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0
귀환 마교관
290화
추량은 팔짱을 낀 채 심각한 표정으로 플라탄의 알을 바라보았다.
그는 시커먼 돌 같은 알을 보면서도 머릿속에서 그날의 광경을 떠올리고 있었다.
마치 인간의 뇌와 같은 마물이 둥실 떠오른 채로 흐느적거리며 이동하는 모습.
하지만 그 크기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물론 사비강이 한 말에 의하면 녀석은 덩치만 컸지, 실제로 그리 대단한 능력을 가진 게 아니라고 했다.
그렇다면 정말로 대단한 능력을 가진 마물은 도대체 얼마나 강하다는 뜻일까?
녀석만 해도 촉수 한 번 휘저을 때마다 전각이 통째로 날아가고, 사람들의 몸이 종이처럼 찢어져 나가지 않았던가?
그게 바로 마계에서 건너온 마물이라니….
생각할수록 소름이 돋았다.
지금까지는 사비강에게 마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믿으면서도 현실감은 없었다.
한데 직접 마계의 괴수를 실제로 보고 나니 경각심 이상의 공포감이 든 것이다.
‘앞으로 그런 놈들이 쳐들어 올 가능성이 있단 말이지?’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런 것들을 상대로 용기 있게 싸울 자신이 없다.
물론 사비강은 추량에게 이렇게 말했다.
“마계가 침공했을 때, 너는 누구보다도 그자들의 흔적을 잘 찾아내고 추적했다. 네 능력이 많은 도움이 됐어.”
하지만 지금 심정이라면….
“추적은커녕 다시는 마계 종족과 마주치고 싶지 않다고!”
추량이 버럭 소리치고는 머리를 마구 긁적였다.
지끈지끈 두통이 일어나는 것만 같다.
“후우우.”
세상의 모든 고민을 혼자 짊어진 것처럼 길게 한숨을 쉬고는 눈앞의 알을 바라보았다.
‘이것도 결국은 마계의 괴물일 텐데….’
문득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드는 거면 어쩌나?
박보다 큰 이 녀석을 깨웠는데, 알고 보니 며칠 전 천신교 장원에서 본 것처럼 징그러운 녀석이 튀어나오면 어쩌나?
한동안 잊고 있던 찜찜함이 다시 야금야금 뇌를 갉아먹는 것만 같다.
‘그래도… 부화를 시켜야겠지?’
한참이나 망설이던 추량이 심호흡을 하고는 플라탄의 알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좋아, 해보자. 뭐가 나오든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 보자고.”
혼잣말을 중얼거린 그가 양손을 뻗었다.
단전에서 혈맥을 따라 뻗어 나가던 진기가 심장으로 모여들면서 마나로 치환되자 뻑뻑한 이물감이 느껴진다.
그 감각은 곧 사라지면서 다시 부드러운 강물처럼 혈맥을 따라 손끝으로 흐른다.
우우우우…!
양 손바닥에서 푸른 기운이 방출되면서 플라탄의 알을 푸르스름하게 물들였다.
우우웅. 우우웅.
플라탄의 알에서 미약한 진동이 전해진다.
‘확실히 마나 량이 증가한다는 게 느껴진다.’
이 알 속에서 뭐가 깨어날지는 알 수 없지만, 이렇게 공명하는 순간 추량은 전신의 마나 량이 늘어나는 것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쉽게 말해 마나를 일방적으로 쏟아내는 것이 아니라, 쌍방 통행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전체적인 마나 량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우우웅. 우우웅.
플라탄의 알이 공명하는 횟수가 훨씬 늘었다.
‘다른 건 몰라도 이럴 때 기분 하나는 끝내준단 말이야.’
추량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플라탄의 알이 공명하는 순간에 느껴지는 기분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만큼 안온하다.
그렇게 얼마나 오랫동안 마나를 교류했을까?
…쩍.
“……!”
추량이 눈을 번쩍 떴다.
‘방금…?’
그가 얼른 플라탄의 알을 보았다.
분명히 소리가 들렸다.
뭔가가 갈라지는 듯한 소리.
“엇?”
색이 변했다.
새까만 색이었던 플라탄의 알이 지금은 암회색으로 변했다.
