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5
귀환 마교관
295화
“실패했다고?”
“그렇습니다. 전멸입니다.”
“암귀(暗鬼)들이 그렇게 간단히 당하다니. 의외로군. 과연 사비강 그자 때문인가?”
“그것이… 사실 그는 적극적으로 나서지도 않았습니다.”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하는 자는 바로 저잣거리에서 거지 행세를 하며 사비강 일행을 염탐했던 사내였다.
그는 어둠 속에서 하반신만 겨우 보이는 사내에게 조곤조곤 보고를 이어 갔다.
어둠 속의 남자가 뜻밖이라는 듯 거지 사내를 돌아보았다.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그렇습니다. 오히려 그의 제자라고 하는 자와 옹기승이 직접 맞서 싸웠습니다.”
“그럼에도 절정 초입에 이른 암귀들이 모두 당했다는 건가?”
“송구합니다.”
거지 사내는 뭐가 송구한지 모르면서도 우선 그렇게 대답해야 할 것만 같았다.
암귀는 어둠 속의 사내가 나름 공을 들여 키운 조직이었다.
그렇다고 각별히 아끼는 조직은 아니다.
다만 어둠 속의 사내가 직접 처리하기에는 껄끄러운 온갖 더러운 일들을 암귀들이 도맡아서 처리했다.
그러다 보니 쓸모가 없어지면 가차 없이 버리는 것도 익숙했다.
어둠 속의 사내가 마음만 먹는다면 암귀는 얼마든지 양산해낼 수 있었다.
‘그래도 이번에 보낸 녀석들은 나름 힘 좀 쓸 줄 알았더니.’
어둠 속 사내가 혀를 차고는 물었다.
“자멸공을 썼나?”
“마지막 남은 자가 시도했으나, 그 역시 통하지 못했습니다. 그를 막은 자는 사비강이었습니다.”
“과연. 그렇군. 그렇다고 해도… 그 녀석이 강해진 것만은 분명하군.”
사비강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그렇다면 추량과 옹기승이 다수의 적을 처리했다는 말이다.
이걸 좋아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어둠 속의 사내가 돌아섰다.
“수고했다. 당분간 눈에 띄지 않게 조심하도록.”
“알겠습니다.”
거지 사내가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몸을 물렸다.
건물 밖으로 나온 거지 사내의 용모는 저잣거리에서 구걸하던 자라고는 보기 힘들 만큼 멀끔한 모습이었다.
그는 주변을 슬쩍 둘러보고는 어딘가로 걸음을 옮겼다.
한편, 그가 나온 지붕 위에서 다람쥐 한 마리가 몸을 곧추세우고는 멀어지는 사내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잠시 후 다람쥐의 눈이 허옇게 뒤집히는가 싶더니 곧 정신을 차린 듯 어딘가로 쏜살같이 달렸다.
**
허옇게 뒤집혀 있던 사비강의 눈동자가 제자리를 찾았다.
마침 옆에서 지켜보던 추량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부님이 매번 그 마법을 쓸 때면 좀 무섭습니다. 눈을 허옇게 뒤집으니 꼭 귀신같아서요.”
“그럼 나중에 귀신을 직접 봐도 익숙한 기분이 들겠군. 고맙다는 인사는 넣어 둬.”
“하아….”
“어쨌든 네 덕분에 이번에는 제대로 꼬리를 잡았다. 아니, 이걸로 머리까지 찾은 건가?”
사비강의 입매가 비틀렸다.
기습을 받았던 날, 사비강은 곧장 추량에게 인근을 샅샅이 수색해서 추종술을 펼치라고 했다.
그때 추량은 거지가 머물렀던 자리에서 추적을 시작했다.
혹시나 했던 자가 역시였던 것.
결국 추량의 끈질긴 추적으로 거지의 행방을 밝혀냈고, 사비강은 이번에 옵저버 마법을 이용해서 거지 사내를 미행한 것이었다.
추량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물었다.
“뭔가 좀 알아내셨습니까?”
“자세한 내막은 아니지만… 일단 배후는 알았다.”
“그래요? 누구예요? 대체 어떤 놈이 감히 우리 신생조원을 건드리는 겁니까?”
“우리 신생조원? 꽤나 애착이 생긴 모양이군?”
“예? 아, 그거야… 뭐… 사부님이 직접 지도하시니까. 아무튼 그놈이 누굽니까?”
“두고 보면 저절로 알게 될 거다.”
“뭐, 뭡니까? 설마 이젠 저도 못 믿으시는 겁니까?”
추량이 발끈하자, 사비강이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내가 널 믿었다고 생각했냐?”
“…….”
추량이 멍한 표정을 짓자 사비강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우선 지켜보자고. 원래 익혀서 따먹는 과일이 맛있는 법이니.”
