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 마교관-293화 (293/670)

# 293

귀환 마교관

293화

옹기승이 한참이나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죽을 때가 된들 기억에서 지워질까?”

“죄책감이라는 것도 시간이….”

“내가 정말 무서운 게 뭔지 아나?”

옹기승이 석탄강의 말을 가로지르며 불쑥 입을 열었다.

석탄강이 그를 내려다보았다.

옹기승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말을 이어 갔다.

“아버지가 내손에 돌아가시던 그 순간, 아버지의 표정과 얼굴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는 거야. 분명 절망에 빠져 계셨을 테지. 한데 난 기억이 나지 않아. 대신 숨통을 끊어 놓을 때의 묘한 쾌감과 그 더러운 감촉만이 생생한 느낌으로 살아 있지.”

“…….”

“그런데 지금 나를 가장 괴롭히는 것은…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 나를 괴물처럼 바라보는 형의 얼굴이야. 분노와 공포, 절망과 혐오를 담은 그 눈빛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 참으로 간사하지 않나?”

옹기승은 어느새 실눈을 뜨고 있었다.

그의 눈빛에서 씁쓸한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석탄강이 고개를 돌리고 먼 산을 보았다.

“네가 과거에 어떤 짓을 저질렀든지 그딴 건 신경 쓰지 않는다. 네가 어떤 식으로 부자의 연을 끊었으며, 어떤 식으로 성을 갈아치웠는지. 그건 내 알 바 아니지. 나와 관계도 없는 일이고. 지금 나에게 넌 그저 잠버릇이 고약한 옹 씨 놈일 뿐이다.”

“…….”

옹기승이 흘깃 석탄강을 돌아보았다.

이래서 이 녀석이 편한 걸까?

그런데…

“이야, 방금 그 말 완전 멋있다? 탄강이 요즘 말 잘 하는 법 배우러 다니냐?”

갑자기 뒤통수에서 불쑥 들린 목소리.

파바밧!

순간 석탄강과 옹기승이 벼락처럼 튀어 오르면서 몸을 돌리고는 각자의 무기를 뽑아 들었다.

그들은 어느새 바위 위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사비강을 보고는 미간을 팍 구겼다.

“뭐, 뭡니까?”

‘도대체 저 인간이 언제부터 우리 뒤에 있었던 거야?’

사비강이 히죽 웃으며 바위에 걸터앉았다.

“뭘 그렇게 놀라고 그래? 누가 보면 내가 너희들을 암살하는 줄 알겠다.”

“끄음…”

“뭔가 입장이 바뀐 것 같지 않아?”

“교관님이 우리 뒤에서 갑자기 나타나는 것 자체가 기분 나쁩니다.”

“흐음. 내가 둘만의 오붓한 시간을 방해했나? 좋은 시간을 방해했다면 미안하게 됐다. 그럼 은밀하게 하던 거 마저 해. 난 피해 주지 않고 물러갈 테니.”

“하던 것 따위 없습니다!”

“없으면 없는 거지 뭘 그렇게 발끈하고 그래? 진짜 하던 게 있던 것 같잖아.”

“큭…!”

석탄강이 내심 이를 갈았지만, 옹기승이 희미한 미소를 짓고는 돌아섰다.

“그만 가지.”

석탄강도 혀를 차고는 몸을 휙 돌렸다.

그때 사비강이 품에서 뭔가를 꺼내더니 휙 집어던졌다.

석탄강이 얼른 몸을 돌려 자신에게 날아들던 것을 낚아챘다.

“뭡니까?”

“읽어 봐라. 사슬낫을 쓰는데 도움이 될 거다.”

석탄강이 대충 훑어보니 사슬낫과 관련된 무공서인 듯 했다.

‘참월연도(斬月聯刀)…? 이런 무공서도 있었나?’