게다가 알 한쪽에 실금이 생겼다.
손가락으로 두드려 보았다.
역시나 돌처럼 단단했다.
실금이 생겼지만 결코 깨질 것 같지 않은 기분이다.
‘그런데 어쨌거나 변화가 생기고 있다는 거군.’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기대와 걱정.
하지만 이미 끝을 보기로 마음을 먹지 않았던가?
여기에서 뭐가 나오든 끝까지 가보는 거다.
추량은 마음을 다잡고 다시 마나를 쏟아 붓기 시작했다.
**
은시 지단의 무인들이 포승줄에 묶인 채로 뇌옥을 향해 줄을 지어 들어갔다.
천멸대원들은 이글거리는 횃불을 들고 냉혹한 눈으로 그들을 감시했다.
반면 매설란은 다소 멍한 표정이었다.
그녀 역시 그날 본 마물이 머릿속을 쉬이 떠나지 않은 탓이다.
더구나 마물 소환식을 직접 목격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희생당한 아이들까지….
“무슨 생각해?”
언제 다가왔는지 사비강이 불쑥 물었다.
매설란이 돌아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혼란스러워서요.”
“그럴 만도 하지.”
사비강이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말을 나누지 않았다.
그러다가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매설란이었다.
“마계에서 온 종족. 다들 그렇게 약점이 분명한가요?”
사비강이 그녀를 돌아보더니 피식 웃었다.
매설란의 눈썹이 곱게 일그러졌다.
“왜 웃죠?”
“그냥. 다행이다 싶어서.”
“뭐가요?”
“의지가 생겼다는 거잖아.”
“……?”
“마물은 태어나서 처음 봤을 텐데… 혹시나 충격을 받고 맞서 싸울 의지마저 잃어버렸을까 봐 걱정했지.”
“솔직히 충격적이었어요. 그런데 그게 약한 편에 속한다는 말에 더 충격이었죠. 촉수 한 번 휘저었을 뿐인데 전각이 통째로 날아갈 정도였으니까요. 지금도 그런 징그러운 마물이 눈앞에 있다면….”
매설란은 말끝을 흐렸다.
맞서 싸울 엄두가 나지 않는다는 말을 꺼내려고 했다.
하지만 그 말을 뱉는 순간 자신의 의지마저도 그만큼 약해질 것 같아서 참았다.
사비강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답했다.
“그럴 수밖에 없겠지. 그래도 나보단 나은 걸?”
“뭐가요?”
“난 처음에 마물을 봤을 때 오줌을 싸 버렸거든.”
“농담이죠?”
“진짜야.”
“절 위로해 주려는 거라면 일부러 그러지 않아도 돼요.”
“나도 그런 거라면 좋겠다.”
“설마 정말이에요? 진짜 오줌을 쌌다고요?”
“그래.”
“그 당시의 얘기. 해줄 수 있어요?”
“못할 것도 없지.”
사비강이 매설란의 허리를 부드럽게 안아들더니 훌쩍 몸을 날렸다.
갑작스러운 접촉이었지만, 매설란은 굳이 저항하지 않았다.
대신 사비강에게 편안히 몸을 맡겼다.
사비강은 한 손으로 매설란을 안아든 채 경공을 펼치면서 은시 지단의 가장 높은 건물 지붕 위로 올라갔다.
“여기가 좀 낫군. 경치도 나쁘지 않으니.”
“경치 핑계를 대지만 사실은 다른 사람이 들을까 봐 부끄러워서 그러는 거죠?”
“그렇기보단… 이러려고.”
“뭘…? 읍…!”
순간 사비강이 매설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매설란이 얼른 물러나려고 했지만, 사비강은 그녀의 허리를 꽉 안은 채로 놔주질 않았다.
‘아… 정말 나빠. 내가 약한 순간에만…!’
결국 매설란은 손에 힘을 빼고는 천천히 사비강에게 안겨 갔다.
별빛이 쏟아져 내리는 가운데, 가장 높은 건물의 지붕 위에서 두 사람은 조금씩 옷자락을 벗어 갔다.
매설란의 가녀린 손가락이 사비강의 탄탄한 가슴을 쓸어내리며 아래로 미끄러져 갔다.