“그러니 그게 맛있는 과일일지, 독과(毒果)일지 판단해 드릴 테니 제게도 말씀해 달라고요.”
“시끄러. 그 정도는 내가 판단한다.”
추량이 휙 돌아서더니 품에서 반묘를 꺼내 털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역시 사부님이 날 못 믿으시는 모양이다.”
- 니야앙.
반묘가 까슬까슬한 혀로 추량의 손바닥을 핥았다.
**
천상궁에서 하루 거리에 위치한 흑운성.
흑운성주 곽일도(郭逸道)는 사과를 한 입 베어 물고는 헤벌쭉 웃었다.
“우리 흑운성에서 머물며 힘이 되어 주겠다고?”
“그렇습니다, 성주님.”
뺨에 벼락 모양의 자상이 새겨진 남자, 구강룡이 씨익 웃으며 답했다.
곽일도는 은괴가 가득 담긴 상자를 보면서 호탕하게 웃어젖혔다.
“거참, 자네가 빈손으로 와도 두 팔 벌려 환영할 일인데, 뭘 이런 것까지 다 준비했나?”
“그냥 오기에는 제 손이 허전해서 말입니다.”
“하하하! 자네는 역시 화통하군. 갑자기 우리 흑운성을 위해 힘을 쓰겠다니. 무슨 바람이 분 건가?”
곽일도는 다시 사과를 우적우적 베어 물면서 물었다.
구강룡이 누군가?
한때 혈사련에서 가장 막강한 조직 중 하나였던 살풍단을 이끈 수장이 아닌가?
비록 지금은 미운 털이 박혀 신생조의 위치까지 미끄러졌지만, 그의 무공이 고강하다는 것은 혈사련 무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그런 구강룡이 갑자기 자신을 찾아와 은괴가 든 상자와 함께 신변을 거두어 달라고 부탁하다니!
어찌 보면 호박이 넝쿨째 굴러온 것 같지만, 그리 간단한 일만은 아니다.
그는 혈사련에서도 다루기가 힘들어 결국 신생조까지 밀려난 자다.
그런 자를 잘못 거두어 들였다가는 괜히 집안이 시끄러워질 수도 있는 문제다.
그럼에도 그를 직접 대면한 이유는 단 하나다.
‘일단 눈앞에 놓인 과일은 먹어야지.’
와삭!
곽일도는 사과를 다시 한 입 베어 물고는 은괴가 가득 담긴 상자를 바라보았다.
한편 곽일도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구강룡은 내심 조소를 지었다.
‘내가 당신을 잘 알지. 재물욕이 누구보다 강하다는 것을.’
은괴가 든 상자를 내밀면 그가 어떻게든 대면해 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더구나 자신은 혈사련의 무인이 아니던가?
문전박대까지 당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곽일도는 아마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자신을 거부할 것이다.
‘뭐, 상관없지.’
내심 냉소를 지은 구강룡이 대답했다.
“저는 혈사련에서 버려진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신생조까지 밀려난 거지요. 아시지 않습니까? 제가 정도맹에서 파견된 교관 밑에서는 절대 얌전히 있지 않을 놈이라는 것을.”
“하긴.”
“성주께서 받아 주신다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저 친구도 검을 조금 쓸 줄 압니다.”
구강룡의 눈길이 옆에 서 있는 사내에게 향했다.
사내는 눈이 가늘면서도 웃는 상이었다.
그가 뒤통수를 긁적이며 예의 그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은괴가 든 상자를 들고 온 자이기도 했다.
곽일도가 사과 씨까지 통째로 입에 털어 넣고 우적우적 씹으며 말했다.
“뭐, 내 입장에서는 참 고마운 일이긴 하지만 련주님의 허락을 받아야 하네.”
“련주님이 허락하실 리가 없습니다. 우선 성주님께서 먼저 모른 척 저를 거두어 주신다면 련주님께서도 결국….”
“그건 아니 될 말이지.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 내 아무리 자네 재능을 높이 산다고는 하나….”
“그래서 은괴만 꿀꺽 하시겠다?”
갑자기 바뀐 말투.
그 싸늘한 목소리에 곽일도가 흠칫 눈을 가늘게 떴다.
“지금 뭐라고 했나?”
어느새 구강룡의 눈초리는 뱀처럼 차가워져 있었다.
곽일도는 지금 일어나는 이 현상을 이해하지 못했다.
“다시 묻겠네. 지금 뭐라고….”
“말이 그렇잖아. 돈만 받아 처먹고 나를 쫓아내겠다는 것이 아닌가?”
“뭐, 뭣이? 네 이노옴…!”
“쉬. 시끄러워.”
“헉!”
어느새 구강룡의 검이 곽일도의 목 줄기에 와 닿았다.