사실 이는 마계에서 사비강의 수하 중 한 명이 사슬낫을 쓰면서 익힌 무공서였는데, 사비강이 틈틈이 한어로 번역하고 몇 가지 초식을 더해 중원의 실정에 맞게 기록한 것이었다.

그러한 사실을 모르는 석탄강은 그저 희귀한 무공서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어쨌든 그가 감사를 담아 목례를 하고는 돌아섰다.

한편, 두 사람이 멀어지는 모습을 사비강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은 옹기승의 등을 향해 있었다.

“기분 나쁜 냄새가 난다라….”

응천 분타를 나서기 전, 능소소로부터 들은 이야기였다.

“역시 그 수밖에 없으려나?”

사비강이 착 가라앉은 시선으로 가만히 중얼거렸다.

**

“넌 역시 그 수밖에 없다.”

사비강이 불쑥 꺼낸 말에 옹기승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날이 밝자마자 사비강이 자신을 찾아오더니 다짜고짜 저잣거리로 데려온 것이다.

옹기승이 꾸벅꾸벅 졸면서 물었다.

“흐음… 그게… 무슨 말입니까?”

“너한테서 냄새가 난다고 하더군.”

“냄새…라니요?”

“좀 씻고 다녀라. 오죽 안 씻었으면 여자한테서 냄새난다는 소리를 다 듣겠냐?”

“…쿠울…”

“네놈이 그렇게 잠이 많은 이유도 어쩌면 네놈 체취에 취해서 그런 지도 모르지.”

“…으음? 예? 제 체취가 역하다고요?”

“시끄럽고, 자, 여기다.”

“여긴…?”

“들어가서 좀 깨끗하게 씻고 나와라. 돈은 내가 내줄 테니.”

“…쿠울…”

“어서!”

“아? 아, 예. 그럼…”

옹기승이 꾸벅 허리를 숙이고는 객잔으로 들어갔다.

한참 후 옹기승이 멀끔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마침 일 층에서 추량과 함께 식사를 마친 사비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객잔을 나선 사비강이 눈썹을 구기고는 물었다.

“뭘 그리 오래 씻어?”

“아… 그게… 따뜻한 물에 들어가 있었더니 졸려서 저도 모르게 그만… 하하.”

“뭐, 말 안 해도 알겠군.”

“오늘 감사했습니다. 갑자기 목욕을 다 시켜 주시고.”

“자, 이젠 향수를 사러 가자. 옷도 갈아입어야겠다. 옷은 빨아 입고 다니냐?”

“뭐…”

“하긴 가족도 없이 홀로 지내니 챙겨 줄 사람도 없을 테고. 냄새가 날만도 하겠군.”

“대체 아까부터… 쿠울. 아, 아까부터 저한테 무슨 냄새가 난다고 그러십니까?”

“나도 몰라. 난 남자한테 관심이 없어서. 네가 보기엔 어때?”

사비강이 추량을 돌아보았다.

추량이 미간을 구기며 대꾸했다.

“전 뭐 남자한테 관심 있는 줄 아십니까?”

“하긴.”

“반묘(斑猫)에게 물어볼까요?”

“반묘?”

“이 녀석요.”

추량이 자기 가슴께를 가리켰다.

마침 옷깃 사이의 가슴골로 쏘옥 얼굴을 내민 새끼 마수가 사비강과 눈을 마주치고는 작은 입을 쩍 벌렸다.

- 니야아.

“독특한 얼룩무늬가 있으니 이름을 ‘반묘’라고 지었거든요.”

“흐음. 하긴 그 녀석도 어쨌든 동물이니 냄새를 잘 맡을 지도 모르겠군.”

추량이 가슴 품에서 반묘를 꺼내더니 옹기승에게 내밀었다.

그 사이에 옹기승은 벌써 잠들어 있었다.

“반묘, 냄새 한 번 맡아 봐.”

- 니야앙.

반묘가 울음을 터뜨리더니 작은 코를 벌름거렸다.

그런데 다음 순간,

- 니야앙!