“그동안 너무 힘들었어.”
“사파의 무인들이 당신을 괴롭히던가요?”
“아니. 당신을 볼 수 없다는 게 제일 괴로웠지.”
“피이.”
매설란이 입술을 살짝 내밀었지만, 내심 싫지는 않은 표정이었다.
사비강은 다시 그녀를 지붕 위에 눕히고 입맞춤을 길게 이어 갔다.
두 사람의 몸은 그렇게 점점 뜨거워졌다.
**
밤하늘의 별빛이 쏟아져 내렸다.
옷자락을 이불 삼아 덮고 있는 매설란은 이 순간이 영원해도 좋을 만큼 평온한 기분을 느꼈다.
문득 우스웠다.
불과 며칠 전 자신은 지옥을 경험했다.
눈앞에서 끔찍한 괴물과 조우했고, 그 괴물이 아이들을 가차 없이 죽여 버리는 것을 목격했다.
그때를 떠올리면 지금도 온몸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다.
한데 사비강이 옆에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면 불안한 마음도 거짓말처럼 사라진다.
그에게 안기는 것이… 싫지 않다.
아니, 좋다.
그가 이렇게 큰 존재였나?
갑자기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서 몸을 일으키려는데, 문득 옆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용천관에서 처음 봤지.”
“……?”
“그 마족들을.”
“아…”
“평소 내가 알고 지내던 교관들과 생도들을 잔악하게 도륙하는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봤지.”
매설란은 괜한 걸 물은 게 아닌지 후회됐지만, 사비강은 말을 계속 이어 갔다.
자신을 아들처럼 돌봐 주었던 진백이 죽임을 당한 그날, 사비강은 부신각에서 빠져나온 후에 곧장 숲속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그는 곧 눈앞에서 마물에게 죽어 가는 교관과 생도들을 보았다.
“평소 내가 증오하던 교관과 생도들이었어. 그런데 그런 교관도 끝까지 생도들을 지키다가 죽었지. 생도들도 장렬히 싸우다가 목숨을 잃었어.”
하지만 자신은 끝내 숲속에 몸을 숨긴 채 마물들이 자리를 떠날 때까지 나서지 않았다.
그렇게 마물이 사라진지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그땐 이미 가랑이가 축축하게 젖어 버린 상황이었다.
“그랬던 나에 비하면, 당신은 아주 기특한 거야.”
사비강이 매설란을 힐끔 보고는 웃었다.
매설란은 가만히 사비강을 보았다.
‘이 남자에게도 그런 과거가 있다니.’
지금의 모습을 보면 전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하긴 지금도 갈피를 잡을 수 없을 만큼 다양한 모습을 보이는 남자가 아니던가?
“그렇게 약골이었던 사람이 어떻게 지금처럼 강해졌죠?”
“마계로 납치당한 후로 온갖 고난을 겪었지. 지옥이었어. 사는 것과 죽는 것의 차이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지. 그러다 보니 저절로 용기가 생기더군. 어차피 생사의 차이가 없다면, 이왕 제대로 덤벼 보자는 생각이 들었달까?”
따지고 보면 그건 용기가 아니었을 지도 모른다.
인간은 고통이 지속되면 점차적으로 둔감해지기 마련이다.
두려움과 공포도 마찬가지다.
본능적으로 내성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극한의 두려움은 이내 분노로, 극한의 분노는 곧 무언가에 미쳐 버리는 것으로 변한다.
그렇다.
자신은 그때 미쳤던 것일 지도 모른다.
“미치지 않고서야 살아낼 수 없는 삶이었으니까.”
매설란은 멍하니 사비강을 보았다.
그가 겪었을 온갖 역경과 고난이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사람이 바로 사비강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왠지… 오늘따라 당신이 달라 보이는군요.”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었다.
사비강이 씨익 웃더니 몸을 일으켰다.
“그런 의미에서 한 번 더 어때?”
“무슨 말을 하는… 읍! 그만… 이젠… 으읍!”
아, 몰라.
매설란이 포기하고는 눈을 감아 버렸다.
달콤한 입맞춤이 다시 또 이어졌다.
그래, 오늘은 좀 더 이 남자의 품에 안기고 싶다.