발검 자체가 워낙 빠르고 깔끔했기에 곽일도는 미처 손을 쓸 틈도 없었다.
‘과, 과연… 살풍단주…!’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어쩔 수가 없었다.
살풍단주 구강룡.
그는 어진간한 대문파 장문인 수준에 맞먹는 무공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방심했다.
아니, 이것도 방심이라고 할 수 있을까?
방심은 적에게나 하는 게 아니던가?
같은 혈사련 식구인 구강룡이 자신에게 칼을 겨눌 줄이야 누가 알았겠나?
“자네… 미쳤군. 아무리 제정신이 아니라곤 하지만 이런 짓까지 하다니. 대체 무슨 짓인가!”
“그러게 쉬운 길로 가자니까.”
“이런 짓을 하고도 혈사련에서 가만히 있을 줄 아는가!”
“글쎄. 어떻게 나올지 기대되는군. 내가 모험심이 좀 강해서 말이야.”
“짜릿한 모험에는 그만한 대가가 따르는 법일세.”
그때였다.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면서 총관이 달려왔다.
“성주님! 무슨 일…! 이, 이노옴! 무슨 짓이냐!”
차앙!
총관이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고는 구강룡을 겨눴다.
구강룡의 검신이 곽일도의 목에 바짝 닿았다.
“경거망동하지 마라. 성주 목이 바닥에 구르는 꼴을 보고 싶지 않으면.”
“끄음…! 도대체 네놈은 무슨 생각을 가지고…!”
총관이 구강룡을 죽일 듯 노려보았다.
구강룡은 시퍼런 검신으로 곽일도를 위협하고 있었다.
초절정의 경지에 오른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곽일도는 언제든 이승의 사람이 아니리라.
탁자 앞에는 구강룡과 함께 온 수하가 여전히 웃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
‘이 미친… 놈들!’
구강룡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자, 지금부터 성문을 열고 모든 병력을 밖으로 내보낸다.”
“무슨 소리를…!”
“쉿. 내가 원하는 말을 할 게 아니면 닥치고 있어라.”
“크윽!”
곽일도의 목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
“성주님!”
순간 총관은 곽일도와 눈빛을 주고받았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두 사람은 서로의 의지를 확실히 읽었다.
‘기회를 봐서 없애 버려!’
내심과 달리 곽일도가 말했다.
“시킨 대로 하게. 성문을 열고 모든 무인들을 밖으로.”
“…알겠습니다.”
총관이 망설이던 끝에 분한 표정으로 돌아섰다.
구강룡이 히죽 웃으며 은괴를 들고 왔던 수하에게 말했다.
“따라 가서 확인해.”
수하가 총관 옆으로 다가가는 순간이었다.
“이여업!”
총관이 기합성을 터뜨리면서 휙 돌아서더니 검을 후려쳐 오는 것이 아닌가?
그 일련의 동작이 무척이나 빨랐기에 근접해 있던 수하는 미처 칼을 들어 막을 수조차 없었다.
‘벴다!’
총관은 자신의 검이 상대의 가슴을 벨 것이라는 걸 확신했다.
그런데…
까앙!
“……!”
파육음 대신 청명한 금속성이 울리더니 검신이 그대로 부러져서 튕겨 나가는 것이 아닌가?
‘헉! 이, 이게… 어떻게?’
부러진 검신이 허공을 날아가는 동안 총관은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상대를 보았다.
분명 가슴을 벴다.
한데 칼이 부러져…?
이 일격으로 모든 힘을 쏟아 부었다.
상대가 제아무리 금강불괴의 몸을 지녔다고 해도 이럴 수는 없다.
그런데 대체 이건…!
수하가 여전히 웃는 표정으로 자신을 돌아보는 게 보였다.
‘젠장…!’
총관이 입술을 쿡 씹었다.
한편, 그 순간 구강룡에게도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의 뒤로 떨어져 내린 시커먼 그림자가 그대로 검을 내리쳐 구강룡의 목을 노린 것이다.
바로 흑운성주 곽일도의 심복이었다.
하지만 구강룡은 그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손을 뻗어 심복의 손목을 낚아챘다.
팍!
동시에,
휘리리릭, 콱!
총관이 휘두르면서 부러진 검신이 구강룡의 뺨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날아가서는 한쪽 기둥에 깊숙이 박혔다.
그야말로 눈 깜빡할 사이에 벌어진 일.
하지만 총관과 심복 중 누구도 성공하지 못한 기습이었다.
두 사람 모두 찢어질 듯 부릅뜬 눈으로 구강룡과 그 수하를 바라볼 뿐이었다.
구강룡이 히죽 입매를 비틀었다.
“쓸데없는 짓을 하는군.”
흑운성주 곽일도의 표정이 사색으로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