갑자기 버둥거리던 반묘가 바닥으로 휙 뛰어내리는 것이 아닌가?

“엇?”

반묘가 재빨리 추량의 다리를 타고 올라가서는 가슴 깃 속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왜 그래? 니야. 으히히히! 간지러워. 냄새를… 쿡, 크헤헤헤! 간지럽다니까… 흐흐흐!”

결국 사비강이 탐탁찮은 시선으로 추량을 보고는 혀를 찼다.

“역시 쓸모라고는 전혀 없는 녀석이었군.”

“으히히힉! 아, 아직 훈련 중이니까… 우히히! 그만! 그만 반묘! 킥킥…!”

결국 사비강이 먼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갔다.

옹기승은 꾸벅꾸벅 졸면서도 사비강의 뒤를 졸졸 잘 따라갔다.

그렇게 세 사람이 저잣거리의 으슥한 뒷골목으로 들어섰을 때였다.

슈슉! 슈슈슉!

갑자기 하늘에서 시커먼 그림자들이 후두둑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복면을 덮어 쓴 자들에게서는 진득한 살기가 느껴졌다.

“엇! 뭐냐? 이놈들!”

추량이 사비강 앞으로 나서면서 소리쳤다.

복면인들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다음 순간,

타앗!

스무 명의 복면인들이 일제히 세 사람을 향해 달려들었다.

**

산기슭의 낡은 오두막집.

그곳에 세 사람이 모여서 은밀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먼저 얼굴을 온통 붉게 물들인 사내가 말했다.

“천신교가 토벌된 건 다들 아실 거요.”

“청이 죽었다지?”

황면의 노파가 묻는 말에 적면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곁에 앉은 흑면인은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황면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도 청이 제 할 일은 다 해주었군.”

무슨 말일까?

청면인은 분명 마물을 소환하긴 했지만, 결국 적의 손에 소멸되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천신교’라고 이름 붙였던 마령교의 한 지파가 완전히 궤멸되지 않았나?

그럼에도 제 할 일을 했다니?

하지만 그녀의 말을 적면인과 흑면인은 일절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적면인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그의 죽음은 안타깝지만 이걸로 존야께서는 그를 인정하실 거요.”

“그러시겠지.”

“다만 생각보다 좀 이르긴 했소. 그렇게 빨리 그자가 찾아올 줄은….”

“확실히 수상한 자야.”

“좀 알아보셨소?”

적면인의 시선이 흑면인에게 향했다.

그제야 흑면인이 눈을 뜨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봤소. 하나 본교와 관련된 어떠한 흔적도 찾을 수가 없었소. 오히려 지극히 평범하고 흔한 정파 무인의 인생을 살았지.”

“흐음. 그런 자가 어째서 본교의 마령공을….”

그러자 황면의 노파가 흑면인을 돌아보며 물었다.

“혹여나 또 다른 마령….”

하지만 흑면인은 이야기를 더 듣기도 전에 고개를 저었다.

“그럴 일은 없소. 확실하오.”

“흐음. 모를 일이군. 참으로 모를 일이야.”

적면인이 턱을 매만지며 말했다.

“어쨌거나 이제 마병이 만들어지는 일만 남았소. 얼마 남지 않았소. 당분간은 눈 돌릴 곳을 만들어야 하오.”

“그래야겠지. 잔치가 바쁘면 국이 타도 모르는 법이니.”

그때였다.

적면인의 귓가로 전음이 들려왔다.

[손님이 오고 있습니다.]

[손님…?]

[일전에 만나셨던 자입니다. 혈사련의….]

[아, 그 친구인가? 흐음. 상관없겠지. 안으로 들여도 좋다.]

[알겠습니다.]

잠시 후 기척이 사라졌다.

적면인이 황면인과 흑면인을 번갈아보며 말했다.

“혈사련에서 손님이 찾아온다고 하오.”

“혈사련에서?”

