술을 비집고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부상자의 팔에 천을 감았다.
**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허무극은 중단성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면서 눈살을 찌푸리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온통 시커먼 잿더미만 풀풀 휘날리는 공터.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곳의 성벽 쪽으로는 각종 전각들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한데 지금은 온통 잿더미만 풀풀 휘날리고 있지 않은가?
훌렁 타고 남은 잔재들을 보면 화마가 휩쓴 지 며칠은 지난 것만 같다.
‘흐음. 구강룡 이 녀석 도대체 얼마나 난장을 부린 거야?’
이 정도 되면 아마도 구강룡을 따르는 자들도 상당했을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큰 난리를 피웠을 리는 없으니까.
그러고 보니 구강룡에게 특임을 맡기고 떠나보낸 게 벌써 일 년 정도가 지났다.
나름 공들인 계획은 제대로 먹혀든 셈이다.
적어도 선천마령지기를 봉인하기 위해서 마령교를 흑운성까지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으니까.
“……!”
중단성으로 들어선 허무극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지간한 일에는 별로 놀라지도 않는 그였지만, 눈앞에 펼쳐진 참상은 그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상단성으로 이어지는 계단은 정중앙에서 세로로 쫙 갈라져 있었고, 거기에서 솟아오른 용암은 중단성에 자리 잡고 있던 수많은 전각들을 집어삼킨 다음 딱딱하게 굳어 버린 상태였다.
멀쩡한 흑운성 복판에서 갑자기 화산이라도 터진 게 아니라면, 어찌 이런 일이 가능할까?
“끄음…”
하단성의 잔재들을 봤을 때까지만 해도 그저 화공을 이용한 전술이 먹혀든 것이라 생각했다.
‘한데 이건 대체 뭔….’
허무극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뚜벅뚜벅 걸음을 옮겨 갔다.
그가 딱딱하게 굳어 버린 용암을 밟으면서 상단성으로 성큼성큼 올라섰다.
이윽고 상단성에 도착하자 그의 눈에 성주전 복판에 우뚝 선 옹기승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상단성 역시 온전한 상태는 아니었다.
성주전의 지붕은 온통 날아가 버렸고, 기왓장이 사방에 부서진 채로 나뒹굴었다.
뿐만 아니라 흑의인들이 피투성이가 된 채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내가 늦은 것인가?’
그렇다면 구강룡과 마령교 사이에서 다툼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마령교는 봉인대법을 시전한 후, 선천마령지체를 취해서 돌아가려고 했을 터다.
그걸 막기 위해서 구강룡이 나섰을 거고.
만약 자신이 좀 더 일찍 도착했더라면, 구강룡은 힘든 싸움을 하지 않았으리라.
‘그렇다고 해도 이곳에서 벌어진 일은 도저히 이해가 불가능하군.’
어지간한 흔적이라면 유추라도 해볼 수 있다.
한데 이렇게 생소한 무공은 살아생전 처음 보는 것이었다.
옹기승에게 다가가던 허무극은 마침 저만치 구석에 쓰러져 있는 구강룡을 발견하고는 훌쩍 몸을 날렸다.
“강룡! 괜찮은가?”
하지만 구강룡은 죽은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온몸이 구타의 흔적으로 망가져 있어 차마 눈 뜨고 봐주기 힘들 지경이었다.
“이보게!”
허무극이 얼른 손가락을 뻗어 구강룡의 목에 가져갔다.
맥이 뛰지 않았다.
‘죽었군.’
허무극이 가볍게 혀를 차고는 몸을 일으켰다.
“자네가 애써 준 공은 내 기억하지.”
그는 어딘지 차갑게 보이는 미소를 짓고는 몸을 돌렸다.
사정이야 어찌된 건지 모르지만, 선천마령지체가 자신의 눈앞에 얌전히 놓인 것만은 틀림없었다.
기감을 펼쳐 사방을 살펴보았지만 살아 움직이는 자는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은신에 특화된 자가 있다면 그조차도 눈치 채지 못할 수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그런 자라면, 막상 눈앞에 나타났을 때는 손쉽게 제압할 수 있을 테니.
“드디어… 내게 들어오는구나.”
선천마령지기.
오래 전, 그는 쓰러진 소년 구기승의 몸에서 선천마령지기를 흡수하기 위해 시도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구기승의 몸을 수호하듯 나타난 선천마령지기는 그의 접근을 일절 불허했다.
어떤 말을 걸어 온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의념으로 전해지는 강맹한 기운.
그것은 절로 고개를 숙이게 만들었다.
사람의 살기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공포감을 주었다.
집채처럼 커다란 존재로부터 받았던 무언의 압박.
그때 허무극은 생각했다.
‘이 아이의 몸에 깃든 존재는 인간을 초월한 무언가다. 그 힘을 내가 취할 수만 있다면….’
“나는 지존이 된다.”
허무극이 입매를 슬쩍 비틀며 조용히 뇌까렸다.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허무극이 가늘게 떠는 손을 들어 옹기승의 가슴팍에 가져갔다.
그때였다.
목석처럼 서 있던 옹기승이 눈을 부릅뜨는 것이 아닌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