“뭐, 그리 신경을 곤두세울 건 없소. 얘기가 좀 통하는 자니까.”

잠시 후 문이 열리면서 한 남자가 들어섰다.

방갓을 푹 눌러 쓴 그가 실내에 앉아 있는 세 사람을 보더니 히죽 웃었다.

“아무래도 내가 적절한 시기를 맞춰 온 것 같군.”

적면인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방갓 사내에게 걸어갔다.

“오랜만이오, 구 대협.”

사내가 방갓을 벗자 뺨에 새겨진 벼락 모양의 자상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는 적면인을 보고는 싸늘한 웃음을 지었다.

“그 사이에 크게 한 건 치르셨더군.”

“어쩌다 보니 그리 됐소.”

“그런가? 하긴. 내가 알 바는 아니지.”

“그보다 어쩐 일로 나를 찾으셨소?”

적면인의 질문에 방갓 사내가 흑면인과 황면인을 돌아보고는 씨익 웃었다.

“당신들이 들으면 좋아할 이야기를 하려고 왔지.”

“그게 무슨 말이오?”

“이제 혈사련으로 귀환할까 생각 중이지.”

“혈사련으로…? 그쪽하고는 연을 아예 끊었던 것이 아니었소?”

적면인이 다소 놀란 표정으로 묻자, 방갓 사내가 피식 웃고는 말을 이었다.

“그러려고 했지만… 생각을 좀 바꿨지.”

“한데 그런 이야기를 왜 나에게…?”

“나와 함께 혈사련으로 돌아가면 어떨까 해서.”

“당신과 함께?”

그러자 잠자코 듣고만 있던 황면인이 일어나서는 쏘아붙이듯 말했다.

“아니, 무슨 스무고개도 아니고. 대체 뭔 말을 지껄이는 건지. 우리가 왜 자네와 함께 혈사련으로 기어들어 가야 한단 말이냐? 뭔 생각을 하는 건지 확실히 말해라.”

그러자 방갓 사내가 물끄러미 황면인을 응시하더니 입을 열었다.

“나는 신중한 편이지. 가만 생각해 보니 나 혼자서는 감당하기 힘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 해서, 그대들 중 한 명을 같이 동행했으면 하는 거야. 만약 동의한다면 내가 당신들이 원하는 먹이를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떤가?”

적면인이 나섰다.

“먹이라 하면…?”

“당신들이 굉장히 흥미를 가질 만 한 자를 줄 생각인데.”

적면인이 고개를 돌리고 황면인과 흑면인을 바라보았다.

세 사람의 시선이 복잡하게 얽혀 갔다.

“뭐, 천천히 생각해 보라고. 참고로 나, 구강룡이 귀환한다고 하면 아마도 당신들이 원하는 먹이가 먼저 내게 달려들 가능성도 크지.”

“먹이가 달려든다? 무슨 속셈이오?”

“혈사련에 속한 흑운성(黑雲城)을 차지할 생각이거든.”

“흑운성을!”

색면인들이 저마다 동요하며 서로 한참이나 눈짓을 주고받았다.

흑운성이 어딘가?

정도맹에 적하성이 있다면, 혈사련에는 흑운성이 있다.

적하성만큼 난공불락의 요새라고 할 수는 없지만, 지형적인 특성상 공략하기가 매우 어려운 성 중 하나다.

한데 그곳을 치겠다고?

“그게 가능하단 말이오?”

“다른 사람은 불가능해도 난 가능하지. 난 아직 혈사련 무인이니까. 그리고 난 흑운성주에 대해 잘 알거든.”

“대체 무슨 생각이시오?”

“그걸 듣고 싶다면 결정부터 내리라고.”

색면인들이 서로 한참이나 눈짓을 주고받았다.

전음으로 의견을 교환하던 끝에 적면인이 구강룡에게 다가갔다.

“좋소. 그 먹이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소.”

“얼마든지.”

구강룡이 입매를 비틀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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